중국의 역사 침탈(侵奪)

BC 28세기 요하문명의 濊貊族이 남하 하여 夏, 商, 周를 건국하면서 황하문명을 일구었으며, 鮮卑族이 秦, 漢, 隨, 唐을 건국했습니다. - 기본주제 참조

홍익인간·인류공영/환단고기·한민족역사

15. 高句麗 大王 周夢(鄒牟) 天子位에 승차

자연정화 2013. 8. 24. 12:29

  十五. 高句麗 大王 周夢(鄒牟) 天子位에 승차
 

一次 창해 戰役後 해모수왕의 君臣들은 大扶余를 (扶餘로부터 분리한 해부루王國) 정벌하여 天王位에 오를 것을 주청 하였다. 王이 말하였다. 우리 고구려가 그들의 속국은 아니나 大扶余王 해부루가 비록 허명이라 할지라도 단군 제국의 정통을 이은 天王位에 있으니 무력으로 정복하면 大義를 저버리는 것이니 해부루王이 스스로 물러날 때를 기다림이 옳다 하였다. 左·右에 서 이르기를 해부루王이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天王位에 그대로 눌러 앉아 있으니 이대로 기다림은 국가에 害가 미치는 것이오니 이는 天帝의 뜻을 어기는 것이옵니다. 大王께서 양위하라는 書札을 써 주시면 使臣을 보내서 전하고 이해로 달래어 만일에 듣지 아니하면 정벌해 버림이 옳을까 하옵니다. 王이 이에 동의하여 해부루 二世 天王에게 讓位하라는 권고문을 발송하였다. 해부루 王은 해모수王의 동정에 관하여 첩자의 보고에 고모수가 군사를 이끌고 왕검 성으로 진격 해 올 준비를 갖추고 있다는 정보가 속속 들어옴에 만조 백관이 전전긍긍하고 민심이 흉흉 하든 차에 해모수王의 使者가 온다 하여 모두 긴장하여 대기하고 있든 중 사자가 도착하여 표를 올림에 받아 보니 표에 가라대,

 

斯如盛也我軍杖義出征强攻凶寇以克難遼河之役矣玆以扶余王解牟漱二世謹表于大扶余國天王麾下矣裨王之麾下勇將猛卒善戰奮鬪卽帥將之智用兵運籌之策必中於決勝戰陣精兵之勇揚武千里之外以保全彊境於扶余聖域焉盖救恤生靈之災危此亦盡忠之信哉豈弗天命之所致乎今師?鄕而群臣公論於朝議則敵侵之禍於對備策也今方可渭海內危機之際陛下無爲尊坐之位焉古來君王者省悉民草之苦以篤勵勉行者治國之大道也本裨王竊惟今天王之威武未及於制禦外寇也又仁化之德未洽於萬民之望兮但只空守天王之大統的虛像也我使歷戰己過十余星霜千里地境於連戰討賊眞忠義之士不顧身命於死之效又難民之赤誠義擧暴骨壙野以今日之保全功有以也夫孤按于今如此難局者因於往年山東?海之役矣漢王劉徹不法越境以劃策爲圖右渠王矣天王有怨恨於右渠王之由兒不顧右渠之救援呼訴以傍觀其王儉之危渠孤立無援之境而只依我北扶余與高句麗之支援而我軍血鬪以擊退滄海之漢寇以保番朝鮮地境矣雖然還有中 原領土之危連接漢寇之進至遼水之境以招來今日之禍也誠此得罪於宗廟列聖之明而又失萬民之望矣豈爲應天理之循乎願察天下之大勢以避自招之困境卽萬民之幸甚矣 漏錄補記

 

(장하도다 충의로운 우리 군사 강력한 공격으로 침략자를 물리쳐 요하변 전역에서 승리하였도다. 이에 북부여王 二世 해모수는 대부여국 천왕 휘하에 글월을 올립니다. 저 비장 휘하 용맹한 장병은 선전 분투하여 장수의 용병 전략은 결승에 백중하고 병사의 용맹은 千里밖에 떨쳐 부여국의 성역(요동 만주)을 보전함으로서 백성들의 재난을 구하였으니 이 또한 충성의 신의로서 어찌 천명의 소치가 아니리요. 이제 출정군 장병이 돌아옴에 신료들의 조정 공론이 적침에 대비하는 결의를 하였고, 온 나라의 위기를 맞은 이때 천왕께서는 아무런 계책 없이 천자 위의 높은 자리에 앉았으니 예로부터 군왕은 백성들의 아픔을 자세히 살펴 부지런히 통치의 대도를 걸음이라 비왕이 저윽히 살피건대 폐하의 무력은 침략자를 능히 막지 못하고 大王의 어진 덕은 만민에게 미치지 못하니 단지 헛되이 대통을 지키는 허상이라 양 고구려는 지난 十여년 간 千里지경에 연이어 적을 토벌함은 참으로 충성스런 장병들의 죽음을 각오한 싸움으로 싸움터에 힘을 합친 난민들의 죽음도 백골이 광야에 흩어지는 희생 끝에 오늘을 보전하였으니 장할세라 그 공이여 돌이켜 곰곰이 생각건대 지금 이와 같은 어려운 시국에 이르는 것은 왕년의 山東 滄海 전역이 원인이라 한무왕 유철이 불법으로 조선 열국 번조선을 침범할 획책을 하였는데 天王께서는 과거 우거王에 대한 원한으로 우거王의 구원 호소를 무시하고 그의 왕검성 위기를 돌아보지 아니하고 다만 우리 북부여와 고구려가 지원하여 아군의 사투로 창해에 침입한 한구의 二十만 군을 격퇴하였으나 아직도 중원 영토의 위태로움은 멀리 요수변까지 이르는 오늘의 화를 초래함이라. 실로 종묘 열성조에 죄를 짓고 만민의 바람을 저 버리니 어찌 天理 순환에 응함이랴.  원컨대 천하 대세를 살피시어 곤경을 자초하는 일을 피하면 나라의 다행 지사이옵니다.) 하였다.

그리고 또 使者가 말하기를 해모수王께서는 大軍을 이끌고 이리로 와서 陛下를 뵈올 날이 멀지 않다 하였사옵니다. 폐하께서 양위의 용단을 내리시면 해모수王께서는 반드시 보답할 것 이옵고 大扶余王 관민의 안전과 운신의 자유를 보장할 것이오니 신의 말을 의심치 마시옵고 영단을 내리 시옵소서. 이때를 놓치면 대 화가 미칠 것은 필연이옵고 참혹한 지경에 이를 것이 오니 깊이 살펴 주시기 바랍니다 하였다. 天王이 답하였다. 짐이 심사할 것이니 그대는 객사에 기다리라 하였다. 天王은 백관을 모아 놓고 의논하였다. 상국이 해모수王의 상소문을 본 후 상소문을 모두 돌려보았다. 이제 올 것이 왔구나 하는 생각들 이였다. 상국이 입을 열었다. 지금 고모수 汗이 한구를 물리치고 널리 민심을 수습하여 번 조선 창해의 흩어진 군사들이 그 휘하에 운집하여 군세는 수十萬에 이르고 백전의 功을 쌓은 맹장 용졸이 운집하고 있사옵니다. 지금까지 天下 열국이 分立 쟁패하여 폐하의 어명에 따르지 아니함이 이미 오래입니다. 저들은 왕검 성을 멀리 포위하고 진격 시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실정이오니 결코 항전할 생각은 아니 되옵니다 하였다. 이어서 상국 阿蘭弗은 말하였다.

 

이제 양위하시면 해모수王은 폐하를 홀대하지 아니할 것이옵니다. 그러 하옵고 臣은 일찍이 神의 계시를 받아 遷都할 것을 상주한 바 있사오나 이제 이곳을 떠나 새로운 도읍할 땅을 찾는 것도 역시 하늘의 뜻인 줄 아옵니다. 여기서 東으로 千里를 못 가서 가섭원(加葉原)이라는 곳이 있사온대 땅이 기름지고 山川이 수려하여 왕업을 이룰 천해지지(天惠之地)옵니다. 이곳을 떠나 천도하옵심이 좋을 것이옵니다 하였다. 제는 阿蘭弗(아란불)의 의견에 따르기로 하고 해모수王(解募漱)에게 사자를 보내어 양위하는 詔書를 전하였다. 그리고 그가 원하는 정통성을 위하여 왕검 성에 受禪台(수선대)를 모아 대통을 이어 天子위에 오르게 하라고 청하였다. 해모수王은 五千의 호위병을 이끌고 왕검성(開原)에 입성하여 五龍車를 타고 百官은 白馬를 타고 전후로 호위하여 수선대에 이르러 오우관을 쓰고 허리에는 용광검(龍光劍)을 차고 수선대에 오르니 하늘에는 瑞雲이 나르고 풍악을 울리니 해부루王이 옥쇄를 올리니 사제(司祭長)장이 선위의 책서를 낭독하고 고천제를 올린 후 天子位에 오르니 백관 장상들의 하례를 받으며 대사령을 내리고 대연을 베풀어 군신을 위로하고 공훈을 포상하였다.

 

이로부터 해모수王은 天子라 칭하였다. 그리고 전 天子 해부루王을 가서라(加西羅)王에 봉하였다. 백관 중에 많은 사람들이 해부루에 대한 봉작을 반대하고 반도 험지에 위리 안치하여 후환을 없이 할 것을 권하였으나 천자는 이를 허락지 아니하고 말하기를 가시라王이 정성을 다하여 짐의 뜻을 따라 왕검 성을 명도하고 백성들로 하여금 병란의 화를 면케 하였으니 짐이 덕으로 관용함이라 하였다. 일설에는 해부루 황제가 해모수의 공격을 피하여 백관을 이끌고 왕검 성을 떠나서 멀리 가섭원 즉 동만주로 갔다 라고도 하였다. 그것은 가서라王(東扶余王) 해부루의 후손이 훗일 고구려 황제와 전쟁을 벌렸기에 그러한 기록들이 나온 것이다. 고구려 역사 古기록이 없어 졌으니 확실한 것은 알 수 없다. 여기서(東滿洲)라 한 것은 일정한 지명이 없고 요하 및 송하강 일대를 요동이라 하였다. 해모수왕이 인수한 대부여 영토는 어떠하였나? 현도의 北으로 千里이고 南으로 고구려와 같이하고 東으로는 파루와 西로는 선비와 접하고 北은 약수가 있었다. 여기 파루, 선비 등은 부여 동족이나 지역에 따라 그 지역 이름을 종족 이름으로 한족이 부른 것이다. 지방 二千里 땅으로 본래는 맥의 영토였다.

 

약수는 영주 유성 동남에 있는 요락수(饒樂水), 지금의 백랑수(白狼水)다. (扶余國在玄蒐北千里南與高句麗東與把婁西與鮮卑接北有弱水地方二千里本濊地也)이와 같은 부여 영토는 고구려 영토와 합하여 고구려의 광역이 되었다. 고구려를 건국한 周夢 聖王의 이와 같은 영토 확장은 광개토大王 시대까지 중원 失地회복을 상당 부분 이루었다. 때에 해모수天王은 그의 庶子 위구대에게 그의 領土의 한 地方을 扶余 分國으로 물려주어 小왕국을 영유케 하였다. 그러나 위구대는 早死(일직 죽음)하고 그의 과부 西召奴가 후일 이곳에 와서 河南(하남)에 백제국을 창업하는 근거지가 되었다. 해모수 天王은 백관을 모아 다음과 같은 조서를 내리었다. 짐이 先王의 유지를 받들어 고리국 고토를 회복하여 옛 영광을 다시 찾고자 하였으나 힘이 미치지 못하고 帝國의 열후를 제휴할 처지에 있지 아니 하였더니 이제 天王位에 올라 天下에 뜻을 펼 때가 왔으나 짐의 나이 八十지년에 심신이 모두 기력을 잃으니 이제는 더 바랄 것이 없는지라 대권을 후사에게 선위코저 하나니 짐의 太子 졸본王 추모는 나라를 세운지 일천하나 富强을 이루었으며, 인성이 착하여 가히 경들의 바람에 틀리지 아니할 것인즉 그 차비를 갖추도록 하라 하였다.

 

군신들이 아뢰기를 그 일은 大王 만세 후에 시행하여도 늦지 아니 하오니 원컨대 옥체를 보존하소서 하며 일제히 재고할 것을 주청하였다. 천왕은 이르기를 짐이 국권을 맡아 경들과 함께 환란지간에 고락을 함께 하여 오늘의 영광을 가져 왔으나 이 모두 경들의 공이라, 이제 짐의 수가 다하였음을 스스로 알고 있음이라, 천명을 도망갈 수 없으니 어찌 하랴. 경들은 너무 슬퍼하지 말고 자중하고 짐의 뜻을 따라 차질 없이 행하라. 짐의 뜻은 이미 정하였으니 달리 짐을 권하지 말라 하니 백관이 모두 체흡하였다. 해모수王은 이제 고령으로 마상에서 광야를 달리며 적과 싸우는 야전생활을 끝내고저 天王位에 오를 때를 기다려 왔으니 이제는 자신 감내 할 수 없었다. 天王은 이전에 추모王과 사이에 父子간의 정이 오가서 옛날 하백녀 유화와의 관계로 거기서 태어난 자기 자식임을 인지하였으니 일찍이 그를 太子로 들이고 두 개의 고구려를 하나로 묶어 합치고자 하였으나 내부 사정으로 그대로 미루어 왔으나 이제 추모王의 세는 그 주위 列國이 항거할 수 없는 강국으로 등장하였으니 고리王國의 휘하 신료들도 이제 강대한 국가의 臣僚로 전환하기에 이른 것이었다.

 

일설에는 해모수王이 다른 嫡子(본부인 소생)가 없었다 고도 하였다. 졸본 고구려王 추모는 해모수 天王의 부름을 받고 군사를 거느리고 북부여(일명:北고구려)국에 이르러 와병 중의 父王을 배알하고 天王位를 계승하여 나라를 합쳤다. 父王은 군신이 힘을 다하여 고토 회복의 대업을 성취하라 하고 지금 한무왕이 패퇴한후 다시 팽월을 대장으로하여 대군을 창해에 파견하여 또 다시 침략하니 창해의 한구를 반드시 격퇴해야 한다고 백관에게 이르기를 신王을 받드는 일을 짐에게 하는 정성과 같이하여 조금도 어긋남이 없게 하라 이르고 아들의 손을 잡고 이르대 나의 휘하 만조 신료는 충량하고 성실하니 크게 너를 도울 것이다. 추호라도 소흘히 하지 말라. 이른 후 이제는 여한이 없다 하고 숨을 거두었다. 해모수王은 父王을 따라 중원 고죽성에서 철수하여 이곳에 정착한 후 심혈을 기우려 나라를 세우고 生前에 헌신적으로 발해, 창해 요동 창예 등지에 침투하는 한군과 싸워 고구려 주몽의 도움으로 연승을 거두고, 한무왕에 이르러서는 더욱 심해진 한구의 집요한 침입을 막아내어 요동을 보전하고 창해에서 한구의 선봉 부대를 축출하여 우거王을 보호하는데 힘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