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역사 침탈(侵奪)

BC 28세기 요하문명의 濊貊族이 남하 하여 夏, 商, 周를 건국하면서 황하문명을 일구었으며, 鮮卑族이 秦, 漢, 隨, 唐을 건국했습니다. - 기본주제 참조

홍익인간·인류공영/환단고기·한민족역사

16. 周夢 皇帝의 崩御(붕어)와 黃龍國(황용국)의 滅亡

자연정화 2013. 8. 24. 12:31

十六. 周夢 皇帝의 崩御(붕어)와 黃龍國(황용국)의 滅亡 
  

周夢 天王은 조선 제국 열후들을 병합하고 위적의 침입에는 선두에서 분전하여 격퇴하고 마침내 고리국의 영광을 이을 고구려를 창업하였으나, 후세에 와서 요동에서 백제와 싸웠다. 二十二세의 젊은 나이로 고구려 대제국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그러나 하늘은 이 불세출의 영웅에게 중원 故土회복의 기회를 주지 안하고 六十二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自朱夢立都闕升骨城歷四十年通典) 三國사기에 이와 같이 열거하고 한편으로 本紀 一편에 四十世에 죽었다고 하였다.(王昇遐時年四十歲) 통전을 인용하여 二十二세의 나이로 王位에 나아가 四十年을 在位하고 서거했다, 해 놓고 四十세에 죽었다고 하였으니 역사 기록이 이와 같이 모순을 많이 범한 것은 이 또한 무리한 고구려 기년 축소의 소산이라 보인다. 주몽天王은 太子유리에게 중원 고토 회복에 전력하라 유언하고 용성에서 붕어 하시니 산천 토목도 슬퍼하는 것 같다 하였다. 太子는 통곡을 그치지 아니하니 군신들이 상의하여 太子를 위로하고 王位에 오를 것을 재촉하니 太子는 서서히 국장을 지낸 후로 미루었다. 이에 장사 마리가 아뢰었다. 지금 국내 제후의 향배가 무상하고 언제 한구의 난이 일어날지 기약할 수 없으며 흉노 모돈이 신조선을 파한후 이제 조선 제국을 두려워 하지 아니하고 중원에서 한나라를 항복 받고 기세 등등하여 무슨 짓을 할지 믿지 못하는 터이옵니다. 이제 太王께서 승하하심이 해내위에 전해지면 天下가 진동할 것이오니 지금 즉일로 大位를 계승한 연후에 국상을 치러야만 만민이 안정을 찾을 것이옵니다. 국가 대사이니 결코 가벼이 생각지 마옵소서 하였다. 백관이 일제히 동의하니 太子는 울음을 그치고 보위에 오른 후 대사령을 나리고 변방에 특사를 파견하여 요새를 굳게 경비하게 하였다. 그리고 추모王을 東明성왕이라 추존하였다.

 

大권을 계승한 유리天王은 先大王의 유훈을 충실히 받들어 내실을 다졌다. 그러던 중 충실하고 현명한 송현비가 젊은 나이에 서거하였다. 현명한 내조를 해 온 王后를 잃은 유리天王은 큰 타격이었다. 유리 천왕은 새로이 두 왕비를 맞았다. 오천후의여 화의(禾姬)라고 하였다. 그리고 얼마 후 다시 한인의女 雉姬(치희)를 제二의 王妃로 맞아들이었다. 두 王妃는 모두 아름다운 여성이었다. 두 女人은 서로 王의 사랑을 끌어오기 위하여 경쟁하고 다투었다. 유리王은 그러한 애정 다툼을 막고자 두 사람을 한사람은 東궁에 한사람은 西궁에 거처하게 하였다. 天王은 어느 날 기산에 가서 여러 날을 머무르고 돌아오지 아니하였다. 天王이 없는 틈에 두 사람의 王妃는 서로 다투었다. 그러나 화희가 치희보고 꾸짖었다. 너는 한가의 천한 계집이 왕실에 들어와 교만하게 구느냐 하였다. 원래 치희는 한인 포로의 딸로 그의 뛰어난 미모와 출중한 자질을 인정받아 天王이 후비로 들인 여인으로서 화희는 평소부터 치희를 멸시하는 마음이 있었으나, 王이 그를 총애함으로 마음속에 질투심이 폭발한 것이다. 치희는 나름대로 원래는 귀한 집 딸로서 그러한 멸시를 참지 못하여 궁을 뛰쳐나가 도망갔다. 天王은 궁에 돌아와 그것을 알고 말을 타고 뒤를 쫓았다. 그러나 치희는 분노하여 돌아오려 하지 아니 하였다. 사랑이란 힘으로는 얻을 수 없는 것임을 새삼 느꼈다. 강제로 끌고 올 수는 있어도 사랑은 그렇게는 얻을 수 없었다. 天王은 나무 밑에 앉아서 종자를 물리치고 혼자 희한의 한숨을 쉬면서 먼 하늘을 쳐다보니 황조가 떼지어 나르고 있었다. 王은 허전한 마음을 노래로 달래었다. 「훨훨 나는 황조여 암쑥이 서로 의지 하네 나의 외로운 마음이여 그 누구인고 돌아오렴」 유리 天王은 그의 치세는 평온을 추구하였다. 중원 고토 희복에는 보다 신중을 기하였다. 이때 고구려 북녘을 점거하고 있던 선비(鮮卑)가 틈만 나면 침입 약탈하고 토벌 고저 나가면 험지에 숨고하여 근심거리가 되었다. 선비는 한나라 기록에는 부여 별종이라고 되어 있으나 선비란 한이 조선 족에 관하여 북녘을 오환 선비 비려 등 여러 호칭을 그때그때 부쳤으나 이들은 모두 조선 동이 족으로 조선 제국 말기 제국의 분열로 각자 분립한 조선 열후이다. 유리天王 十一年봄 묘당에 군신이 모여 방위책을 의논하였다. 天王이 물었다. 북막후 선비가 우리와 환친을 하지 않고 험지에 의지하여 틈만 보면 출몰하고 불리 하면 험지에 숨어 버리니 그냥 두면 국가의 화근이라 어찌하면 좋을꼬 하였다.
 

 이에 정서 장군 부분노가 출반주하여 가라되 선비국은 험고한 나라이나 용맹하여도 어리석은 성품이오니 힘으로 치기는 어려우나 모략으로 치면은 쉬운 것입니다 하였다. 天王이 가라대 그러면 장군의 계책을 듣고자 하노라 하였다. 부분노가 대답하였다. 미녀 첩자를 선비에 밀파하여 고구려는 허장성세로 강한 척 하나 기실 허약하고 군사도 적으니 약한 나라이다 라고 선전한 후 선비의 동정을 보아 계교로서 섬멸하면 되옵니다 하였다. 天王은 그 말을 듣고 과연 좋은 생각이다 하고 그대로 따랐다. 얼마 후 과연 선비는 침공 할 준비를 갖추고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王은 친히 군사를 이끌고 南으로 선비와 적대하였다.

 

선비는 용맹을 뽐내며 성을 나와 고구려 군을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고구려 군은 일전을 패하고 후퇴하니 선비는 고구려 군이 비겁하여 후퇴함을 보고 마침내 성중 수비는 허술한 채 大군을 동원하여 진격해 왔다. 이때 부분노는 정병 二萬을 이끌고 사잇길로 깊이 선비 도성 위각산에서 멀리 바라보니 성중이 허술한지라 전군에 영을 내려 도성으로 진격하여 성채를 유린하고 성중으로 쇄도 하니 소수 수비군은 중과 부족이라 궤멸하고 고구려 군은 도성을 점령하고 성누에는 고구려국 국기가 올라갔다. 선비군은 멀리서 이 광경을 바라보고 대경하여 군사를 돌려 달려가니 부분노는 선비의 요새 험지를 반대로 고구려 군이 점령케하여 선비군을 돌아오지 못하게 막았다. 그리고 고구려 유리天王은 군사를 다시 돌려 돌아가는 선비군을 大군을 몰아 공격하니 전후로 협공 당한 선비군은 계궁 역진하여 항복하였다. 이리하여 선비국은 고구려에 속한 옛조선 열후로 돌아왔다. 天王은 부분노의 大공노를 포상하여 식읍(食邑)을 넓혀 후에 봉하고자 하니 이번 승리는 太王의 성덕이라, 어찌 신의 공이라 하오리까, 하고 부분노는 굳이 사양하고 받지 아니 하니 天王은 황금 三十근과 말 十四필을 하사하였다. 十四年봄 東부여王 대소(帶素)는 사자를 보내어 제의하기를 상호간 친목을 돈독히 하기 위하여 王子를 교환하여 인질 하자고 하였다. 대소王은 고구려가 선비를 정벌하고 국역이 점점 커짐에 심히 불안하였다. 그리고 고구려 王子 三人이 모두 총명하여 인망이 두터움을 알고 계교로서 제거 코저함이 였다. 대소王도 다수의 王子가 있으나 출중한 자식을 얻지 못하였다. 고구려 天王은 太子를 불러 의사를 물었다. 太子 도절(都切)은 대소王이 해코자 하는 것을 짐작하고 가지 아니하였다. 대소王은 군신을 모아 의논하였다. 우리가 지금은 고구려가 두려울 것이 없으나 저들은 계속하여 영토를 확장하고 북막후 선비를 병탐하여 날로 강성하니 지금 치지 아니하면 장차 화가 미칠 것이니 군사를 일으켜 공략함이 어떠한고 하였다.

 

군신들의 의견이 분분하였으나 대소王은 결단을 내렸다. 출정 할 것이니 제공은 이에 따라 만반의 출정 준비를 하라 하고 王은 친히 보기(步騎)五萬을 이끌고 고구려를 침공하였다. 그러나 고구려는 요소를 궂게 지키고 출전을 자제하였다. 고구려 노장 부분노는 출전 방위 장군에게 일렀다. 엄동에 군사를 일으키는 것은 병가의 꺼리는 바인데 대소王이 강함을 믿고 엄동 출사를 강행하니 우리는 응전 하지 말고 굳게 지키고 있다가 적의 변동을 보아 공격하라. 내가 천문을 보니 유성이 북에서 동으로 흘러 동부여지에 떨어지고 흑운이 西공에 밀집하니 장차 동으로 대설을 가져 갈 것이니라, 때가 아니면 움직이지 아니하고 편함을 가지고 피폐함을 급습하여 백중 승리하는 법이라, 지난날 태조성 王이 백전 백승한 전략이니라 하고 일러주었다.

 

한편 대소 왕은 전위군 五萬을 이끌고 진격코자 하나 적이 험고를 지키고 움직이지 아니하니 후군을 이끌고 오는 장수에게 우회하여 적의 측면을 치라 하고 적을 강공하여도 요새를 파하지 못하고 근심하든 중 대설이 내리어 그치지 아니 하니 군사가 움직일 수 없는지라 고구려 군의 기습을 두려워하여 퇴각 하니 무수한 동사자를 내고 돌아갔다. 유리天王은 太조 聖王과 같은 군사 대국에 자신이 없었다. 근시 교가 天王에에 진언하였다. 신이 전일 제수용 도야지를 잡기 위하여 위나암에 갔다가 그곳 지형을 살펴보니 산은 험하고 물은 깊어 지키기에 좋은 환경이고 한편으로 좋은 곡창을 끼고 좋은 목축지를 겸유하고 있으니 좋은 도읍지가 될까 하옵니다 하였다. 근신들은 유리天王이 일찍이 보다 견고한 도읍지를 원하고 있음으로 이와 같은 보고를 한 것이다. 그리하여 天王은 여러 차례 답사 한 후 위나암성을 축조하고 二十 二年 그 지역 국내(國內)에 천도(遷都)하였다. 이것을 국내성이라 호칭한다. 설화로 보아 신도와 구도는 근거리로 보인다.

 

유리天王은 수렵을 즐겨 한 번 나가면 여러 날을 수렵에 몰두하여 도성에 돌아오지 아니함에 노상(老相)협부사 이를 간하여 국정을 소홀히 하면 선大王 의 창업이 수포로 돌아 갈 것이라고 극간 하였다. 유리天王은 대노하여 늙은이가 무슨 망언인가 하고 삭탈관직하고 내 쫓았다. 이일은 국가에 큰 손실을 가져왔다. 이후로는 신하들이 유리天王의 잘못된 처사에도 입을 열지 아니하고 열후(列候)도 점점 떨어졌다. 유리太子가 天王位에 오른 후 天王은 나약하였다. 모-든 일에 겁이 많았다. 그러나 그의 王子들은 출중하였다. 새로 太子에 봉해진 해명王子는 父王의 소극적이고 무기력한 통치에 불만 이였다. 兄 도절太子도 王이 언젠가는 대소王에게 인질로 보내질 것을 생각하고 고민 끝에 죽었던 것이다. 해명太子는 王이 천도 후에도 구도(?都)를 지키고 父王을 따라가지 아니하였다. 해명太子의 용기 있고 현명하다는 소문은 황룡국(黃龍國)에도 전해졌다. 黃龍 國王은 강궁(强弓)하나를 사자를 시켜 가지고 가서 해명太子에게 바쳤다. 太子를 시험해 보려고 한 것이다. 太子는 그 활을 받고 힘차게 당겨서 부러뜨려 버렸다. 太子는 사자에게 말하였다. 이활이 약해서 부러졌다. 내가 힘이 세서 부러진 것이 아니라 하였다. 黃龍王은 사자가 돌아와서 보고하는 말을 듣고 놀라고 부끄러워하였다. 이런 일들을 太子를 음해 하려는 신하가 王에게 고하였다. 太子께서 강함을 뽐내어 黃龍王을 조롱하였으니 장차 국가 비상 사태가 일어나면 黃龍王은 적과 힘을 합쳐 우리 나라의 한편을 위협 할 것입니다.

 

太子가 太조聖王의 고도(故都)를 떠나지 아니하고 군사를 조련하고 있으니 혹여 간신배들의 오도하는바 될까 두렵습니다. 하고 은근히 太子의 불손함을 비쳤다. 天王은 이 말을 듣고 太子가 반란이라도 모의하는 것 같은 착각을 일으켰다. 즉각 사자를 黃龍王에게 보내어 太子가 무례한 행동을 해서 미안하다는 사과 말과 함께 太子가 심히 불효하니 우리太子를 죽여 달라고 청하였다. 이에 黃龍王은 太子를 한 번 만나자고 초청하였다. 太子는 초청을 받고 黃龍國을 향해 출발코자 하니 주위 종자가 충간 하였다. 황용 왕은 지금 아무런 만날 사유도 없이 太子를 만나고자 함은 무슨 까닭이 있는 것이오니 혹여 불칙한 음모가 있을지 모르오니 가지 마옵소서 하였다. 太子는 말하였다. 내 命이 하늘에 있거늘 하늘이 나를 죽이고자 아니하면 누가 나를 어찌할까 보냐 하고 나섰다. 황용 왕은 죽일 계획을 하고 태자를 맞았으나 태자의 늠름하고 용맹한 모습에 감탄하고 두려워 감히 해칠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친절하게 대접하여 돌려보내고 좌우를 돌아보며 말하였다. 세상에 저런 훌륭한 인물이 어디에 또 있단 말이냐 유리王이 저런 大인물을 太子로 두고 있으면서 어찌하여 죽이려 하는고 하며 한탄하였다. 유리天王은 황용국王의 손을 빌려 죽이려 한 것이 실패로 돌아가자 이제 즉시 스스로 목숨을 끊으라는 명령서와 함께 칼을 보냈다. 太子는 사자를 맞아 명령서를 펼쳐 보니 가라대, 내가 일찍이 도읍지를 옮겨서 안시성으로 왔으되 너는 따르지 아니하고 그곳에 머무르고 강함을 뽐내고 이웃 황용 국을 멸시하여 이웃간 정의를 저버리고 원수를 맺었으니 이 어찌 자식된 도리라 하겠느냐? 너 같은 불효자는 마땅히 죽어야 하는 법이니 여기 칼을 보내나니 이 칼로 자진토록 하라 하였다. 太子는 명령을 받고 불효자가 어찌 세상에 낯을 들고 살수 있으랴 하고 곧 칼을 들고 죽으려 하니 주위에서 말렸다. 사자가 비록 명령을 전달하여 왔으나 혹여 간사한 무리가 장난하는 수도 있으니 다시 하회를 보고 그때 가서 대처함이 옳은 것이오니 잠시 참으시기 바랍니다. 하였다.

 

그리고 이어 말하기를 처음 장자이신 도절 太子께서 단명으로 세상을 떠나신 후 금太子께서는 정당하게 太子位를 이으시고 父王의 命을 어긴바 없사온데 불효란 千부당 하오며 간신배의 참언으로 大王께옵서 성총을 흩트린 일로서 어찌 쉽게 죽을 수 있사오리까 하였다. 太子가 말하였다. 전일 내가 황용국 사자가 가져온 강궁을 뿌려트린 것은 힘자랑이 아니라 황용국이 우리를 미약하게 여겨 넘볼까 하여 시위 한 것을 父王께서 오해 한 것이라, 이제 그것으로 이와 같이 불효라고 질책하시니 내어찌 父王의 命을 따르지 아니하고 살 궁리를 할 까부냐. 그러하면 불효의 죄를 더욱 무겁게 하는 것이라 그대들은 나를 말리지 말라 大丈夫 마상에서 전장으로 달리며 적을 치고 나라에 충성을 해야 할 몸인 것을 어찌 방안에서 죽으랴. 하고 칼을 가지고 동원에 나가서 땅에 거꾸로 꽃아 놓고 말을 달려 그 위에 엎어져 비참하게 생을 마쳤다. 방년 二十一세였다. 원로들은 그가 태조 성왕의 지난날의 기풍과 영특함이 같다 하여 대성 할 것을 기대 하였다가 이와 같이 죽으니 슬퍼하며 한탄하였다. 그러면 그 황용국(黃龍國)은 어떤 나라기에 天王이 그같이 중희 여겼는가. 유리 황제는 지난날 고구려가 선비를 토벌하여 항복 받은 후 선비 추장 모용보로 하여금 그 곳 중산을 다스리게 하였으나 中山국은 遼동이 아니고 中原 北部 冀州地域이며 元來 조선 제국의 열후국이며 後日백제의 하남이다 모용보는 본국 고구려의 지원 없이 그 곳을 지키기에는 힘이 모자랐다.

 

그리하여 색노(索虜)역시 (동이족 별종)에게 영지를 빼앗기고 東으로 연나라 지경 황용땅에 와서 다시 일어나 터전을 닦던 중 모용보(慕容寶)의 동생 수하 장수 빙발이 寶를 죽이고 다시 진왕 고운을 멸하고 스스로 대연 천왕이라 하였다.(秦王高雲爲海夷憑跋所滅跋僭號自稱大燕天王 緯書) 빙발의 소재(小第) 문통(文通) 은 어린 나이로 모용氏 모살 음모에 참여하였다. 빙발은 종방형제등 二十三人이 차마를 부인이 몰고 숨어서 황용성에 잠입하여 공손氏를 멸한 것이다. 후에 문통 또한 음모를 꾸며 성공하여 연王位에 올랐다. 황용성(黃龍城)에 도읍을 정하니 황용국 이라 하였다. 王은 壯大하고 용맹하여 유리 황제는 심히 경계하고 충돌을 피하였다. 그리고 장차 고구려의 중원 진출에 그의 향배는 큰 영향이 있기에 중요한 존재였다. 황용국의 문통은 그兄 빙발이래로 대연 천왕이라 칭하고 동이족 왕국으로서 중원에서 위세를 떨쳤다. 그러나 중원에서 진(晋)이 위(魏)를 누르고 새로이 일어나서 강동의 손호를 정벌하여 서촉과 강동을 모두 병탐하여 강성함에 고구려를 뒤로 두고 진과 쟁패할 수 없었다. 

 

문통은 진주 사마염과 사돈하여 딸을 진의 태자비로 시집보내고 진국에서도 연주문통과 사돈하여 동방불패 고구려를 중간에서 막는 완충역할을 맡게하는 정약 결혼을 하였다. 이리하여 三국은 서로 견제하는 상태로 상당기간 평화를 유지하였다. 진주 사마염은 연주 문통에게 연태자의 입시(入侍)를 요청하였다. 혹여 고구려의 중원정벌을 도울까 염려하여 연태자를 인질코저 함이였다. 비록 사돈을 맺었으나 연과 고구려는 동족임으로 믿을 수 가 없었다. 그러나 문통은 내심 딴 마음이 있었다. 그것은 고구려가 중원고토 회복을 노리고 있으나 진은 서촉과 강동을 모두 병탐하여 광대한 중원영토를 점유하고도 조선고토를 고구려에 넘겨줄 생각은 아예 없고 진주의 조부 사마애가 고구려와 약조하고 전후로 공손연을 멸한 후 공손연의 영토 전부를 점유하고 고구려에 그 고토(故土)를 돌려 주지 아니하고 있음에 불원 고구려와 진은 대전을 피할 수 없는 형편이니 그시기에 중원을 정복할 야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하여 태자 입조를 아니하였다. 이에 연나라 조정에서는 공논을 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때에 산기상시 유훈이 연왕에게 상소하여 가라대 비록 서로 상혼하여 화합하였다 하나, 태자의 진조 입시를 안하고 있다가 위가 대거침입하면 나라가 위태하니 진은 오나라와 연나라보다 강대하니 우리가 대국을 섬겨서 태자를 입시케하고 연후에 이산한 백성을 모으고 창고의 곡식을 백성에게 나누어 주고 농산을 장여하여 부강을 이룬후라야 사직을 영구히 보전할 수 있을 것입니다하였다. 이 상소문을 받아본 문통은 대노하여 유훈을 사형시켰다. (世祖許之徵其子王仁入朝文通不遣侍子魏若大擧將有危亡之廬夫以重山晋氏燕弱于吳屬願時遣世子以恭大國之命然後收離集散厚布恩澤分賑倉庫以濟民之勸督農桑以激秋稔庶大業危而更安社稷可以永保文通大怒殺之)문통과 그 후 발은 중원 하북일대를 점거하고 위력을 떨쳐 한 때 중원 동북에 군림하였다. 빙발이 죽고 그 아들 홍(弘)이 왕위를 이었으나 또 다시 색노와의 오랜 전쟁으로 궁극에 패하고 고구려 故國壤王 시절 중원 東北部에 깊숙이 들어가 그 지역을 점유하고 있을 적에 고구려에 자진 투항한바 있다. 이리하여 황용국은 멸망하였다. 이 때에 고구려는 영주 평주 등 일대가 모두 고구려 영토였음으로 고구려의 별궁이 있던 북풍성(北豊城)에 투항해 온 것으로 보인다.

 

황용국 영토였던 용화주에서 가장 가까운 위치였다. 그리고 太子의 죽음에 대하여는 세상 사람들이 말하기를 부모를 섬김에 있어 곁을 떠나지 아니한다. 하나 옛날 주나라 무王은 문王의 곁을 떠나 武로서 제후를 굴복케 하는 등 문王의 생각과는 다른 행동도 있으나 불효라 하지 아니하였다. 해명太子가 父王의 곁을 떠나 있어 용기를 보인 것은 불효의 죄가 마땅하다 하였다. 그러나 무王이 그 아비 문왕의 뜻을 거슬려 용맹을 뽐낸 것과는 다르다 라고도 하였다. 또 전하기를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고 자식이 용기(勇氣)있게 행동하는 것이 못마땅하면 좋게 타일러 선도할 것이지 타일러도 듣지 아니했단 말인가. 이웃에 실례를 저질렀다 하여 한마디 주의도 없이 곧바로 죽으라 한 것은 아비의 도리가 아니며 해명 태자는 그러한 命을 받았다고, 한 번 해명하고 용서를 빌어 보지도 아니하고 죽어서 아비로 하여금 자식을 죽였다는 불미스런 평을 듣게 한 것 또한 불효이니 이것은 곧 아비는 아비의 도리를 다 하지 못한 것이고, 자식은 자식의 도리를 다 하지 못한 것이라 하여 후세에 王子 호동이 부왕의 명으로 자살 한 것과 같이 평하였다. 안컨대 옛날 동이족이 동방군자국이니 예의지국이니 하여 한무재가 번 조선을 칩벌하여 고구려의 법령 엄격하고 도덕 질서 정연함에 감탄하고 고구려의 서적을 반출하고 미처 못 가져 간 것은 모조리 없앤 바와 같이 그 도덕 관념이 충효 사상에 있어 지나친 정도가 아닌 가도 생각된다.

 

아무튼 동이족은 그것이 무너지지 아니하고 이조까지 이어왔고 지금도 차이는 있으나 그러한 도덕률은 우리 민족의 전통으로 이어져 오고 있다. 옛날 대순(大舜, 禹舜)이 독장사의 아들로서 소년 시절 그의 계모가 모함하여 아비가 계모의 말을 듣고 순을 죽이고자 지붕 위에 오르게 하였다. 오른 후에 내려오지 못하게 사다리를 치웠다. 순은 미리 눈치채고 올라갈 적에 삿갓 두 개를 가지고 올라갔었다. 사다리를 치운 후 그 집에 불을 질렀다. 순은 아비가 죽이려 하여도 죽지 아니하고 그 뜻을 어기고 살고자 삿갓을 양손에 들고 뛰어 내렸다.

 

순이 죽지 아니하고 아비의 뜻을 어긴 것은 아비로 하여금 자식을 죽였다는 불미스런 말을 듣지 않게 하기 위함이니 효자라 하였다.순은 그 계모가 항상 모함하고 해롭게 하여도 계모를 정성으로 섬기고 악명이 밖으로 나지 않도록 최선을 다 하고 계모 소출 동생들을 우애 있게 선도하였다. 순이 세상 사람들에 지효(至孝)라고 평판이 높아서 원근에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널리 알려져 후일 만인의 추대를 받아 제위에 올라 만세에 성군(聖君)의 칭호를 남겼다. 고구려의 해명太子가 이 같은 성인을 본받지 못한 고로 효자의 도리를 못하였다고 한 것이다. 유리王은 太子의 시체를 거두게 하여 죄인이 아닌 태자의 죽음으로 장사 지내고 사당을 지어 주었다. 유리왕의 첫王子는 대소王에게 인질로 보내려 하여도 아니 감에 핍박하여 고민 끝에 죽었고 둘째는, 이웃나라에 실수를 저질렀다고 죽었고 셋째 왕자 무휼이 남아 있었다. 무휼 또한 용맹하고 영특하였다. 중국 사서에는 용맹하여 폭군 같은 인물로 묘사하였다. 후일 대무신왕으로 중원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천하를 호령한 인물이다. 유리天王은 그의 용맹을 못마땅하게 여겼으나 다른 王子가 없어서 무휼을 태자에 봉했다. 한편 東부여 대소王은 젊은 나이에 王位를 계승하고 혈기 방장하여 고구려의 늙고 겁많은 유리天王이 만만하였다. 협박하는 국서를 가지고 사자가 고구려를 방문하였다.

 

유리왕이 국서를 받아 보니 가라대 나의 선王은 고구려 주몽王과는 좋은 사이였는데 우리를 유인하여 우리 군신이 이곳으로 도피하였다. 군신이 옛 영광을 찾고자 힘써 오늘의 국가를 이룩하였다. 무릇 국가는 大小가 있고 사람은 장유가 있다. 적은 나라가 큰 나라를 섬기고 어린 자가 나이 많은 어른을 섬기는 것은 약한 자가 강한 자를 섬기는 도리(道理)이다. 王께서 순리를 따라 나에게 순종하면 하늘은 반드시 그대를 도와 영구히 사직을 보존 할 수 있을 것이고 그렇지 아니하면 보존코자 하여도 어려울 것이다 하였다. 이에 王이 생각하건데 나라를 세운지 오래지 아니하며 先代의 列候는 흩어지고 백성이 불안하고 군사는 저들 보다 많지 못하니 일단 항복하였다가 다시 훗일을 도모함이 옳다고 생각하고 군신과 상의하여 회답하되 과인이 바닷가 구석에 있어 (발해北쪽 국내성) 예의를 듣지 못하고 이제 大王의 가르침을 받으니 어찌 감히 따르지 아니하오리까 하였다. 이 말을 전해들은 무휼 태자는 父王의 나약함에 울분이 치솟았다. 그는 太子궁으로 사자를 청하였다. 太子는 사자에게 말하였다.

 

나의 선조大王께서는 천지 신령의 자손이라 어질고 총명한데 그대의 先王이 시기하여 父王(해부루)에게 참소하여 말먹이로 부리고 해롭게 하여 불안하여 탈출하였다. 이제 東부여王이 옛일을 부끄럽게 생각지 아니하고 강함을 믿고 우리를 경멸하니 사자는 돌아가서 고하라 하고 계란 꾸러미를 주며 일렀다. 이것을 大王께 바치니 大王이 이것을 깨면 내가 大王을 섬길 것이고 그렇지 못하면 섬기지 아니 할 것이다 하였다. 유리왕은 太子의 간청으로 항복을 늦추고 사자를 그대로 돌려보냈다. 부여王은 사자가 돌아와 계란 꾸러미를 바치며 하는 보고를 듣고 군신들에게 물었다. 이것이 무슨 뜻인고 군신들이 입을 열지 못하였다. 그 뜻을 알 수가 없었다. 이것을 본 한 궁여 노파가 아뢰었다. 계란 꾸러미는 자고로 누란(累卵)이라 위태로움을 상징하는 것이옵니다. 그것을 깨지 아니하면 편한 것이니 그 뜻은 대왕께서 자신의 위태로움은 모르고 남의 항복을 받고자 하니 위태로움을 편안함으로 생각을 바꾸라는 이치 옵니다 하였다. 王은 고구려를 칠 수 없음을 짐작하고 생각을 바꾸었다. 소년 太子의 지혜가 이와 같았다. 부르王 三十 一年 한나라 王位를 찬탈하여 황제가 된 왕망(王莽)이 사자를 보내 와서 예맥과 흉노를 함께 토벌하자고 하였다. 고구려는 예맥과는 서로 통하는 바이고 그들이 예맥이라 이름 부처 부르는 예맥도 고구려의 일족이며 흉노는 고구려와 서로 싸움을 피하는 사이였다. 고구려는 이를 거절하였다. 그러나 한 나라는 중원 깊숙이 침투한 이들을 단독 격퇴하는 것은 어려워 여러 차례 사자가 와서 강요하였다.

 

이때 한나라는 중원에 침투한 고구려로 하여금 그들을 징발하고 군사를 동원하여 흉노를 정벌코자 하였다. 그러니 東明聖王이 중원고토 회복을 위하여 파견하였던 사람들이라 끝까지 불응하니 한은 중원에 있는 고구려인을 징발하여 강제로 전선에 밀어 넘었다. 그들은 전쟁을 피하고 색위(塞外, 북경, 요서 지역)로 달아나 집단을 이루어 도리어 중원으로 되돌아와서 약탈하였다. 한王 왕망은 볼모로 잡고 있던 그들의 가족을 학살 하니 수十萬명을 매몰하였다고 전해진다. 이후 중원에서 한과 동이 족은 싸움이 계속되어 왕망이 한나라 황제가 된지 三十年만에 망하고 광무(光武)가 한나라 유씨 정권을 중흥하는 기회를 잡았다. 왕망은 음우를 식혀 고구려를 치라고 하니 음우는 고구려와 싸워 이길 수 없음을 알고 고구려 대장 연비(延丕)에게 화친하자고 유인하여 암살하였다.한편 이틈에 부여는 고구려를 침공하였다. 유리王은 무휼 태자에게 동부여를 막으라고 명령을 내렸다. 太子는 군사를 이끌고 나가며 첩보를 들으니 적의 병력이 훨씬 많았다.

 

정면 회제(會戰)으로는 꺾을 수 없다고 판단하여 진군을 늦추고 병역을 나누어 깊이 매복하였다. 부여군은 고구려 군이 부여 군에 비하여 훨씬 열세라는 첫보를 듣고 大軍으로 음습하여 준비할 틈을 주지 아니하고 왕검 성을 공략할 계책을 세우고 급하게 진격하였다. 大군이 고구려 진지를 습격코자 학밭령에 이르렀을 적에 함성이 크게 일어나면서 후군이 소란하며 복병이 후군을 급습하여 三군이 흩어지니 전군이 혼란에 빠져 제각기 도망하여 늪을 빠져 나와 산으로 올라가서 고구려 군이 겹겹이 에워싸서 군사는 배고프고 목말라 싸울 힘을 잃고 무참히 섬멸 당하였다.

 

무휼 태자는 이번 싸움에 수만 필의 군마를 얻고 부여王은 겨우 생명을 보전하여 도망갔다. 이후로는 동부여가 고구려를 침범하지 못하였다. 한나라도 그 동맹국인 동부여가 패배함에 중원에서 고구려의 침공을 막기 어려워졌다. 고구려는 지난날 제국의 열후로서 지금 한구와 연고를 맺고 있는 양 예맥국(梁濊貊國)을 노장군 오이(烏伊)와 마리(摩離)로 하여금 二萬騎의 정예군을 동원하여 정복하고 한이 전날 요서(遼西)에 있는 고구려 영토의一부를 점령하여 고구려 현을 설치한 실지(失地)를 공략하여 다시 찾았다. 그리고 한나라가 화친하자고 꼬여 대장 연비를 모살하여 그 수급을 경사 거리에 매달아 고구려를 파했다는 것을 선전하고 고구려를 하구려로 낮추었다고 선전한 한나라의 비겁한 행동에 고구려는 분개하여 중원의 동북과 서암지역에 침입 공격을 강화하였다. (其更名高句麗 爲下句麗 布告天下令咸知焉于是烙人愈犯邊東北與西南夷皆亂云) 유리天王은 태조 성왕의 창업을 소중히 지키는데 전력하고 중원고토 회복의 유언을 실천하는데 과감하지 못하였으나 태자 무휼이 그 일을 시작하였다. 유리天王은 三十 七年 十月 두 곡리 별궁에서 봉하시니 호를 유리명왕이라 추존하고 두곡동원(豆谷東原)에 안장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