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역사 침탈(侵奪)

BC 28세기 요하문명의 濊貊族이 남하 하여 夏, 商, 周를 건국하면서 황하문명을 일구었으며, 鮮卑族이 秦, 漢, 隨, 唐을 건국했습니다. - 기본주제 참조

홍익인간·인류공영/환단고기·한민족역사

18. 衛滿의 번 조선王位 찬탈과 漢武帝의 蒼海패(敗)戰 및 歷史 왜곡과 古史書 破棄

자연정화 2013. 8. 24. 12:33

十八. 衛滿의 번 조선王位 찬탈과 漢武帝의 蒼海패(敗)戰 및 歷史 왜곡과 古史書 破棄
 

大단군 제국이 三조선으로 분립한 후 번조선왕 기준은 위만을 맞아 그를 후대하였으나 위만은 야심이 충만하고 병법에 능통하며 기준이 그를 통제할 수 있는 능력이 모자랐다. 위만은 한구(漢寇)의 침입을 핑계로 병력을 동원하여 왕검성(험독, 후한서동 이전에 의하면 험독은 山東省登洲근처임)을 점령하고 기준 왕을 쫓아 버리고 스스로 번조선왕이 되어 진조선왕 조선 황제에게 정변을 상주하였다. 제는 그를 번조선왕으로 봉하였다. 한나라 사기에는 연인 위만을 한족 인양하여 위만이 동이의 의관을 하고 상투를 쫓고 연을 탈출하여 조선으로 가서 조선 왕이 되었다. 하고 또한 쪽으로는 東녘의 조선 왕들이 황조(皇朝, 大단군 조선 제국이 분열로 쇠퇴하니 한 왕도 진시왕을 본떠서 황제라 칭하기에 이름)에 조공을 하려 하여도 위만의 손자 우거王이 막고 교통을 끊었다 라고 앞뒤가 안 맞는 기록을 함. 위만은 번조선王이 된 후 서경의 성곽을 수축하여 방비를 강화하고 역내 제후들을 단속하고 병마를 보강하여 그의 통제에 불복하는 낙낭후 최숭(催崇)을 공격하니 최숭은 일당을 이끌고 바다를 건너(여기 바다는 발해를 말한 것임) 남단의 왕검성(在平壤)을 점거하고 요하 발해 연안일대에 영지를 이룩하여 낙랑王(樂浪王)이라 칭하였다.

 

위만은 세를 확장하고 병마를 조련하여 그의 숙원인 서토의 동이족 결합을 위하여 연 나라에 버리고 온 백성들을 다시 규합하는 꿈을 이루지 못하고 병이 위중하니 그의 아들 손자들을 탑전에 불러 놓고 유언하기를 내가 연 나라에서 고락을 같이하는 동이 동족을 버리고 와서 영화를 누리는 것이 귀한 것이 아니라 연 나라 백성과 越에 흩어져 있는 동이 족은 옛 영화를 생각하고 있다. 大단군天王께서 九환의 백성을 三분하여 통치할 적부터 이곳은 번汗의 땅으로서 幽王, 燕王, 契丹王 樂浪王등이 모두 번汗王의 휘하 제후였다. 동몽선습에 통감을 인용하여 古我東方九種夷東有穢貊諸國西有幽燕契丹諸國北有肅愼抹鞨諸國此元來自爲東方別種夷 (이것으로 보아 연 나라가 亡하기 이전까지는 조선 반도에는 나라를 형성할 만한 수의 주민은 살지 아니하였다.)

 

이제 西에 있는 三개王국이 차례로 亡하고 백성은 흩어져 고초를 겪고 있으니 내가 이루지 못한 꿈을 너희들은 명심하고 힘써 이루도록 하라. 그것은 곧 三국을 통일하여 동족의 아픔을 덮어 주는 일이다 하고 세상을 떠났다. 이때부터 한은 흥성 하야 번한王이 영토를 회복할 틈은 나지 아니하였다. 한은 국내 정세가 안정되니 四 方面의 적들을 공격하여 국경 멀리 구축하는 원정에 착수하였다. 한나라 효경 왕은 남방의 월남을 공격하여 영토를 확장하고 국경을 늘리고 동월을 공격하여 멸하고 北으로 흉노를 정벌하여 흉노를 멀리 쫓고 방책을 강화하고 東으로 번조선을 공격하였으니 우거왕의 반격에 부딪쳐 후퇴하였다. (是時漢方南?兩越東擊朝鮮北逐匈奴西戌大宛中國多事) 한서에서 말한 서술대완은 치뱃트를 이름인지 알 수 없음. 한은 三方에서 成功을 거두었으나 조선에서는 실패하였다. 한 왕은 번 조선의 우거왕에게 한나라의 봉작으로 조선王을 봉하고 중원의 한나라 열국으로 후원하겠다는 회유책을 썼으나 우거왕은 나는 조선帝國의 臣下라 한王이 어찌 이같이 무레하뇨 하였다.

 

다시 한무왕에 이르러 東으로 우거王에 대한 회유와 위협은 계속 되었다. 우거왕은 한나라의 강력한 방위망으로 西土의 확장 회복은 불가능이었다. 한무왕은 국세를 확장하여 국력을 키우려고 동으로 국토 확장을 꾀하였다. 그것은 곧 또 동이 족의 내란으로 발전하였다. 밀고 밀리는 전쟁이 계속되었다. 한무왕은 이때를 기회로 번조선 정벌을 위한 준비를 서서히 착수하였다. 漢은 진족뿐 아니라 중원의 수많은 종족과 파촉의 남만까지 同化하여 이제는 강력한 대국민족으로 성장하였다. 무왕은 北으로 흉노를 공격하여 그 세를 동·서로 갈라서 약화시키고 고조이래 흉노국 선우에게 바치는 조공도 중지하고 선우王에게 첩실로 바치는 한왕의 공주도 헌상을 중지하고 흉노왕의 문책 침입에 대항하는 등 한족의 오랜 수치를 설욕하고 이제는 東으로 눈을 돌려 동이 족의 분열로 와해 상태에 있는 단군 제국의 중원 동북 일대 열국의 분리 공략에 나섰다. 우선 동방의 조선 제국 열후들을 유혹하여 번 조선을 돕지 못하도록 하기 위하여 사자의 내왕이 있어야 하는데 우거왕이 요소에 경비병을 배치하여 막고 해로도 봉쇄하여 전혀 손을 쓸 수가 없었다.

 

무왕은 백관을 모아 의논 끝에 우거王의 배후인 요동에 한 개의 교두보를 확보하여 장차 있을 수 있는 조선 제국의 지원군을 차단하고 겸하여 우거王의 배후를 위협하는 세력을 만들고자 요동에 출병하였다. 그러나 뜻밖에 강력한 고구려 군의 출현으로 격퇴 당하였다. 때에 고구려는 중원 故土 회복을 노려 군비에 힘쓰고 있는 중에 뜻밖에 漢寇의 침입을 맞았다. 한무왕은 고구려와 十年동안 거침없이 발해 지경에서 싸우다 고구려와 부여 해모수의 뒤를 이은 大고구려에게 패 하였다. 그곳을 한나라 영토로 만들어 번 조선 정복의 기지를 만들고자 함이다. 그리하여 大軍을 파견하여 그곳 동이 족을 정복하고 창해군(蒼海郡)을 설치하였으나, 반란이 계속 되고 근접한 연 나라와 제나라도 소동이 일어나고 고구려가 공격 해 오고 하여 막대한 소모전을 감당할 수 없어(相公) 공손홍의 간하는 청을 들어 철수하고 말았다.(公孫弘數諫以危罷弊中國以奉無用之地願罷之∼上乃許之春罷蒼海郡) 무왕은 이 전쟁에 패전하여 막대한 피해를 입었으니 그 실상인 즉, 팽오(彭吳)를 대장으로 한 二十余萬의 군사를 동원하여 전장에 나가서 적을 죽이고 포로 한자에게는 큰상을 준다 하고 거기에 그러한 공로자에게 지급한 황금이 十余萬金이고 한나라 군사의 전사자가 十余萬名이며 군수물자와 선박 등의 비용도 이에 못지 않다고 하였다. (是時漢比歲金十余萬斤而漢軍死士馬者十余萬兵甲輾漕之費不與焉, 通典) 무왕은 바닥난 재정을 메우기 위하여 관직을 대량 매관, 매작 하고 무공을 뽐내고자 욕심을 부리다가 나라가 위태로운 지경에 이르렀다.

 

(武帝之志荒矣豈非, 多欲之爲累裁通典) 이 전쟁에서 부여 해모수王은 중도에 서거하고 고구려는 승리를 거두었으나 역시 국력 소모도 심대하여 大부여국의 쇠태를 가져왔다. 고구려도 주몽황제의 고리국 故土 회복의 大望을 이루지 못한 상태였다. 주몽황제는 창해 전역에서 승리하였으나 그해 四十年治世를 마감하고 六十二세에 세상을 떠나니 중원 공략도 중단되고 만 것이다. 周夢 天王 四十治年 漢元朔 三年 BC 138年이다. 무왕은 무수히 宮女를 두었다.(武帝多取好女至數千人嗔後宮通典)무왕은 好武功名하여 무공을 좋아하고 욕심이 많아서 수천 명의 후궁을 두었다고 한다. 그가 정복한 四方의 미녀들은 모조리 잡아다가 후궁으로 가두어 두고 공신들에게 나누어주는 일도 없었다.무왕이 창해군에서 고구려에게 패하고 철수한 것은 고구려 건국年代를 가리는데 중요한 자료이다. 또 광계토 大王비문에 왜(倭)가 대방(帶方) 경계에 칩입했다.

 

   *帶方郡 位置圖
 

비문에 기재된 지명과 같이 대방군은 한말에 처음으로 설치되었다고 건안중의 여러 사기에 보이며 비문에 이르기를 왜가 대방지역 경계에 출몰하였다는 것으로 보아 알 수 있고 好太王이 백제, 신라 등 나라를 관활하고 숙진을 열병하고 왜놈을 소탕하였으며 위세가 삼한을 덮었다는 것은 반드시 증거이다. 한의 건안시대가 광개토太王 시대이니 한의 헌왕이 고구려의 영낙 연호를 중지하고 건안 연호를 썼든 시대라 약 180年을 이와 같이 고구려 年紀가 축소된 것은 확실하다. 七百余年이란 역사 기록은 오류가 분명하며 九00年 전후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이상 추측컨대 김부식의 三국사기에 역년을 감축한 것은 서한 말기 애왕(哀王) 평왕(平王)시절 고구려가 중원의 대부분을 점령하고 위세를 떨쳤던 역사 기록을 유사에서 빼 버리고 없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아예 그 시대는 고구려가 없었던 것으로 하여, 건국 연대를 낮추어서 기록하고 五胡 十六國 시절을 전후한 고구려 전성 시대 고구려가 중원 北부를 석권하여 당시 중원은 비록 한 시대적이기는 하나, 고구려 연기를 중원 열국이 사용했을 정도로 고구려의 위세가 중원을 호령하였다는 중국 측 기록도 있는데도, 후세 당나라의 위조한 사기에 나오는 고구려를 비하한 기록을 채택하여 고구려와 중원 북부 열국 즉 연(燕) 위(魏) 조(趙) 진(秦) 등 十六국 시절, 고구려와 옆에 있는 열국들과의 교류를 모두 고구려가 그들 나라에 조공했다고 당나라 시절 편찬한 사기를 그대로 옮겨 쓴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이며, 당나라 이전 당대(當代) 기록과 다른 것은 그 당시의 기록이 특별한 모순이나 하자가 없는 한 후대에 와서 기술한 것보다 신빙성이 있다고 인정하는 것이 틀리지 아니 할 것이며, 굳이 후세 기록을 채택하고 또 三國史記를 저술할 당시는 우리 나라 고사(古史)서 神秘集古朝仙秘詞大辯說朝代記周南逸土記誌公記表訓三聖秘記安含老三聖記元童仲三聖記道證記智異聖母河沙良訓修撰余所一白余券動天錦魔風錄通天錄中錄 地華錄 道銑漢都識圓史太白逸史 등등 古史가 있어 충분히 우리나라 正史를 편찬할 수 있었을 것인데 이러한 참고 서적을 전부 배제하고 왜곡되고 위조한 흔적을 충분히 감지할 수 있는 당서 계통 사서를 그대로 가져다 쓴 것은 무슨 이유일까? 어찌 보면 그렇게 씀으로서 오늘날까지 三國史記가 폐절 되지 아니하고 남아 있을 수 있었는지 모른다고 생각되기도 하다. 우리 나라의 古代 正史 古代史 類雜記등이 없어진 경위는 唐의 고구려 침입 朝鮮時代 太宗의 古史수거 임진왜란에 약탈, 소각, 倭政時代 소위 明治王의 칙영에 의한 史書약탈, 서운각 소장古史의 日本史學者 今西龍의 약탈 소각 등으로 모두 수거 소각되어 오늘날 정사 편찬이 극히 어려운 상태에 이르렀다.

 

대단군제국이 개국이래 아세아 대륙의 중요 지역에 군림하고 문화의 기초를 뿌리 박은 우리의 正史를 비록 삐뚤어지고 축소되고 하였으나, 멸망하지 아니하고 이와 같이 남아서 활기를 찾고 있는 민족의 저력은 후세 자손에 희망을 안겨 주어야 할 것이다.

三國史記를 쓸 적에 어떤 이유가 있었는지 지금 와서는 알 수 없는 일이나 더욱이 우리 나라 고사는 일체 채택하지 아니하였으니 그 어떤 압력에 의한 저술임은 추측되나 무어라 단정할 수 없는 것이다. 당이세민은 한림원을 창설하여 박사들을 모아 본격적 역사 위조 사업을 강행한 자로서 그의 北적출신 횡폭한 성질은 누구도 그의 뜻을 거슬리지 못하였다.

 

唐 末 중국 사학자도 이러한 그의 행위를 인군 된 자가 춘추 대의를 모르면 가장 나쁜 것이다. 라는 말을 반드시 듣게 되는 것인즉, 당(唐)은 집안 법도도 없고 당 태종은 악(惡)의 우두머리다. (故曰爲人君父而不知春秋之義者必蒙首惡之名唐世無家法由太宗首惡也痛鑑)라고 비난하였다. 그는 漢族을 지배함에 있어서 포악 적이었다. 당태종 이세민은 수양왕을 섬기면서 그의 방자 무례함을 많이 본받은 것 같다. 수서에 고구려가 수나라와 전쟁에서 이겨 수나라 군사 三十만이 몰사하니 수나라에 사죄하고 조공을 바쳤다고 사실을 완전 전도하였는데 후세 당이 고구려에 패하여 백만 대군을 요동에서 잃고 당 태종은 九사 一생으로 도주하였는데, 여기서도 고구려가 使者를 보내어 잘못했다 사과하고 조공을 받쳤다고 하였다.

 

당 태종은 그가 수나라를 이어 당나라王에서 황제로 자칭하고 三년 七月에 요동의 고구려의 승전 경관(景觀)부터 파괴하는 일부터 시작한 철저한 고구려에 대해 원한을 품은 자이 였다. 지금 우리 나라 古代 正史가 국내에는 없어도 침략자들이 소각하고, 남은 일부가 일본이나 중국에 반드시 있을 것으로 추측되나 이것을 찾을 국력이 우리에게는 아직 없다. 그렇다고 식민 사학적이라고 보여지는 부분이 아직도 남아 있는 교과서는 조속히 시정하여 후세 국민에게 역사관의 오착이 없도록 하는 것은 미룰 수 없는 과제라고 생각된다. 삼국 사기에서 보여지는 고구려와 백제의 건국年代 축소는 그것이 그 연대 축소에 그치는 것이 아니고 그로 인한 역사 전체에 미치는 영향도 큰 것이며 역사 年紀를 낮추어서 그 시대 史記를 빼 버린 것으로 당을 숭상하는 당 문학자의 비위에 맞추었다. 우리나라 사기를 기록하면서 황제, 황조, 天子 등의 존칭을 일체 쓰지 아니하고 신라가 황제 天子 등의 칭호를 중단한 것을 잘한 일이라고 칭찬하였으며 요동을 회복코자 하는 세력을 반동분자로 지목하는 등 당나라를 숭상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왜정이 金泉市 南面 所在 옛 감문국 사찰 三층 석탑에 天官 十七年 戊戌에 세웠다는 碑文에 敬信大王 生母 朴氏를 照文皇太后라 기록되어 있다. 그것은 皇帝칭호를 쓰고 故土회복을 꿈꾸고 있는 세력이 남아 있었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大王, 太王 등의 호칭은 황제와 동격으로 쓰여졌다.

 

신라 高句麗人의 詩文을 당나라 학자들이 皇帝 天子 등의 문구를 빼고 임의로 문장 문구를 만들어 맞추고 元나라에서 우리 나라에 대하여 皇帝, 皇朝, 天子 등의 호칭을 못하게 했다는 기록 등으로 보아 고려 시대까지는 우리 나라에서도 中國과 同一한 호칭을 했다고 보여지며 모든 서적에 皇帝 칭호를 없앤 것은 李朝시대 들어와서 부터이다. 여기 중국의 호칭에 대하여 알아 둘 필요가 있다. 중국이란 한족이 그들의 나라가 중원의 중심지다 라는 자존심으로 중국이라는 대명사를종종 쓴 것이고, 그것을 나라 이름으로 쓴 것은 요즘와서 생긴 일이다. 한무왕이 집권 초기 번 조선을 치기 위하여 팽오를 보내어 예맥을 (후한서에 高句麗一名貊耳, 고구려는 一名맥이라고도 한다 하였다.) 치고 창해 군을 조선에 설치하였더니 이웃 연 나라와 제나라가 소동이 벌어졌다 라고 한나라 사기 식화지에 기록되어 있고 (武帝卽位數年彭吳察濊貊朝鮮置滄海之郡則燕齋之間?然 騷動) 또 후한서에 한무왕 원삭, 원년에 예君 남녀가 번조선 우거王을 반하고 二十八萬口를 이끌고 요동에서 漢에 항복하여 그 땅에 창해 군을 설치했다고 기록하고 그 후 창해 군을 파(철수)했다고 했으니 이와 같이 약 十年간을 뺏고 빼앗기는 혈투를 하다가 종국에 파했다고 호도 한 것이다. 더욱이 한무왕은 국가 재정이 파탄에 이르러 전쟁을 계속할 수 없었음을 명백히 하고 있다.

 

이와 같은 무왕집권 초기의 조한(朝漢)大戰은 한 고왕 후기의 초한(楚漢)七年 전쟁보다 못하지 않는 대전쟁 이였음에도 불구하고 한나라 사기는 그 내용을 자세히 기록하지 아니하고 그 결과를 창해 군을 파했다고(철수) 간단하게 기록하고 우리 국사의 기본 역사로서 간주하고 있는三國史記는 이와 같은 역사적 大 사건을 아예 기록하지 아니하였다. 또 전기한 예의 군후 남여(南呂)가 우거王을 배반하고 요동에서 한에 투항하여 二十八만 가구를 요동에서 창해군을 설치했다 하였으니 그 당시 二十八만 가구는 당시 조선반도 전체인구 보다도 많았을 것이고 우거왕국 번조선 인구에 비할 만큼 많았을 것임에 단군 제국 열후중에서도 큰 비중을 차지한 열후였을 것으로 추측되며 예국 군후가 투항한 경위의 기록이 없고 전쟁으로 정복한 흔적도 없으니 필연코 물심 양면으로 희유 혁박 병탄한 것으로 보이며 그것은 곧 우거왕 정벌에 나설수 있다고 한무왕이 판단을 내린 원인이 되었고 창해군을 설치하고 우거왕의 번조선을 정복하고 동방제국 조선의 중원 진출을 완전 봉쇄해 버릴 정책을 수행하는 계기로 삼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