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역사 침탈(侵奪)

BC 28세기 요하문명의 濊貊族이 남하 하여 夏, 商, 周를 건국하면서 황하문명을 일구었으며, 鮮卑族이 秦, 漢, 隨, 唐을 건국했습니다. - 기본주제 참조

홍익인간·인류공영/환단고기·한민족역사

20. 漢武王의 번조선 侵攻과 우거王의 抗戰

자연정화 2013. 8. 24. 12:35

  二十. 漢武王의 번조선 侵攻과 우거王의 抗戰
 

王은 전군에 동원령을 내렸다. 번조선을 도울 우군이 없다고 판단함이다. 제一선에는 燕과 齊에서 징발한 지난날의 전쟁 포로(주로 동이족)를 앞장세워 번조선 국경 요새를 격파하여 大軍의 진로를 개척하였으나(포로군은 이것을 한나라는 죄수軍이라 하였음.) 그들은 초전격돌 수개월간에 전멸하였다. 무왕은 초전에 패하고 다시 군사를 증모하여 그해 가을 二十萬大軍을 일으켜 출사할 새 누선 장군 양복(樓船將軍 楊僕)으로 하여금 軍士 五萬을 주어 齊나라로부터 발해로 나아가 조선군의 뒷면을 공격하라 하고, 좌장군 순체(左將軍旬)에게 軍士 五萬을 주어 山東으로 나아가 왕검 성을 공격하라 하고, 武王은 스스로 中軍을 이끌고 요하西江으로 나아갔다. 이에 우거王은 무왕이 군사를 이끌고 三路로 진격 해 온다는 급보를 받고 大臣과 將軍들을 모아 兵事를 의논하였다. 우거王은 말하기를 무도한 무왕이 이름 없는 군사를 일으켜 우리 나라를 침범하니 이를 물리칠 방략을 수립하자 하고 군사를 나누어 험지 요새에 웅거하여 나가서 싸우지 말고 지키고 있다가 적이 접근하거든 방위하여 공격하되 출격하지 말라 하였다. 그것은 적은 兵力으로 大軍을 막는 방법이고 敵은 병력 보충을 무한정 할 수 있으나 아군은 그것이 여의치 못한 탓이다. 한 군은 요동으로 진격하였다. 우거王은 백관 장수들을 격려하고 우리는 이미 방위책을 마련하였거니와 분신 쇄골 대단군 天王이래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소중한 영토를 사수하기 바라오 하였다.  
 

때에 한 군의 선봉 부대는 죄수 부대를 선두로 파도와 같이 밀려들어 방책을 부수고 국경을 넘어 난입하였다. 이들은 물러서면 죽이는 운명의 죄수였다. 조선군은 第 二방벽으로 진격해 오는 노변 험지에 이미 복병하고 기다리다가 측면공격을 하고 후퇴하던 부대가 돌아서 협공하니 초전에 승승 돌진해 오던 한 군은 중간에서 포위되어 전멸되었다. 무왕은 의기양양 승전을 뽐내고 저 中軍장중에서 諸將을 독전하다가 무참한 패배를 당하고 조선 군의 역습이 두려워 좌우 신하들의 권유를 들어 함양으로 돌아갔다. 한무王은 이것을 체험으로 죽을 때까지 두 번 다시 요동 원정에 나서지 아니하였다. 그는 신중하여 약수를 건너지 아니 하였음으로 무사하였다. 그러나 번조선王의 항복을 받지 못하면 一生 一代의 수치일 뿐 아니라 그의 호칭과 같이 武왕의 명성을 잃으면 연 나라 백성과 진 나라 백성 등 여러 이민족 열국의 반란을 불러 올 것임으로, 국력을 기울여 우거王 정벌에 전념하였다. 요서에 침공해 온 한나라 좌장군 순체는 朝鮮군의 방위 성채를 공격 함락시켜 주민을 약탈하는 등 행패가 극심하였다.  
 

한나라 군사들은 풍요로운 식량과 호화로운 의복을 보고 황홀한 딴 세상을 본 듯 닥치는 대로 약탈을 자행하여 미처 피난 가지 못한 주민의 피해는 헤아릴 수 없었다.한나라의 지휘관들도 동이국은 군자국이라고 들은 바는 있으나 이와 같은 문명국 인줄은 미처 몰랐다. 사병들이 딴 세상에 온 듯 약탈하고 설치는 것을 막을 수도 없었다. 조선 군은 점령당하지 않는 지역의 주민들을 피난케하고 미처 운반하지 못한 식량 의복은 불사르고 병력을 북해에 있는 도도국(陶塗國, 번조선 제후국)을 중심으로 집결하여 험지를 先占웅거하고 浿水를 엄수하여 보급로를 확보하고 도도국 병력은 해로를 막고 우거군은 육로를 막고 나오지 아니하고, 응전 하지 아니하고, 지키고 있으니 한나라 군사는 왕검성으로 갈 수가 없었다. 이러하니 누선장군 양복의 수육 十萬병력으로 단독 왕검성을 공격하다가 선발로 성하에 도착한 齊나라 군사 七千名은 성밖에 매복한 조선군의 기습으로 전멸 당하고 양복의 후속 부대도 우거왕이 독전하는 조선 군에게 대패하고 전군이 지리멸렬하여 겨우 五十군을 이끌고 산골짝으로 피하다가 난데없이 복병이 내달아 저기 오랑캐의 대장을 잡으라 하고 소리치며 달려드니 양복이 혼비백산하여 달아날 곳을 찾으나 앞·뒤로 포위되어 갈곳이 없었다.  
 

그러자 누가 와서 장군은 소장의 뒤를 따르소서 하며 앞을 막아섰다. 양복의 심복 부장이었다. 그리하여 대모를 휘두르며 포위망을 뚫고 혈로를 개척하며 나가니 十여기가 겨우 뒤를 따랐다. 부장은 쫓는 조선 군을 가로막고 사투하다 기진맥진하여 쓰러져 어육이 되었다. 양복은 종자 數名과 함께 말을 버리고 山上으로 숨어서 생명을 보전하였다.
 

한편 좌장군 순체가 이끄는 요동 군은 왕검 성 城下에서 기다리며 고전하는 양복 장군에게 가는 길을 뚫을 수가 없으니 무왕의 죄책이 두려운지라 수하 동이족 장군 정다에게 一지군을 주어 선두에서 조선군 방위채를 파하지 못하면 군법으로 다스린다 하고 양복은 후원군을 지휘하여 조선군을 강공하다가 군사의 태반을 잃고 패퇴하였다. 좌장군 순체는 선발 대장 정다에게 패전의 책임을 덮어씌워 처형하였다. 이와 같이 전력을 상실한 순체는 패잔병을 거두어 조선 군의 추격을 피하여 야음을 타서 국경 패수를 넘어 퇴각하였다. 그리고 누선 장군 양복은 산중에서 十여일 을 숨어 있다가 조선 군이 성중으로 철수한 후 九死一生으로 하산하였다. 조선 군은 한나라 총수가 산중으로 도주하여 十日이 넘도록 하산하지 아니하고 四方으로 찾아도 찾지 못하니 굶어 죽었다고 단정하고 철수하였다.(王 右渠城守窺知樓船軍昭卽出城擊樓船軍敗散遁山中十余日稍求退散卒復聚左將軍擊朝鮮浿水西軍未能波, 漢書鑑記)  
 

좌장군도 패수가에서 조선군과 싸워 또 패하고 패잔군을 수습하니 살아남은 자 만 명에도 미치지 못하였다. 이에 멀리 조선군을 피하여 국경 넘어 퇴각하여 진을 치고 무왕에게 패전을 고하고 패전에 원인이 좌장군 순채의 지원군이 오지 아니하여 실패하였다고 하였다.
 

한무왕은 조선 원정군이 一派로 선봉군이 몰패하고 二次로 出戰 大軍 全員이 패귀하니 분을 참지 못하여 大小臣僚를 召集하여 선후 책을 의논하니 신료들의 의견이 화전 양론으로 의논이 분분하였다. 내가 傾國之兵을 일으켜 기필코 조선王 우거를 파하고자 하니 누가 총대장에 합당하뇨 하였다. 이에 대신들이 일제히 그것은 불가하다고 간하였다. 우리가 이번 전쟁에서 패하였다 하여도, 조선王이 한나라를 얕보고 출병 침입하는 망동은 결코 하지 아니할 것이옵니다. 그냥 내버려두어도 조선 왕이 그 행동을 삼갈 것인즉 폐하의 위엄이 손상되지 아니하옵니다. 또 말하기를 한나라가 경국지병을 일으켜 조선 열후국의 하나인 우거王을 파멸했다고 하여 폐하의 위엄에 보탬이 되지 아니하옵고 지금 흉노가 조용하오나 폐하께서 공주를 단우에게 보내 주지 아니한데 한을 품고 있사오니 그가 언제 변할지 예측 할 수 없사오니 국가 전군을 동원하여 우거王을 치는 것은 자칫 대화를 자초하는 일이오니 깊이 살펴 주시옵소서 하였다. 무왕 가라대 大臣들의 충간은 이해할 수 있으나 짐이 이미 원정 대군을 잃고 이대로 앉아 있으면 백성들이 원망할 것이니 어찌 한을 풀지 않으리요 하니, 상국이 아뢰었다. 신에게 한 계교가 있사옵니다 하였다. 그것이 무엇인지 말해 보라 하였다.
 

지금 형세는 우리가 싸우면 불리합니다. 그것은 조선 동이족은 용역 표간하여 지난날 진시왕을 살신 공격한 사람이 모두 동이족이 였습니다. 그들은 지금 전쟁에 이겨서 기세 등등하고 아군은 패하여 의기소침하니 싸움을 피하고 다만 좌장군 순체와 누선 장군 양복은 소수의 군사를 이끌고 진퇴 양난에 빠져 있사오니 병역을 원상 보충케 한 후 별도로 十萬의 지원군을 보내어 적을 위축케 하는 위세를 과시하며 항복을 종용하고 수만 금을 던져 우거왕의 장상을 매수하는 장기 정책을 쓰면 적을 가히 피할 수 있사오니 병마로 다투는 일은 결코 해서는 아니되옵니다 하였다. 이에 무왕 가라대, 적을 휘유 하는데 어찌 그러한 거금을 쓸 것이며 성공하지 못하면 국고만 큰 손실을 입는 것이로다 하였다. 상국이 다시 아뢰었다. 지금 대군으로 승부를 다투면 몇십 배의 전비가 드는 것이 온데 어찌 기만 금을 아끼오리까 한 군중에는 연 나라의 동이 족이 상당수 있사옵니다. 그들 중에 우거王의 좌우 신료와 친교 있는 者 있사오니 쓸모 있는 인물을 골라 회유하면 반드시 성공할 것이옵니다 하니, 여러 大臣들이 그것이 상책이라 하여 권하였다. 무도 역시 군사로서 번 조선을 파하기 어렵고 다른 조선 열후의 동향 또한 헤아릴 수 없는 불덩이니 그 계책을 따르기로 하였다. 
 

무왕은 영을 내려 二十萬병력을 다시 증발하고 열국에 명하여 치중을 맞게 한 후 백만 대군이라 허장 성세하야 요동으로 진격하였다. 이 소식이 요동에 전해지니 왕검 성의 백성들도 불안하여 험독을 버리고 요하를 건너 만주로 피난가는 자가 무수하였다. 우거王은 백관을 모아 의논한 결과 중과 부족이니 싸워서 불리 할 것임으로, 왕검 성을 더욱 보강하여 성 외곽 험지 요소 요소에 방채를 만들어 왕검 성에 접근을 어렵게 하고 나가서 싸우지 아니 하면 적은 大軍이라 수천리 운량에 적의 허점이 들어 날것이니, 때를 가려 공격하면 두려울 것이 없다 하여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그리고 왕검 성에는 삼년의 양식을 비축하고 도도국 도 의로운 도읍이 수십만중 大軍을 막아내기는 중과 부적이고, 더욱이 왕검 성이 수성 일변도로 접전을 회피 할 것임으로 밖으로 지원을 받을 길이 없으니, 도성을 폐하고 관민이 모두 요동 동역으로 본거지를 옮겼다. 도도국(陶塗)이란 지금의 진 황도로서 번 조선의 위성국이니 한서에 國陶塗國名也本 出兵國以爲名이라 하여 도도(陶塗)는 이 도읍이다. 여기서 도도국 太守를 고리 국에서 후퇴한 고두막한 (高豆莫汗)이 아닌가 한다. 한 군이 요동으로 다시 대거 침입하여 좌장군 순체와 누선 장군 양복이 다시 군사를 보충하여 옛 위풍을 갖추었다.  
 

한편 무왕의 특파 장군 위산은 수만금의 금폐를 가지고 군사를 이끌고 와서 패전한 두 장군을 격려하고 지난 패전을 검토한 후, 지난 경험에 비추어 도도국을 점령하지 않고는 왕검 성을 칠 수 없음을 깨닫고 전군이 도도 국으로 진격하니, 이미 폐허가 되어 둔병할 곳이 없는지라 골짜기에 진을 치고 왕검 성으로 향할 준비를 하였다. 이때 도도국 태수 고두막(가상)은 패수강서변에 일지 군을 매복해 두고 한군의 동정을 살피고 있었고 한군은조선 군이 멀리 달아났다고 안심하고 원로의 피로를 풀기 위하여 무장을 풀고 휴식에 들어갔다. 고두막한은 야음을 틈타 한군진지 가까이 병력을 집중하여 새벽녘에 일제히 하산하여 한군 진지에 돌진하여 닥치는 대로 휘두르는 창검 아래 한 군은 미처 피할 겨를도 없이 몰 죽음을 당하였다. 조선 군은 한군 선봉을 섬멸하고 그 진지 방책을 모조리 불태우고 퇴각하였다.  
 

한 군이 변고를 듣고 후속 대군이 도착했을 때에는 조선 군은 이미 섬을 건너고 있었다. 지난번에 좌장군의 전군이 몰패를 당하고 이번 다시 출병한 선봉군이 전멸함으로서 한 군은 고두막한을 신병(神兵)이라 두려워하였다. 한편 좌장군 순체와 누선 장군 양복도 왕검성하에 진을 치고 위산(衛山)도 대군을 왕검성 가까이 이끌고 나아가 시위를 하며 싸움을 돋구지는 아니하였다. 위산은 믿을 만한 동이 출신 장군 한사람을 자신의 장막으로 불러서 위산은 말을 끝냈다. 내가 황제 폐하의 어명을 받고 대군을 인솔하고 이곳에 와서 싸움을 주저하고 있는 것은 무고한 생명의 무한한 희생을 피할 길을 생각하고 있슴이다. 지난날의 이곳 싸움에서 수십만 생명을 잃었으나 이번 싸움에 백만 대군을 우거王이 어찌 항거 할 것이냐 성이 한 번 파하면 성중의 백만 군민은 씨를 말릴 것인즉 어찌 두렵지 아니하랴. 이러한 비극을 피하는 것은 항복하여 명예와 생명을 보전하는 일이라 지금 우거王이 미옥하여 끝까지 한王 폐하의 화해를 거부하니 그의 주위 장상을 달래어 항복케하면 그 공노에 따라 후작을 내리어 자손 대대로 영광을 누리게 할 것이니 그대는 왕검 성에 들어가 그들을 옛정으로 이해를 들어 설득하여 성공하면 그대 또한 열후의 봉작을 내릴 것이니 성심을 다하여 이일을 성공케하라. 하고 수만 금을 주어 성중으로 보내고 그대 가솔은 내가 보호하여 그대가 성공하고 돌아오도록 기다릴 것이라 하고 가족을 인질 하여 딴마음을 품지 못하게 하였다. 
 

그러나 왕검 성에 잠입하는 기회는 쉽게 오지 아니하였다. 한편 위산은 사자를 시켜우거王에게 대화를 청하였다. 그리하여 성 가까이 나아가 마상에서 기다리니 우거왕이 제신을 거느리고 성누에 나타나서 위산을 보고 외쳤다. 그대는 군사를 이끌고 왔으면 싸울 것이고 싸움이 두려우면 물러갈 것이지 무왕의 말을 전하겠다고 하니 무슨 수작이요 하고 꾸짖었다. 이에 위산은 머리를 굽혀 예를 올린 후 말하였다. 소장이 오래 전부터 大王의 고매한 위명을 듣자옵고 이제 황제 폐하의 어명을 받들려 이곳에 와서 옥안을 우러러 뵈오니 영광이옵니다. 하고 이어 말하였다. 지금 한 황제께옵서는 거듭되는 전화로 도탄에 빠진 만백성의 고초를 더는 것은 양국이 화친하여 친목을 이루는 것이라 믿으시고 신을 사자로 이곳에 보내시었습니다. 太王께서는 皇帝폐하의 존의를 이해하시고 화친의 約을 맺도록 허락해 주시옵소서 하였다.  

우거王이 물었다. 당초 이 전쟁은 한王이 시작한 것이다. 이제 싸움을 그만두고 어떠한 화친을 하겠다는 것이냐? 하였다. 위산이 답하기를 지금 무제 폐하께서는 조선 국과 교통을 트고 산물을 교역하며 친선을 맺고자 하는 것이지 다른 뜻이 없사옵니다. 大王께서 끝까지 들어주지 아니하면 부득이 군사로서 결단을 내리려고 신으로 하여금 백만 군을 이끌고 이에 이르게 하였사옵니다. 황공하오나 大王의 소수 군사로서 끝까지 겨루고자 하는 것은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격이옵니다. 大王은 군사는 十萬에도 미치지 못하고 백성은 백만에 미치지 못하온데 싸워서 줄어드는 국력은 무엇으로 채울 것이옵니까. 곧 바로 양측이 모여 앉자 화의(和議)를 의논토록 허락해 주시옵소서 하였다. 우거王이 말하였다. 나의 군사는 충정 용맹하여 一당百으로 百萬大軍도 두려울 것이 없다. 다만 무고한 생명을 구하고자 하는 마음에는 변함이 없다. 그대의 전하는 말이 한 왕의 진심이라면 의논해 보리라 하고 양자의 和議가 열렸다. 의제와 조건은 대화에서 이미 양해된 것이니 그 실천 방안이 의제였다. 이에 우거왕의 인준서를 가지고 직접 태자가 가지고 가서 무왕 한테 인준을 받는다는 것으로 의견을 모았다. 우거王의 입조칭신(入朝稱臣)하는 것이 아님으로 王은 이를 허락하였다.  
 

따라서 우거王은 太子로 하여금 步騎一萬을 점검하여 대동케 하고 만일에 대비하여 군량치 중운반병 五千을 달게 하여 함양으로 무왕을 만나러 출발토록 하였다. 太子가 군사를 이끌고 패수를 건너려고 하니 使者 衛三과 左將軍 楊璞은 의논하였다. 太子가 정병 萬여명을 이끌고 황제 폐하를 배알하겠다고 하니 위험한 일이라 무슨 변란이 일어나면 어찌 할 것이냐? 폐하의 노여움을 살지도 모르는 일이고 저들이 군사를 이끌고 가겠다고 하는 것은 항복을 끝내 거부하고 황제 폐하와 대등함을 과시하는 것이니, 우리는 죄책을 면하지 못할 것이라 여기서 제지해야 한다 하고, 太子에게 군사 대동을 말리었다. 처음부터 이들은 화의를 한다 하고 太子를 한 왕에게 보내어 항복의 서약을 하게 하고 무왕이 우거를 조선 왕에 봉한다는 봉작을 내린다는 수작이었다. 우거왕은 한무가 中原 三方에 이민족 추장들을 왕후로 봉작하여 변방을 지키는 정책을 쓰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럼으로 太子에게 정병을 거느리고 가서 회의 비준을 받되 항복하지 말라고 일렀던 것이다. 사자 위三이 太子에게 말하였다.  
 

太子께서는 이미 항복하였으니 군사는 여기 두고 종자만 데리고 가서 황제 폐하를 뵈옵소서 하였다. 이에 太子가 위三을 보고 꾸짖었다. 내가 화의를 위하여 한王을 보러 가는 것이지 항복하러 가는 것은 아니거늘 무슨 말이요. 한王은 흉노 단우에게는 조공을 바치고 왕녀를 헌상하면서 단군 조선 제국 天王에게는 조공을 받치지 아니하며 우리에게 군사로 위협하고 항복을 강요하니 어찌 화의(和議)를 바랄 수 있겠소, 내 그대의 목을 뵈어 경계코자 하나 양국간에 사자를 해치는 것은 우리 군자국에서는 아니하는 것임으로 그대를 살려 보내니 한王에게 가서 이대로 이르시오 하고 군사를 이 끌고 돌아왔다. 사태가 실패로 돌아가니 좌장군 양복은 본진으로 돌아가고 사자 위三은 함양으로 돌아가서 무왕에게 전후사를 고하였다. 
 

한무왕은 자초지종을 듣고는 大怒하여 너는 어찌하여 그와 같이 나라의 위신을 떨어뜨리고 무슨 낯으로 죽지 않고 나를 보러 왔느냐 하고 좌우를 호령하여 끌어내어 목을 뵈어라 명하였다. 무왕은 노여움이 가시지 아니하여 좌장군 양복도 죽이려고 양복을 소환하려 하니 좌우 대신들이 간하였다. 지금 양복을 잡아오면 원정군이 동요 할 것이고 부르면 양복은 위삼을 참한 것을 알고 있으니 변이 일어날까 두렵습니다. 그냥 두어 공을 이루도록 하옵소서 그가 전자에 패전하여 十만명의 군사를 잃고 이번 다시 실수를 저질렀으니 죽음을 무릅쓰고 공을 세워 죗값을 씻고자 할 것이옵니다 하였다. 그리고 諸臣들은 요동 출병으로 수천리 운량에 국력 소모가 막심하여 요동 군사를 罷할 것을 간하였으나 무왕이 불허하고 노함이 심하여 두 번 입밖에 내지 못하였다. 한나라 사기는 우거왕이 항복을 약속하고 太子가 군사를 이끌고 항복하러 나왔다고 했다. 항복을 하려면 太子를 무왕에게 보내서 볼모로 하고 (그 시대는 꼭 이렇게 하였다.) 항서를 바치고 적군 군문 앞에 나와 엎드려 비는 것이지 어찌 큰 군사를 이끌고 항복하러 갈 것인고 심한 조작이다. 
 

한무왕은 諸臣들에게 이르데 우리 大軍이 한낱 조선 열후를 파하지 못하고 거금으로 화의를 이루지 못하니 어찌하면 좋은가 하였다. 상국이 말하기를 위삼이 화의 진행을 그르쳐서 실패를 하였사오니 우거왕의 좌우 장상 몇 명을 통하여 환심을 샀다 하오니 불원 무슨 변고가 그들에게 있을 것으로 생각되오니 회의를 좀 기다림이 옳을까 하옵니다 하였다. 한편 왕검 성에서는 太子가 돌아와서 그들의 속임수를 말하고 일체 그들의 회의 제의에 응하지 않도록 하고 성곽을 철통같이 지키고 경계하니 한 군이 반년을 싸워도 아무런 성과를 거둘 수가 없었다.  
 

한 군은 연 나라에서 징모한 동이족 군사를 앞세워 공격을 강행하였으나 약간의 수성병을 격살하였으나 성병이 굳이 지키고 나오지 아니 하니 큰 성공을 거둘 수가 없고 연 나라서 징발한 조선 병은 강폭 무작하여 용감하나 다루기 어려웠다. 한 군은 여러 방법으로 攻城을 하여도 왕검성의 수비는 철통같아 어찌 할 수 없어 누선 장군은 군중에 영을 내려 수군(水軍)을 따로 편성하니 제(齊) 나라의 조선 족이 주력을 이루었다. 그리하여 수중으로 잠행하여 방책을 급습 파괴하고 수군을 동원하여 성벽으로 오르게 하여 기습 공격을 강행하였다. 그러나 공격에 가담한 수군은 강변 험지에 진치고 있는 조선 군과 성상에서 쏟아 대는 화살에 포위되어 한사람도 살아 돌아오지 못하였다. 누선 장군은 또 萬여兵을 잃고 수심에 잠겨 있는데 좌장군 순체가 사람을 보내어 날을 받아 合力하여 총공격을 하자고 통지가 왔다. 그러나 누선 장군 양복은 자신이 없었다. 왕검 성의 철통같은 방비를 뚫으라고 하면 병력만 소모 할 뿐 무모한 공격은 얻을 것이 없다고 판단하였다. 그리고 성중에 한장수가 전일 공작한 매수 작전으로 암암리에 투항해 왔다. 그리하여 그 장수를 성중에 있으면서 수시 연락하도록 성중으로 다시 돌려보내고 성공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럼으로 좌장군의 제의를 알겠다고 간단히 일러서 사자를 돌러 보냈다. 한편 한왕무는 요동 출병으로 국비는 과중하고 一년이 다되도록 왕검 성은 파하지 못하니 초조하였다. 그리고 좌장군 순체와 누선 장군 양복의 번갈아 올리는 전항보고는 서로 상치하여 협력이 안된다고 판단하였다.  
 

무왕은 백관을 소집하여 말하였다. 요동에 출전中인 좌장군 순체와 누선 장군 양복이 서로 다투어 협력하지 아니함으로 병력만 무수히 잃고 아무런 성공을 거두지 못하니 어찌하면 좋겠소 하였다. 한 대신이 아뢰었다. 그 두 사람을 통제할 칙사를 보내서 협력토록 해야 하옵니다. 하였다. 그 일을 누구에게 맡게 할 것인가 하였다. 대신이 아뢰었다. 제남태수 공손수는 병법에 밝은 명장이옵니다. 공손수에게 절월을 주어 一군을 이끌고 가서 요동의 兩人 장군을 통제하여 攻城게 하오면 성공 할 것이옵니다 하였다. 이에 무왕은 제남태수 공손수(公孫遂)를 입조하라 일렀다. 공손수는 원래 동이 족으로 지난 초한 전쟁에서 봉해진 할아버지의 뒤를 이어 전공을 세운 功臣이었다. 입궐한 공손수에게 무왕은 전권을 주어 군사를 이끌고 요동에 가서 양장을 돕되 알아서 적절히 모든 군무를 처리하라 하였다. 무왕이 요동에 동등 품격의 두장수를 파견하는 것은 大軍을 한사람의 통제하에 두는 것은 반란의 위험이 있기에 그렇게 하는 것이고 무가 친정하여 양장을 통제하다가 무가 양장에게 군권을 같이 맡기고 돌아옴으로서 이러한 현상이 생겼다. 
 

공손수는 어명을 받고 군사를 거느리고 요동에 이르러 먼저 좌장군 순체를 만나 경과 보고를 들었다. 좌장군이 말하였다. 누선 장군이 여러 차례 나와 함께 작전을 세워 적을 치기로 약속하고도 지키지 아니하여 성공 할 수가 없었고, 그 뿐 아니라 사람을 왕검 성에 밀파하여 우거왕과 내통하고 있으니 필연코 조선 군과 짜고 우리를 격멸할 우려가 충분히 있사옵니다 하였다. 공손수가 들으니 一理가 있는 말이었다. 이에 사자에게 절월을 주어 누선 장군 양복은 좌장군 군막으로 오라 하였다. 양복은 순체의 막사로 공손수를 만나러 갔다. 공손수는 순체와 짜고 포졸을 배치하고 누선 장군의 수행 군사는 장막 밖에서 기다리게 하고 장막 안으로 들어오는 누선 장군을 직각 포박하였다. 공손수는 말하였다. 내가 어명을 받들어 그대의 반란죄를 물어 처형한다 하고, 변명의 여유를 주지 아니하고 처형해 버렸다. 그리하여 누선 장군의 군사는 모두 거두어 좌장군 순체의 휘하로 편입하였다. 누선 장군 양복은 일찍이 여러 차례 패전으로 대군을 잃고 무왕의 성품을 아는지라 언젠가는 죄를 물어 처형 될 것을 짐작하고 있었다. 우거왕에게 망명하여 순체를 공멸할 기회를 노리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되나 그 증거가 나타나기에 앞서 처형해 버렸다.  
 

공손수는 돌아가 무왕에게 결과 보고를 하였다. 무왕은 놀랐다. 순채에게 전군을 독단 위임해 버렸다. 무왕은 두말없이 공손수를 참하였다. 좌장군 순체가 반심을 품고 출정 대군을 이끌고 돌아오면 무왕은 감당하기 어려운 것이다. 그러나 공손수를 처형한다고 해서 위험이 살아지는 것은 아니라 한나라 조정은 침울한 공기가 감돌았다. 그것은 순체도 폐군과 무수한 병력을 손실한 허물이 있어 좌장군 순체도 어떤 생각을 할지 예측할 수 없는 것이였다. 순체는 전군을 총동원하여 왕검 성을 공격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