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역사 침탈(侵奪)

BC 28세기 요하문명의 濊貊族이 남하 하여 夏, 商, 周를 건국하면서 황하문명을 일구었으며, 鮮卑族이 秦, 漢, 隨, 唐을 건국했습니다. - 기본주제 참조

홍익인간·인류공영/환단고기·한민족역사

21. 변조선 王國의 반역자들이 우거왕을 弑害하고 漢에 투항

자연정화 2013. 8. 24. 12:42

二十一. 변조선 王國의 반역자들이 우거왕을 弑害하고 漢에 투항
 

세상 운명의 신은 너무나 무정한 것 같다. 물론 그것은 인재가 부른 불운이지만 우거왕의 大臣 相路人 相韓陰尼谿相參(국상노인 국상한음 니계상삼) 세 사람은 한王이 보낸 황금과 봉작의 유혹을 받고 항복의 기회를 노리던 中, 뜻밖에 누선 장군이 처형되고 우리 장군들이 동조하지 아니하니 항복을 못하고 기회를 보고 있었다. 하루는 大臣노인이 수성 장군 왕겹(王)을 찾아갔다 왕겹은 상국께서 어찌 여기까지 납시었습니까? 하고 물었다.  

 

노인이 말하였다. 금일 한 군의 공성(攻城)이 더욱 가열하여 많은 사상자가 난다기에 걱정이 되어 사정이 어찌한지 한 번 들렸습니다. 하고 전고를 위로하였다. 왕협이 말하였다. 요즘 와서 적의 공격이 극심하여 피아의 사상자가 많고 특히 적의 사상자는 몇 배 많사오니, 그 시체를 치우는 일도 없이 산적한 시체를 딛고 물 밀 듯이 들어오니 잠시만 마음놓아도 큰일날 지경이옵니다. 이제 一년이 넘도록 싸워서 무수한 인명을 잃고도 지칠 줄 모르고 성을 둘러싸고 있으니 소장이 평생을 戰場에서 살아왔으나 저같이 미련한 전쟁은 처음 보았습니다. 성을 치는 것은 한달 아니면 두달에 함락시키지 못하면 물러가서 다시 기회를 보는 것이 전법인데 一년이 넘어도 포위망을 풀지 않고 버티고 있으니, 이러한 전쟁은 전무후무한 일입니다. 하였다.
 

재상 路人이 가만히 있다가 물었다. 적이 그러하니 아군의 희생 또한 적지 아니하고 전비 또한 과다하여 나라와 백성들이 다 같이 고통을 겪고 있는데 이 전쟁이 계속되면 장차 어찌 될지 장군의 생각은 어떠하오 하였다. 왕겹이 말하였다. 지금 싸우고 그치는 것이 모두 무왕의 마음먹기에 있으니 그것을 누가 어찌 될지 장담 할 수 있사오리까. 다만 무왕도 이제 싸움에 지칠 터인즉 불원 포위를 풀고 돌아갈 것으로 보는 것이 저의 전장의 경험이옵니다 하였다. 이에 상노인이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말하였다. 지금 무왕은 조선과의 싸움에서 크게 패하고 함양으로 돌아가 그 수치를 씻고자 전력을 다하여 싸움을 독려하고 있소. 백의 군사가 죽으면 二백의 군사를 보충하는 전법으로 지금 한 군의 수는 十여만을 잃고도 초전의 倍數에 이르고 있소, 漢武는 이 전쟁에서 결판을 내지 않고 물러나지는 않을 것이오 하였다.
 

왕겹이 물었다. 일찍이 무는 北에서 흉노에게 패하여 도망간 일도 있고 년년 조공을 바치고 왕녀를 흉노 단우의 첩으로 바치기로 하고 화해하여 보전 한일도 있사온데, 요동의 패전을 거기 비하면 크게 수치라 할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더욱이 단군 조선 황제에게 바쳐 오던 오랜 예물도 중단하고 단군을 본따 天子를 자칭하고 있는 터에 자기네 마음대로 철수하는 것이온데 무슨 불평이 있사오리까 하였다. 노인이 말하였다. 차일시 피일시라 그때는 중원에서 한족이 통일을 이루었다 하여도, 중원의 각 민족이 완전 복속하지 아니하였고 영토는 우리 조선 제국의 三分의 一에도 미치지 못하였고, 大軍을 일으켜 數千里 원정에 나설 처지도 못되었습니다. 지금에 저들은 영토는 中原의 八, 九를 자치하고 군사는 백만을 헤아리고 군량은 수년 먹을 것을 쌓아 두고 있으니 무왕이 이번 싸움에서 무수한 군사를 잃고도 물러나지 아니하는 이유이니 전쟁의 끝은 우리가 기대할 수 없는 일이오 하였다.
 

그러하오면 相國께서는 장차 어찌 될 것으로 생각하옵는지요? 하고 물었다. 路人이 말하였다. 전일 진시왕이 천하를 통일 할 적에 五국을 정벌하고 연 나라에 三十만 대군을 투입하여 싸우다가 군사를 물리고 화해하여 太子丹의 인질을 풀어 돌려보내고 진나라 열후국으로 남아 있으면서 친목코자 하였으나 연太子단이 분수를 헤아리지 아니하고 수차례 진시황을 죽이려다 실패하고 연王 희(喜)가 또한 진과 맞서 싸우다가 조선과 진나라가 협공하여 일족이 몰사하고 백성은 바다 건너 마한 등으로 피난 가고 山넘어 요동으로 피난하고 미처 피하지 못한 백성은 한족의 노예가 되어 비참한 삶을 살고 있음은 장군도 알고 있는 일 아니오.
 

연王이 일찍이 조국을 배반하고 단군 조선 제국 황제의 절재를 받지 아니하고 동으로 제국 영토를 침범하여 싸움을 끝내지 아니하여 원수를 지고 西에서 강력한 진나라와 맞서 싸우다 앞뒤로 협공 당하여 패망하였으니 이는 길이 역사에 교훈 삼아야 할 것이오 하였다. 이에 왕협장군이 물었다. 장차 어찌 하면 좋을지 가르쳐 주십시오 하니 相路人이 나직이 소리를 죽여 말을 이었다. 지금 相府에서 王에게 대세가 어찌할 수 없음을 설명하고 화해할 것을 재청하였으나 王께서 완강히 거절하니 우리 모두가 함께 죽음을 기다리는 형편이라 하여 왕협의 응답을 기다렸다. 왕협이 한숨 쉬며 무슨 방책이 없느냐고 다구처 물었다. 
 

상노인이 보기에 왕협의 마음을 능히 돌릴 수 있다고 판단하고 입을 열었다. 지금 한 왕의 밀사와 의논이 있어 항복하면 열후에 봉하여 장래를 보장하는 여러 차례의 확약이 있었소. 다만 용맹한 장수 한사람을 함께 하라는 무왕의 요청이 있어 여러모로 고려한 결과 장군을 만나러 온 것이오 우리가 나라를 배반하는 것이 아니라 이 길밖에 나라와 백성을 구하는 길이 없소 지금 이 기회를 놓치면 우리 또한 연 나라의 再版이 될 것이오니, 정세가 그때와 똑같은 처지에 놓여 있소 하였다. 배후에서 조선 별군의 협공은 없다는 말은 빼고 연이 지난날 겪은 것과 같은 처지임을 역설하였다. 이리하여 왕협은 설득되고 그날 밤으로 노인, 한음, 상협은 상협이 모든 관문을 열도록 명령하고 가솔을 데리고 왕검 성을 빠져 나와 한군 진영에 가서 좌장군 순체에게 항복하였다. 순체는 이들로부터 왕검 성의 군무 전반에 걸친 정보를 입수하고 순체는 파팔마를 함양으로 띄워 무왕에게 보고하였다. 그리고 이들 배반자들은 함께 모의한 니계상삼은 우거王을 죽이고 투항 할 것이라 하였다.
 

한무왕은 요동 전쟁의 장기화로 국민 부담이 가중하고 병역 소모의 계속으로 인심이 흉흉하여 묘당에 철군론이 끊이지 아니하였고 좌장군 순체에게 全軍을 독단케하여 무슨 변고가 생길까 마음을 놓을 수 없어 군신을 모아 더불어 요동군 철수를 의논할 참에 조선王의 大臣과 將軍이 항복했다는 보고를 받고 좋아서 어쩔 줄을 몰랐다. 우거왕은 제장과 大臣들을 모아 훈유하였다. 지금 몇 사람의 반역자가 도망갔다 하여 우리의 힘이 약해지지 아니한다. 그것은 오직 여러분이 여기 있기에 조금도 흔들리지 아니한다. 그리고 즉각적으로 적에게 누설된 제반군 기밀을 점검 개정하고 철석같은 그의 의지는 한 군이 불원 철수 할 것을 확신하고 도도王 고두막과 상의하여 한 군이 철수하면 그 뒤를 추격하여 몰살하고 중원 깊이 진격하여 조선고토 기주지역 十二주를 회복할 계획을 짜고 있었다. 고두막은 이 때에 왕검 성을 포위하고 있는 한구를 도처에서 기습하여 막대한 피해를 입히고 漢寇는 그를 보면 달아나기 바빴다. 그는 大弓을 써서 멀리 있는 한나라 장수를 백발백중 쏘아 죽여 한나라 장수들의 공포 지적이었다.
 

그러나 역사의 진로를 바꾸는 행운의 여신은 한무왕에게로 갔다. 반심을 품고 우거왕의 주위를 살피고 있던 니게상삼은 경비가 허술한 틈을 타서 그의 심복 장수를 시켜 우거왕을 죽이고 한구의 병영으로 달아나 순체에게 항복하였다. 무왕은 이 소식을 듣고 의기 양양하여 대신들을 모아 대연을 베풀고 전쟁 수행에 공이 많은 신료들을 위로하였다. 그리고 이르되 이번에 항복한 조선 대신 니계상삼은 경사에 오는 길로 참형하라 그 주인을 배반하고 죽이는 者는 살려 두어 쓸모가 없느니라 하였다. 대신들은 무왕이 큰상을 내릴 줄 알았는데 이 말을 듣고 대경실색하였다. 이윽고 군무 대신이 아뢰었다. 그것은 불가하옵니다. 지금 우거왕을 죽였다. 하여도 그 수하 장군들이 태자를 업고 항전을 계속하고 있는중이온데 그렇게 되면 성중에 남은者 죽기로 싸울 것이니 항복한 大臣을 죽이는 것은 항복하는 者를 막는 것과 같사오니 결코 그를 죽여서는 아니되옵니다 하였다. 그러면 옥에 가두어 두었다가 성이 함락한 후에 처형하리라 하였다.
 

이에 대신들은 다시 아뢰었다. 그러하여서는 아니되옵니다. 대왕께서 항복하는 將相에게는 候에 봉작하고 우거왕의 머리에 만호후를 걸었사온대 이제 폐하께서 식언하시면 폐하의 위엄에 손상이 오고 그보다 큰 문제는 지금 조선은 열국이 분열하여 쟁패하고 있으나 부여王이 단군제국의 정통을 이었다고 황제를 칭하고 있사오니 그들이 국내가 수습되면 중원 고토회복에 나설지도 모르는 위험이 있사옵니다. 투항자를 우대하고 신의를 동이에게 보이는 것은 도적을 잡기 위해 도망을 치는 것이옵니다. 폐하께서 신위영무(神威英武)하시고 中原 大國에 君臨하시었사옵니다. 비록 그러하오나 단군 제국의 후예 황제국은 강력하고 생활 기능과 예절지풍은 이번 요동에서 보다시피 우리 나라가 배워야 될 미풍이오며 자고로 동방 군자 지국의 명칭이 허언이 아니오니 공자께서도 항상 동이국에 가서 살 것을 원하였사오니 그러한 군자국이여서 그러한 것이옵니다. 공자께서 中原에서는 君子之道가 행해지지 아니하니 그런 생각을 한 것입니다.(孔子悼道 不行設浮海慾居九夷有以也夫) 그러하오니 무력으로 동이제국을 이길 수는 없사옵니다.(여기 공자께서 바다를 건너 동이 국에 가고자 했다는 것은 당시 노나라에서 육로로 요동에 갈 수 없고 발해 바다를 이용하여 왕래가 쉬웠슴이다.) 동이가 그들 서로가 싸우고 분열하여 약화시키는 것이 상책이옵니다. (以蠻攻蠻夷中國之形也, 漢書) 깊이 살피시옵소서 하였다. 이리하여 무왕은 우거왕을 배반한 반역자들을 후대하기로 결정하였다. 이리하여 투항자들을 격려하여 王儉城 함락을 위하여 전력을 기울이도록 지시하였다. 왕검 성은 우거왕이 반역자들의 음모로 시해된 후 대신 성기(成己)가 우거왕의 太子 장상을 옹립하여 국왕을 대행케 하고 제장을 모아 의논하였다. 이제 국운이 불행하여 반역자들이 국왕을 시해하였으니 실로 하늘이 무너지는 시련이 우리에게 닥쳐왔음이라 우리가 지금 한나라 오랑캐에게 항복하면 우리 군자 국민은 한족 오랑캐의 종복이 되는 것이다. 우리는 지금 비극을 맞았으나 슬픔에 잠겨 용기를 잃어서는 아니된다. 지금 왕검 성의 견고함은 적이 백가지 방법으로 쳐들어 와도 무너지지 아니하고 충효한 우리 군사 앞에 한 병의 목은 추풍낙엽과 같다. 우리는 끝까지 싸워서 이 나라를 보전해야 한다. 우리가 마음과 힘을 합치면 두려울 것이 없다. 하고 단결을 호소하였다.
 

그러나 항복한 반역자들의 조선군 교란 회유는 집요하였다. 그들의 전일 部下 장성들과 친 인척을 통한 온갖 모략 회유에도 성중은 요동하지 않았다. 한편 한나라는 크게 놀랐다. 大臣들과 將軍이 항복하고 왕을 죽이고 하여도 끄덕도 하지 않고 城을 지키고 軍民이 위협과 유혹에도 흔들리지 아니하니 武王은 항복한 者들을 불러서 命하였다. 너희들이 정한 時日안에 王儉城守將 成己를 죽여 왕검 성을 함락하지 못하면 너희들은 가솔과 함께 모두 살아남지 못하리라 하였다. 이에 왕검 성 성중에는 니계상삼의 수하 장수로서 니계상삼이 잠복시켜 둔者가 있었다. 항복한 반역자들은 城下로 몰려가서 城中을 향하여 소리 높이 외쳤다. 항복하면 武왕이 상을 주어 보답하고 항복하지 아니하면 城을 파한 후 軍民을 몰살한다고 그리하기 數日만에 잠복하고 있던 니계상삼의 부하가 성기를 죽이고 혼란한 틈에 한 군이 城을 맹공 하니 성中이 마지막 희망을 잃고 항복하였다. 이에 武가 大喜하여 이제 中原 天地는 漢나라 것이로다 하고 항복한 조선 反逆者들에 후를 封하였다. 그리고 우거王의 아들 長에게 幾候의 봉작을 내리어 거두어 주었다. 번조선 국민의 우거왕을 기리는 마음을 달램이었다. 이리하여 僚河以西 中原 東北 一部가 漢族領土가 되고 단군以來 東方君子國으로 中原의 文化 예술 산업의 中心地였던 번朝鮮國은 멸망하고 東方의 英雄 번조선王 우거는 패권 다툼에 정신을 못 차리는 진 조선 말조선의 지원도 받지 못하고 고군분투 二年에 매국 반도의 손에 운명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