十九. 漢武王과 右渠王의 朝漢平和 交涉 失敗
한무王의 창해 패전은 한무王에게 위협이 되었다. 한무王은 지난날 東征을 성공적으로 수행할 목적으로 창해에 전진 기지를 설치코자 하다가 고구려에게 패하여 번조선 정벌을 중지하였으나 조선을 요동으로 멀리 밀어내고 싶었다. 한무王은 조선이 패수가에 공지를 점거하고 있는 것은 국경지대에 공지를 두기로한 옛 조약을 위반하고 국경을 침범한 것임으로 그냥 두면 큰 우환이 될 것이라 생각하였다. 전쟁을 반대하는 측은 지난날 우거王을 멸하기 위하여 배후 교두보를 설치코자 오랜 전쟁을 계속 하여도 교두보 확보에 실패하였는데 평화로운 이때에 그러한 전쟁을 자청하는 일은 불가하다 하였다. 한무王은 내심 中原의 三方을 정벌하여 성공을 거두었으나 유족 東方 四夷(한서에 조선을 四夷라고도 한다 하였다.) 에게 敗하여 불쾌한 마음으로 다시 조선 정벌에 나서고 싶은 감정이었다. 지금 다시 조선을 정벌하려면 지난날의 실패를 거울삼아 좋은 계책이 있어야 하는데 그 어떠한 계략이 없는고 하였다.
주전론자들은 말하였다. 지난날 동이족을 가볍게 보고 시작한 전쟁으로 과오를 범한 것입니다. 지금 한나라는 병력이 강성하여 지난날에 비할 바 아니고 재화는 국고에 가득하여 大戰을 치르는데 어려움이 없습니다. 그럼으로 우거王의 배후를 위협할 교두보도 필요없이 大軍으로 엄습하여 우거王이 준비할 겨를도 없이 서두르면 조선天王의 구원도 이루어질 겨를이 없을 것이옵니다. 이에 무王은 결의를 표명하였다. 짐이 三方을 토벌하고 東方에서 뜻을 이루지 못하였느니 이제 마땅히 힘을 모아 大事를 이루도록 총력을 모으라 하고 반전론을 용납치 아니한다 하였다. 이리하여 육해군에 동원령을 내렸다. 한편으로는 우거王에게 친교를 맺자는 서한을 가진 使者가 파견되었다. 응하면 지난번의 예국과 같이 싸우지 아니하고 승리를 거두는 것이고 아니 들어도 방심토록 하여 급습코자 함이다.
그리하여 한무王은 출병을 위한 준비에 착수하고 한편으로 우거王에게 마지막으로 친선 사절을 보내어 친교를 청하고 겸하여 번조선 형세를 살피고 오라 하여 涉何(섭하)로 하여금 방물을 갖추고 종자를 거느리고 험독 왕검 성에 번조선王 우거를 배알하였다. 우거王이 섭하를 보고 하문하였다.그대의 주인 한 왕은 이번에 무슨 일로 그대를 이곳에 보냈느뇨 하니, 섭하가 아뢰옵기를 신의 황상께옵서는 大王과 친교를 돈독히 하고 동녘 조선 열국과도 교통하여 친선을 도모코자 하와 이제 大王께서 길을 열어 주시옵기를 바라옵고 소신을 大王전에 보내였사옵니다. 원컨대 교통을 허락하여 주옵소서 하였다. 우거王이 이 말을 듣고 사자에게 이르기를 내가 교통을 끊고 내왕을 막는 것은 세 가지 이유가 있어 그리 하는 것인즉 한 왕의 청은 들어 줄 수 없느니라 하였다. 습하가 그 세 가지 이유가 무엇이 온지 일러 주시옵소서 하였다.
우거왕이 말하였다. 한 왕은 전일에 친선 사절을 빙자하여 나를 비방하고 나와 동녘 열국간의 이간(離間)을 획책하는 간교한 걸로 利로서 유혹한 서간을 한 왕의 밀사를 체포하여 압수한 바 있으니, 한 왕이 조선열국과 교통코자 하는 것은 목적이 친선이 아님으로 이를 막는 것이오 둘째는 지난날 포악한 진시왕이 연을 병탐하여 동이 족을 괴롭히는데, 이제 한이 진을 멸하고 중원을 차지 하였은즉 연을 해방하여 자립의 길을 열어 주어야 함에도, 그대로 진시왕을 답습하여 동이를 억압하니 이것은 양국간의 친선의 본의가 아니라 만일, 끝내 나의 충고를 들어주지 아니하면 장차 大禍를 면치 못할 것이다 하였다. 이 말은 불원 적중하여 한나라의 쇠퇴를 가져왔다. 셋째는 이제 대단군 조선제국이 九환의 혼미로 天步 불순하나 대통을 이으신 王께서 왕검 성에 계시며 일찍이 殷과 周는 대단군 조선제국 天王에게 예물을 올리고 문후를 게을리 하지 아니 하였거늘, 그대 한나라는 周의 정통을 이었으니 전례를 따라 禮를 행하고자 하면 과인이 인도 할 것이나, 다만 교역을 터고저 길을 열라 하니 이를 허락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니 그대는 돌아가서 이대로 전하고 한王이 교통을 트기에 앞서 친선 예를 행한다면 내가 양국간의 교통을 풀 것이고 한 왕도 황제를 칭함에 뜻뜻할것이니 그대는 돌아가 이대로 한 왕에게 일러라 하였다. 섭하는 한王이 목적한바 우거왕을 설득하여 한 왕의 후원을 받아 조선 제국을 이탈하고 독립 왕국을 만들어 동방의 동이 족을 막는 완충 역할을 맞는 지난날의 연과 같이 하고저 하였으나 그의 지조가 철저하여 말을 끝내지도 못하고 돌아가게 되니 돌아가서 무왕에게 무어라 말해야 할지 앞이 캄캄하였다.
우거왕은 약간의 답례품을 갖추어 비장으로 하여금 멀리 국경 초소까지 전송케 하였다. 사자 일행이 국경에 이르러 섭하는 간도가 두렵다 하여 한나라 초소 임유관까지 배웅해 줄 것을 간청하였다. 이에 비장은 그를 한나라 초소 근방까지 배웅하였다. 사자 섭하는 갑자기 숨겨 가지고 있던 비수로 비장을 난자하였다. 그리고 재빨리 방채속으로 달려가 숨었다. 그리하여 섭하는 비장의 수급을 베어 들고 무왕에게 돌아가 고하였다. 조선왕 우거는 방약무인하여 교통을 틀 생각은 전혀 없고 폐하가 조선 제국 황제에게 친선을 행하지 아니하고 황제를 자칭한다 하여 진시왕과 같다 하였사옵니다. 신이 폐하를 위하여 부끄럽고 분하여 오는길에 배웅하는 우거王의 大將 한사람의 목을 베어 왔사옵니다. 하고 그 수급을 쟁반에 담아 바치었다. 무왕은 분하여 우거王의 大將을 죽인 섭하의 노고를 치하하고 그 공을 표창하여 요동 태수를 봉하였다. 여기 요동太守란 이름뿐이고 그 封地는 없은, 즉 이러한 봉작제도는 한족의 오랜 관행이나 봉토가 없는 명예만의 제후에게는 응분의 국녹을 주어 체통을 갖추게 하였다. 그리하여 조선과의 국경수비에 파견 주둔토록 하였다. 한편 조선 우거王의 命으로 배웅 나갔던 비장의 수하 종자들이 돌아와서 비장의 참살 당한 사실을 王에게 告하니 우거王이 대노하여 무왕의 비겁함을 크게 꾸짖고 복수의 방책을 강구하더라, 한편 무왕은 중원 三方을 안정하였을, 즉 흉노의 혼사王(渾邪)을 항복 받아 北적의 침공 근심을 덜었을 즉 흉노를 막는 속국이 생겼음이라 지난날 한 고왕이 흉노에게 포로 되어 흉노 왕비의 은총으로 풀려났으나, 흉노에게 항복하고 조공과 王女를 흉노왕 선우의 첩실로 바치는 일을 한족의 참을 수 없는 수치로 엮어 왔으나, 이제 그것을 폐지할 수 있게 된 것이다. 單
때맞추어 동이 예王(歲)의 항복을 받아 소위 四이 정복의 大望을 이룰 때가 왔다고 생각하였다. 동이족은 연이 망한후 대를 이어 예王이 비록 한의 명분상 列國이라 하여도 自治 王國으로 있다가 한의 핍박과 회유로 항복하기에 이르니 燕齊之間의 동이족이 一大 혼란에 빠졌다. 이러한 두 나라의 항복은 재물(財物)로 유인하여 성공한 것이고 兵馬는 그냥 위엄을 보여 위협을 느끼게 한 것이다. 중국 史官은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武帝從事四夷以慧費中國不獨其征伐而然也如東夷?王等降而燕齊之間 爲之騷動匈奴暈邪王降而府庫爲之一空夫王者之於夷狄不誘其來不追其往使中國自爲中國夷狄則吾民可以無事而己也然則光武閉玉門以謝西域之質豈蚩不爲長策乎)
무왕이 동이를 치는 일은 재물과 무력으로 이루는 것이니 동이 예王 등을 항복받고 연과제의 두나라에 소란이 일어나고 흉노 흔사王이 항복함은 비용이 많이 들어 국고가 비워졌다. 무릇 이적을 다루는 대는 오라고 유혹하지 아니하고 가는 자는 쫓지 아니하고 중국 스스로 이적으로 하여금 따르게 함이니 백성을 편하게 하는 것이라 그러한즉 광무는 궐문을 닫고 서역나라들의 인질을 사절하였으니 어찌 좋은 정책이 아니라고할수 있겠는가. 한의 이러한 정책은 다시 한의 서역 통로를 중간에서 막고 있는 동이의 오손(烏孫)을 후한 폐백 재화로 초청하여 한과 연계하는데 성공함으로서 흉노의 오른팔을 꺾는 결과를 가져와 오랜만에 서역 통로가 트이게 되었다. 이와 같이 燕과 齊의 고토에 있던 예왕마저 한무왕에게 항복하니 조선이 연을 회복하는 것은 더욱 어려운 난관이 생겼다. 우거왕은 백관을 모아 의논하였다.
전날 한나라의 使者가 나의 대장을 암살하고 도망갔으나 한무왕은 일언반구 사과의 말도 없을 뿐 아니라, 죄인을 요동 태수로 임명하여 그 일을 오히려 표창하니 실로 의리 없는 오랑캐라 백성은 사람 잡아 먹는 풍습이 아직도 남아 있고, 조정 공경 대신은 공맹의 유학과 공자에 의하여 전파된 우리 동이족의 예법으로 교화의 공이 있다고는 하나, 아직 군자 지도의 덕을 이해 못하고 있으니, 그들 행실 또한 흉측한 오랑캐 풍이라 이제 한족은 진족(秦族)을 위시하여 여러 종족을 융합하여 거족(巨族)을 형성하여 강성하니 지난날의 한족이 아니라 쉽사리 물리칠 수 없는지라, 그러나 우방의 대장을 그것도 자기를 호송해 주는 그 마음도 모르고 암살하고 간 범인을 공로자로 표창하고 벼슬을 내리는 무도한 오랑캐를 어찌 그냥 둘 수 있겠는가 제공은 의견을 말하라 하였다. 상국(相國) 노인(路人)이 아뢰었다.
지금 한은 크게 흥성하여 四方이 안정되었습니다. 지금 우리 번조선 힘으로는 한을 치는 것은 섶을 가지고 불로 뛰어드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비록 저들의 행동이 불순하나 참으셔야 합니다 하였다. 또 大將 王?(왕겹)이 말하였다. 지금 우리의 군사는 十만에도 미치지 못하고 마필도 三만을 넘지 못하옵니다. 대전 발생하면 한은 수十만중을 동원하여 大戰에 임할 것이고 폐하여도 쉽게 보충할 수 있으나 우리는 한 번 폐하면 후원군이 없고 부여 왕금성에 帝國 皇上께서는 열국의 통합이 아니되니, 大軍으로 우리를 돕지는 못할 것이고 우리가 패하면은 우리를 버리지 아니하고 一, 二만의 구원 군으로 퇴각을 도와주는 것이 고작이옵니다 하였다. 王이 말하기를 우리는 참을 수 없는 수모를 겪고 있으니 이대로 있어도 저들은 대항하지 못하는 우리들을 깔보고 정벌코자 할 것이라 하니 제장 막표들이 묵묵부답이라 중낭장 성기(成己) 가라대 무왕이 연에 예王을 항복 받고 燕齊의 동이 족을 제압하여 東城에 걱정이 없사옵니다. 그럼으로 지난번과 같은 야만 무례를 서슴없이 저지르고 있습니다. 한무왕과 자웅을 겨를 수는 없다 하여도 이냥 지나칠 수는 없사옵니다 하였다.
그러면 문책사를 보내어 그의 죄과를 추궁하면 그의 사죄를 받아 낼 수 있을는지, 그 누가 한王의 사죄를 받고 요동 태수를 문죄할 수 있을 고 하니, 좌우 제신이 모두 그것은 불가합니다 하였다. 그것은 지금 한무왕은 군자가 아닙니다. 일찍이 先祖 大王께서 말씀하시기를 한 고왕 유방은 지방 소읍의 형장으로 진나라 말에 세상이 어지러운 때에 패거리를 모아 떠돌아다니다가 옛친구 노관의 도움으로 군사를 일으켜 요행히 천하를 얻은 자라 미개 몽매하여 대의를 모른다고 하였사오니 그 소자 무왕이 무슨 예절을 알겠사옵니까. 만일 우리의 사자가 가면 반드시 해를 입을 것이오니 사자 파견은 불가하옵니다. 따라서 신의 생각으로는 지금 요동 태수 섭하가 舊연나라에 머무르고 있으니 그를 토벌하여 멸살하고 돌아오면 일단 복수하는 것이오니 어떠하올는지 하니 제장들이 모두 찬동하였다. 이에 王은 장군 왕겹을 정서 장군을 명하고 니게(尼谿)를 軍師로 하여 기병 일만을 주어 일거에 한군 국경을 돌파하여 방채를 유린하고 국경 방위 한 군을 격파한 후 섭하를 잡아 참수하고 돌아왔다.
한王 무가 이러한 보고를 받고 대경하여 장상을 전원 소집하여 회의를 열었다. 무는 엄숙히 입을 열었다. 짐이 四方을 진압하고 해내가 이제 안정한데 유독 동에 조선이 끝내 수호를 거부하고 국경을 유린하여 군민의 피해가 우심 한지라 그들이 깊이 영내에 침입해 오지 아니하였으나, 아국의 국경 수호가 일거에 붕괴되니 장차 두려움을 금할 수 없는지라 제공의 의견을 말하라 하였다. 많은 대신과 대장들이 말하기를, 변조선王 우거는 오만불손하게도 폐하에게 항거하고 한과 동녘 요동에 있는 단군 제국과의 교통을 중간에서 가로막고 조선 제국 황제에게 예를 행하지 아니하면 길을 열 수 없다는 등의 망언을 하는자 이오니, 이번 기회에 군사를 일으켜 정벌함이 오른줄 아옵니다 하였다. 그러나 대신 반고는 말리었다. 이번 우거王의 범경은 전일 섭하의 불의(不義)에 대한 보복이 오며 폐하에게 不軌를 저지른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지금까지 四夷 불 정벌의 정책을 계속하고 무마의 술수로 다스림이 옳은 줄로 아옵니다. 고구려 등 조선 열국의 병마가 참전하면 동이 제국과의 大戰으로 확대될 것이오니 그렇게 되면 종묘 사직이 위태로울 것이옵니다.
안전에 우거왕 만을 두고 대사를 결정하지 마옵소서 하였다. 이에 여러 장군들이 입을 열었다. 지금 조선 열국은 내란이 끝치지 않고 패권 다툼에 몰두하여 우거王의 패망을 오히려 관망할 것이옵니다 하였다. 이에 무왕은 말하였다. 간자를 요동 만주와 남평양에 밀파하여 그 소식을 들은 후에 출사 할 것이니 준비를 게을리 하지 말라 하였다. 그리고 동이 제국이 통합 안정되기 전에 우거王을 정벌하여 山東省과 河北省을 한으로 완전 편입해 버리고 요하西에 있는 양국간의 국경 空地도 한인을 이주시켜 한의 中原 占領을 이루는 기회로 삼을 것이라 하였다. 한편 우거王은 한武王의 好戰 기질이 그냥 넘어가지 아니할 것으로 판단하고 방위에 여념이 없었다.
징병을 서두르고 성곽과 방채를 수축하고 영내 列侯에게 참전 준비를 지시하고 나무를 베어다가 병선을 만들어 해전에 대비하는 등 거국적 노력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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