十七. 大武神王의 東부여 征服과 遼西經營
고구려는 무휼 태자가 보위를 이어 天子位에 오르니 이가 大武神王이다. 十六세의 나이 어린太子로 大軍을 이끌고 전쟁터에 나아가 각부 장군을 지휘하여 적을 격파하고 대공을 세워 나라안밖에 사람들을 놀라게 한 영걸이었다. 어려서부터 총명 영리한 장한 웅걸로서 큰 지략을 품고 있었다. 十七세에 등극한 大武神王은 부여 고구려를 입국한 해모수의 五世손이고 太祖 동명성왕의 三世라고 하나 (實은 四世이다) 二年 정월에는 수도에 큰 지진이 있었고 백제인 千여호가 투항해 왔다. 三國史記의 기록이다. 이 무렵 중국 사기에는 고구려가 요동에서 백제를 공격하여 고구려는 요동을 점유하고 백제는 요서를 영유(領有)하였다고 하였다. 미루어 보건대 백제人의 투항은 요동 고구려 본토에서 있었던 일임이 분명하다. 이때는 조선 반도에 아직 백제 국은 존재하지 아니하며 그럴 만한 개척된 땅도 인구도 없었다. 요서 군은 요령 서부와 하북 당산지구(北京南 天津地域) 동부 하북천 서쪽 낙정으로 장성 이남이다. (낙정은 낙랑군을 이른다.) (遙西郡遙寧西河北唐山地區東部河北千西 樂亭以長城以南, 漢魏總書) 四년 十二月 황제는 그의 숙원인 東부여 병탐을 위하여 大군을 이끌고 친정에 나섰다. 부여 남쪽은 진흙토로 진격이 어려웠다.
재(帝)는 습지를 벗어나 평지에 진을 치고 불류수상 (지금의 송화강)에서 멀리 끝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키가 九척에 얼굴이 희고 눈이 빛나는 한 거한 (巨漢)이 나타나 어전에 배알하고 아뢰기를, 폐하께서 부여를 친다 하오니 소신은 북막에서 온 사람이 온데 이름은 괴유(怪由)라 하옵니다. 종군을 허락하여 주시면 부여王의 머리를 베어 휘하에 바치겠습니다 하였다. 帝는 크게 기뻐하여 허락하였다. 또한 사람이 있으니 이름이 마려(麻廬)라 적곡리 지방에서 왔다. 하며 장창을 들고 앞장서 폐하를 호위하여 길을 인도하겠다 하였다. 王이 부여국을 향해 북진하다가 중간에 진을 치고 말은 안장을 풀고 인마가 휴식을 취하고 있으니 이 광경을 첩자가 東부여王에게 보고하니 부여王이 때가 왔다. 하고 이르되, 적이 교만하여 적을 앞에 두고 말안장을 풀고 칼을 두고 쉬고 있으니 대군으로 음습하면 적은 대오를 이루어 항전할 겨를이 없을 것이다. 하고 전군에 命을 내려 신속히 포위하여 퇴로를 차단케 하고 스스로 一지 정예 기병을 이끌고 고구려 군을 직충 하였다. 그러나 적진 가까이 있는 늪지에 말이 빠져 진퇴 양난에 빠졌다. 이 때 고구려의 괴유가 칼을 휘두르며 비호 같이 달려드니 부여 군이 겹겹이 둘러싸서 항전하여도 만군중을 횡행하여 대성 일갈하고 번개 같이 달려들어 부여 왕의 목을 베어 들고 뛰쳐나가니 그 누구도 막을 자가 없었다.
고구려 황제는 부여 왕의 목을 베었으나 부여군에게 겹겹이 싸여서 빠져 나갈 수가 없었다. 갇힌지 5日만에 양식은 떨어지고 군사는 굶어서 싸울 힘도 없으니 하늘에 기도하고 살려 달라 호소하였다. 그런데 안개가 四方에 끼어 지척을 분별할 수 없었다. 고구려 군은 풀을 베어 허수아비를 만들어 즐비하게 세워 놓고 사잇길을 해쳐 도망쳐 송화강 상류 이물림(利勿林)에 이르러 야수를 잡아먹고 허기를 채우고 겨우 도성에 도착하여 보니 수萬名의 군사를 잃고 허다한 치중을 버리고 참담한 패배였다. 帝는 군신을 모아 놓고 짐이 경솔하게 부여를 치고자 진군 하다가 이와 같이 많은 군사와 물자를 잃었으니 이난 짐의 부덕한 탓이라 나의 과오로다 하고 상한 자를 위로하고 친히 조문 지어 전사자를 北문밖에 재단을 차리고 제사하며 통곡 하니 군신이 上을 위로하여 승패는 병가상사라 너무 슬퍼하지 마옵소서 하고 궁으로 돌아왔다. 나라 사람들은 큰 희생을 치렀으나 결속하고 나라 위해 신명을 바칠 것을 다짐하였다.
다음해 三月에 큰말 百필이 동부여국을 떠나 고구려국 학발령 아래 차회곡(車廻谷)에 몰려오고 지난 전쟁에서 죽은 동부여 왕의 막내아우가 동부여 국의 장내가 어두움을 보고 부여를 떠나 갈사천 (曷思川, 송화강지류)에 한 무리를 이끌고 와서 나라를 세우고 백여 군사를 이끌고 압녹곡(鴨綠谷, 압록강 계곡, 즉 黑龍江변 골짜기)에 숨어 있다가 수렵 나온 해두국(海頭) 王을 습격 살해하고 옛 제국 열후였던 해두국을 점유하였다. 부여왕의 종제(從弟)가 국민에게 선포하였다. 이제 王이 전사하고 나라를 바로 세울 王弟마저 떠나서 갈사국을 세웠으니 우리에게는 나라를 지킬 능력이 없다. 이대로 있으면 죽음을 기다리는 것이니 이제 항복하여 생명을 보전함이 옳다 하고 고구려에 항복 하니 고구려 황제는 그를 반겨 맞이하여 연나부(椽那部)王에 봉(封)하고 주민을 무휼 하였다.
이해 十月에 天下 名將怪由가 죽었다. 帝는 궤유가 병이 무거워 소생하기 어렵다는 말을 듣고 친히 괴유의 집에 납시어 문병하니 괴유가 울면서 신이 北막의 천한 출신으로 폐하의 거두심을 얻어 후은을 감격하고 있사온대 이제 폐하께서 이와 같이 친히 납시니 이 몸이 죽어도 은혜를 잊지 못하겠나이다 하였다. 帝도 눈물을 흘리며 장군의 용맹은 세상에 미칠 자가 없어 부여국이 공구하여 귀순하였는지라 장차 중원 회복의 대사를 함께 도모코자 하였거늘, 이 어찌된 일인고 하며, 손을 잡고 슬퍼하였다. 帝는 괴유의 大功을 가상하여 北망명산 양지에 장사 지내고 수묘인을 두어 춘추 재향을 지내게 하였다. 帝는 을두지(乙豆智)를 좌보(左補)로 재수(除授)하고 송옥구(松屋句)를 우보(右輔)로 제수하고 백관을 승차 한 후 항복을 거부하는 계마국(盖馬國)을 정벌하여 國王을 참하고 구다국(句茶國)을 항복 받아 주위의 옛 제국 열후들을 모두 항복 받으니 국토가 팽창하고 백성들을 무휼하여 국위가 떨쳤다.
이리하여 국토방위를 튼튼히 하여 기초가 여물었다. 국토 통일을 이룩한 고구려는 중원 쪽으로 눈을 돌려 요서에서 백제와 충돌하고 중원 故土회복에만 관심을 쏟고 조선 반도는 비록 고구려 영토는 아니나 동족이 몰려서 해가 갈수록 피난민이 불어서 세가 커져 가는데 거기에 관심을 두지 아니하고 내버려두었다가 장차 동족 쟁패의 내란으로 이어지는 비극의 씨앗으로 발전하였으니 五百年후를 내다보는 강태공과 같은 위인의 없었음이라 할까?
후일 유일한 선구자 광개토大王이 단명으로 끝났음이 한스럽다. 이에 군신들이 王에게 아뢰었다. 지금 중원에서는 진시왕이래 王의 칭호를 황제라 부르고 문장이나 어법에서 王의 상위로 새겨 지금 한王 유철도 황제라 자칭하고, 변방 군웅들도 황제를 칭 하는 자 많사옵니다. 대단군 제국이 분열 와해 된 후 진왕 정(政)이 연을 멸하고 중원을 통합한 후 방약 무례하여 감히 황제라 일컬어도 단군 제국의 대통을 이은 대부여는 국역이 미약하여 진 왕의 망자 존대하는 방자함을 막지 못하고 오늘에 이르러 도처에서 황제를 자칭하는 자 생겼으니 지금 형편으로는 이들을 통제 할 수 없고 이 상태로는 천왕의 위엄을 지킬 수 없는 형편에 이르렀사옵니다. 그리고 진나라가 망한 후 그 나라 국민은 한족에 동화하여 삶을 보전해 가는 형세로서 한나라는 연 나라가 망한 후 그곳 동이 족과 진나라의 진족 국민을 포섭하여 대국으로 성장하였으니 이제는 경시 할 수 없는 형세임을 인식할 때가 왔습니다.
그러니 저들의 언동을 탓할 것 없이 우리 스스로 전통 자세를 확립해야 합니다. 이제 우리 나라에서는 太祖 聖王이래 간이 황제 칭호를 쓰고 있으나 고정적 관행이 아니되오니 신료들이 주상의 호칭에 혼돈이 있사옵니다. 우리 나라의 大王칭호가 황제 칭호에 못할 것이 아무것도 없사오니 저들이 오만 방자하여 황제가 王의 위에 있는 듯이 호칭하고 있으니 우리도 황제 칭호로 하는 것이 옳은 줄로 아옵니다. 이일은 저희 신료 백관이 이미 의논한바 이옵니다 하였다. 대무신王은 말하였다. 과인은 王의 칭호가 은근하고 더 좋은 듯 하나 公 등의 의견이 그러하다면 그렇게 하라 하였다. 그리하여 황제 칭호를 채택하였으나 大王칭호도 병행되었다. 그러나 황제 호칭은 진시왕 이래의 칭호임으로 어색하였다. 과인이 학문을 하였으나 황제 칭호에 관하여는 아는바 가 적다. 그 자세한 것을 말해 보오 하였다. 이에 좌보 을두지가 아뢰었다. 원래 제(帝)란 단군 天王께서 天帝의 아들로서 이 세상에 하강하셨다 하여 나온 것인데 帝란 가장 높으시고 주재한다는 뜻이고 같은 때의 당요(唐堯)와 다음 우순(禹舜)을 공자께서 요재 순재라 일컬었사온데 진시王에 이르러 그의 신료 박사들이 王에게 고하기를 옛 五帝도 능히 하지 못한 天下통일을 大王께서 이루시었으니 天皇 地皇(천왕 지황)의 대업이라 마땅히 황제라 호칭해야 한다 하여 王보다 上位에 올라야 한다. 하고 자칭 황제라 하였사옵니다. 진王정(政)은 진王 초(楚)의 자식이 아니고 효문왕비 화양태후와 승상 여불 위와의 불륜의 자식으로서 진시왕은 한족이 진을 멸시하고 유학자들의 비평적 논리의 저서(著書) 등을 혐오하여 갱유 분서(坑儒焚書)와 같은 잔학 행위를 자행하였고 진시왕의 母 화양태후의 음란은 그칠 줄 모르고 여불위는 그의 불륜 관계가 공개적으로 논의될까 두려워 독이라는 장한을 자기 대신으로 화양태후에게 추천하여 독은 환관(부랄깐병신)이라 속여 입궐한 후 공공연히 태후의 내실에 출입하여 그들의 음란은 더욱 심하여 급기야는 독과 태후 사이에 다시 두 아들이 나고 태후와 독은 불궤(不軌)를 획책하다가 탄로되어 독과 아이는 죽이고 이사 건의 책임을 물어 여불위도 삭탈 관직하고 초나라로 추방되었다.
진시왕은 여불위에게 따졌다. 그대는 진나라를 위하여 한 것이 무엇이며 무슨 공이 있다고 승상 자리에 앉았는고 하고 질책하였다. 시왕 정은 여불위가 내심 자기의 친부임을 알고 그를 처형하지 아니하고 초나라로 추방하였다. 여불위는 쫓겨 나와 지난날을 희한하고 내가 남의 나라를 빼앗고 남의 집을 어지럽혔으니 죽음이 마땅하다 하고 자살하였다. (奪人之國而亂人之家以罪當死矣)당시 진족이나 한족은 화양태후와 같은 과부의 음탕 행위는 허물이 아님으로 조정에서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군자국을 자칭하는 조선은 그를 화냥년(華陽女)이라 하여 후세에 음탕한 女子에 대한 대명사로 사람들은 그러한 행동을 멸시하였다. 孔子는 한족 사회의 도덕 개혁을 위하여 부녀자의 절개를 강조하고 二君不事 사상과 함께 一夫 從事를 설교하였으나 道가 행해지지 아니하였다. 진시왕을 위시한 진나라 조정에선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나 적녀(狄女)와 한족인 여불위의 사이에 나온 자식이니 진족이 아님으로 오히려 다행으로 일체 불문에 부치고 王으로 받들었으나 그 무례하고 교만함은 사후에 二世 또한 난행을 하여 불과 二世에 亡하였으나 대를 이은 한의 유방이 또한 그 제도를 따라 황제를 호칭한 것이옵니다. 그러면 자세한 제도를 말해 보시오. 을두지는 설명하였다.
一. 황제는 자칭 짐(朕)이라 하옵고 신민은 폐下라고 부르옵니다.
二. 그 말은 제조(提調)라 하옵고
三. 사관(史官)기사에는 上이라 하옵니다.
四. 소재(所在)는 행재소(行在所)라하고
五. 거처는 금중(禁中)이라 하옵니다.
六. 后는 성중(省中)이라 하옵고
七. 도장은 옥새(玉璽) 라 하옵니다.
八. 이르는 곳 (所至)은 幸이라 하고
九. 나아가는바 (所進)은 어(御)라 합니다.
一. 命令은 一曰 책서(策書)요
二. 二曰 제서(制書)이고
三. 三曰詔書요
四. 四曰 계서 (戒書)라 하옵니다.
一. 皇帝 皇后 王后帝는 모두 임금(君)이라 하옵고
二. 王의 영토는 王有天下라 하옵니다.
三. 우리 나라에서는 예로부터 단군 성조께서 天帝의 아들로서 세상에 하강하셨기에 天帝之子 天王, 天子 등의 호칭으로 중원의 여러 나라들은 감히 이러한 호칭은 쓰지 못하였는데 진시왕이 동이족인 연 나라를 정복하고 증원을 통일 한 후 단군 제국에 항거할 수 있다는 교만 방자한 생각으로 황제를 참칭(僭稱)하고 진나라를 멸한 한나라가 또한 진시왕을 본받아 황제 天子 등을 참칭하고 있으나 대단군제국의 분열로 이를 문죄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옵니다. 예로부터 天王, 天子 등의 호칭은 우리 단군 제국만이 쓰는 호칭이며 아비는 하늘과 같고 어미는 땅에 비유하여 天子라고 부른 것이며 그럼으로 天王, 天子의 호칭은 단군을 천재의 아들로 받드는 칭호로서 右代史書에 기록하되 동이 조선이 예로부터 부르는 호칭이며 天下를 통제하여 여기에 귀의한다고 일컬어 왔사옵니다. (故稱天王天子夷稱之所父天母地故稱天子之所稱歸往故稱天王天子夷狄之所稱天下之所?往, 通典)진시왕 以來 한나라에서도 지금 황제 天子 등의 호칭을 참칭하고 있으나 황공하오나 이제 우리가 저들의 방자함을 막을 수 없사옵니다. (註, 요전 이전의 고대사는 공자의 고사 단서로 맥이 끊어지고 없으니 단군의 치적은 전해 진 것이 없으나 통전 위서 등에 관련 기록이 있어 古代에 황제 천자 등의 호칭은 조선 제국에서 통용했음을 알 수 있다. 보다 자세한 것을 알고자 하여도 남아 있는 고전에는 없고 하서(夏書)에 있었을 것으로 사료되나 구덕 하지 못하였다.)
天王은 다시 물었다. 그러면 天子는 天下를 통제하여 天下가 귀의한다. 하였음 즉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고 답하여 가라되 옛날 단군 성조께서 天下를 홍익인간의 큰 덕으로 덥고 天下만민이 여기 귀의하여 생업을 영위하여 왔사옵니다. 서로 다투지 아니하고 성교를 받드는데 소홀함이 없이 세상이 평화로이 오랜 세월을 화목하게 살아왔사옵니다. 그럼으로 天下귀의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럼으로 一. 天子는 밖이 없으며 天下를 집으로 삼는 것이니 天子는 바로 부르는 별칭이옵니다. 二. 皇帝는 至尊을 이르는 것이니 皇은 황황(煌煌)하여 빛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으니 능히 天道를 행하는 고로 皇帝입니다. 하였다. 이에 황제는 말하였다. 지금 중원에서 황제의 칭호가 쓰여진지 불구하거늘 이를 금하지 못하니 한스럽구나 경이 그 자세함을 빠짐없이 해덕 하였으니 과연 학식의 깊음을 알겠도다.
학덕과 경륜을 겸비하였으니 경은 짐의 여망(呂望)이로다 하고 칭찬하였다. 한편 연과 유주 걸안의 동이족 피난민이 바다를 건너 조선 반도에 이주하고 요동 만주의 숙진 예맥 말갈 등 동이 족의 남하 한 피난민이 농토를 개간하고 목축지를 조성하여 비로소 건국할 인구가 모였으며 기원전 마한 진한 변한 가야 등은 이름이 나라라고 하나 미미한 수의 인구로 추측된다. 중국 역사 기록에도 진시왕이나 한무왕은 오래 살고 싶어 신선이 산다고 하는 조선 반도를 바다 속의 험한 산으로 된 곳으로 감히 접근 할 엄두도 못 내고 불로초를 구하고자 여러 차례 행하여 태산에 제사만 지내고 돌아갔다고 하였다. 이 두 사람이 모두 호전 주의자로서 감히 조선 반도를 넘보지 못한 것은 요동 만주에 웅거하고 있는 동이 조선 제국이나 후 고구려와 대전할 수 없다는 문제도 있거니와 별로 사람이 살지도 않는 험한 산으로 둘러싸인 반도에 침입할 생각은 엄두도 못 내고 또 그럴만한 이유도, 필요도 없었다. 불로초를 구하기 위하여 다만 태산에 올라 동녘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멀리 해중 삼신산에 신선이 산다는 곳을 향하여 정성을 들이고 신선이 나타날 것을 기다리다가 두사람 모두 뜻을 이루지 못하고 죽었다. 이러한 조선 반도에 가야라는 부락 국가가 반도 남쪽에 있었다. 후에 마한, 변한, 진한 부가 생기고 몇百年후에는 국가 형태를 갖춘 신라에 이어 백제 분국이 생겼다. 신라 백제가 조선 반도에 영토를 조성하고 있어도 고구려는 조선반도에는 전혀 영토적 관심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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