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역사 침탈(侵奪)

BC 28세기 요하문명의 濊貊族이 남하 하여 夏, 商, 周를 건국하면서 황하문명을 일구었으며, 鮮卑族이 秦, 漢, 隨, 唐을 건국했습니다. - 기본주제 참조

홍익인간·인류공영/환단고기·한민족역사

14. 盧관의 반란과 衛滿의 탈출

자연정화 2013. 8. 24. 12:28

十四. 盧관의 반란과 衛滿의 탈출 
 

한나라 유방의 막료 중에 노관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유방의 죽마고우로서 뛰어난 재주와 지모가 있고 기모 준수하여 용역 과단하고 무예 출중한 유방과 좋은 짝이었다. 초패왕 항우와의 싸움에도 항시 호위장군으로 유방의 곁을 자유로이 출입하고 작전에 공을 세웠다. 항적이 해하일전 에서 강동 팔천 제자를 잃고 오강에 몸을 던져 죽음으로써 오군이 평정됨에 연왕을 봉하여 동북을 안정시켜야 하는데 그 인선이 극히 어려운 처지였다. 연은 진시왕이래 중국 영토로 편입되었으나 아직 그 주민은 동이족이며 번조선과 국경하고 공지를 두어 주민간의 교통을 분리하고 있으나 동족간의 제휴가 쉬운 것인즉 대 인물이 아니면 대임을 맡길 수 없는지라. 내심 노관을 염두에 두고 있으나 여러 의견을 듣고자 백관을 소집하였다.

 

유방이 이르되, "제장 열후 중에서 누가 연왕에 적임인가?" 하니 여기서 자격으로 보아서 장자방,한신,노관 삼인으로 거론되었다. 그러나 장량자방은 이미 벼슬에 뜻이 없음을 밝혔고 한신은 한왕의 신임이 노관만 못하니 중의(衆議)는 노관으로 갈 수밖에 없었다. 이에 모두 입을 모아 "태위장안후노관이 적임이옵니다." 하였다. 그때 벼슬도 가장 높은 자리에 있었다. 이때 왕후에 봉작을 받은 자는 많았으나 한족식 명예직일 뿐 실권을 행사하는 왕후는 유씨 였다 따라서 유씨 외의 타성지인은 팔명에 불과 하였다.한고조가 노관을 연왕으로 봉하니 왕후들 중 행운이 연왕 만한 사람이 없었다. (上乃入?爲燕王諸候得莫如燕王者)라고 역사가 반사고가 당시의 상황을 설명했다. 연나라는 동이열국의 서쪽에 위치하여 산물이 풍부하고 영토가 광활하여 동방군자국으로서 문화가 발달하여 중원의 각 민족으로서는 선망의 대상이 되었다. 중원의 한족에게는 문명을 수출하는 대단군 조선 제국의 번한에 속한 열후였는데 자칭 왕이 되어 이탈함으로서 번한과 오랜 전쟁을 하였고 한족 열국과도 분쟁이 있었다.

 

그런데 진나라에 패망 당하고 진이 한나라에게 망하니 한나라 영토가 된 것이다. 연인은 동이족의 용맹과 의리와 강인한 성격을 가지고 있었기에 진시왕 정이 중원을 통일할 적에도 마지막까지 항거하였으나 본국과 결별되었으므로 본국의 구원을 받지 못하고 멸망하였다. 이러한 연나라는 옳은 주인을 만나면 크게 발전하여 중원에서 한과 겨룰 만한 강국이 될 소지가 있었다. 그러므로 다른 열국과는 비교가 안되는 그 연왕의 자리를 노관에게 맡긴 한고왕 유방은 내심 아무리 심복이라고 하나 불안하였다. 노관은 일족 일당을 거느리고 연에 부임하여 군신의 하례를 받으며 연왕위에 오르고 동으로 성채를 수축하여 조선에 대한 방위에 힘쓰고 왕도를 복구하여 왕실의 위엄을 갖춘 후 백관을 모아 효유하여 가로되, "지난날 이곳 백성들이 오랫동안 전란에 시달려 피폐하고 바다를 건너 동으로 피난한 자 또한 헤아릴 수 없으니 실로 불행한 일이다. 이제 군비를 확충하고 양식을 쌓아 국방을 튼튼히 하여 백성이 안심하고 생업에 힘쓰도록 도울 것이며 조선을 침범하지 아니하고 흉노와 분쟁하지 아니할 것인 즉 조선의 경우 서로를 넘볼 틈이 없으니 우리의 방위가 든든하면 침범하지 아니 할 것이다. 그러나 국토 관리에 힘써 부강을 이룰 것인 즉 나의 이와 같은 결의를 성공하도록 힘써 주기 바란다"하였다.

 

이때에 한은 중원을 통일하여 열국제후왕을 전공에 따라 봉작 하였으나 아직 건국 초기임에 국내외의 반항 세력을 제어하기 위하여 각기 병력을 보유함으로 언제 어디서 반란이 일어날지 헤아릴 수 없는지라 조선 제국도 그러한 상황에서 분열과 내란으로 이 천년 대제국의 붕괴를 가져 왔던 것으로 이는 고대 국가의 공통적 애로였다. 유방은 국기의 안정을 위해 거침없이 군사를 거느리고 열국을 순수하여 충성을 확인하고 내정은 여후가 소하 조참의 자문을 얻어 처리하였다. 그녀는 성격이 잔인하고 질투가 심하여 유방의 애첩을 돼지우리에 가두고 짐승 먹이를 주어 폐사토록 하였다. 그리고 그 자식들도 모조리 가두어 죽였다. 유방의 친척이 아닌 공신으로 영지를 가진 자와 명예직의 봉작을 가진 자의 경우 그 인망이 높아서 능히 중대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인물도 있었다. 그런데 인물들도 이제는 전쟁이 끝나고 쓸모가 없으니 살려 두면 화근이 될 수 있는 즉 기회를 보아 처치 할 것을 생각하고 있었다.

 

한왕 유방이 중원을 통일하는데 가장 큰공을 세운 자는 한신 영포 ,팽월이다. 이 세 사람은 수많은 전공을 세웠는데 특히 항적의 용맹을 감내 해낼 수 있었던 것은 이 세 사람 없이는 불가능하였다. 이들은 여러 차례 포위 당하여 사경에 이른 유방을 위험 속에 몸을 던져 구해 낸 용사들이며 한나라의 천하 통일은 유악지중에 장량 수하 조참의 운수 지략과 밖으로는 한신 영포 팽월의 힘으로 이루어졌다. 따라서 한족의 중원 점유를 가져오게 한 영웅으로 받들어진 인물들이다. 여기 장량은 호를 자방이라 하였는데 꾀 많은 사람을 장자방이라 할만큼 세상에서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그는 유방을 섬겨 전시에 대공을 세워 삼만호 봉토를 주어 열후에 봉함을 받았으나 그것을 사양하고 받지 아니 하였다. 그는 언행이 온순하고 용모 단정한 미남자였다. 그러나 그는 두뇌 명철하여 그의 계획 묘책은 백발백중하였고, 한 치의 어긋남이 없었다. 그의 만류를 듣지 않고 유방이 자의로 행하는 정책이나 작전은 반드시 실패하였다. 유방과 여후의 사람됨을 거울같이 들여다보고 있었으며 유방도 자기의 마음속을 깊이 헤아리고 있는 그를 내심 두려워하였다. 자방은일찍이 한신에게 일렀다.

 

"세상 영화는 부운과 같은 것이다. 이제 장군은 한나라 통일을 이룩하였는데 대공을 세웠으니 이것으로 국가 민족을 위한 의무를 완수하였으며 또 그것으로 대장부의 꿈을 또한 이룬 것이다. 마땅히 나와 함께 속세를 떠나 노후를 편히 보내자고 하였다." 그것은 영화를 누리려 하면 유방이 살려 두지 않을 것임을 충고한 것이나 한신은 유방을 겉으로는 잘 알고 있었으나 깊이 알지 못하여 자방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였다. 자방은 속세를 떠나 적송자를 따라 동방군자국으로 입산하였으니 그 종적은 아는 사람이 없다. 또 그가 동이족인지 한족인지 아는 사람도 없다. 유방은 한신을 희음후에 봉하고 영포를 희남왕에 봉하고 팽월을 양왕에 봉하였다. 팽월은 용맹하나 지혜롭지 못하였다. 계략에 걸려 반란죄로 처형되었다. 유방은 또 낭중열후희 한신을 반한다 하여 참하였다. 이리하여 유일한 타성인으로 왕후의 자리에 있는 자는 노관 한사람뿐이었다. 연왕 노관은 이제 내 차례가 왔구나 하고 안절부절 마음을 놓지 못하였다.

 

이에 노관은 박사 위만과 상의하였다. 위만은 원래 동이족이라 연이 망한 후에도 계속 그곳에 머물면서 망국의 슬픔을 주민들과 함께 하였다. 노관의 경우 연왕으로 부임하여 민심을 수습하고 사회의 안녕과 질서를 바로잡기 위하여 현지 동이족의 지도층 인사를 등용 하는 것은 자연적인 추세였다. 그리고 당시 미개한 한족 관헌으로는 동방예의지국의 국민 의식의 자존심이 강한 조선족의 마음을 순화할 수 없었다. 노관은 좌우를 물리치고 조용히 입을 열었다. "나는 연나라에 와서 본 즉 이곳은 나의 고향과 같이 친숙한 심정이 든다. 나는 고향에서 유방과 함께 교우할 적에 그곳에도 많은 동이족이 있어 동족의 정을 느꼈다 나는 연왕으로 봉작을 받은 것이 무한의 영광이라 여겼고 또, 모든 왕후장상들이 부러워하였다. 그러던 것이 이제 고민과 희한이 과인의 피를 마르게 하고 있다. 그대는 장자이니 이 어려움에서 벗어나는 길을 알릴 가르침을 받고자 하오." 하였다. 위만이 물었다.

 

"대왕께서 이곳에 오시어 만백성을 보살펴 편히 생업에 종사하고 기강을 엄하게 세워 탐관오리가 자취를 감추었고 백성의 생활이 안정되어 풍요로웠던 옛 풍속이 차츰 돌아옴에 만백성이 대왕의 은덕을 칭송 하온 대 무엇이 걱정이 옵니까?" 하였다. 연왕은 이 말을 듣고 한숨을 깊이 내쉬고 멀리 서쪽 하늘만 쳐다보고 있는지라 조금을 기다리다 위만이 입을 열었다."신이 감히 생각 드는바 있어 한 말씀 올리겠습니다. 지금 대왕께서는 한왕폐하와의 군신지의 보다 그 옛날의 우정이 멀어질까 염려하는 것이 옵니다.신이 망언을 하였다면 용서하옵소서"하고 용서를 청하였다. "바로 그것이로다 공이 이미 짐작하고 있으니 좋은 계책이 있을 것인즉 사양치 말고 일러주기 바라오." 하며 위만의 손을 잡고 일으켜 가까이 앉게 하였다. 위만이 이윽고 대답하였다.

 

"지금 한왕께서 천하를 대정하고 자손 대대로 그 영광을 있게 하고자 장래의 화근(禍根)을 제거하는데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아니하옵니다. 한나라의 화복을 좌우하는 인물은 칠인방으로 삼상(三相) 삼장(三將)과 연왕이라고 세상이 다 알고 있는 터입니다 그 중 제일인자로 꼽힌 장자방은 한왕의 마음속을 헤아리고 부귀영화를 페리와 같이 버리고 적송자를 따라 동방 봉래산 방장에 몸을 숨겨 속세를 떠났으며 소하 조참은 나라를 다스리는 경륜은 있으나 유문 장자에 불과하니 종결을 본 것이고 한신 팽월 영포 삼장은 이미 참하였으니 이제 대왕 한 분만 남아 있사옵니다. 그리고 한왕의 친족이나 여후의 친족이 아닌 왕후는 이제 대왕 한사람뿐이옵니다. 한왕께서나 더욱이 여후께서 천하사를 경영하는데 어찌 사사로운 우정에 매이겠사옵니까?" 하였다. 연왕이 가로되, "과인이 또한 그 일을 생각하면 잠을 이룰 수 없는지라 장차 나에게 화가 미칠 것이니 어찌하면 좋겠소?"하니, 위만이 다시 이르기를 "이제 대왕께서 그 화를 면하는 길은 두 가지가 있습니다. 그 하나는 장량을 본받아 황금의 자리 연왕위를 한왕에게 돌려 드리고 속세를 떠나서 먼 동방으로 신선을 찾아 나가시면 한왕은 필연코 대왕의 가솔을 거두어 보전케 할 것입니다.

 

그것이 한왕의 변치 않는 우정이 옵니다. 그리고 둘째는 군사를 조련하여 병력을 증강하고 서북 방어 성책을 보강하고 서로 제(齊)와 친교하면 될 것입니다. 그 곳 주민 또한 동이족이 많이 살고 있으니 비상시에 도움이 될 것이고 동으로 번조선왕 기준과 연합하여 황하 서안을 선점(先占)하고 조선 제국 진조선왕에게 왕자를 보내어 조선 제국과의 친선을 확인하고 후원을 약속 받으면 한왕을 두려워 할 일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와 같이하여 삼분 천하하면 영토는 한왕만 못지 않고 인구 자원은 한왕보다 위일 것이니 한왕이 어찌 하지 못할 것입니다. 일찍이 한신이 괵월의 삼분 천하 건의를 듣지 아니하였다가 일개 부녀자의 손에 복검이사(伏劒以死)하였고 팽월이 유용이무지(有勇以無智) 하여 동으로 조선과 제휴하여 삼분 천하의 계책을 선용하지 못하고 단지 용맹만을 믿고 서남에 웅거하여 한왕과 겨루다가 패망하였으니 천리가 이러 하옴에 대왕의 현명함으로 스스로 정하옵소서"하였다. 

 

또한 "지난번 희가 때를 놓쳐 결국 한왕이 선수를 쓰게 되었고 한왕의 명을 받들어 희를 한왕과 함께 공벌하여 멸하였다. 한왕은 첫째로 버거운 한사람의 공신을 제거하고 둘째로 불안하게 생각하고 있는 대왕의 한 팔을 꺽는 두 가지 목적을 달성한 것인바 대사를 도모하는 기틀이 이러한 것이오니 지체 미결하면 화가 미치는 것이 필연 지사이옵니다. 물러 나가는 것 또한 천기(天機)가 있사옵니다. 그런고로 장자방이 삼만호왕후 봉작이 라는 파격적 처우를 즉석에서 거절한 것은 그 때를 놓치면 화를 자초한다는 것을 짐작한 것인바 봉작을 받아 부임하여 자리를 잡으면 자방의 마음먹기에 따라 유방과 상쟁하면 유방은 자방의 적수가 되지 않으며 유방은 의심이 많은 사람임은 세상이 다 아는 터이니 반드시 자방이 자리를 굳히기 전에 명분을 만들어 토벌할 것입니다. 따라서 자방은 이러한 유방의 품성을 깊이 알고 있음으로 이렇게 대처하였습니다. 양자 중 어느 것을 택하든 때를 놓치면 후회하여도 미치지 못하오니 헤아리옵소서 신 또한 대왕과 같은 길을 가야 할 운명이 온대 대왕께서 자립의 길을 택하지 아니하면 어쩔 수 없사오니 이미 이곳을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사옵니다" 하였다.

 

이에 노관은 말하였다. "공의 계책대로 라면 한왕과 결전을 각오해야 하는데 나의 병마는 지금 극히 미약하고 한왕은 삽시에 대군을 일으킬 수 있는데 어찌 항쟁 할 수 있으랴?"하니, 위만이 답하기를 "한나라가 지금 통일을 이루었으나 열국의 여러 민족들이 언제 반란을 일으킬지 불안하여 한왕이 순수(巡狩)를 그치지 않고 비유씨(非劉氏) 제후를 제거하느라 심히 인심이 불안하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군사를 일으켜 한왕을 침범하지 아니하면 한왕은 움직이지 아니 할 것 이 옵니다. 지난날 영포가 군사를 이끌고 연으로 들어 왔더라면 연나라 국민이 기꺼이 맞이하였을 것이고 대왕께서도 항전할 수 없는 형편이니 그와 연합하여 보전하는 것이 사책이 되었을 것이옵니다.  

 

그렇게 되었다면 한왕이 영포를 치려면 전국 대군을 일으켜 영포와의 전쟁이 아니라 장차 조선 제국 승부를 겨루는 대전으로 발전할 것을 각오해야 할 것이니 한나라가 강성하고 조선 제국이 분열되었다 하여도 아직은 조선 제국에 맞설 생각은 없사옵고 진나라가 망한 후 많은 진나라 사람들이 서북으로 흉노에게 돌아가 한인에게 원수를 갚으려고 흉노와 연계하여 침입할 기회를 노리고 있사오니 장기적으로 대군이 출전하면 함양과 낙양은 가루가 될 것입니다. 감히 치지 못할 것이 온대 영포가 그의 동족의 나라 연이 한왕의 심복인 대왕께서 지키고 있다는 그것만을 염려하고 연나라 백성들이 호응할 것을 헤아리지 못하고 남으로 월에 의지코자 하니 한왕이 마음놓고 토벌한 것입니다. 지금 한왕이 쉽게 대왕을 칠 수 없는 것이 역시 이와 같은 이치이옵니다. 대왕께서 하루속히 병력을 보강 조련하여 정예병으로 무장하면 동이족은 용맹무겁하여 번조선 기준과 연합하고 제(齊)와 조(趙) 또한 제휴할 수 있으니 한왕이 대군으로 출병해도 자방과 한신 등이 없는 한 능히 감당할 수 있고 다행히 연나라 국민이 대왕의 선정에 감복하여 잘 따르고 있으니 나아가서 한중왕에 오른 후 한왕을 쳐서 천하를 쟁취 할 수도 있습니다" 하였다.

 

노관은 원래 세심하고 영리한 성품이라 결단을 내렸다. "내 마음을 정하였으니 공은 곧 병력 보강의 조처를 취하고 병마를 조련하는 일에 전념하라. 내 친히 국경 방채와 성곽의 보수를 돌아보리라 하고 일면 기준왕에게 격문을 보내어 상호 동맹관게를 확인하고 양국 국경 패수를 상호 준수하여 친선을 도모하고 전쟁 결과에 따라서는 상호 연합군을 편성하여 중원을 공략키로 한 후 왕자에게 명하여 단군조선 황제에게 가져갈 공물을 준비하여 떠날 차비를 차리게 하였다." 또 한편으로 상사 장승을 흉노 선우에게 파견하여 제휴할 것을 청하였다. 선우가 물었다. "그대의 주인 노관은 일찍이 유방을 도와 초패왕 항적을 쳐서 항적이 오강에서 기가 막혀 자살토록 계교를 꾸민 지묘 발굴한 인물로서 그가 유방을 따라 종군하여 음산에서 나와 싸운 일도 있어 그를 중히 보고 있는 터인데 한왕이 그를 특별히 중용하여 연왕의 대임을 맡겨 동(東)을 감시케 한 것으로 알고 있거늘 그대들이 우리 나라와 제휴코자 함은 한왕의 지시로 모략을 부리는 것이 아니냐? 내 그대를 살려 보내지 않으리라" 하고 다그쳐 심문하였다.

 

장승은 이에 한나라에서 있었던 무자비한 숙청으로 공신들이 억울한 죽음을 당한 일들과 연왕의 지금의 처지를 설명하니 선우 또한 그 일을 탐지하고 있는 터라 일단 장승의 원로방문의 고초를 위로하고 당분간 그곳에 머물게 한 후 탐정을 연과 한에 밀파하여 실정을 탐문케 하였다. 그러나 천지운기는 언제 어디서 어떤 변화를 가져오게 할는지 운명이란 인력으로 어찌할 수 없는 일이었다. 전기한 바와 같이 낭준열후 희는 조나라와 동이족의 국경을 경비하는 방위 병력을 관리하는 장군인데 예하 장병들의 일선 방위 노고를 위로하기 위하여 군관민 초청 잔치를 개최하였는데 국경 지대이니 조선족과 접촉이 많음으로 사람들이 조선족과 내통하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하여 인심을 얻는데 힘써서 잔치에 빈객이 구름같이 모여들어 대성황을 이루니 사람들이 많이 따르고 희는 스스로 몸을 낮추어 지극한 태도로 연로자를 공손히 접대하니 주민들이 희장군을 칭송하고 군사들이 잘 따르랐다. 유방은 일찍이 명망 높고 실권을 가진 장수를 꺼리고 여러 방법으로 제거해 버리는 터에 희의 하자를 잡을 수 없어서 수하 심복 주창을 조나라 재상으로 임명하여 조후 희를 감시케 하였다. 이에 주창은 한왕을 찾아가 말하였다. "조후가 민심을 크게 얻어 인망 높다는 잔치 지난날의 정황을 설명하고 이곳이 진시왕이 빼앗은 조선 제국 고토삼십군(故土三十郡)의 일부임을 상기시키고 조후 희가 마음만 먹으면 조선과 연계하여 능히 모반할 수 있으니 두렵다고 하였다." 한왕은 조용히 듣고 있다가 큰소리로 외쳤다. "곧 토벌하리라" 하고 출사 명령을 내렸다. 한왕은 '희를 제거하는 기회를 잡았다.'라고 생각하였다.

 

항상 희의 인망과 유능함이 마음에 걸려 동이족과 접경한 이 지역에 유씨 성을 가진 자를 배치코자 하여도 희를 제거할 명분을 얻지 못하다가 어찌 이 기회를 놓칠세라 불시에 출전하여 희가 미처 준비하지 못하게 신속히 진격하였다. 그리고 동으로 연의 노관으로 하여금 진격케 하니 희가 황황망조하여 크게 싸워 보지도 못하고 한왕에게 유린되니 크게 한왕을 보고 외쳤다. "내가 폐하를 배반한 것이 무엇이오!" 한왕이 말하였다. "너는 여기서 방위 노력은 하지 않고 민심 얻는데 만 열중했으니 그것이 반심을 품은 것이 아니고 무엇이냐?"하니 "내가 주인을 잘못 만났구나"하고 탄식하였다. 유방도 희를 진멸하고 탄식하였다. 그가 아무런 허물이 없음을 알고 있슴이다. 유방은 희를 진멸하고 친척으로 조후를 봉한 후 철수하였다. 이로써 전국 열후중에 친 인척 아닌 봉후는 연 왕 노관 한 사람뿐이고 또 가장 크고 중요한 왕국이었다.

 

자연 세상 사람의 이목이 연으로 살피었다. 이와 같이 희가 완전 패망하기 전에 희는 조선에 구원을 청하고자 하나 연왕 노관이 동북에서 공격하는 조선에 사자가 갈 수 없고 흉노에게 사자를 보내어 구원을 청하였다. 아마도 전쟁이 조금 지체되어 구원군이 들어가서 조후 희가 안 죽었다면 세상은 크게 변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행운은 한왕 유방에게 있었다. 결국 조후 희는 억울한 죽음을 당한지라 이 사건이 계기가 되어 희의 구원사와 연왕의 구원사 장승과 흉노국에서 만나게 되고 흉노의 항자가 한왕에게 연왕의 모반을 밀고하고 희의 구원사가 흉노국에서 돌아와서 장승과 만난 사실을 한왕에게 고했다. 연왕은 장승이 돌아오지 아니하니 흉노의 선우가 안 보낸 것을 모르고 혹여 배반한 것 아닌가 의심하고 한왕의 소환에 칭병 불참하였다. 이미 반역이 들어 난 지라 미처 준비에 착수할 겨를도 없이 이 지경이 되였으니 이 어찌된 운명인고 노관과 위만은 하늘을 우러러 한 탄 하였다. 노관은 위만의 손을 잡고, "공은 조선국으로 돌아가면 될 것이나 이 몸은 돌아갈 곳이 없다"하고 탄식하였다.

 

이에 위만은 이번 반란 모의로 연에 머무를 수 없는 조선족 천여 명을 대동하고 번조선 기준왕에게 귀의하였다. 그리고 연왕 노관도 한왕의 토벌군이 이르기 전에 수하 한인을 이끌고 흉노국으로 피난하였다. 결국 본국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한왕 죽은지 얼마 안되어 흉노국에서 쓸쓸히 죽었다. 여후는 함양 연왕저에 있던 노관의 처를 지난날의 극진한 친교를 생각하여 해치지 아니하였다. 이 사건은 중원의 변화적 역사의 혼란에 종지부를 찍었다. 위만은 일족을 거느리고 기준왕에게 가서 박사의 벼슬을 받고 군국 정사를 살피는데 능수 능난 하여 크게 성과를 올렸다. 그러한 위만의 능력을 보고 기준왕은 만족하였으나 한편으로 두려웠다. 한편 요동에는 단군 제국의 뒤를 이을 세력으로 고구려가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