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역사 침탈(侵奪)

BC 28세기 요하문명의 濊貊族이 남하 하여 夏, 商, 周를 건국하면서 황하문명을 일구었으며, 鮮卑族이 秦, 漢, 隨, 唐을 건국했습니다. - 기본주제 참조

홍익인간·인류공영/환단고기·한민족역사

12. 모돈(冒頓)의 新朝鮮 侵犯과 漢나라 征伐

자연정화 2013. 8. 24. 12:26

十二. 모돈(冒頓)의 新朝鮮 侵犯과 漢나라 征伐 
 

BC 198年 신조선왕은 부여 별종으로 불리는 대 부여국 북막추장 鮮卑가 정녕 불복하고 月氏候를 공격하고 흉노가 이를 지원하니 신조선王이 月氏候를 支援하여 선비를 討伐하고 이어서 흉노를 討伐코저 하니 흉노王 單于 頭蔓이 감히 朝鮮과 抗戰할 수 없음으로 월후에게 太子 모돈을 볼모로 보내고 사죄하니 和平을 허락하고 회군하였다. 그러나 월후는 볼모로 와 있는 흉노의 태자 모돈이 非常한 人物임을 보고 두렵게 생각하였다. 한편 흉노왕은 美女 알씨 소생자를 심히 사랑하여 후계자로 하고자 長子인 太子모돈을 죽음으로 몰기 위하여 조선국 월씨를 다시 공격하였다. 월후는 흉노왕의 배신에 大怒하여 볼모인 태자 모돈을 죽이려고 하니 모돈은 꾀를 써서 월씨의 좋은 말을 훔쳐 달아났다. 흉노는 태자가 돌아온 것을 보고 다시 태자의 말과 그 처를 활로 쏘아 죽게 하고 태자 모돈에게도 활을 쏘아 죽이려 하니 그 활을 돌려 그의 계모와 그 소생인 이복동생 들 그리고 그를 죽이려 하는 아비 두만까지 전부 쏘아 사살하고 스스로 王位에 올랐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신조 선왕은 모돈에게 사자를 보내서 모돈의 千里馬를 상납하라 하였다. 모돈이 추장 회의를 열고 의견을 들으니 부하장상들이 모두 거절하고 싸우자 하였다. 그러나 모돈은 말하였다. "지금 조선이 강성하여 싸워서 이기기는 극히 어려운 형편이니 국가를 보전하기 위해서는 한갓 명마 한 필이 대수로울 것 없다."하고 기꺼이 말을 헌납하였다. 얼마 후 조선의 북막후 月氏는 모돈의 처첩 중에 美色이 뛰어난 麗人이 있다는 말을 듣고 그 女人을 바치라 하였다. 모돈은 左右신하들을 모아 놓고 의논하였다. 한 신하가 다시 "閼氏(王의 비빈)를 바치라 하니 어찌할 수 없다 하였다. 군신이 일제히 분노하여 말하기를 "무도한 오랑캐를 공격해야 한다."고 규탄하였다.

 

모돈이 말하였다. "이웃나라와의 友好를 위하여는 어찌 한낱 女子를 아낄 것인가"하고 사랑하는 女人을 헌납하였다. 모돈은 內心 분노하고 장차 원수를 갚기 위하여 군비 확장에 全力 하였다. 얼마 후 조선의 북막후 月氏는 점점 교만하여 다시 사자를 보내어 흉노와 조선 사이 서로 비워 놓은 공지 千里땅을 조선이 점령하겠다. 고하였다. 이에 모돈은 大怒하여

":영토는 나라의 근본이라 어찌 양도할 가부냐?"하고 양보하고 화친하자는 者는 목을 베고 馬上에서 月氏를 치는데 참전하지 아니하고 뒤에 남는 者는 모두 斬한다 고하였다. 高句麗 건국과 같은 시기이다. 軍令을 내리고 三十萬 步騎 大兵으로 三군을 호령하여 일제히 요동으로 진격하니 신조선은 모돈을 가볍게 보고 그가 감히 조선에 도전하지 못할 줄 알고 지난날 여러 차례 흉노는 조선을 침입하였다가 패하고 상당 기간 순종하였은 즉 안심하고 있다가 불시에 침공하니 1차로 하북의 월후가 패하여 전초 방위선이 무너지니 신조선이 갑자기 징집한 병력은 十萬에 불과하여 요하변에서 방어하다가 또다시 패배하였다. 모돈은 이에 신조 선왕이 멀리 달아났으니 깊이 추격하다가는 계교에 빠질까 위험하기도 하고 신조선이 재기하여 다시 공격해 올 힘은 당분간 없을 것임에 요서로 철수하였다.

 

번조선은 원군을 보낼 겨를도 없이 신조선의 十萬병력은 섬멸 당하고 무수한 치중을 잃었다. 그리하여 하북 영토를 모두 빼앗기고 요동으로 후퇴하였다. 때에 한나라 유방은 항우와 싸우느라 하남지역을 비우고 있었다. 그 틈에 모돈은 조선故地와 하남지역 한나라 국경 지역까지 진출하여 넓은 영토를 차지하고 三十萬 大軍을 이끌고 漢軍을 공격하여 馬邑에서 한나라 大將 韓信을 포위하였다. 한신은 여러 차례 흉노에게 사자를 보내여 화친을 청하였으나 의심하여 화의에 응하지 아니하였다. 한편 한신은 한王 유방에게 구원해 줄 것을 여러 차례 요청하여도 한王도 한신을 의심하여 구원해 주지 아니하니 한신은 進退兩難으로 마읍에서 흉노 모돈에게 항복하였다. 모돈은 한신을 항복 받고 한왕 유방을 토벌하기 위하여 낙양으로 향하였다. 한王도 모돈과 항전하기 위하여 군사 三十二萬명을 유방왕이 친히 이끌고 北으로 향하여 평주(大同府)에서 모돈군과 만났다. 모돈은 동방의 강국 신조선을 격파하고 자신을 얻어 四十萬 정병을 이끌고 진격하였다. 흉노 모돈은 남으로 太原을 공격하고 晋陽에 이르렀다. 흉노와 한신은 진양에서 한군을 공격하였다. 유방의 한군은 三十二萬의 병력으로 반격해서 들어갔다.

 

이때 한나라 大將 劉敬이 돌아와서 한왕 유방에게 고하였다. 양국 싸움은 조금 쉬고 동정을 살펴야 하겠습니다. 신이 살피건대 전면에 늙은 노약者가 배치되고 아군이 진격하면 후퇴하고 복병을 해 두었다가 기습할 궁리를 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하니 지금 흉노를 쳐서는 아니 되옵니다 하였다. 이때 한나라 군사는 이미 진격을 재촉하고 있는 中이라 유방은 이 말을 듣고 大怒하여 유경을 가리켜 제나라 포로가 입을 잘 놀려 벼슬을 얻고서 무슨 그따위 망언을 하느냐 하며 마구 치고 가둔 후 한王은 군사를 재촉하여 일거에 흉노를 섬멸코자 평성에 진출하였다. 흉노는 싸우며 달아나다가 한군이 미쳐 평성에 집결하기 전에 모돈은 四十萬 보기병으로 한王군을 포위하여 생포하였다. (冒頓從精兵四十萬騎圍帝於白登 『鑑易』) 한王을 따라 종군해 온 陳平이 한王을 구하는 비책을 세웠다.

 

간첩에게 보화를 많이 주어 斡氏(모돈의 王비)에게 갖다 바치도록 파견하였다. 모돈의 王비가 좋은 선물을 받고 모돈에게 말하였다. 우리와 한나라가 지금 서로 어려움이 없는 터에 지금 우리가 한王을 잡고 너른 영토를 점령하였으니 우리가 점령한 영토는 목축을 할 만한 초지가 아니니 가져도 쓸모 없는 땅이고 한王은 놓아주지 아니하면 그를 대신할 王을 세울 것인즉 차라리 한王을 놓아주고 쓸모 없는 땅도 지키는데 힘만 들 것이오니 돌려주고 앞으로 우리에게 충성을 바치도록 다짐을 받는 것이 상책인가 하옵니다 하였다. 그리하여 흉노 모돈은 돌려보낼 것을 허락을 하고 그 대신 매년 상당한 세패(조공)을 받고 한王의 公主를 선우(單于:흉노족왕의 호칭)모돈의 첩실로 헌납하도록 하였다. 이리하여 돌아온 한王 유방은 가두어 두었던 유경을 풀어 주고 가로되 내가 公의 말을 듣지 아니하고 평성에서 욕을 보았다 하고 유경을 二千戶의 管內候에 封하고 號를 建信候라 하였다. 단 (유경은 동이족으로서 포로된 자임) 註. 중국 사기는 한王이 포위되어 七일 동안 굶고 있다가 흉노가 길을 열어 주어 탈출했다고 쓰여 있을 뿐 자세한 포로 생활의 내용이 없음. 한王이 公主를 흉노에게 보내려고 하니 呂后(한王의 王비)가 밤낮으로 울면서 첩이 太子와 단 하나의 公主가 있는데 어째 公主를 흉노에게 버릴 것이오 하며 슬퍼함에 보내지 못하였다. (帝曰善欲遣長公主呂后月夜泣曰妾唯太子一女奈何棄之匈奴上竟不能遣 『通鑑』)한王이 고민하고 있다가 다음해 겨울 집안 처녀를 公主라고 속여 보냈다 라고 사기에 기록하였으나 그후 공주에 관한 기록으로는 흉노에 시집간 公主가 생남하여 외손자가 外家를 잘 섬겼다는 것뿐 공주에 관하여는 일체 기록이 없고 한나라 呂后의 주위 친 인척 기록이 허다한데 비하여 보면 다른女子를 보냈다는 것은 신빙성이 없다. 그리고 이 문제에 관하여 신광이 말하기를 건신후(유경)는 모돈 잔적은 仁義로 설득할 수 없는 오랑캐라 하고 한편으로 혼인하여 사돈을 맺게 하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아니한 부당한 행동이었다 라고 하였다. 신조선은 그릇된 판단으로 모돈을 대하다가 상곡 우북평 일대의 영토를 도리어 잃고 모돈의 요서 침입을 막는데 급급하였다.

 

이번 전역으로 河南北州의 36개 고조선 영토가 흉노와 한의 영토로 돌아갔다. 한나라도 오래 전부터 흉노를 東에서 위압하든 조선이 뜻밖에도 흉노에게 도리어 패하니 크게 당황하였다. 흉노 모돈은 오랜 세월 東역의 강대국 조선 제국의 위력에 눌려 오다가 신조선을 패퇴시켜 의기양양하여 중원의 한고조를 공격하여 항복 받고 교만이 넘쳤다. 흉노 선우(單于:흉노족王의 호칭)모돈은 한나라 유방이 죽은 후 여태후에게 사자를 보냈다. 사자가 여태후에게 전한 친서를 펼쳐 보고 여태후는 군신들 앞에 민망하고 부끄러워 얼굴을 붉히다가 사자를 보고 호통쳤다. "이 자를 끌어내어 목을 베라 하였다." 그 친서의 사연인즉

 

"지금은 과부가 된 당신이나 내가 다같이 인생의 즐거움이 없으니 서로간에 같이 즐길 수 있도록 오락을 갖자 하였다." 즉 연애를 하자는 것이다. 그러자 옆에 앉아 있던 번희가 아뢰었다. "흉노 선우가 이같이 무례하니 원컨대 十萬병을 주시면 흉노속에 들어가 모조리 정벌하겠습니다."하였다. 옆에서 듣고 있던 제포가 큰 소리로 외쳤다. "지금 번희의 목을 베어야 합니다."하였다. 그리고 말을 이어 가로되, "지난날 고조 폐하께서 평성에서 흉노와 싸우다가 포위되었을 적에 번희는 상장군으로서 한병 三十二萬병을 이끌고 흉노와 싸워도 고조 폐하를 구하지 못하고 황공하게도 고조 폐하께서 항복하여 풀려나고 그들의 침공을 막을 수 없어서 년간 조공을 바치고 공주를 헌납하는 수치를 감당하고 있는 터에 무수히 죽어 간 상이의 애처로운 노래 소리가 끊기지 아니한 형편에 단지 十萬명의 병사로 흉노에 가서 횡행한다는 망언은 교만에 넘친 행동이옵니다. 흉노는 지금 강성하여 그들이 섬기는 조선 제국도 패퇴시켰습니다. 오랑캐는 좋은 말로도 그들을 좋아하게 하는데는 부족하옵고 나쁜 말은 노여움을 사는데 부족함이 없습니다."하였다. 여후가 실정을 모르는바 아니라 그가 애지중지하는 공주를 선우에게 바치고 철석간장이 녹는 아픔도 견뎌 온 처지이라 중신들 보기 민망하여 한번 노여움을 보였을 뿐이었다. 이에 여후는 사자에게 좋은 말로 손사하고 차마를 내어 사자를 돌아가게 하면서 여러 가지 여건이 여가를 즐길 수 없어 미안하다는 답서를 써서 답변사를 함께 파견하였다. 선우 모돈도 사자를 보내어 고맙다는 답서와 함께 좋은 말을 선사하고 선우 모돈도 드디어 화친하고 여후 초청을 강요하지 아니하였다.

 

신조선도 이번 전쟁으로 피해 막대하나 漢나라도 이번 전쟁으로 사람과 물자의 피해는 헤아릴 수 없고 하북산동의 조선국과의 충돌도 일체 피하였으며 그 지역의 동이족 내란에도 간여하지 아니하였다. 우리 나라 역사 서적에 西土지역의 大小전쟁을 내란과 漢寇의 구분을 하지 않고 기록한 것이 많은 것으로 보인다. 진시왕에 의하여 멸망한 연은 유방의 한나라가 진나라를 대신하여 영유한바 되었다. 진나라를 멸한 후 漢 중왕 유방과 楚 覇王 항우는 중원의 주인공 자리를 두고 七年간의 혈전을 벌여 유방이 승리를 거두어 한나라의 왕으로 등장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