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역사 침탈(侵奪)

BC 28세기 요하문명의 濊貊族이 남하 하여 夏, 商, 周를 건국하면서 황하문명을 일구었으며, 鮮卑族이 秦, 漢, 隨, 唐을 건국했습니다. - 기본주제 참조

홍익인간·인류공영/환단고기·한민족역사

22. 樂浪 玄도 臨沌 眞番 이란 四군의 실상을 살펴본다.

자연정화 2013. 8. 24. 12:43

二十二. 樂浪 玄도 臨沌 眞番 이란 四군의 실상을 살펴본다. 
 

한무는 비록 번 조선을 멸하고 그 영토를 점령하였으나 그것은 불과 수년에 고구려가 다시 회복하였으며 계속된 전쟁으로 국고의 탕진과 민심의 이탈로 장차 사직을 왕망에게 빼앗기는 원인을 만든 결과이기도 하였다. 무왕의 호전적 행동으로 변방(四方) 전쟁에 국력 소모가 너무 컸으며 우거王국을 정벌한 후 四군을 설치하고, 고구려를 고구려 현으로 만들었다고 역사 기록을 하였으나, 그것은 위조한 것이며 한무가 번조선을 정복하는 과정에서 번조선 영토와 접한 고립된 고구려 변방 영토를 전쟁 없이 일부 병합한 것을 고구려 전체 인양 과장하여 한四 군을 새로이 설치 한양 변조한 것이고, 기실 한은 그 시에 고구려와 싸운 일도 없고 고구려와는 초기에 창해에서 싸우다가 패한바 있다. 우거왕국의 반역자들에게 우거王의 영토였던 기존의 四군에 속한 것을 나누어 후(侯)에 봉한 것뿐이다. 그 당시 하남과 요서에는 중원 北域의 강국 백제가 있고 東域 요동에는 고구려가 도사리고 있는데, 그 속에다 무슨 한사군을 설치한단 말인가. 불능함을 당시 상황이 그것을 말해 준다.  
 

당시 한 무왕은 신흥 고구려의 중원 공략을 막는데 급급한 터인데 요동 요서를 점유하고 있는 고구려와 백제를 제치고 인구 희소한 조선 반도에 갈 수도 없고 갈 일도 없다. 한나라 사기에도 그런 기록은 없다. 후세 당의 이세민이 고구려를 치려고 명분을 세우고자 요동은 한무왕이 四군을 설치했던 한나라의 땅이다 라고 허위 선포하였고 당시 요동이란 요하 변을 中心으로 四方 一대를 이르는 것이고 만주 고구려 영내는 아니다. 일본의 식민 사관 편찬 교과서에서 당의 이세민이 만든 잘못된 사기를 확대 편찬한 것이다. 한무왕이 설치했다는 현토 낙랑 임돈 진번 四郡은 무왕이 침공하기 前부터 있었던 명칭으로, 서전 한서 지리지 등에 간혹 보인다. 그리고 그 四郡의 位置는 遼西와 遼東에 있고 조선 반도와는 먼 거리에 있던 위치며 반도에는 郡을 설치 할 인구도 없었다. 그리고 그곳 번조선 조선족은 한나라 점령하에 소위 四郡으로 나누어 한나라의 封侯를 받은 四人의 반역자가 다스리게 되었다. 그러나 직접 점령한 영토는 우거왕의 영지일 뿐 그것도 원래 있던 四郡 전부가 아니다. (遂定朝鮮爲樂浪臨沌玄?眞番四郡封參爲?淸候有功爲陰爲萩?候?爲平州候長爲幾候最以父死頗有功爲捏陽候, 鑑易) 즉 드디어 조선을 평정하고 四군에 삼을 홰청후에 음을 추저후에 협을 평주후에 장을 기후에 취는 그 아비가 죽고 공이 있음으로 낙양후에 봉했다 라고 하였다. 일본 총독부 교과서는 낙낭군을 조선 반도에 갔다 놓았으니 그것은 조선 역사를 고의적으로 축소 시키기 위하여 그런 조작을 한 것인지 아니면 古史탐사의 미숙으로 인한 무지인지 알 수 없으나 우리 나라 식민 사관의 원인이다. 漢무왕은 땅을 점령 하여보니 그전부터 전해 들은 바는 있으나 동이족은 부유한 문화 선진 국민으로 중원 여러 민족들을 감복케 하였고 한족의 문명화에 큰 자극을 주었다.  
 

後世중국 역사서는 이것을 기자가 조선에 와서 조선인을 교화 시겼다고 왜곡하였다. 그러니 中國 古典에 이와 반대로 동이 문화 제도를 배워서 중원의 정치 문화 예절 도덕적 치세의 순리를 발전시켜 왔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 한무왕이 반역자들에게 내린 봉작 또한 조선에서 배운 단군 대제국의 통치 제도를 본뜬 것이다. 한족은 빠른 시일에 東夷의 선진 문화와 기술에 힘입어 농토 개간과 목축지 조성에 성과를 올려 생활 안정을 찾았다. 동이 문화의 발전은 그것은 또 중원의 각 민족에게 예절을 알게 하고 모르면 동이 족에게 구하였으니 무릇 오랑캐라고 불리는 만이(夷) 융적 四夷(조선 족의 별칭이라 하였음)는 오히려 문명 제도인 공작, 후작, 백작, 자작, 남작(公, 候, 伯, 子, 男) 이라고 부르는 벼슬의 고하를 이르는 작호 제도를 두어 그렇게 불렸다.所謂中國失禮求之四夷者也凡蠻夷戎秋總名四夷者猶公候伯子男皆號諸候云, 漢書東夷傳)

  이와 같이 한무왕의 번 조선 침략은 한무왕의 武威를 四方에 뽐내고자 하는 그의 야만적 공노심도 있었거니와 단군 제국의 문명 수입에도 큰 희망을 건 침략전쟁이었다. 이와 같이 정치적 문화적 先進 제도는 주나라때 이래 단군천王국으로부터 계속 중원에 수입되어 단군제국의 제후 열국에 대한 작위 제도 관직 제도 등이 중국에 전해졌음을 말한 것이다. 춘추좌전에 이르기를 공자께서 작위 제도를 담자에서 이미 빼앗거니와 (여기 담자란 산동성에 있는 단군제국의 열후임.) 사람에게 이르기를, 내가 듣기로는 천자의 관직 제도를 배운 것을 잃은 것도 조선 족에 있었던 것을 의심치 않는다 하였다.(左傳曰仲尼學官名於掘子旣而一告人曰吾聞之天子失官學在四夷其信也) 단군제국은 영토의 大小 강약에 따라 제후들의 작위를 정하였다. 단군 제국 시대에는 조선 반도에는 제후가 없었다. 제후를 봉할 만한 王국이 없었다. 인구가 희소 한 까닭이다. 한서지리지에 한 四郡에 관하여 요동군이 그 위치임을 분명히 하였다.(遼東郡 遼東元?郡樂浪郡)
 

첫째, 한무왕이 漢四郡을 설치했다는 것은 큰 誤錯이다 그것은 後世에 와서 唐書의 장난이다. 한서 지리지에도 樂浪으로(?狼)玄도는 옛조선의 나라 이름으로 한족이 호칭한 것이라 진번 임돈도 매 일반이다. 遼東과 함께 모두 幽州에 屬하였다고 하고 옛날 진번조선국이다 라고 (故眞番朝鮮胡國)했으니 四郡이란 한무왕이 원래 있던 地名에 郡을 일부 점령하여 四적에게 봉해준 것이다. 古代 朝鮮 단군 대제국의 열후였으며 일부는 번 조선에 속한 영지였다.
 

우거王國이 무너지면서 한무왕이 한때 차지하여 上記한 반역자들에게 봉지로 일부가 들어간 것이 분명 한 것인바 한무왕이 새로이 四郡을 설치했다는 근거는 없다. 그리고 그곳에 봉함을 받은 반역자들도 그 순간일 뿐 어떤 명분을 부처서 처형되었거나 패서인 된 것으로 보이니 그 후 그 지역이 고구려 영토로 회복된 끝인데도 그들의 이름은 다시는 나타나지 아니한다. 중국 역사상 반역자에게 주는 상훈은 언제나 순간적인 것이 그 통례이다. 다음 위치 문제인데 난데없이 조선 반도 평양 대동강까지 편입한 소위 일본 학자의 지론은 거론할 가치조차 없다. 한의 左장군과 번 조선의 싸움은 浿水가에서 있었고 이기지 못하였다.(左將軍擊朝鮮浿水西軍未能破天子爲兩將未有利乃使衛山鑑易) 중국측 사기는 패퇴한 싸움은 이기지 못하였다, 이롭지 못하였다, 등으로 기록한다. 이와 같이 패수 西쪽 즉 지금의 天津 지역에서 싸워서 두 장군이 모두 패하고 위산을 시켜 재물로 매수하여 반역자의 자체 내란으로 한나라가 승리 한 것인바 그들이 점령한 땅 즉 번조선땅의 위치를 알 수 있다.  
 

必要에 따라 별지 어수록
 

그 時代에 倭는 文學이란 아예 없는 未開한 時代였고 한이 遼東에서 우거王을 파하였을 當時의 기록에 朝鮮백성들은 전혀 서로 도적질 하는 일이 없고, 집에는 門도 해 달지 아니하고, 대문을 닫는 일도 없고, 婦女子는 정숙하여 음탕함이 없고, 遼東에 처음 관리가 就任해서 보니(여기서 말하는 官吏란 武王이 임이 封侯를 했은즉, 행정은 조선 족이 할 것이고, 漢寇의 軍吏 통제 要員일 것임) 백성을 다스리는데 六十余條目의 法規가 있어 참으로 좋은 法治제도로서 어진 文化 社會였다. 樂浪海中에는 倭人이 있어 百余國으로 나누어져 사는데 해마다 조공을 조선에 바치고 있는 것을 보았다. (是以其民終不相盜無門之戶閉婦人 貞信不淫郡初取吏於遼東吏見犯禁睍多至六十余條可貴哉 仁賢之化也 樂浪海中有倭人分爲百余國以歲時來獻見云) 라고 하였은 즉, 한족社會에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이러한 文明國을 보고 비록 힘으로 征服은 하였으나 史記를 쓸 적에는 오랑캐 胡國으로 表現하고 별별 명칭의 國名을 만들어 멋대로 쓰고 하면서도 亦是 君子國이라는 呼稱은 빼지 못한 것은 未開한 漢族 社會에 모범 됨을 일깨우지 않을 수 없음이랴 하물며 倭의 未開함은 문명과는 멀었으니, 거기에 우리 나라의 古代 史書가 있을 수 없고, 다만 日本明治開化後에 비로소 歷史學이란 日本의 榮光된 皇國史記 만들기의 御用史學家가 생겼는 즉, 거기서 무슨 古代朝鮮史가 나오며, 敢히 古代 朝鮮史를 論擧한단 말인가, 史學者는 그러한 사람들의 말을 흉내내는 것보다는 歷史를 硏究할 熱意가 있다면 유식한 옛 村老를 찾아 한 마디라도 들었더라면, 실로 史學徒의 眞實된 修業이 되었을 것을 一部 그릇된 史學書의 補完을 바라는 마음 간절함. 한무왕이 우거王을 破하고 번 조선 땅을 차지할 영토는 어떠하였는가 살펴보기로 하자.
 

진시왕이 연을 멸하고 中原을 통일 할 적에 옛날 大檀君 이래 조선 제국의 노른자위 옥토였던 黃河邊諸侯國의 三十余郡을 연이망함으로서, 자연 秦나라에 빼앗기고 四郡이 남고 진이 빼앗은 영토 안에 광막한 空地를 만들어 조선과의 충돌을 피하고, 상호 불가침조약을 맺고, 국경선에는 방위 진지를 견고히 만들어 그 一대의 요새를 수리하고 甲兵으로 엄중 방위하였다.(秦幷兼諸候山東三十余郡繕津關據險塞修甲兵而守之 漢書) 그 후 한이 진을 멸하고 진의 영토를 그대로 차지하고 조선의 故土를 돌려주지 아니하니 위만이 이를 분하게 여겨 한을 칠 궁리를 하였던 것이다. 漢은 진이 공지를 두고 방위하는 方法으로 泰과 똑같이 하여 조선과 불가침 조약을 맺고 그곳을 방비하였다. 그러나 한나라 기록은 그곳이 멀고 방위하기 어려워서 진나라가 정한 제도를 그대로 따랐다고 하였다. 무왕이 번조선을 침탈한 것과는 서로 상치되는 사기를 쓰고 있다. 이와 같이 武왕이 빼앗은 번조선영토는 黃河변 공지였던 난민 정착地 및 其周圍一帶와 遼河西土一帶의 山東 四郡의 일부이다. 한서 地理志에 四郡이 유주에 속했다는 것과 一致하는 것이니 우거王의 영토와 王검성이 있는 험독을 요하 東쪽으로 추정한 것은 후세 史家의 근거 없는 잘못된 추측이다.
 

더욱이 한사군의 위치를 조선반도까지 갖다 붙이는 것은 무지한 망발이다. 武왕과 같은 폭군적 史記 변조 명령에 의하여 상호 모순된 기록을 하게 된 것임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후세 당의 이세민은 요동 전체를 한 四郡이라 하고 옛 中國땅이라고 망언하였다. 이번 朝漢大戰후 한구는 여러 차례 요하건너 東域에 침입하여 약탈 행위를 하였으나, 조선측의 고등의 후예들의 신무용맹에 그때마다 폐산 하였다. 이것은 무왕의 침략 명령이 아닌 지방 병사의 약탈 등 호기심으로 인한 전쟁도 겹쳤다. 무왕은 이번 朝漢大戰에서 초전에 의기양양하여 조선 帝國과도 이제는 항쟁할 수 있을 것인데 列國 번조선쯤이야 하고 얕보고 그 무위를 요동에 떨치기 위해 친히 大軍을 몰고 와서 싸움을 독려 하다가 大敗하고 달아나 다시는 요동에 걸음 하지 아니하였으니 조선군의 용맹에 그 얼마나 놀랐을 것인가. 한낱 조선열후국의 왕검성을 함락시키지 못한 무왕은 전기 한바와 같이 출전 장수들을 까닭 없이 모두 죽이고 마지막 승전하고 돌아온 대장 순체를 하옥하고 죽이려 하니 대신들이 일제히 간하여 가라대, 순체가 약간의 과오가 있다 하여도, 그것은 敵이 결사 항전 함으로 생긴 것이옵고 지금 승전하고 개선한 장군을 큰 허물없이 참수하는 것은 불가하옵니다.
 

하니 무제는 할 수 없이 죽이지 못하고 폐하여 서인을 만들어 추방하였다. 패전의 책임을 그리로 돌려서 자기의 敗戰수치를 감추고 국민의 원망이 자기에게 돌아오지 않도록 함이었다. 전사자가 너무나 컸슴이다. 역사학자 반사고, 사마천 등이 무왕의 패전 역사를 사실대로 쓰다가 모두 형벌을 당하고, 그의 행적을 찬란하게 함양하는 역사 위조를 하고 수치스런 기록은 폐기한 후 일단 풀려났다. 그것은 도처에서 승전을 뽐내던 무왕이 우거왕에게 패하여 돌아오고 그 파견한 한나라 군대가 조선 군에게 연전연패하고 그가 믿었던 장수들이 패전의 원인을 서로 떠미는 추태를 부리니 분하기도 하고 막판에 간 자의 모략이 성공하여 財物로서 매수하여 적국에 반란이 일어나 스스로 망하여 승전하였으나, 옳은 전쟁으로 이긴 것이 아님에 화풀이로 패전 책임을 물어 무고한 장수들을 죽인 것이다. 당초 무왕은 번조선 변방 防衛세력을 파하고 발해南에 창해군을 설치하였으니, 해모수와 고구려의 공격으로 八年을 싸웠으나 지탱하지 못하고 철수하였다. 무왕은 이 전쟁으로 국고가 탕진되어 이후 요동을 넘보지 못하였다. 한무왕은 해모수王과 고구려 동명성왕이 죽은 후에야 번 조선을 급기야 정복하여 그의 필사적 욕망을 달성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