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역사 침탈(侵奪)

BC 28세기 요하문명의 濊貊族이 남하 하여 夏, 商, 周를 건국하면서 황하문명을 일구었으며, 鮮卑族이 秦, 漢, 隨, 唐을 건국했습니다. - 기본주제 참조

홍익인간·인류공영/환단고기·한민족역사

24. 한무왕의 조선 반도 海路침입 실패와 신라의 건국

자연정화 2013. 8. 24. 12:45

二十四. 한무왕의 조선 반도 海路침입 실패와 신라의 건국

 

요동은 한나라의 색위 국경 밖이다. 진시왕은 불로초가 나는 삼신산을 가려면 조선 제국과 전쟁을 해야 하고 한무왕은 삼신산을 가려면 고구려와 싸워야 했다. 그들은 승산 없는 전쟁을 할 수는 없고 바다를 건너 바로 건너가서 신선이 나타나서 불로초를 구해 준다고 믿을 수도 없는데 적이 해로를 차단하면 속수무책으로 잡혀 죽을 것임에 감히 할 수 없는 일인데 무왕은 만년에 진시왕이 구하지 못한 불로초를 구하고자 이성을 잃었다. 무왕은 멀리 동해 바다를 바라보다가 봉내산에 건너가리라 선언하였다. 侍臣 중신들이 크게 놀랐다. 군신(群臣)이 간하여도 막무가내였다. 동방삭(東方朔)이 간하였다. 동방삭은 중원 제一의 장수자로 유명한 인물이다. 신선이 나타나는 것은 자연스럽게 얻는 것이옵고 조급하면 이익 되지 못합니다. 봉내산은 수중에 있는 나라에 있고(東海之內北海之隅有國名曰朝鮮天毒其人水居倚人愛人) 여기 물에서 산다는 것은 바다에 둘러싸인 나라의 산에 산다는 뜻이다. 위험한 산악 지역에 가서 신선은 못 만나고 주위 적에게 잘못 포위 되면 어찌 하옵니까? 그 곳에는 사람이 살지 아니하나 요동의 고구려가 그들의 후방에 적이 침입하는 것을 묵과하지 아니할 것입니다. 

 

대군을 동원하여 싸울 수 없는 것은 진시왕과 같은 처지입니다 하였다. 무왕은 일찍이 요동을 거처 조선 반도에 가고자 발해에 창해군을 설치하여 동부여와 교통을 터서 후원을 얻고자 하였으나 고구려에게 패하여 창해군을 철수하였던 것이다. 무왕은 나이를 헤아릴 수 없이 장수한 者 東方朔의 말을 따라 바다로 조선을 침입하는 일을 중지하고 동방삭이 시키는 데로 궁으로 돌아가서 조용히 신선의 출현을 기다렸다. 무왕은 그 후 계속 발해 근방 태산에 행차하여 제사도 지내고 높이 二十丈이 되는 大지점대를 세워서 정성을 드리고 方士를 봉내 방장에 보내어 신선을 만나도록 하라 하고 다시 東으로 태산을 찾아 上帝에게 제사를 올려 볶음을 빌고 친히 발해에 나아가서 멀리 東녘 하늘 아래 三神山 봉내방장을 바라보며 간절히 신선이 불로초를 가지고 올 것을 빌었다.(太初元年冬十月上行幸泰山十二月甲午朔旦冬至祠上帝於明堂東至海上考入海及方士求神者莫驗然翌遣冀遇之十二月甲午朔上親禪高里?后土臨渤海將以望祀逢來之屬冀至朱延焉, 漢書) 그러나 아무런 효험도 없었다.  

 

무왕은 이에 위험을 무릅쓰고 조선 반도를 침공하겠다고 우겨서 東萊(山東半島)에 수군을 집결케 하여 발해에서 一개 군단을 이끌고 군신의 만류를 뿌리치고 三신산에 신선을 만나러 진격하였다. 그리하여 바다에서 태풍을 만나 상륙하지 못하고 十여일을 머물러 있다가 돌아왔다.(上欲浮海求神仙君臣諫弗聽會大風冥海水彿涌留十余日及還, 鑑易) 무왕은 다시 또 선단을 이끌고 갔다가 四日후에 어루선(御樓船 인군타는배)만 돌아왔다고 하였다. 여기 어루선을 호위한 병선들은 어찌 되었는지 어찌하여 어루선만 돌아왔는지 전혀 기록이 없다. 당시 조선 반도는 한무왕의 군단을 격퇴 할 만한 인구도 군사력도 없는 시기였다. 아마도 상륙도 못하고 고구려 순군에게 패멸당한 것 아닌가 한다. 이후로는 무왕은 진시왕 못지 않게 불로초 구하던 그 일을 단념하고 세상에 어찌 신선이 있겠는가. 짐이 간사한 무리들에게 속은 것이로다 하고 불로초 구하는데 동원된 방사, 도사 등을 모두 해체해 버리고 두 번다시 바다 건너 三神山에 간다는 말을 하지 아니 하였다. 한무왕의 三神山 불로초 구하는 일로 많은 인명을 발해에서 잃었으며 이에 관련된 조정의 궁인과 신료들을 죽인 자도 百여명에 이르렀다고 감역에 기록이다. 한서에는 봉내방장의 신선을 만나기 위하여 바다를 건너갔다가 十日만에 혹은 四日만에 어루선이 되돌아 왔다고 기록하였으나 뽐내는 것을 즐겨 대군을 동원하여 四方을 정복하는 무왕이 배한척을 가지고 단독으로 건너갈 이치는 없고 필연코 해상에서 고구려 수군에게 함대가 전멸되고 무왕탄 배만 경우 도망쳐서 살아온 것 아닌가 한다.

 

한무왕의 조선 반도 침공은 그 자세한 상황이 역사서에 기록되지 아니하고 다만 어루선 즉 황제가 타는 큰배가 돌아왔다고 만 기록하였다. 그것은 아마도 패전의 수치를 남기지 않기 위함일 것이다. 한무왕이 불로초를 구하기 위하여 신선이 사는 조선 반도 가려면 요동을 거처서 가든지 아니면 동해 (황해)를 건너야 하는데 조선 고구려 군과의 싸움을 피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동해를 건너 직접 상륙을 시도하였다고 보인다. 그것은 조선반도 안에는 싸울 상대는 없는 사람이 거의 살지 아니하는 상태이기 때문이다. 무왕은 아마도 상륙하기 전에 태풍을 만나고 고구려 수군의 습격을 받아 대부분의 선박과 군사를 잃고 구사일생으로 돌아온 것으로 보인다. 무왕은 결국 세사람의 신선이 산다는 삼신산(東海中三坐神仙所居的山故稱三神山)에 가보지도 못하였다. 이와 같이 진시왕과 한무왕은 태산에 올라 동방 하늘을 바라보며 오지 아니하는 신선을 기다리며 건너가지 못하는 삼신산 봉내방장을 바라보며 애타게 기다리다가 하늘이 정한 수명을 어찌하지 못하고 죽었다.  

 

한반도 혹은 조선 반도라고 불리는 三神山이 있고 동래방장에 불로초가 나고 신선이 산다는 높은 산과 맑은 계곡 세상에서 가장 맑은 공기와 먹으면 약이 되는 물 온갖 영기 있는 휘귀나무 이 세상 아무 곳에도 없는 불로초로 일컬어지는 千년 묵은 산삼이 나는 곳 일명 해중 삼신산은 처음에 농토가 없고, 목지가 없고, 말을 달리고 길우는 광활한 평야가 없어 이곳에 사는 사람은 극히 소수의 남하한 동이족과 남방에서 풍랑으로 조난한 소수인이 살고 있었다. 그러다가 중원 대륙과 요동 만주에서 부족간 전쟁과 민족간 전쟁이 빈번히 일어나서 패전한 동이족피난민이 조금씩 이주하여 기원 전후에는 상당수의 인구가 유입되었다. 그리하여 BC 三十年경에는 반도 동남 지방에 나라가 생겼으니 그 건국 경위는 중원에서 한무왕의 침략으로 고조선 족의 여러 집단이 피난하여 조선 반도로 건너와서 여러 小國을 이루었으니 가라대,  

一. 曰閼天楊山村이니 瓢巖峯에 웅거하고

二. 曰突山高墟村이니 兄山에 웅거하고

三. 曰茂山大村이니 尼山에 웅거하고

四. 曰覺山珍支村이니 花山에 웅거하고

五. 曰全山加利村이니 明活山에 웅거하고

六. 曰明活山高耶村이니 金剛山에 웅거하였다.

 

이들 나라는 극히 좁은 지역으로 三國 유사에도 산골이라 하였다. 어느날 고허 촌장이 멀리 나정 방림들을 바라보니 말이 꾸부리고 앉아서 큰 알 한개를 지키고 있는 것을 주워서 깨어 그 속에서 나왔다고 하는 혁거세라는 十二세 소년이 있었는데 어려서부터 보통 사람과는 다른 위인이였다. 각부에서 이 소문을 듣고 모였다. 상기한 각부 촌장들이니

 

一. 고허부장 소벌도리

一. 무산대수부장 구레마

一. 각산진지부장 지백호

一. 금산가리부장 지타

一. 명환산고야부장 호진  

 

以上 六부장이 공동 합의로 혁거세를 신라王으로 추대하였다.박모양의 알에서 나왔다. 하여 박혁거세라 하였다. 도읍을 서라벌에 정하고 비로소 반도 안에 가야국에 이어 국가 형태를 갖춘 王국이 탄생하였다. 진한, 변한, 등 주위 소국들을 병합하고 농경과 잠업을 장려 개발하여 점차 부강을 이루어 주민의 생활이 윤택하여 지난날 중원의 풍요로운 옥토를 버리고 피난 온 고통을 씻었다. 남만주의 낙랑이 군사를 이끌고 약탈하러 왔다가 신라인이 대문을 밤에도 잠그지 아니하고 곡석을 야적 하여도 도둑이 없음을 보고 낙랑 군은 그 높은 도덕성에 탄복하여 우리가 여기서 저것을 약탈해 가면 도적 떼와 같으니 지난날의 번조선땅 한구와 무엇이 다르겠느냐 하고 서로 부끄러워하여 그대로 물러갔다. 신라인은 번조선과 고구려 등지의 난민으로서 고도의 문명 의식을 가져 주경야독하고 근면한 문화인 이였다. 박혁거세거서간(朴赫居世 居西干)은 BC 五七年 十三세에 등극하여 역년 六十 一年에 서거하고 남해 자웅이 후사로 즉위하였다. 혁거세王이 죽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낙랑국이 상중을 틈타 신라를 습격하여 서라벌 수도를 포위 공격하였다. 신라인은 이러한 부도덕한 야비 행위에 분개하여 결속하여 항전하였다. 낙낭국은 그들의 인국에 대한 부도덕한 공격이 성공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철수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