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역사 침탈(侵奪)

BC 28세기 요하문명의 濊貊族이 남하 하여 夏, 商, 周를 건국하면서 황하문명을 일구었으며, 鮮卑族이 秦, 漢, 隨, 唐을 건국했습니다. - 기본주제 참조

홍익인간·인류공영/환단고기·한민족역사

26. 太祖황제가 遼東의 漢寇를 축출함과 아울러 중원 고리국 故土를 회복

자연정화 2013. 8. 24. 12:47

二十六. 太祖황제가 遼東의 漢寇를 축출함과 아울러 중원 고리국 故土를 회복

 

漢광무가 죽고 환왕이 왕위를 이은 후 한구가 요동을 침범함에 고구려는 다시 요동 六현을 공략하고 이어 안왕이 王위를 계승함에 五年에 사신을 파견하여 현도 군에 침입한 한구의 철수를 요구하였으나 실행되지 아니함에 태조 황제는 현도후 예맥 거수로 하여금 한태수 경기(耿夔)를 토벌케하여 화려성을 탈환하고 반격해 온 후임 현도 태수 요광 유주자사 빙환 요동 태수 채풍 등이 대거 출정 요새를 넘어 현도군에 출격하여 예맥거수를 공박함에 태조 황제는 太子 수성으로 하여금 大軍을 이끌고 한구를 토벌케 하였다. 太子 수성은 太祖황제를 따라 역전의 공을 쌓아 용병에 능숙하고 천성이 총명 활달하였다. 한구가 고구려 현토후(玄?候)를 파하고 의기 양양함에 수성太子는 소수의 군사를 전면에 이끌고 와서 화친할 뜻을 사자로 하여금 전하여 적으로 하여금 방심케 한 후 험한 요새지에 군사를 매복하고 大軍을 멀리 우회하여 현도 요동 번성의 한구를 일거에 섬멸하였다. 다음해에는 요동에 주둔하고 있는 一線 部隊로 하여금 요대(遼隊)에 침입한 한구를 소탕케 하였다. 반격해 온 한군大守 채풍 경기 병조연 공손보 등이 大軍을 몰아 고구려 軍을 추격하다가 신창에 매복한 고구려軍 八千정병의 기습을 받고 요동 태수 채풍 공조연 용서 ?마연 공손보 등 한나라 장수 百余명이 전몰하고 황제의 친정군(親征軍)이 패주하는 한 군을 추격하여 섬멸하였다.(蔡諷等追擊新昌戰沒功曹耿耗兵曹?龍端兵馬椽公孫輔以身?諷俱沒於陣死者百余人 後漢書)

 

이어 태조 황제는 친히 군사를 지휘하여 마한 예맥병 수千명으로 현도 군에 출몰하는 한구를 유인케 하고 요동 일대에 침입하여 노략질하는 한구를 大軍으로 완전 소탕하던 中, 한은 위급함을 벗어나고자 부여에 구원을 요청하였다. 고구려가 북부 중원을 점거하면 하남의 백제도 위태로운 것이다. 이때 고구려는 요동에 침입한 한구를 소탕하고 연하여 右北市 탁군에 침투한 한구를 격퇴시켜 漢은 장차 화북 전체가 위기에 놓이게 된 것이다. 백제는 부여王子 위구대로 하여금 정병 二萬을 황하 북류 고구려軍 후방에 침투시켜 한軍과 전후로 협공하여 고구려 군은 일진을 패하고 진격을 멈췄다. 여기 부여는 백제와 同一體다. 高句麗 太祖황제는 옛고리국 故土의 대부분을 회복하는 위업을 이루고 그의 생애는 끊임없는 한구의 침입으로 여러 차례 親征에 나서야 했음으로 馬上에서 오랜 세월을 보냈다. 太祖황제가 붕어 하심에 한왕은 弔喪所를 차리고 백관을 거느리고 東郊 조상소에 나와 애곡하였다. 비록 서로 싸운 적국 황제이나 그의 위대한 인품에 경의를 표한 것이다. (帝爲 高麗王璉擧哀於城東行宮, 魏書) 처음 고구려 太祖 皇帝가 百歲의 장수를 누리고 붕어 하셨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한은 크게 흥분하여 한안왕은 백관을 모아 묘의를 열고 대책을 의논하였다.

 

지난 전쟁에서 요동 태수 광은 구사일생으로 살아 남았었다. 요광이 아뢰었다. 고구려는 강대하여 정도로서 칠 수 없습니다. 지금 상중에 혼란이 있을 터이니 이때를 놓치지 말고 대군으로 음습하면 고구려는 파하고 요동을 점령할 수 있을 것이옵니다. 실로 동방불패의 고구려를 파할 수 있는 기회이오니 고구려를 파하면 그 다음은 요서의 백제를 파하고 하남을 회복할 수 있을 것이옵니다 하였다. 군신이 모두 찬동하여 한 王은 크게 기뻐하여 출사 준비를 서두를라 하였다. 이에 상서(尙書)진충이 간하였다. 신은 듣자온데 어진 인군은 남의 불행을 나의 행운으로 하지 않는다고 하옵니다. 전일 요광은 고구려와 싸워서 패하였사온데 적의 상중에 습격하는 것은 오른 일이 아닙니다. 지난날 고구려는 중원에 깊이 침입하였으나 의리를 버리지 아니 하였사옵니다. 고구려는 강대하여 섣불리 대전할 수 없습니다. 만일 싸워서 성공하지 못하면 예절을 존중하는 고구려는 중국의 의리 없음을 멸시하고 깊이 원수를 삼을 것이오니 이일은 국가에 이롭지 못하오니 조문사를 보내어 지난날의 그들 잘못을 잊고 선린을 이루자고 하면 그들 또한 따를 것이옵니다 하였다. 여기 모든 백관이 고구려의 강력함을 두려워하여 반론하지 아니하였다. 안왕은 그 말을 따랐다.

 

고구려에 문상하는 조문사를 파견하여 수성황제(차대왕)를 위로하였다. 수성황제는 화이(和이) 표시로 수千名의 한인 포로를 석방하였다. 요동은 원래 중원 색위(국경요쇄)밖으로서 지광민희(地壙民稀)라 하며 땅은 거칠고 넓으며 거주하는 주민은 드물다 하여 돌아보지 않는 땅이 였는데, 한무왕이 중원의 四方을 정복하여 무위를 뽐내고자 하는 야심에 찬 무력 시위로 번 조선이 망하였으나 결과로 번 조선에서 요동으로 많은 피난민이 유입하고 만주에 건국한 고구려의 발전으로 요동이 개발되니 역대 중국王은 동이의 땅, 돌아보지 않던 요동을 東北 지방의 수장들을 시켜 요동을 계속 침공하였다. 그것은 정략적 통치자의 제후들을 다스리는 계책도 그러한 것이다.

 

고구려 신大王 四年 현도 태수 경림이 대군을 일으켜 침공하였다. 때에 현도 태수는 공손도 경림 등이고 요동 태수도 여러 명이다. 명예직으로 그렇게 하는 것이 통례이고 행직은 아니다. 고구려 조정은 묘의를 열어 의논하였다. 군신의 공론은 한구가 비록 대군이나 우리 군사는 날래고 용맹하고 견고한 요새가 있으니 두려울 것이 없다. 우리가 지키고 나가서 싸우지 아니하면 겁을 먹고 있다고 업신 여길 것이옵니다. 한편으로 지키고 한쪽으로는 나가서 싸우면 능히 이길 것이옵니다. 하였다. 그러나 승상 답부가 말하였다. 적의 대병력을 쉽게 파할 수 없습니다. 千里운량에 대군을 먹여야 할 적은 결코 오래지 못할 것이옵니다. 굳게 닫고 싸우지 아니하면 적은 물러갈 수밖에 없을 것이옵니다. 이것은 여러 번 경험한 것이옵니다. 하였다.帝는 그 의견을 따랐다. 그리하여 영성(?城)에서 지키고 나오지 아니하니 半年만에 한 군은 양식이 떨어져 물러가기 시작하였다. 승상 답부는 제장을 모아 놓고 훈령하였다. 지금 한구는 양식이 떨어져 굶주린 군사들은 앞을 다투어 돌아가고 있다. 그간 한구는 끊임없이 침략을 일삼았고 우리 영토를 계속 점령하고 있다.

 

天子께서 지금 친히 이곳에 행행하사 나라를 지키는데 노심 하시니 제장은 때를 놓치지 말고 적을 추격하여 섬멸하라 하고 정예 기마 五千기로 한 군을 맹추격하여 좌원 평야에서 一大 소탕전이 전개되어 혼전중 후군이 당도하여 포위 섬멸하였다. 전하는 바 한은 이번 전쟁에서 필마불반(匹馬不反)이라 하여 한사람도 살아서 돌아가지 못하였다고 하였다. 中國사기는 패전한 전쟁이니 자세한 기록을 아니하였고 우리의 사기는 자세한 기록이 없어졌다. 승상 답부는 대공을 세우고 百여세의 장수로 세상을 떠나니 신대王 백고 황제는 친히 상가에 나아가서 애곡하고 후이 장사 지내어 七日간 조의를 파하고 애도하였다. 동 十二月에 황제 붕어 하시고 고국 천왕 남무 황제가 즉위 하신 지 六年에 요동 자사 공손도가 군사를 일으켜 침공하였다. 이보다 앞서 先大王이 붕어 하신 후 太子 발기(拔奇)가 불초하여 국인의 공론으로 백관이 상의하여 태자를 페하고 차자인 남무를 황제로 추대하니 발기는 대노하여 휘하 장병과 三萬 호구를 들어 공손강에게 항복하여 돌아갔다. 이 사건은 다음에 그 내막을 자세히 서술한다.

 

공손도는 이러한 고구려의 변란으로 능히 파할 수 있다고 판단하고 대군을 일으켜 침공한 것이다. 제는 太子 계수를 시켜 적을 치게 하였으나 패하고 돌아왔다. 남무帝는 사태가 심상치 아님을 알고 친히 대군을 이끌고 적을 포위 공격하여 지난날의 전승지인 좌원에서 적을 섬멸하니 적의 시체가 산더미를 이루었다. 남무황제는 용맹하고 웅위한 체구의 거인이었다. 후덕한 품성이나 유덕 무모하였다. 황후는 제나부 우소의 딸로서 미모의 야심찬 여인이었다. 중위 대부 좌가려등 요직을 모두 황후의 친척이 차지하고 횡포를 부려 남의 집 전택을 마구 빼앗고 자녀를 납치해서 첩실 종복 등을 삼고 국인이 크게 반발하였다. 황제는 이 사실을 알게 되어 대노하여 이들을 모두 참수한다. 선포하고 잡아 들이라 명하였다.

 

그러나 이 소식을 전해들은 좌가려등 일당은 반란을 일으켜 왕검 성을 공격하였다. 제는 충의군을 징모하고 기내 병마를 일으켜 반란군을 토평 하였다. 반란을 진압한 후 제는 백관을 소집하고 사후책을 의논하였다. 천자 가라대 간신 소인배가 높은 자리를 차지하여 권력을 남용하고 조정을 어지럽혀 백성을 잔휼하였으니 이것이 모두 짐의 부덕한 소치라 이제 국정을 쇄신코자 하니 경등 四部는 난국을 수습할 현량을 추천하기 바라오 하였다. 이에 四部에서는 모두 안류(晏留)를 추천하였다. 이에 제는 안류를 불러 국정을 바로잡도록 위임하였다. 안류가 天子앞에 나아가 아뢰었다. 臣이 용열하와 국정을 바로잡을 능력이 없사옵니다.

 

신이 한사람을 천거하여 폐하를 도와 사직을 반석 위에 올려놓고자 하옵니다. 서압녹골작이 좌물촌에 을파소라는 사람이 있사온데 유류선황제의 (臣下乙素)외손자 이옵니다. 품성이 강이하고 지려가 깊으며 세상에 나서지 아니하고 스스로 노력하여 살고 있사옵니다. 폐하께서 이 나라를 통치함에 있어 이 사람을 쓰지 아니하면 성공을 거둘 수 없사옵니다 하였다. 帝는 기뻐하여 그를 청하는 정중한 계서를 내려 사자로 하여금 예물을 갖추고 가서 짐의 바람을 전하고 데려 오라 하였다. 帝는 그를 맞아 예로써 대하고 중위 대부를 제수하고 우대의 작위를 더하였다. 그리고 가라대 짐이 선조 열성의 대업을 이어 받아 백성을 다스림에 덕이 박하고 재주가 모자라 밝게 다스리지 못하니 경의 높은 인덕으로 오랜 고생 속에 살아오는 민초를 구해 주기 바라오. 지금 짐의 바람을 버리지 아니하고 이와 같이 나와 주니 이는 비단 짐의 행운이 아니라 사직과 만민의 복이오, 짐의 어두움을 일깨우고 성심으로 나라 위해 봉사하기 바라오 하였다.

 

파소는 비록 충성을 다하여 天子를 받들고자 하나 그 직책이 그 일을 능히 해낼 수 있는 책임을 지는 자리가 못되는 지라 天子에게 아뢰었다. 臣은 우둔 하와 감히 폐하의 엄명을 감당할 수 없사옵니다. 원컨대 어진 사람을 구하여 그 일을 맡기게 하옵소서 하였다. 帝는 그 뜻을 알아차리고 다시 파소를 승상에 제수하고 大小국정을 위임하였다. 이에 백관 황족들은 파소가 아무런 국가 공훈이 없으면서 승상의 자리에 올라 영지 정사(令知政事)의 대임을 겸하니 불안과 질투가 심하였다. 사태가 이러함에 帝는 하교하여 가라대 인권에는 귀천이 없음이라 짐은 반드시 개혁을 단행할 것인바 국상을 비방하거나 命을 따르지 않는 자는 참하리라 하고 엄명을 내리었다. 파소는 퇴조(退朝)하여 주위 사람들을 돌아보고 말하였다. 선비는 때를 만나지 못하면 숨어 지내고 때가 오면 출사(出仕)하는 것이 상도(常道)라 금상께서 후의로 나를 대하시니 내가 지난날 편하게 은거하던 것을 어찌 다시 생각하겠는가 하였다.  

 

그는 성심을 다하여 국정을 보살피고 밝은 정치를 펴서 나라에 봉사하여 상벌을 삼가하고 백성을 편하게 하는 일이면 그 어떤 고초도 앞장서 행하니 오래지 아니하여 나라가 안정되고 위적도 넘보지 못하였다. 제는 안류에게 이르기를 짐이 그대가 파소를 천거하지 아니하였다면 어찌 오늘의 성공을 거두었겠는가 이것이 경의 공이로다 하고 안류를 대사자에 제수 하였다. 제는 재위 十九年에 붕어 하시니 산상왕 연우(延優)가 뒤를 이어 황제 위에 오르니 나면서부터 눈을 뜨고 사람을 보니 그의 증조부와 닮았다하여 별명 궁이라 하였다. 선재가 무사(無嗣)하여 둘째 동생이 嗣位(사위) 한 것이다. 처음 故國川王이 붕하심에 우황후는 주위를 단속하여 상사를 감추고 밤에 황제의 첫째 동생 발기(拔奇 )를 찾아갔다. 후는 발기에게 말하였다. 황제께서 無嗣하니 아즈버님 (큰아우)께서 대위를 계승하심이 좋을 것입니다 하였다. 발기는 아직 兄이 죽은 줄 모르는지라 형수에게 일렀다. 하늘의 역수는 절로 돌아가는 곳이 있는지라 경솔하게 입에 담을 일이 아니옵니다. 하물며 황후께옵서는 사사로이 야간에 부인의 몸으로 사문에 나와 이런 말을 입에 담으니 이 무슨 예법이오 하고 못마땅해하였다. 우후는 무안하고 부끄러워 아무말도 못하고 나와서 다시 다음 시동생 연우(延優)집을 찾아갔다. 연우는 의관을 정제하고 우황후를 맞이 하였다.

 

주석을 차려 좌정한후 우후는 입을 열었다. 大王께서 붕어 하신후 嗣子가 없으니 발기가 뒤를 이어야 할 것이나 내가 그 일로 가서 의논하였든 바 그는 나를 두 마음을 품었다고 모욕하고 무례하니 내가 작은 시숙을 찾아 왔습니다. 마땅히 大位를 이어 주기 바라오 하였다. 연우가 이 말을 듣고 숙연히 자세를 고치고 예를 올린 후 스스로 칼로 주찬을 뵈어 올리었다. 그는 고기를 자르다가 잘못하여 손가락을 다쳤다. 황후는 직접 상처에 붕대를 감고 친절하게 치료하였다. 밤이 깊어 황후는 궁으로 돌아갈 때 연우에게 일렀다. 밤이 깊으니 혹여 무슨 사고가 날까 두려우니 나를 전송해 주기 바라오 하였다. 그리하여 연우는 함께 궁으로 돌아가 손을 잡고 입궁하여 정분이 각별하였다. 밤이 새고 황후는 백관을 모와 天子붕어 하심을 선포하고 유명(遺命)으로 연우에게 후사를 전한다고 발표하고 즉일로 즉위식을 거행하고 연우는 황제 위에 오른 후 선재의 국상을 거행하고 故國川王이라 일호 하였다. 발기는 이에 대노하여 군사를 이끌고 궁을 포위하였다. 帝는 門을 닫고 일체 부름에 나가지 아니하였다. 발기는 소리쳤다. 

 

너는 어찌 兄을 제치고 황제가 될 수 있느냐? 위계질서를 어기고 황제 위를 차지한다면 내 너의 가족을 몰살할 것이다. 하고 부르짖으나 帝는 三日을 소리쳐도 응하지 아니하였다. 발기는 국인이 따르지 아니하고 힘으로 싸워서 이길 수 없으니 그 길로 처자를 데리고 공손도에게 가서 항복하고 공손도에게 고하였다. 아우가 지금 선제 붕하신후 兄인 나를 제치고 제위에 올랐으니 이것은 천리를 어김이라 형수의 간사한 술책으로 그리된 것이오니 원컨대 일시군을 빌려주면 대위(大位)를 찾고 그 은혜 잊지 않게 사옵니다 하였다. 연王 공손도는 현인 군자라 그 말을 듣고 고구려王이 옳지 못하다 하여 보기 三萬을 빌려주었다. 파기는 三萬군을 이끌고 고구려를 급습하였다. 파기는 고구려에 당도하면 옛 부하들이 자기에게 호응하여 줄 것을 믿었으나 대응하여 주지 아니하였다. 한편 天子는 이 소식을 듣고 끝에 아우 계수(喬須)로 하여금 일지군을 이끌고 응전하였다. 발기는 기대 하였던 동조 장수가 없으니 三萬군으로는 고구려와 싸울 수 없어 패하고 달아나니 고구려 군이 대장 계수를 선두로 추격이 급하니 발기는 감당할 수 없는지라 계수를 돌아보며 외쳤다.

 

너는 늙은 兄을 죽일 것이냐? 이 말을 들은 계수는 兄弟간 우애의 情이 어찌 할 수 없었다.  兄을 보고 말하였다. 황제가 순위를 어기고 兄을 제치고 황제 위에 오른 것은 옳지 못하다 하여도 兄은 일시적 분을 참지 못하고 적에 의지하여 종묘 사직을 망치려드니 장차 죽어서 저 세상에 가서 선조를 어떻게 대할 것이오 하였다. 발기는 부끄럽고 할말이 없어 그 길로 배천(요하지류)으로 가서 빠져 죽었다. 계수는 兄의 시체를 거두어 초원에 장사 지내고 통곡하였다. 계수는 군사를 이끌고 돌아와 고하니 天子는 一喜一悲하였다. 이어 대연을 베풀어 출전 장병의 노고를 위로하였다. 계수는 가만히 天子에게 고하였다. 제가 兄弟간의 가정사로 兄님에게 말씀 드리겠습니다 하고 말하기를, 발기가 남의 나라 군대를 빌려 조국을 치고자 한 것은 실로 대죄 옵니다. 그러나 兄을 죽이지 못하였습니다. 하였다. 天子가 물었다. 그대가 전쟁에 이기고 그를 죽이지 아니하고 풀어 주어 그가 자살함에 심히 애통하고 통곡하였으니 이것은 나를 무도하다고 원망함인가 하였다. 이에 계수가 초연히 눈물을 흘리며 아뢰었다. 제가 이제 한 말씀 올리고 죽겠 사옵니다 하였다. 그것은 무슨 말이냐 하고 天子가 물었다. 계수 가라대 황후께서 선제의 유명으로 大王을 大位에 오르게 하였으나 大王께서는 사양하는 예의를 차리지 아니 하였습니다. 이미 있어 온 兄弟간 공경하는 의리가 없습니다. 신이 大王의 미덕을 나타내고자 시체를 거두어 장사 지냈사옵니다. 

 

이것이 어찌 大王의 노여움을 사고자 할 생각이 있겠습니까 大王께서 어진 마음으로 지난날의 미움을 잊고 예를 갖추어 죽은 형을 장사 지낸다면 이 어찌 세상 사람들이 大王을 옳지 않다 하겠습니까. 이것으로 臣은 할말을 다하였사오니 죽어도 한이 없사옵니다. 청컨대 유사로 하여금 신을 참하여 주시옵소서 하고 엎드려 죄를 청하였다. 帝는 그 말을 듣고 삼연히 눈물을 흘리고 가까이 다가가서 앉자 아우의 고개를 들게 하고 따뜻한 말로 위로하고 말하기를 내가 불초하여 미처 생각지 못하였도다. 이제 그대의 말을 들으니 참으로 과오를 알겠노라. 그대는 잘못이 없느니라 하고 위로 하니, 계수는 일어나 절을 올리니 天子 또한 함께 절하여 兄弟간의 우의를 회복하고 한때를 즐겼다. 帝는 그해 九月에 발기의 시신을 다시 거두어 왕후예로 장사 지냈다. 帝는 새로 황후를 들이지 않고 형수 우씨를 황후로 맞이하였다. 고구려의 친가나 처가의 형제간 미망인의 상혼은 간혹 있었으나 우리 나라 三國時代 후기부터 이것이 미풍양속에 어긋나고 사회 풍기에 좋지 못하다 하여 차츰 사라지고 이조에 와서는 큰 범죄로 간주하여 엄금되었다. 이조에 와서 극단적 사대주의에 빠졌으나 조선 제국의 군자국 자존심은 이어졌음이다. 일본과 중국의 일부에서는 지금도 이 풍속이 유지해 오고 있다. 황후 우씨는 후일 임종에 그가 누려 온 황후의 영광이 허무한 것임을 한탄하고 눈물을 흘리며 나의 비행을 저 세상에 가서 선대 종실 종친 앞에 무어라 말할 고 하며 한탄하여 마지않았다. 비록 수숙간 혼사를 법으로 금하지는 아니 하여도 도덕적 제약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