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역사 침탈(侵奪)

BC 28세기 요하문명의 濊貊族이 남하 하여 夏, 商, 周를 건국하면서 황하문명을 일구었으며, 鮮卑族이 秦, 漢, 隨, 唐을 건국했습니다. - 기본주제 참조

홍익인간·인류공영/환단고기·한민족역사

28. 고구려(高句麗)와 위(魏)가 합작(合作)하여 공손연을 멸(滅)하고 모용광이 고구려를 공략

자연정화 2013. 8. 24. 12:49

二十八. 고구려(高句麗)와 위(魏)가 합작(合作)하여 공손연을 멸(滅)하고 모용광이 고구려를 공략

고구려 10대산상왕 延憂 皇帝는 후사가 없어 근심하고 山川에 제사지내고 王子를 점지해 줄 것을 빌었다. 어느 날 꿈에 三신이 나타나서 이르기를 '장차 소후의 몸에서 太子를 얻을 것이니 근심하지 말라.'하였다. 다음날 天子는 국상에게 그 꿈 이야기를 하고 , "짐이 小后가 없는데(고구려는 황실의 기강이 엄격하여 소후 비빈 등을 두는 것을 자제하고 중국의 수백명 수천 명씩 후궁을 두는 제도를 오랑캐라 멸시하고 형편에 따라 후궁을 두어도 한 두 사람에 그치고 天子의 행동은 항상 백성의 귀감이 되어야 한다는 도덕적 관습이 있었다. 그러므로 남녀 불륜 사건도 엄격하게 다스렸다.)그러한 꿈을 꾸었으니 이 무슨 꿈이요."하고 물었다.

 

국상 을파소는 말하기를, "하늘의 뜻은 헤아릴 수 없사오니 두고 보십시오." 하였다. 그 해 八月에 을파소가 세상을 떠나니 온 나라 사람들이 크게 슬퍼하였다. 그는 오랜 세월 天子의 특별한 신망으로 국정을 처결하고, 天子는 인사와 재정을 그가 하는 데로 따랐다. 그가 죽고 喪家는 초라한 집에 약간의 책만 있을 뿐 아무 것도 없었다. 나라에서 내리는 녹봉이나 상금은 나라 안에 어려운 사람이 있으면 모두 구휼하는데 쓰고 없었다. 그리하여 국고는 항상 차고 군사는 강성하여 국위를 선양하였다. 몇 년이 지난 후 제사에 쓰는 돼지가 달아나서 주통촌이라는 마을까지 추적하였다.  

 

그러나 사나 와서 잡을 수가 없었고 특히 제사에 쓰는 돼지는 잘못 상하게 하면 엄벌을 받기에 더욱 조심스럽게 다루게 된다. 더욱이 전일에는 달아나는 제수용 돼지를 잡다가 다리를 부러뜨렸다. 이에 관리자는 정성이 모자란다 하여 처형된 일도 있었다. 그래서 관리자는 잡지 못하고 쩔쩔매고 있노라니 한 묘령의 미녀가 나타나서 보고 웃으며 쉽게 돼지를 달래며 잡아 주었다. 하도 신기하여 그 처녀를 보니 참으로 미인이며 품위가 있어 보였다. 관리자는 궁으로 돌아가서 이일을 이야기하였다. 이 말을 전해들은 天子는 호기심에 한 번은 그곳을 찾아가 보았다. 그리고 방에 좌정후 그 처녀를 불러 그처녀와 하룻밤을 보내고자 하였다. 그녀가 말하기를, "소녀가 어명을 거역할 수 없어 왔사오나 청이 하나 있사옵니다. 그것이 무엇 인가하면, 혹 자식이 생긴다면 버리지 않겠다는 약속을 하여주옵소서." 하였다. 帝는 허락하고 하루 밤을 지내고 환궁하였다. 다음해 봄에 황후가 이 말을 듣고 질투하여 군사를 보내어 죽이게 하였다. 이 소식을 듣고 그 주통촌 처녀는 남자 복장으로 갈아입고 달아났으나, 추격하여 온 군사에게 잡히고 말았다. 그리하여 군사가 칼을 뽑아 들고 찌르고자 하니 처녀는 크게 소리지르며 말하기를, "너희가 나를 죽이려 하는 것은 누구의 명령이냐?"하였다. 군사가 말하기를, "우리는 황후 마마의 명을 받들어 너를 죽이려 하니 그리 알라."하고 칼을 쳐드니 "잠깐만!"하고 소리쳤다. "지금 나의 뱃속에는 王子가 계시느니라. 너희가 나를 죽이는 것은 곧 왕자를 해치는 것이니 그러고도 장차 너희가 살아남을 수 있느냐?" 하였다. 군사들은 주춤하고 서로 돌아보고 그대로 돌아가서 황후에게 그대로 보고하였다. 황후는 질투 시기가 심한 사람이라 분노하여 언젠가 죽이리라 마음먹고 있었다. 天子께서 이일을 전해 듣고 다시 주통촌 그 처녀 집에 납시었다.

 

 帝는 물었다. "네가 임신한 것이 누구의 자식이냐?" 그녀가 답하여 말하기를, "소녀가 오늘까지 형제간에도 자리를 함께 하지 아니하옵니다. 어찌 감히 외간남자를 가까이 하오리까? 살펴 주옵소서." 하였다. 은밀히 알아본 바에도 그녀는 행동거지가 정숙하고 단정하여 사람들이 칭찬하였다. 帝는 그녀를 위로하고 상을 후하게 주어 보신을 잘하라 이르고 돌아와서 황후에게 일러 그를 질투하는 일이 없도록 하였다. 그후 황후도 다시는 해치지 못하였다. 그후 주통촌女는 생남하여 帝는 크게 기뻐하여 과연 꿈대로다 하고 그녀를 소후로 들이고 그 아이를 太子로 봉하니 그가 후일 동천왕 憂位居황제다. 산상왕이 붕어 하신 후 大位를 이은 憂位居 황제가 즉위하고 八年에 魏가 사신을 보내 화친을 청하였다. 우북평 하북 산동일대에서 오랜 싸움끝이였다. 帝는 이를 허락하고 화해가 성립되었다. 조조의 손자 조예의 시대였다. 이 ?는 위나라는 서촉의 제갈 량이 중원에 침입하고 강남의 손권이 양자강을 사이에 대치하고 있어 고구려가 동북을 치면 감내 할 수 없는 형편이었다. 한편 10年 봄에는 오왕 손권이 또한 사신 호위를 보내어 통호를 청하였다.  

 

고구려는 그 사자를 억류하고 돌려보내지 아니하였다. 고구려는 요동의 공손氏와 모용氏가 단군 제국 분열 후에 계속 고구려와 통합을 거부하고 동족상잔을 계속하고 강동 손권이 공손씨의 고구려 침공을 도와주었던 것이다. 이제 고구려는 위 나라의 제의를 받아들여 공손씨를 멸하기로 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오나라 사자의 목을 베어 漢나라에 보냈다. 공손씨는 하남 요서의 백제국과 연합하여 오히려 고구려를 멸할 궁리를 하고 있었다. 十一年 고구려는 위에 사신을 파견하여 요동의 공손연을 멸할 구체적 논의를 끝내고 고구려는 東北에서 위는 西南에서 공손연을 협공하기로 하고 고구려는 주부 대가로 하여금 十萬군을 이끌고 나아가 공손연을 치게 하였다. 위는 태부 사마애로 하여금 4萬의 군사를 이끌고 서남에서 공손연을 공격하였다. 공손연은 앞뒤로 적을 받아 불과 반년에 패망하였다. 공손연은 공손강의 아들이고 공손도의 손자다. 위가 요동 태수에 봉하여 고구려를 막게 하고 강동 손권은 공손연을 연王에 봉하여 고구려를 막게 하였다. 물론 허명의 봉작이나 공손연은 고구려와 합쳐 중원 고토를 회복하는 聖業에 고구려와 함께 할 생각은 아니하고 위와 오의 조종을 받아 고구려를 적대하였던 것이다.  

 

그것은 고구려의 타협을 모르는 강성적 정책도 한 가지로 동족 화합의 묘미를 발휘하지 못하는 조선족의 단점이 한족의 유연하고 타협적 유난성에 열등함을 들어낸 것이라 하겠다. 위장 사마애는 능수능난한 모략가였다. 그는 공손연을 파멸하지 아니하면 언제 또다시 지난날의 위험한 사태가 일어날지 모를 것임을 조정에 일깨웠다. 하남에 자리한 백제는 강성하여 공손연의 후원을 받고 있으며 백제와 인접한 서하국과도 친밀하니 공손씨가 고구려와 화친하면 그것은 곧 위나라의 존망이 걸린 문제인 것이다. 지난 광무 초기 동이가 중원을 석권하던 것과 같은 사태가 불원 닥쳐올 형편이다. 선수로 고구려를 회유하여 화친을 이룩한 것이였다. AD 238년이다.

 

그때 상항기록을 보면 120年전에도 다시 조선은 국경을 넘어 수관 장병을 살해하고 항주 서하 四郡을 점령함을 두고 보고만 있었으니 효안 황제 열성조 대업을 이어받아 백성의 재난을 구하고 평화를 누리도록 선정을 베풀지 못하고 적의 침략은 종횡무진으로 황하를 활거하여 그치지 않는데도 어찌할 수 없다고 한 바 (恭宗孝安皇帝五年夫余夷犯塞殺復吏人閏月丁酉赦?洲河西四郡戊戌詔曰朕以不德奉郊廟承大業不能與和降善爲人祈福災異蜂起寇賊縱橫夷狄猾夏戌不息 {鑑易}) 지난날의 大禍를 사전에 방지코자 조정을 설득하여 위험을 무릅쓰고 공손연의 연나라를 파한 것이다. 여기 하남 백제국과 인접한 하서 四군은 낙양과 불원하고 하남은 수도와 불원하여 위는 항상 위협을 느끼고 있었는데 그곳을 점유한 부여란 고구려 백제 선비 오환등 옛 부여 출신 조선족의 총칭이다. 여기가 곧 西河國이다. 공손연을 파한 사마애는 요동의 요지를 점령하고 있는 부대는 철수하지 않고 위는 모구검을 요동 태수로 임명하여 지키게 하여 요동의 주권을 장악코자 하였다. 고구려는 이에 요동의 요충 서안평을 공격해 온 위군을 축출하고 요동을 점령하였다. 위지는 위 사마애가 요동을 정벌하는데 고구려가 군사 수 천명을 보내서 지원하였다고 하였다. 

 

요동을 점령한 위의 당위성을 입증코자 고구려 군을 축소하여 기록한 것이다. 위의 존망을 위협받은 공손연의 연나라를 단지 사마애 군사 4萬名으로 멸하였다는 것이다. 이것은 삼국지의 僞作이다. 위는 母丘儉으로 하여금 數十萬名을 이끌고 가서 현도군을 공략케하였다. 고구려는 步騎二萬을 선봉 부대로 출동케하여 불류수상에서 위군을 大破하였다. 帝는 제장을 모아 영을 내렸다. "모구검은 위나라 명장이라 그를 사로잡아 위의 威勢를 꺽을것이니 모구검이 지금 주력군을 잃고 어려운 지경에 있으니 분투하여 섬멸토록 하라.”하고 帝는 친히 中軍진영에 나가서 군대를 지휘하여 대가로 하여금 五千철기병을 이끌고 위군을 추격하였다. 이에 "모구검은 과연 기장이였다. 그는 초전에 두 번 패하여 많은 전사자를 내고도 조금도 위축되지 아니하였다. 모구검은 말하였다. 적이 두 번 이기고 우리의 사상자가 지대하니 적은 이제 교만하여 반드시 우리를 추격할 것이다. 각장은 여차여차히 포진하라. 내전면에서 적을 항전하다 달아나면 적은 전력하여 나를 추격할 것이나 요수가에 이르러 완전 포위하라. 적병이 정예 하나 선봉군이 불과 五千이라 하니 후군이 당도하기 전에 반드시 몰살하여 적의 전의를 꺾어야 하나니 착오 없이하라. 싸우다 후퇴하는 자 있으면 현장에서 즉결하라." 대전의 승패가 이 일전에 달렸으니라 하고 각기 진지로 돌아가 준비를 갖추었다. 고구려는 二차의 전쟁에 전승함에 帝는 모구검이 멀리 달아나지 못하게 선봉 五千을 보낸 후 대군을 총동원하여 추격하다 보니 선봉 첩보에 아군이 몰사하였다 하고 살아남은 자는 거의 없다 하며 패잔 부상병이 또한 돌아와 고하였다.  

 

그리고 十萬위군이 물밀듯 들어오며 후군도 이미 포위되었다고 보고하였다. 帝는 대경하여 후퇴를 명령하였으나 이미 늦은지라 위군이 겹겹이 포위하여 나갈 곳이 없었다. 帝는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였다. "과인이 적을 치는 것만 알고 적이 나를 치는 것을 생각지 못하였으니 옹렬한 王이로다."하고 한탄하였다. 이 전쟁에 전사자 萬八千이요 부상자는 부지기수로 十萬군이 파멸하여 帝는 남아 있는 수千여기를 이끌고 압녹원 요하 지류 지역으로 후퇴하여 지원군을 기다리고 있던 중 위장 모구검은 환도성을 포위 함락하여 고구려 군의 재편 통로를 차단하였다. 한편 모구검은 장군 왕석으로 하여금 고구려왕을 추격하니 帝는 구원군의 집결을 기다릴 수 없어 남옥저로 달아나니 따르는 자 모두 흩어져서 장군 동부 밀우 한 부대가 곁에 남아 있었다. 그가 말하였다. "적의 추격은 급하고 남은 군사는 적으니 사태가 급하옵니다.

 

소장이 죽음으로 적을 막을 것이오니 폐하께서는 사잇길로 멀리 달아나소서."하고 "이중에 나를 따라 순국할 자 나오라."하니 수 千 여명의 군사가 따랐다. 그는 十여명의 결사대로 협로에서 위군 선발대를 막아 적군 백여 명을 사살하고 그 사이 帝는 탈출하여 산 속에 의지하여 모여든 패잔병으로 진을 치고 이산 장졸을 모아 방어 진지를 만들고 장졸들에게 이르되 "누가 능히 가서 밀우를 구하여 오면 후상하리니 용기 있는 자 나서라 하니 하부 부장 유옥구가 나와서 신이 사력을 다하여 구해 보겠습니다." 하였다. 유옥구가 진지를 찾아가니 적은 아황상이 멀리 달아나 추적 불능으로 단념하고 돌아가고 전장에는 시체만 있었다. 가까이 가서 살펴보니 밀우는 아직 몸이 식지 아니하였다. 그를 일으켜 업고 본진으로 돌아와 금침위에 눕혔으니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기적으로 소생하였다. 한편 위장 모구검은 수하 장군에게 엄명을 내렸다. "지금 적도 환도성을 함락하였으나 고구려王을 잡지 못하였으니 승전의 성과가 없음이라 지금 고구려를 완파하지 못하면 불원 고구려는 재기하여 우리를 칠 것이니 기필코 끝까지 추적하여 고구려王을 잡으라."하고 계속 추격하여 남옥저의 피탄지를 포위 공격하였다.  

고구려의 패잔군은 위의 수만 군을 대항하기에는 너무 빈약하고 여타 고구려 군은 모구검이 요로를 봉쇄하여 집결이 불가능하였다 .帝는 세궁역진하여 어찌 할 바를 몰랐다. 동부인 유유가 나와서 아뢰였었다. "지금 아군은 약소하여 적의 大軍을 막을 수가 없사옵고 구원 군은 모구검이 막고 있어 오지 못하오니 이대로 싸워서 헛되이 죽을 수 없사옵니다. 신이 한 계교가 있어 성공하면 폐하는 가히 사직을 보전할 것이옵니다 하고 적진에 들어가 항복한다고 하고 적장과 함께 자폭하겠습니다."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얼마만의 술과 안주를 만들어 가지고 적장을 찾아갔다. 고구려 대장 유유가 고구려 황제의 항복서를 가지고 대위제국 원정 대장을 배알하러 왔으니 너희 대장에게 전하라 하고 위군 진지 앞에 와서 외쳤다. 비장은 즉시 저희 대장에게 이 말을 전하니 들어오라고 하였다. "저희 황제께서 항복코자 먼저 약간의 酒肴를 가지고 가서 이 뜻을 장군께 전하라 하옵기 여기에 왔사옵니다."하고 음식을 받들어 올렸다. 주위에서 받아 올리는 순간 감추었던 비수로 비호같이 달려들어 적장을 찔러 죽이고 그도 동시에 도륙을 당하였다.  

 

적은 대장의 갑작스런 변고에 혼란에 빠지니 고구려 군은 불과 三萬이니 비록 소수이나 결사적으로 창칼을 뽑아 들고 돌격하니 위군은 지리멸렬하고 도주하였다. 帝는 수만 명을 격살하고 군사를 수습하여 낙랑으로 돌아와 전열를 갖추고 위적에 대비하였다. 모구검은 숙진 경계까지 왔다가 '고구려는 과연 강국이다. 힘으로 멸할 수 없다.'하고 돌에 새겨 기공하고 다시 환도성에 이르러 不耐城이라 각석하여 전공을 기념하고 장병에게 영을 내려 일체 고구려 능을 파지 못하게 하고 고구려 군의 추격이 급하여 부녀자를 석방하고 돌아갔다. 고구려 군은 호국 이념이 철저하여 위난 지경에도 몸을 던져 나라를 지키는데 서슴지 아니하고 항복이나 도피하는 것을 생각지 아니하였다.

 

帝는 유유의 죽음을 길이 빛내게 하고 그의 유족을 후대하고 유옥구 밀우에게 식읍을 봉하고 논공 행상을 하였다. 帝는 관인 후덕한 군주로 국민의 신망이 두터워 백성이 잘 따랐으나 전쟁의 경험이 부족하였다. 초전에 대승을 거두고도 승전 못하였으니 유능한 모사가 없었다.불행히도 지난 날 중원을 호령하든 명장 전략가도 없었고 위의 사마애나 모구검에 비길 만한 장수도 없었다. 그러나 충의 사절지사가 무수하여 나라를 보전하였다. 여기 不耐城은 한지에 동부도위치불이현위지작불이성이라(東部都尉治不而縣魏志作不而城)했으니 옛 황용국 영지인 황용城 즉 요하서북에 있다. 위는 모구검의 성과로 고구려가 상당 기간 중원 침공이 불가능할 것으로 판단하여 서촉의 유선과 강동의 손권을 정복코자 나섰다. 고구려는 수도 환도성이 불타고 회복 불능임에 새로이 평양에 왕검성을 축조하였다. {사기}에 평양은 원래 옛 단군의 고택이다(平壤都本仙人檀君之宅)하였으니 평양은 여러 곳에 있음으로 어느 평양인지 분명치 않으나 世祖 時代(晋황제 사마염) 쇄의 증손 璉(고국양왕)이 처음으로 중원에 사마염에게 사신을 보내 왔음으로 산기시랑 이오로 하여금 절월을 가지고 가서 연을 도독 요해(발해)의 군사를 총괄하는 정동 장군으로서 요동군을 통치하는 고구려王이라 하고 이오가 평양에 가서 보니 고구려 황제가 있는 평양은 요동南으로 千여리고 東으로 가면 책성에 이르고 南으로는 발해에 이르고 북으로 가면은 하얼빈-옛 부여에 이른다 하였다. (遣員外散騎侍郞李敖排璉爲都督遼海諸軍事征東將軍領護東夷中郞將遼東郡開國公高句麗王敎至其所居平襄城訪其方事云遼東南一千余里東至柵城南至小海北至舊扶余 {鑑易})

 

이것으로 보아 이때의 평양은 심양 혹은 통화로 보인다. 이연 황제가 붕어 하심에 고조는 태화十년 東쪽 교위에 弔喪所를 차려 놓고 친히 애곡하였다.(太和十五年璉死年百余歲高祖擧哀於東郊 {鑑易}) 다른 기록에는 七日간 조회도 폐하였다고 하였다. 이러한 행사는 종주국에 비유할 이웃나라 황제가 죽었을 적에 행하는 예절이다. 물론 조문사도 보냈다. 지금 세상보다는 인정이 있다. 태화는 페제 년기다. 이때 魏는 고구려의 속국은 아니 였으나 이와 같이 종주국에 대한 예를 행하여 정성을 표하였다. 東川王 二十二年 신라가 국세가 신장하여 비로소 고구려에 사신을 파견하여 친교를 맺었다. 고구려는 만주에서 국가 재건에 힘을 기우려 요동을 회복하고 요하 건너에서 세를 확장하였다. 요동에서 공손연이 망한 후를 이어 모용세가 일어나서 요동에서 세를 확장하기 시작하고 당시 새로 일어난 송나라도 중원의 남쪽에 있었다. 당시 중원에는 위나라와 서촉의 후한과 강동에는 오나라와 북에는 진나라와 남에는 송나라와 동에는 연나라와 기타 군소국이 있었는데 그중 위, 오, 촉의 三국이 강하여 三국시대라 하여 삼국지 소설이 후세에 나올 만큼 유명하나 연나라도 이에 못지 않았다. 

 

연은 요동에서 강국 고구려의 위협을 느꼈다. 모용귀는 사마애가 요동 공손연을 칠적에 선봉장으로 큰공을 세워 그 공로로 의왕(義王)의 봉함을 받은 막호발의 증손이고 모구검을 따라 고구려 정벌에 공을 세운 목연(木延)의 손자이며 좌현王의 봉함을 받은 섭(涉)의 아들이다. 고구려와 상당 기간 요동에서 승패를 거듭하였다. 모용귀가 죽고 아들 모용원진 일명 모용광은 연王을 자칭하고 고구려와 동족상잔을 계속하였다. 연王 모용광은 도업을 용성(龍城)으로 옮겨 고구려 국경으로 바짝 다가왔다. 광범한 첩보망을 고구려에 펴고 아비모용귀의 원수를 갚고자 만반의 공략 계획을 수립하였다. 연왕 모용광은 요동의 고구려 영토를 대부분 차지하고 장차 중원을 공략코자 하나 강적 고구려를 그냥 두고 중원 출사는 위험하다는 결론임으로 고구려 정복을 최우선 목표로 하였다. 때에 연王 모용광은 중원에서 강력한 세력으로 중원 통일을 꿈꾸고 있었다. 그들의 계획은 강력한 고구려가 배후에 있는 한 중원에서 대대적 군사 행동이 불가능하다는 것이었다. 

 

연장(燕將) 한이 연王에게 말하였다. "一차로 고구려를 치고 二차로 우문씨를 멸한 후 가히 중원을 도모할 수 있사옵니다." (入威將軍翰請先取高句麗侍滅于文烈后中原可圖) 고구려는 지금 전혀 우리의 의도에 눈치채지 못하고 있으니 불의에 습격하면 고구려를 가히 파할 수 있을 것이옵니다. 연장 한은 고구려 침입의 지리를 충분히 규명하고 있었다. 고구려는 두 개의 진입로가 있으니 그 北路는 평탄하고 南路는 험준하니 항상 北路를 엄수하고 南路는 소홀하였다. 대군을 움직이는데는 北路를 통하고 있으니 이번에도 주로 北路를 방어할 것이옵니다. 그럼으로 우리는 그리로 공격한다고 크게 움직이고 이면으로 南도 험한 길로 진격할 준비를 갖추고 정예 경기(輕騎) 五千으로 기습하여 적의 방책을 분쇄하고 大軍이 진격하여 적의 왕검성을 공격하면 적은 필연코 소수 병력으로 왕검성을 지키고 大軍은 北道를 방위할 것이니 왕검성이 함몰하면 적의 大軍은 미로에 설 것이오니 대사를 가히 정할 것이옵니다 하였다.

 

한편 고구려는 연이 침략해 온다는 것을 알고 상예대로 北道에 긴급히 대군으로 겹겹이 방어 태세를 갖추고 南道에는 일지군을 파견하여 지키게 하였다. 연장한(燕將翰)의 작전은 적중하였다. 그해 十一月모용광은 모용한 모용패 두 장군으로 하여금 선봉 기습 부대의 뒤를 쫓아 전군(前軍)四萬을 이끌고 南도를 급습하고 장사 왕우(長史 王禹)등으로 하여금 장병一萬五千을 이끌고 北道로 진격하고 연王 광은 후군을 이끌고 총지휘하였다. 고구려帝는 황제(皇第) 무를 대장으로 하여 정병 五萬으로 北道를 방어하고 帝는 친히 후군을 거느리고 南道를 수어하였다. 연군은 前軍四萬이 총공격을 퍼부어 일거에 고구려 군을 격파하고 후속 하여 연王이 大軍을 이끌고 속속 진격하여 왕검성을 포위 공격하여 환도가 함락하여 연군은 황후 주氏와 太后를 포로하고 고구려 장수 아불과 도가는 연장 장사한수에게 참수되고 北도 방위군 五萬은 전후로 협공 당하고 환도성이 이미 함몰하고 황제의 행방이 묘연하니 戰意를 잃고 패주하니 北道守將 왕우도 전몰하여 고구려 二十萬軍은 제대로 싸워 보지도 못하고 지리멸렬하여 죽는 자 무수하였다. 

 

帝는 적의 추격이 급하니 단기로 달아나 운곡에 숨어 들어갔다. 연군은 추격하다 놓치고 잘못 깊숙이 들어갔다가는 항상 고구려 군의 매복 전술에 패하는 전례로 미루어 추격을 중지하고 돌아와서 수도인 왕검성 즉 환도성을 철저히 약탈하여 부고에 싸여 있는 누세 보물 재화를 내어 싣고 환도성을 불살라 궁궐 민가 할 것 없이 소진하고 고구려 역대 왕묘도 모두 도굴하고 연王 모용광은 제장에게 회군 명령을 내리고 이르기를, "고구려王은 지금 멀리 험지에 숨어 있다가 우리 大軍이 물러가면 돌아와 흩어진 장병을 모으고 다시 나라를 재건할 것이다. 하지만 王은 패하고 백성은 피폐하고 국고는 빈털터리니 언제 다시 일어날 것인가? 또 고구려는 강하고 만주 땅은 넓고 험하여 힘으로 정복하는 것은 불가능하니 상당 기간 재기 불능케 하였음으로 우리가 중원 三국을 統一한 연후에는 고구려가 재건하여도 우리를 넘보지 못할 것이니 이제 은혜를 베풀어 항복케 할 것임으로 돌아가는 것이다."하고 고구려 황후와 노모와 선王의 시체를 발굴하여 싣고 반사하였다. 帝는 연군을 추격 섬멸코자 흩어진 패잔군을 모아 왕검성에 돌아와 보니 그 처참한 모습은 형용할 수 없고 모용광은 이미 멀리 가서 추격할 수 없었다. 고구려는 전국민이 결속하여 국가 재건에 매진하였으나 帝는 노모를 돌아오게 하지 않고는 만민의 王이 될 수는 없는 것이라 생각한 것이다.

 

帝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나라안에 있는 보화를 모두 거두어 화친하는 국서를 쓰서 보화와 국서를 가지고 사신을 파견하여 선재의 시신과 母后의 반환을 호소하였다. 연王은 이를 받아 들여 미천王의 시체와 生母 그리고 王妃 주씨를 모두 돌려 보내 왔으나 민가 五萬여 가구의 납치해 간 인구는 돌려보내지 아니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