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역사 침탈(侵奪)

BC 28세기 요하문명의 濊貊族이 남하 하여 夏, 商, 周를 건국하면서 황하문명을 일구었으며, 鮮卑族이 秦, 漢, 隨, 唐을 건국했습니다. - 기본주제 참조

홍익인간·인류공영/환단고기·한민족역사

27. 高漢 大戰에서 光武帝를 敗退시키고 中原 北部 故土를 回復한 후 歲幣(朝貢)를 徵收

자연정화 2013. 8. 24. 12:48

二十七. 高漢 大戰에서 光武帝를 敗退시키고 中原 北部 故土를 回復한 후 歲幣(朝貢)를 徵收

 

大武神王 혹은 대주류왕, 무휼 皇帝는 在位 27年에 遼東과 遼西의 一部 및 山東 河北의 中原 北部 地域 및 東北 地域을 占據하여 中原 故土 回復의 轉機를 마련하는 大功을 이루었다. 高句麗 大武神王 11년 漢王 光武는 高句麗가 扶餘를 倂呑하고 개마국을 征伐하여 威勢가 떨치니 中原 北部에 駐屯하고 있는 高句麗軍과 百濟軍의 中原 攻略이 激化될 것을 우려하여 10萬 대군을 요동으로 파견하여 수십만 대군이라 선전하며 대거 입구하였다. 고구려 조정에서는 근간에 없었던 대군이 공격해 옴에 회의를 열어 대책을 논의하였다. 帝는 이르기를 "漢나라 光武가 이름 없는 군사를 일으켜 대군으로 우리를 공격해 오고 있으니 경들의 대책을 듣고자 한다." 이에 우보 송옥구가 대답하기를 "신이 듣기를 어진 德을 崇尙하는 자는 繁盛하고 힘을 崇尙하는 자는 亡한다 하였습니다. 中原은 지금 도적 떼가 4방에서 일어나고, 光武왕은 자체 보전도 어려운 상태에서 대군을 일으켜 虛張聲勢로 강함을 과시하니 이는 漢王의 軍部 統制 能力 喪失로 인한 邊防 將帥들의 强要한 장난일 수도 있습니다.  

 

이들의 放恣(방자)한 行動은 천리를 어김이니 반드시 패망할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의 東北과 渤海를 지키고 있는 군사는 부르면 안되고 여기 있는 병력으로 지형의 험함의 이점으로 굳게 지키고 있다가 적이 피폐한 후 기습하면 적을 피할 수 있으니 폐하께서는 마음놓으셔도 될 것입니다." 이어서 좌보 을지두가 아뢰기를 "강하고 큰 적을 잡는데는 신이 요량하건대 폐하의 군사는 일찍이 한나라의 많은 군사와 싸운 적이 있습니다. 가히 모략으로 칠 것이고 힘으로 꺾으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帝는 물었다. "그러면 그 계획을 구체적으로 듣고 싶다." 이에 대답하기를 "지금 漢兵은 멀리 와서 필사적인 대적이니 맞서 싸우는 것은 옳지 못하옵니다. 성문을 굳게 닫고 적이 지칠 때까지 기다렸다가 나가 그들을 치면 크게 이길 수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帝는 위나암성에 들어가서 굳게 지키고 적이 성을 공격하면 막는 것에만 전력을 다하였다.  

 

그러나 적도 포위망을 뚫지 않고 공격을 계속하니 아군도 오랜 싸움에 지치고 帝는 두지에게 하문하였다. "싸움은 계속되고 적은 성을 포위하여 풀지 않으니 장차 어찌하면 좋겠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적이 지금 약식을 가져다가 먹는데는 어려움을 겪고 있으며 성을 포위하고 계속 공격하는데 지치고 있사오니 무리한 공격을 계속하고 있는 것은 우리 성중에 물이 떨어져서 스스로 목말라 무너지는 날이 멀지 않다고 믿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가 물 기근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면 적은 낙담하여 계책이 없어져 싸울 기력을 잃을 것이오니 계곡에 잉어를 잡아 안주로 삼고 약간의 술을 가지고 적장에게 보내 우리가 어려움이 없는 것을 보여 적을 조롱하면 적이 戰意를 상실할 것입니다. 때를 틈타 공격하면 전승할 것입니다." 하였다. 이에 帝는 그 의견을 따라서 계서를 내려 약간의 안주와 술을 가지고 사자를 적장에게 보냈다. 적은 크게 놀랐다. 이제는 물이 떨어져 항복할 것이라고 막대한 死傷者를 내면서 고전하던 중에 성안에서는 물이 충분하다고 하는 것을 보고 전의를 잃었다.  

 

계서가 말하기를 大高句麗國皇帝招諭于漢國將兵矣夫王者之道則通達天理以善治於爲民草之苦樂信勉義焉今漢王秀者弗量天命以放恣無節乎今中原各地之混迷危難則濫發出兵之所致也至此無名之出師於數千里遠征以加惡危害於後邦又出戰士卒橫死於到處暴骨戰野者皆貪欲之果也朕問如此之實?誠憐憫不己也玆以應當投降以保生命爲幸乎今此去使者依送酒饌若干則爲慰幸也 漏錄補記 (大高句麗國 皇帝는 漢나라 장병을 招諭하노라 무릇 임금된 자는 天理를 通達하여 나라를 잘 다스리고 백성의 苦樂을 헤아려 부지런히 옳은 길로 이끌어야 하는데, 지금 漢나라 王 秀는 天命을 헤아리지 않고 放恣하여 절제하지 않고 中原 各地에 소란이 일어나는 것은 軍士를 마구 일으켜 화를 불러올 뿐이다. 이제 또 이름 없는 군사를 일으켜 만리 遠征으로 시체가 황야에 흩어져서 白骨이 쌓이니 이것은 貪慾서러운 무리에서 나온 결과이다. 

 

이에 朕은 漢의 無辜한 군사들을 불쌍히 여김에 항복하여 생명을 보전하라 음식을 보내니 노고를 풀게 하라) 하였다. 한군은 험난한 요새에 웅거하고 성문을 굳게 지키고 있는 고구려를 힘으로 치다가 성은 함락하지 않고 사병의 전사자는 쌓이니 포위하여 성안의 물이 고갈하면 항복할 것이다. 믿고 있다가 그것이 아닌 것을 보고 크게 당황하였다. 수천리 밖에서 운반해 오던 군량미는 점점 여유가 없게 되고 군사는 이미 전의를 상실하고 더 이상 싸울 수 없음에 본국에 表를 올려 사태를 보고한 후 돌아가기로 하였다. 그러나 은밀히 요소 요소에서 고구려군의 추격에 대비하고 야음을 틈타 퇴각하였다. 고구려 첩자는 漢軍이 退却을 준비하는 것을 정보를 조정에 보고하였다. 帝는 급히 조회를 열어서 "한군이 물러날 준비를 하고 있으니, 이제 때가 왔다. 전군을 총동원하여 漢軍을 추격하여 섬멸하고자 하니 경들의 의견은 어떠한가?" 이에 우보 송옥구가 아뢰기를 "한군이 비록 피폐하였다 해도 계속 지원군이 와서 그 수가 아군의 배에 이릅니다. 

 

그들은 수만의 병력을 잃었으나 크게 구애받지 않을 것입니다. 반드시 돌아가는 길에 매복하여 기회를 노리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섣불리 추격해서는 안됩니다. 면밀히 경계를 하면서 추격하면 성과가 없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돌아가서 고구려를 능히 칠 수 없음을 그들 스스로 널리 알려주는 것이 십만 군을 섬멸하는 것보다 더 큰 성과가 있을 것입니다."하였다. 이것에 대해서 좌우의 여러 將相들이 모두 "우리는 한사람도 손실 없이 승리를 거두는 일이다." 해서 찬성하였다. 이 때 樂浪王 최리가 고구려에 不服하고 특히 漢王光武의 침입으로 낙랑국과의 서로 밀통하는 것이라고 추측하여 그 대비책으로 왕자 好童을 시켜서 樂浪國을 염탐케 했다. 이에 호동은 沃沮國에 들어가 정보 수집에 노력하던 중 樂浪 國王이 沃沮候를 만나러 갔다가 호동을 보고 그 소년이 이목이 수려하고 풍채가 귀인상으로 가히 비범한 인물임을 알아보고 사위로 삼았다. 그러나 이것으로 고구려 황제의 의혹을 풀지는 못하였다. 낙랑은 그 위치로 보아서 반드시 고구려 제국의 산하 열후로 들어가야 할 형세였으나 낙낭은 다른 뜻을 품고 있었다.  

 

그것은 중원의 한나라의 사주를 받아 그를 믿고 있었을 것이다. 한은 요동 요서를 고구려와 백제가 분리 통치하면서 하북 산동의 여타 동이족과 상통함으로 항상 위협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므로 고구려의 배후에서 고구려의 제후가 아닌 하나의 복속국 연계를 유지하여 만일에 대비하고자 하는 것이 일관된 정략 이였다. 왕자 호동은 많은 군사 정보를 가지고 본 국에 돌아가서 부왕에게 보고하였다. 帝는 백관을 모아서 상의하였다. "짐이 보위에 오른 후 항상 낙랑후가 짐의 봉작을 받지 않은 것은 고구려의 화근이 될 수 있는 것이라고 여겨 왔다. 반드시 멸망시켜야 한다고 믿어 왔으니 이제 그 때가 왔음이라 즉시 진군할 준비를 갖추고 불시에 공파하라. 비록 적은 그 세력이 적으나 미리 준비하면 어려움이 생길 것이다 하였다." 백관이 아무런 이의가 없이 준비하여 선두로 정예 1만 輕騎로 급습하여 평양성 주위 요새를 분쇄하여 위부(한나라)와의 교통을 차단한 후 대군이 음습하니 낙랑왕이 항거할 겨를이 없이 항복하였다. 이로써 고구려는 중원 출병에 추호의 두려움이 없어졌다. (註. 여기 평양이란 지금의 봉황성으로 추측되나 확실한 기록이 없음, 낙낭은 요하 西南의 발해 변이다.)  

 

이 싸움의 혼란 속에 낙랑 공주는 나라의 神器라 불리는 북을 찢었다는 죄로 죽음을 당하였다. 왕자 호동은 大武神王의 後妃 소생으로, 그녀는 미모의 賢德 婦人으로써 帝가 지극히 사랑하였다. 그리고 그 소생인 호동 또한 출중한 호남자로 황후가 적자인 자신의 소생을 제치고 왕위를 넘볼까 걱정하였다. 그래서 황제에게 허황된 무고를 하였다. 즉 자기에게 음심을 품고 있다 하였다. 이에 황제가 大怒하여 호동을 꾸짖었다. 주위에서는 그 억울함을 아는지라 호동에게 억울함을 변명하지 않고 그대로 누명을 쓰고 있느냐고 묻자 호동이 답하기를 "내가 이 일을 억울하다고 해명하면 모후의 허물을 드러내는 것인데 그것은 또 부왕을 근심하게 만드는 일이다. 이것은 곧 부모에게 불효의 죄를 짓는 것이니 어찌 하랴 내가 죄를 덮어쓰고 죽는 것이 옳다."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러자 고구려의 백성들이 그 인물이 너무 아깝다고 해서 슬퍼하고 혹자는 그것이 반드시 효도하는 길이 아니라고 여겼다. 실로 고구려조의 잇따른 비극이다. 이와 같은 왕자 호동과 낙랑 공주의 비극은 사람들의 심금을 울려 오랫토록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漢王은 遼東에서 高句麗를 치다가 敗退하고 그들의 橋頭堡로 樂浪을 이용하고자 해서 파병했는데 그를 구하러 간 구원군이 무위로 돌아오니 이 사실을 후세에 그대로 전할 수 없어 다음과 같이 {史記}를 왜곡하였다. '한나라의 요동 태수가 장병을 이끌고 가서 고구려를 치고자 성을 포위하였으나 고구려 왕이 書信을 보내 왔다. 그 말이 심히 순하고 공손하여 포위를 풀고 돌아왔다 하고 낙랑을 구하려고 갔다가 미쳐 구하지 못하고 돌아갔음에도 낙랑을 멸하고 돌아왔다.' 라고 하였다. 그 당시는 요동은 고구려가, 요서는 백제가 점유하고 있는 시기인데 요동 태수가 무엇인가? 낙랑국은 대무신왕 15년에 고구려에 항복하여 국왕 취리를 낙랑 후에 봉하였다가 다시 불복하자 20년에 멸망시키고 고구려 직할지로 편입하고 없어졌는데 10년 후인 27년에 다시 한왕은 없어진 낙랑군을 정복하여 현을 두었다고 하는 것은 이 무슨 망발인가! 후세 중국 {史記}는 이런 식으로 위조한 것이다.  

 

遼東 10城築造

 

중원에서 용맹을 떨친 太祖 大王 宮은 나면서부터 눈을 뜨고 사람을 보며 크면서 지략이 탁월하여 기상이 웅위하니 사람들이 두려워하였다. 7세에 등극하니 太后가 垂簾聽政하였다. 한 광무왕 말기에 광무가 고구려의 대무신왕에게 패퇴하고 요서에서 철수하여 한군이 우북평지역을 버리고 패수 이남으로 후퇴한 훗일 일것인즉 十城의 완성은 태조 대왕 궁황제의 초기이나 착공은 대무신왕대일 것이다. 10성의 완성은 宮 皇帝 登極 때이고 太后의 垂簾聽政 바로 이 시기이다. 大武神王은 漢나라와 百濟를 효과적으로 막기 위하여 하북 산동의 접경인 요서에 10성을 쌓아 방위와 동시에 河西 30洲의 기지를 마련한 것이다.  

 

(註. 태조 대왕 궁의 연기는 {삼국사기}를 참고한 것이나 궁황제의 실지 年代는 이보다 30∼60년 앞설 것이며 따라서 요동 축성도 궁황제 즉 태조 대왕의 업적으로 추측되며 고구려 기년 축소로 인한 {삼국사기}의 오착이 아닌가 한다. 참고로 이 시기에 서역 불교가 백제와 고구려에 전해졌다. 중원에서 각국 민족에게 연하여 전해진 것이며 중원에서 한의 광무왕 초기 기원전 32년에는 한나라 정부에서도 불교를 연구하기 위하여 天築國에 사자를 파견하였다고 후한서에 기록하고 있다. 西域有神其名曰佛因遣使之天笠國求其道得其書及沙門以來其書大抵以虛無爲宗貴玆悲不殺以爲人死精神不滅隋後受形生時所行善惡皆有報應故所貴修練精神以至爲佛善爲宏闊勝大之言以勸誘愚함精於其道者?曰沙門於是中國始傳其術圖其形象而王公貴人獨楚王英最先好之 (서역에 신이 있는데 그 이름은 부처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사자를 천죽국에 파견하여 그 도를 얻고 그 서적과 사문 이래의 그 글은 대저 세상 허무를 주로 하여 자비로움을 귀하게 하고 살생하지 말고 사람이 죽어도 정신은 불멸하여 다시 형상을 받아 태어나니 착하고 악한 것이 거행함에 따라 응분의 갚음이 있고 정신 수양을 귀히 하여 광활승대한 부처의 말을 깨달아 그 도를 행하는 자를 사문이라고 한다. 때에 중국에도 그 술법, 그림 형상이 전해져서 왕공귀인 중에도 초왕이 가장 맞서 추종하였다.) 이 시기에 조선에도 전해졌다. 이 무렵 요동과 요서 그리고 하북 산동의 일부를 고구려와 백제가 점유하고 있을 때이고 광무왕은 그 지역에 잔류해 있는 변방 장수들을 총동원하여 요동의 한 요충지를 점유코자 시도한 것으로 보여진다. 당시 중원은 群雄 割據(군웅활거)로 皇帝라고 자칭 한자는  

 

一. 邯鄲皇帝(감단황제) 王郎
                     감단에서 기병하여 담양에 입도 하였다가 3년만에 성황제 공손술에게 항복하였다.
一. 梁皇帝 永(양황재 영) 대양황제
                     휴양(紙陽)에서 기병하여 황제 위에 올라 패초 임후지역을 점거하였다.
一. 光武 皇帝 秀(광무황제 수) 대한 황제
                     한종친(漢宗親)으로 형제간에 일어나 춘능에서 기병하고 신시평림에서 정부군을
                     파하고 황제위에 올랐다.
一. 成皇帝 公孫述(성황제 공손술) 대연황제
                     성도에서 기병하여 무릉 서안 등을 점거하고 감단왕제를 항복 받고 장안 낙양에
                     입도하고 한중을 점거하였다.
一. 赤眉皇帝 劉盆子(적미황제 유분자) 대진황제
                     원명은 번승이며 청주부 영주에서 기병하여 당시 관동 대 기근으로 일어난 폭도를
                     도와 정부군 장군을 주살하고 용맹을 떨쳐 황제위에 올랐다.
一. 蘇皇帝 蘇(소황제 소)   일찍 토벌되고 황제 영광을 누리지 못하였다.

 

등으로 각기 분립하여 쟁패하고 한편으로 조선족이 중원 동북으로부터 대거 진출하였는데 紀元前 22년 전후이다. 사이가 구름 띠 같이 모여들어 광야에 싸움을 벌렸다.

 

(四夷雲集龍鬪野 {鑑鋼}15) 여기 사이(四夷)라 한 것은 한서에 조선족을 사이라고도 한다. 하였으니 사이라고 한 것은 동이 구종중 부여족인 고구려 백제 예맥 선비 등 중원 동북 지역을 점거한 조선족을 지칭한 것임) 그 유래는 동이족왕은 왕위에 오를 적에 삼신재를 지내서 하늘에 고하고 풍악을 울리며 춤추고 노래하여 천하만민에게 화합의 환심주는 행사를 하는데 그것을 사이음악이라 불렀다. 이에 사이는 조선족의 대명사가 되었다. (四夷樂之別名王者必有作四夷之樂以定天下之歡心祭神明和而歌之以管樂爲之聲) 紀元前 14년에 관동 一帶의 대 기근으로 사람들이 먹을 것이 없어 서로 잡아먹고 큰 혼란이 일어났다. 특히 婉城에서는 광무왕이 왕망군을 포위하여 몇 달이 되니 성중에 먹을 것이 없어져 사람들이 서로 잡아먹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關東大饑蝗關東人相食完城漢兵攻之數月城中人相食 {綱易})

 

당시 한은 식인 풍속이 그치지 않았다. 그러나 皇帝 王莽(왕망)은 全中原에 확산하는 혼란을 막을 길이 없어 반란군 속에 죽고 30여년 만에 다시 劉氏 皇帝시대로 되돌아갔다. 王莽이 패한 후 고구려와 가장 가까운 위치에 있는 왕이 바로 光武였다. 그러므로 요동의 고구려에 침공한 자가 광무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이며 후세에 중국 역사 기록에 광무가 요동 태수를 시켜 고구려를 공격하게 했다고 기록하였다. 그러나 당시 漢 王 秀는 皇帝位에 올랐다 해도 다른 여러 황제들과 마찬가지로 중원을 통치하는 일급 황제는 아니었다. (註. 이들 황제는 모두 같은 시기에 황제위에 올랐으나 광무는 그 형과 함께 거사를 도모하였다. 세가 미약하여 군웅들을 제압할 수 없어 서 일단 적미왕에게 항복하여 세를 확장한 후 황제 위에 오르기로 하고 백관을 모아 의논하여 모두 찬성은 하였으나 중국 황제가 조선족 황제에게 항복하여 칭신하는 것을 부끄럽다고 하여 땀을 흘리고 손을 들지 못하였다고 고사 기록이다.) 아직 정식으로 황제위에 오르기 전 일이다.) (光武帝未能朔平四方 {綱易}) 그 시대 중원에서 가장 강한 자는 成帝 公孫述이였다. 유일한 중원 중부에 있는 동이족 황제로서 성도에서 기병하여 서안에 도읍하였다.

 

요서에 있는 백제와는 善隣之交를 맺었으나 요동에 있는 고구려와는 적대 관계에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고구려와 제휴하지 않고는 중원 본부에서 황제위를 유지할 수 있을 만큼 다른 한족 황제들보다 우월하지는 못하였던 것이다. 그는 불과 30여년에 망하였다. 한과 오의 연합군에 의하여 동이족인 황제 公孫述은 멸망되고 그 처자와 성을 들어 항복한 동족인 연잠까지 모조리 죽였다. (延岑以城降吳漢夷述妻子盡滅公孫氏幷族延岑) 같은 동이족인 공손씨의 잔당이 고구려 백제와 연계할까 봐 이와 같이 일족을 항복한 자까지 몰살한 것은 중원 동북에 웅거하고 있는 고구려와 백제를 의식한 것으로 보인다. 왕망은 중원 동북을 점령하고 있는 고구려군 일부 항복한 자들을 서북의 흉노 정벌에 출전시켜 양측을 상호 자멸케 하는 전략을 썼으나 고구려 군은 되돌아 와서 왕망정권을 공격하여 멸망으로 몰았다. 인솔자 자칭 赤眉王(적미왕)이라고 하는 자는 式候 萌의 아들로서 청서(靑洲 徐洲)에서 일어나 그 무리 수 10 萬에 이르고 정예 군사만도 10 만 명을 넘어 지나는 곳에 방종하고 조선말을 썼다. (別由是?曰赤眉匡丹合將銳士十餘萬人所過放縱東方爲之語)

 

한 광무 건무 원년에는 그들 二部가 합하여 홍농에 모여 장안을 공략코자 하니 왕망 정부군 경시 소무 등이 막다가 대패하고 적미군은 그 무리가 불어서 萬名을 한 개 營으로 나누어 30 營으로 편성하니 위세가 점점 커지니 삼월에는 다시 승상 松을 파하여 한군 死者가 三萬餘名이였다. 그러나 싸우면 이기는 고구려인도 피폐하여 싸움을 싫어하고 밤낮으로 고향이 그리워 동쪽으로 돌아가고자 울었다. (一部赤眉雖數戰勝而疲弊兵皆日夜愁思欲東歸) 이에 적미왕은 하루 빨리 장안에 입성하여 군사들이 방종하면 위로가 될 것으로 보고 장안 공략을 서둘렀다. 秋八月에 적미는 고릉에 이르니 장묘 등이 항복하고 구월에 적미는 장안에 입성하였다. (九月赤眉人入長安 {鑑紀}) 적미왕은 서선을 승상에 제수하고 번승을 어사 대부에 봉안을 좌대사마에 사록을 우대사에 기여는 모두 장군 공경등 서열을 정하여 제수 하였다. 이가 적미왕 유분자다. 후에 광무가 모반하여 그가 섬기든 적미왕을 파하였다.

 

옛 고리국에 근거지를 두고 있던 부여족 해모수왕의 후예 고구려 백제는 BC 170 년경부터 요동의 千여里의 땅에 다같이 나라가 있었으며 그후에 고구려는 요동을 공략하고 백제는 요서를 공략하였다. 백제가 다스리는 땅은 진평군이다. (百濟國本與高麗俱在遼東之東千餘里其後高麗略有遼東百濟略有遼西百濟所治謂之晋平郡平縣 {宋書}) 진평군은 하남에 있다.

 

高句麗 太祖 大王 宮은 幼年에 皇帝位에 등극하였으나 成長함에 智모 卓越하고 謀事가 非凡하였다. 그러나 요동 요서에서 백제와 전술한 황용국의 연왕 빙발은 고구려의 중원 진출에 있어 충돌을 면치 못하였다. 그들 또한 중원 정벌을 꾀하고 있었습이다. 그 후 중원에서는 조조의 위나라가 한을 제압하고 서촉의 유비와 강동의 손권이 각각 야심을 품고 있었다. 위나라는 위왕의 봉작을 거부하는 연왕 빙발을 치고자 대군으로 황용성을 포위하여 맹 공략하였으나 패하고 돌아갔다. 고구려는 요서에 10개성을 쌓아 항구를 막고 발해에 있는 동옥저를 희유하여 병탐하고 동으로 창해까지 영유하고, 패수에서 위왕 조조와 접하였다.

 

(위왕 조조가 한의 국정을 전담하여 서는 유사에서 동은 창해까지 그 손에서 임명되었다. 專制令檀威福者西流沙東極滄海莫不授館於東門) 남으로는 살수에 이르렀으며 창해는 발해군이고 고구려는 전술한 바와 같이 왕망이 그 대장 음우를 시켜 화친하자고 유인하여 고구려 장군의 목을 베여 長安 城中에 달아 놓고 高句麗를 征服하여 縣을 설치했다고 布告함에 高句麗 大武神皇帝는 大怒하여 中原 고리국 故土를 攻掠하고 대군을 이끌고 장안으로 향하여 진격 명령을 내리고 31년 고구려 太祖 大王 宮은 본격적으로 中原 故土 回復에 착수하였다.

 

한왕은 前事를 사죄하고 고구려국과 우의를 복구하고자 수호를 청하였다. 그러나 한왕은 지난번 과오는 왕망의 과오로 돌리고 아무런 성의 표시도 없었다. 이에 제는 군사를 재촉하여 패수가의 방채를 일거에 분쇄하고 패수를 건너 유주를 공략하고 만여 가구를 요동으로 이주시켰다. 이어 우북평을 포위 공격하여 당년에 함락하였다. 여기에 요서의 10성과 유주 우북평에 30만 군을 각기 分屯하여 치중을 補完하고 越冬 準備에 들어갔다. 光武는 中原의 皇帝들이 각기 야심을 품고 있어 공동 항전에 응하지 아니하니 비록 百萬大軍이라 하나 실전에 동원할 수 있는 병력은 4 50만의 烏合之衆에 불과하였다. 한왕의 군사는 정예 고구려군의 적수가 되지 못하여 극심한 사상자와 군수 치중을 잃고 성지를 버리고 도망하였다. 한왕은 장안의 방위를 여러 겹으로 진지를 구축하고 각지 요새를 수축 강화하였다.

 

이 전쟁에 貊人이 참전한 기록이 나오는데 貊人이란 {後漢書}에 '高句麗 別種' 즉, '고구려에서 갈라진 바'라 하였다. 이 貊人이 용맹을 떨쳤다. (是貊人寇邊愈甚 ) 추위가 지나고 새해 들어 帝는 다시 태자 수로 하여금 정벌에 나서게 하였다. 제1군은 어양을 공격하고 제2군은 上谷을 공격하고 기마 정병 5萬으로 적의 병참기지 太原을 습격하였다. 어양 상곡은 태원기지와 중간에서 차단되어 보급이 두절되고 장차 식량 보급이 끊어질 형편에 이르렀는데 태원이 함락하였다. 어양 상곡은 식량이 바닥나고 군사는 사기가 떨어져서 더 이상 지탱할 수 없어 성문을 열고 항복하였다. 그리고 태원을 점령한 (三十五年春句麗寇右北漁陽上谷太原 {後漢書}) 원정군은 우북평 어양 상곡의 주민 절반이 동이족임으로 병역 보충에 힘입었다. 한편 數 10 萬의 전사자를 내고 달아난 한군은 장안으로 집결하여 준비를 새로이 하고 군량을 쌓았다. 병마의 휴식을 취한 고구려는 만리 원정에 군량 준비를 위하여 공격을 중단하고 월동하여 충분한 준비를 갖춘 후 고구려 군은 장안으로 진격하니 장안 성중에 이 소식이 전해짐에 피난민이 단체를 만들어 떠나갔다. 

 

황급한 한 광무왕은 백관을 모아 모의를 열고 대책을 논의하였다. 모든 장상들의 의견이 고구려 군의 銳鋒(예봉)을 꺾을 수 없으니 성을 굳게 닫고 지키고 싸움에 응하지 말 것이며 고구려 군은 수천리 원정에 양식과 여러 치중 운반에 전비를 지탱할 수 없을 것이니 변화를 보아 역습하면 고구려는 가히 파할 수 있을 것이라 하였다. 그러나 고구려 군은 태원에서 탈취한 군량과 그간 보충한 것으로 별 어려움이 없었다. 이러한 첩보를 접한 한나라 조정은 거침없이 진격해 들어오면서 전초 방위 진지를 마구 유린하고 쇄도하는 고구려 군을 보고 전율하였다. 한은 다시 백관을 모아 묘의를 열었다. 한왕은 말하였다. 짐이 즉위하여, "초기에 국난을 맞으니 어찌하면 좋을까?" 하니 군신이 입을 열지 못하였다. 그들은 안전에 닥친 충격이 너무나 컸던 것이였다. 겹겹이 구축한 방위선이 노도와 같이 밀려드는 고구려 군 앞에 맥없이 무너지는 방위 병역의 대부분이 종횡무진으로 추격하는 고구려 군 말굽 아래 짓밟히고 中南 中原을 영유하고 있는 다른 황제들도 위험이 코앞에 다가오고 있음에도 각 주군을 휩쓰는 고구려 군에게 감히 항거할 생각을 못하고 전전긍긍하고 있으니 장안을 구하려 하지 아니할 것임에 광무 홀로 고구려를 막을 수 없음을 깨달았다. 당시 낙양도 이미 연나라 황제 공손술과 백제의 연합군에 의하여 함락되어 파괴된바 가 있었고 패망의 막다른 길에 다다랐다는 것이다.

 

(哀皇帝三年燕陷洛陽 {鑑易}) 이미 수십만 병역을 잃은 한왕은 장안을 잃으면 갈 합당한 곳이 없었다. 다른 곳에 있는 황제도 그가 의탁할 곳은 못 되었다. 일부 신료들 이 최후 결전을 주장하나 아무런 승산 없는 주장이였다. 광무왕은 요동 태수 蔡尤에게 하문하였다. 경은 그 동안 요동에서 오랜 세월 고구려와 여러 번 싸운 경험이 있으니 고구려에 관하여 아는 것이 많을 것인즉 무슨 묘책이 없는지 말해 보라 하였다. 채동이 입을 열었다. "지금 저들의 출사 명분이 고토 회복이옵니다. 하북의 하남군(河北省 河南郡) 옛 고리국 영토와 산동 평주지역이온데 그 곳은 고구려 발상지로서 옛 고조선 땅이옵니다. 지금 그 일부를 우리가 점유하고 있사오니 이 곳 주민 또한 동이족이오니 이것을 돌려주면 침략 명분이 없어질 것이오니 은이로 달래면 화친에 응할 것이옵니다."하였다. 채동은 요동에서 고구려에게 패하고 패잔군을 이끌고 이곳 광무의 휘하에 와 있었다. 그는 이어 말하였다. "지금 고구려는 화북을 휩쓸고 위엄은 화하에 진동하니 이르는 곳에 호령을 받들지 않은 자가 없사옵니다. 

 

우리가 싸우다 패하면 진시황의 중원 정복 再版(재판)이 될 것이옵니다. 황공하오나 폐하께서는 지난날의 고조 황제가 모돈에게 행한 은이의 전래로써 고구려왕 궁을 달래면 난국을 벗어날 수 있을까 여겨집니다. 싸우다 패하고 성이 함락되면 저들 또한 희생이 클 것임에 항복을 수용하지 아니하고 지난날의 왕망의 과오를 구실로 복수할 것이오니 이 점을 헤아려 주시옵기 바랍니다. 그리고 동이는 예절을 존중하오니 흉노 모돈과 같은 공주의 헌납과 같은 요구는 하지 않을 것이옵니다. 신이 감히 죽음을 무릅쓰고 패하를 위하여 고구려 왕을 만나서 화의를 성사케 하겠습니다."하였다. 만조 백관이 비통한 마음으로 반박하는 자도 있으나 조용하였다. 광무왕은 이름은 수라하며 재능이 출중하고 현명하여 요동 태수의 직언을 책하지 아니하고 수용하였다. 그는 원래 유방의 후예로써 지방에서 자라서 28세에 신왕 왕망 말기 지방 호걸들이 모여서 한고왕의 후손인 수가 현명하다 하여 황제로 추대되었으나 세상에서 알아주는 인물은 아니고 文書上에 보이는 황제인지라 하물며 황제를 일컫는 자 여러 사람이 있다.(融等召豪傑議之其中識者皆曰皇帝姓名見於圖書?今稱帝者數人)

 

그러나 광무 수는 사람을 끄는 수단이 있었다. 명장 馬援은 황제 공손술의 고구인대도 더욱이 원래 출신은 동이족인데 자기편으로 끌어들였다. 마원이 한 번은 공손술 황제 측으로부터 광무를 보러 갔다. 광무는 반가이 맞아 인사를 나누고 좌정한 후 웃으면서 말하기를, "경은 두 임금 사이를 왔다갔다하면서 무슨 생각을 하는가?" 마원이 머리를 조아리면서 사과하고 말하였다.

 

"지금 세상에 임금이 신하를 얻는데는 사람을 가려서 들이는데 신하 또한 임금을 섬기는 데는 가려서 섬기나이다. 공손술은 같은 고향으로 어려서부터 같이 컸으니 친한 사이옵니다. 이제 신이 먼 곳에서 찾아왔는데 어찌 폐하께서는 혹여 자객이 아닌지 의심하지 아니하니 혹시 간사한 자객이면 어쩌자고 이와 같이 쉽게 대하나이까?"하였다. 광무는 "경이 자객이 아님에 공론함이요"하니 마원이 말하기를 "천하에 반복하여 이름을 날리는 자가 부지기수인데 이제 패하의 큰 도량은 高祖와 같음을 알 수 있으니 참으로 왕이옵니다."하였다.

 

마원은 친구 효를 만나 東方事(고구려)를 의논하면서 말하기를 "전에 조정에서 광무왕은 나에게 수 10번을 의논하면서 매 번 연나라 말(조선 말)로 접하니 아침부터 밤까지 명철하고 용기는 적이 없고 마음을 털어놓고 성의가 보인다." 하였다. (?與援共臥起問以東方事曰前到朝廷上引見數十每接燕語自致旦才勇略非人敵也且開心見誠 {鑑易}) 여기 마원이란 북파장군의 작위를 받고 훗날 조조가 한나라 황제 핍박하는 것을 보고 분노하여 조조를 죽이려다 모살 당한 마등의 고조인데, 고구려가 광무를 칠 때에는 연로하여 출전하지 못하였다. 광무는 이러한 인물이였다. 그는 더 이상 지체할 수 없었다. 광무는 채동의 의견을 따르기로 결심하였다. 요동 태수 채동이 한왕의 조서를 가지고 고구려 황제를 배알하고 국서와 함께 歲幣를 올리니 고구려 황제는 화친을 허락하였다. 여기 세폐란 매년 종주국이나 강자에게 바치는 세금이다. 중국 기록은 이것과 같은 선물등 타국왕이 보내는 것은 모두 조공이라 한다.

 

(二十五年春句麗寇右北平漁陽上谷太原而遼東太守蔡尤以恩信招之皆復還塞後 {漢書}) 한왕 광무가 고구려 천자께 바치는 조공을 한서에 조공 혹은 세폐를 바쳤다는 것을 중국식 기록에 말을 바꾸어 '은신 초지'라하여 그들의 자존심을 달랬다. 요동 태수 채동전에 의하면 세폐는 2億 7千萬이라 하였으니 국가 재정에 큰 몫을 하였다. '개복환색후'라 함은 모두 요새 뒤로 물러가서 아이대로 복구하였다고 하였으니 여기 지칭한 요쇄는 하북은 함곡이고 산동은 패수니 옛 고리국은 회복하고 여타 색안은 아이대로 철수하였다는 것이다. 기원 49년이다. (註. 한나라에서 고구려에 恩信招之했다고 {한서} 등에 기록하였으니 한의 광무제가 고구려 황제에게 항복하여 稱臣한 것이 아니고 화친하고 그 대가로 歲弊를 바친 것이니 그것은 조공이 아님으로 은신 초지라는 묘한 문구로 대신한 것인데 그들이 받는 경우에는 무조건 조공이라 썼다. 한고조가 흉노 單于에게 황녀를 헌납한 것도 恩惠를 베풀었다고 기록하였다. 그들 필법으로는 중국 외에는 모두 오랑캐에게 바친 것은 상납이 아니고 은신이라는 것이다. 원래 은신이라는 문구는 한 나라가 북적 부족들에게 분활 통치 각개 격파 등의 전략적인 매수 자금에 관한 용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