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역사 침탈(侵奪)

BC 28세기 요하문명의 濊貊族이 남하 하여 夏, 商, 周를 건국하면서 황하문명을 일구었으며, 鮮卑族이 秦, 漢, 隨, 唐을 건국했습니다. - 기본주제 참조

홍익인간·인류공영/환단고기·한민족역사

29. 故國原皇帝의 戰死와 廣開土太王의 中原 北部 征服 및 五胡十六國

자연정화 2013. 8. 24. 12:50

二十九. 故國原皇帝의 戰死와 廣開土太王의 中原 北部 征服 및 五胡十六國

 

 百濟는 近肖古王 26年 高句麗가 모용광에게 패하여 쇠약한 틈을 타서 3萬명의 군사를 파견하여 아직 완전 수축이 안된 왕검성 공격에 나섰다. 그간 백제는 하남에 창업한 이래 고구려와 요서에서 여러 해를 충돌하여 왔다. 고구려 故國原天王(諱 斯由 혹은 釗)은 친히 군사를 이끌고 백제군을 막다가 백제군의 화살에 맞아 전사하였다. 백제군은 그를 쏘아 죽이고 철수하였다. 이 사실을 魏王에게 알렸다. (百濟盖肖王表魏曰梟斬釗首過辭也) '괴수 釗를 斬首했다고 하였으니 너무 과한 말이다.'라고 하였다. 백제가 그런 말로 통고했는지, {魏志}에 참수했다고 썼다는 말인지는 알 수 없으나 高句麗天王의 죽음은 고구려와 백제간에 서로 깊은 원한이 깊어졌다.

 

이 전쟁이 전례대로 遼東의 遼水가에서인지 上谷(中原北部)에서 싸웠는지 알 수 없으니, 때에 조선 반도에 세운 백제 담울도 3萬軍을 동원할 수 있는 인구가 집결되었다고 여겨지는 시기다. 여기 담을이란 백제의 옛말로 분국의 뜻이다. 燕王 모용광은 반사(班師)하여 다시 우문씨를 대파하고 본격적 中原 공략에 나서서 南으로 中原에서 위를 공격하여 면남 주성(沔南 ?城)을 함락하고 예주자사 돈보(屯寶) 서양 태수 번준은 성을 버리고 달아나 강에 몸을 던지고 죽고 때에 위는 내위를 계엄령을 내려 좌위화감 관술 등의 여러 부대는 무장으로 후퇴하고 모용광은 연왕을 자칭하였다. (胡賊大寇沔南陷?城予洲刺史王寶陽太守焚焌皆棄城投江死於是內外戒嚴左衛桓監匡術等諸軍至武昌乃退七年慕容簿自稱爲燕王 {宋書}) 모용광은 새로이 점령한 千里땅에 고구려의 만주에서 납치한 五萬가구를 입주시켰다. 때에 중원에는 사마애의 손자 사마염(晋世祖武皇帝炎)이 위주(魏主)를 폐하고 황제 위를 차지하고 晋나라라 하였다. 강동의 오나라를 정복하고 三國을 통일하여 위세가 중원에 떨쳤다.그러나 中原 東北의 東夷族과는 계속 대치 상태였다.  

 

중국의 {三國志}는 조조가 한을 멸하고 위나라를 세웠고 사마애의 진나라가 다시 위를 멸하여 진나라를 세워 天下통일을 했다는 것은 漢魏晋 三國이 모두 亡國의 外的 原因은 東夷族과의 쟁패에 있었고 중원을 통일하지는 못하였던 것이다. 중국의 {三國志}에는 魏王 조조 吳王 손권 촉왕 유비를 주요 인물로 三國 爭覇를 그렸으나, 中原의 三分之一을 점유하고 魏吳와 相爭한 동이족의 상관관계는 제외하였다. 하지만 사실 흥미로운 소설로 꾸며 흥미를 돋구어 그리기 위함이랴! 당시의 중원 여러 古史 記錄은 三國 爭覇가 아닌 四國五國 爭覇였음을 보여준다. 

 

魏가 漢을 멸하고 위나라 全盛期 사마애가 위나라 태부 직책에 있을 적에 하남 요서에 있는 백제가 화북을 점유하고 있는 공손씨와 손을 잡고 요동의 고구려와 상쟁하는 기회에 위는 고구려와 동맹하여 공손씨를 멸하였다. 이 시기에 같은 동이족인 모용씨는 제갈 량이 유비룰 도와 점령한 바있는 중원 南部를 점거하였다. 이 때에 진은 강동의 오나라를 정벌하여 國富 병강함에 위세가 등등하였다. 시어사 곽흠이 상소를 올려 가로되, "오랑캐가 땅이 넓고 강성하여 예로부터 우환이라 지금 오를 정복한 위엄과 모사 맹장들의 지략으로 중원 내의 여러 오랑캐의 변지에 주돈케하여 오랑케들의 침입을 준엄하게 막도록 하옵소서 이것은 밝으신 先大王이 횡포를 막는 제도였사오니 이는 만세에 좋은 정책이옵니다."하였다.  

 

그러나 어려운 내전을 치룬 진주(晋主)는 또 다시 위험을 하고자 아니 하였다 (侍御史郭欽上疏曰戎狄彊廣域古爲患宜及平吳之威謀臣猛將之略漸徙內郡鏶胡於?地埈四夷出入之防明先王荒服之制此萬世長策也不聽) 여기 四夷란 {漢書}에 朝鮮을 四夷라고도 한다 중원 북부에 있는 옛 檀君 帝國의 諸侯國 中 東北 地域에 분포하고 있는 後裔들로서 扶余를 分하여 番韓 百濟 高句麗 선비 오환 肅鎭 沃沮 濊貊 靺鞨 契丹 등이다. 이들은 때로는 단독으로, 때로는 합쳐서 중원의 漢族(한족이 중원의 여러 민족을 동화한 상태)과 쟁패하였다. 연은 중국 사기에 중국의 열후로 편입 기술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동이족이 중원에 진출하여는 주로 연이라고 옛 국호를 사용하였다. 여기 공손씨도 燕王이라 하였고 그후 모용씨도 燕王이라 하였다. 모용씨는 고구려를 파한 후에는 고구려 황제를 高句麗王으로 부르고 자신은 大燕皇帝, 大王, 天王 등의 호칭을 가졌다. 진주 사마염은 오를 치고 돌아온 장병을 중원을 방위하는데 배치하고 싸움을 피하였다. 진주는 남고에 제사를 지낸 후 예를 마치고 사예四위 유이에게 물었다. "짐이 한나라의 어느 인군에 비할만한고?"하니 유이 가로되 "환제 영제에 비길 만합니다. 환재와 영재는 매관 매작하여 국고를 채웠고 폐하는 매관 매직(벼슬자리를 파는 부정행위)하여 사사로이 문중에 받았으니 이와 같이 말하여도 틀리지 않사옵니다."하였다.

 

진王은 그 말을 듣고 크게 웃으면서 이르되, "환재 영재는 이런 충고를 듣지 못하였고 짐은 이런 바른 말을 하는 신하가 있으니 짐이 더 나은 임금이라." 하였다. 진 무왕이 죽고 나니 왕후와 왕태후가 각기 권세를 장악하여 骨肉相爭의 소용돌이 속에 各 王族이 반란을 일으켜 중원이 크게 어지러웠다. 이에 유연이 대단우(大單于즉 황제)를 자칭하였다. 유연은 흉노족으로서 漢王의 공주가 흉노에게 시집가서 그 사이 출생한 漢王의 甥姪이다. 漢은 그를 좌현왕에 봉하고 五部 감독으로 西北의 군사를 맡겨 흉노를 통제하고 조선을 막는데도 일익을 담당케 했다. 그의 아들도 총명하고 효용 하였다. 그의 종조부 宣이 족인 들에게 말하기를,

 

"한나라가 망한 후에는 우리에게는 단우라는 허명뿐이고 한 치의 땅도 없고 왕후의 지위도 낮추어졌다.우리가 쇠퇴하였으나 아직 二萬에 모자라지 않는다. 어찌 앉아서 망해 버릴 것이냐? 지난 백년 좌현왕이 영무초세(英武超世)하니 하늘이 흉노를 망하게 하려 하지 않다면 반드시 이 사람을 헛되이 세상에 태어나게 하지 않았을 것이다. 지금 사마씨가 골육 상잔하여 사해가 들끓으니 우리가 일어날 때다. 그리하여 국난을 회복한다."하고 군사를 일으켰다. 유연은 군사를 이끌고 조선족을 공격하여 색위로 몰아 내려고 출발하려 하였다. 그의 종조부 유선이 급히 달려와 말렸다. "진나라는 우리를 노예로 부리고 있다. 지금 진은 骨肉相殘하여 하늘이 그를 버리는데 우리를 시켜 다시금 선비와 오환을 백제와 서하국까지 쳐서 우리가 일어나는 것에 무슨 도움이 되는가? 우리 흉노족과는 기맥이 통하는 동류라 가히 우리의 도움이 될 것인데 어찌하여 공격한단 말인가?"하였다. 유연은 크게 깨닫고 그쳤다. "옛날 한나라와 오래도록 은혜로 맺어 왔고 나는 한나라와 생질이다. 그러므로 국호를 한이라 한다."하고 선언하였다. 연이 죽고 뒤를 이은 유총이 낙양에 이어 장안을 함락하고 진민제를 참수하였다.

 

이 전진(晋)은 모용광의 女를 황후로 맞아 고구려를 방비하여 왕조를 보전하고자 노력하였다. 증원 화북을 휩쓰는 동이족을 막지 못하고 망하였다. 흉노 유연을 앞장세워 동이 조선을 몰아내려 한 것도 아니 된 것이다. 그후 모용광의 子 준(俊)은 大燕帝國 황제 위에 나아가 업도로 수도를 정하고 연호를 광수라고 하였다. 그들은 집안싸움이 그치지 않아 문화적 수양이 모자란 사람들이었다. 고구려는 점차 국력을 회복하여 비록 모용씨의 절제는 받지 않았으나 요동의 일부를 상실하여 중원 고토를 회복의 꿈은 깨지고 말았다. 고국양왕 이연 황제(古國陽王 伊連 皇帝)에 이르러 사만의 군사를 일으켜 요동 회복에 나섰다.

 

그리하여 요동 현도 2군을 회복하고 만주서 끌려갔던 남녀1만여 가구를 귀환시켰다. 동년 11월 모용농이 다시 요동에 침입하였다. 3년 8월에는 남쪽 백제 분국의 잦은 침투를 징벌하였다. 9년에는 황제가 붕어 하시고 태자 담덕(談德) 廣開土大王이 18세에 즉위하였다.  

 

태어나면서부터 영리하고 생장함에 外貌 雄威하고 智貌 發群하여 사람들이 위복하였다. 제는 즉위 당년 7월에 선제가 추진 중에 있던 정벌군을 출동하여 남으로 백제를 쳐서 조선 반도 멀리 남쪽으로 축출하고 북으로 거란을 토벌하여 만여 가구의 陷沒民을 구하였다.

 

2년 8월에 백제가 남침하여 옴에 군사를 보내 막았다. {三國史記}에 3년 2월 백제가 내침 하여 제가 精騎 5천을 이끌고 격퇴하고 남쪽에 7개성을 축조하고 백제 침공에 대비하였다고 했으니 이때 한반도에 세운 백제 분국은 급격히 인구가 증가한 것으로 보인다. 4년 8월 제는 패수에서 백제와 싸워 크게 이기고 8천의 포로를 잡아왔다고 하였다. 중원 하남에 있는 백제 본국과의 싸움으로서 패수 서쪽은 異洲 즉 하남이다. 제는 영락 5년AD 359년에 서북의 흉노 별종 과려가 자주 침입하여 변경을 노략질함으로 대군을 일으켜 서북으로 진격하여 부산(負山) 적을 파하고 염수에 이르러 일대의 7백부락을 정복하고 많은 전리품을 가지고 돌아왔다. 신채호 {조선 상고사}기록에 그 위치를 자세히 기록하였으니 원정군이 진격해서 들어간 거부산 부산 염수 등에 관하여 거부산(巨富山)은 {隋文備史}에 지금은 음산산맥의 와룡산이라고 했고, 부산은 감숙성 서북에 있는 선산이고 염수는 몽고 지지에 아라선산(阿拉善山) 下에 吉蘭泰(치란타이)라는 염수가 있어 소금이 六尺이나 응고된다고 하였다.

 

太王의 돌아오는 경로를 보면 양평도(襄平道), 동해빈(東海濱), 역성(曆城), 북풍(北豊), 오류(五廛),를 거쳐 국경을 살피고 돌아왔다. (永樂五年歲在乙未王以碑麗不息拉人躬率往討巨富山負山至鹽水上破其丘部落六七百當群馬牛不可稱數於是旋?因過襄平道東海濱力城北豊五廛猶觀土境由而 {碑文}) 제가 정복한 땅은 흉노와 인접한 진나라 북부였다. 비문으로 미루어 보면 돌아온 길은 장장 3千0리의 원정이다. 가히 호태 황제의 웅지(雄志)가 엿보인다. 여기에 중국 사가들은 廣開土大王이라는 호칭을 부쳤다. 비려에 관한 확실한 위치 설명이 사기에 없으나 참고로 추정컨데 전왈(傳曰)모용연이 처음으로 강원쪽을 통하였으니 농서왕에 봉하고 태자궁을 새로 지었으며 무도양이 당할 수 없었고 하남토곡 모용연이 스스로 하남왕이라 하니 고려왕 고리 즉 고려왕 고연이다. 송무재 초기에 청업하였다.  

 

(慕容연 始通江左故封?西王新作東宮太子邵居也武都揚難當也案高麗王高璉宋武帝初踐祚) 이것으로 미루어 보건데 하남백제와 서하국이 망한후 이곳을 고구려 태조황제가 관활하였는데 중간에 모반함에 광개토태왕 담덕황제가 정복한것이니 여기가 비려지역이다. 여기 토곡 모용연을 고구려 태조대왕 이연 황제로 지칭하였으니 그들은 부여족을 때에 따라 토곡희 모용씨 등등 호칭이 일정하지 않다.漢末 진열종(晋烈宗)시대에 등태위(鄧太尉)의 사당과 광무 장군(廣武將軍)의 사당을 지었는데 그 비문에 영락 5년이라고 고구려 광개토대왕 紀年을 새겼다고 후세 명나라 학자들이 오랑캐나라 年號라 하여 맹비난 한바 가 있어 그것을 명나라 시대의 영락 연호로 이치에 맞지 않는 변조를 한 바가 있다. 그리고 그렇게 바꾼 것은 큰 다행한 일이라고 좋아하였다.

 

{魏志}에 고구려가 한나라 애평지제(哀平之際), 애제와 평제 시대에 중원 북반을 점유하고 중원을 호령하였다는 역사 기록은 지금은 전부 삭제하고 없으니 우리 역사에 단군 대제국에 이어 제 이의 동방 대제국 고구려의 정사를 찾을 길이 막연하다. 한나라 말기에서 당나라에 이르는 동안 韓中日 삼국은 고구려 年紀를 일부 사용한 것은 확실하다고 생각되나 우리 나라 {三國史記}, {三國遺事}까지도 {당서}를 근거로 편찬한 것으로 인식됨에 당나라를 중심으로 하는 기술을 하였으니 백제 신라에서 쓰여졌을 것으로 생각되는 고구려 연호는 없고 당나라의 연호가 보인다. 9년 정월 제는 3만 군을 이끌고 요동에서 연나라 표기 대장군 모용희의 10만 군을 대파하고 요동에서 모용씨를 축출하였다. 이로서 지난날의 혹심한 모용씨로부터 받은 수모를 청산하였다. (모용희는 연의 선봉장으로 왔다가 고구려에 항복하고 고구려에 공을 세우고 돌아갔다.) 대왕은 신성과 남소를 공략하고 요동의 천리땅을 회복하였다.  

 

太王이 비려 원정에서 돌아오는 길의 당지 太守(태수) 內史(내사)들을 격려한 경로지로 기록된 동해빈의 위치에 관해서 밝혀 둔다. 동해빈과 창해에 관하여 종래 여러 우리 역사 서적에 이것을 조선 반도에다 같다 부치는 오류를 범하였다. 해빈과 창해는 지금의 천진 패수 지역 渤海?이다. 이곳은 원래 고구려 영토였음으로 발해는 고조선 시대부터 조선족의 內海 영토이다. {魏書}에 위나라 황제 조예(조조의 손자)가 동역을 순행하여 요서 황산 별궁에서 주연을 즐기고 갈석산(碣石山에서 크게 잔치를 벌리고 창해를 내려다보고 해빈에 단을 쌓아 순행을 기념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옛날 그 시대에 조선 반도에 없던 지명을 후세 와서 갖다 부치는 것은 역사 오류의 원인이 된다.) 그러므로 해빈(海浜)과 창해(滄海)가 모두 발해변 갈석산에서 내려다 보이는 곳이다. 

 

(魏高宗文成帝曺叡遼西黃山宮遊宴登碣石山觀滄海大宴築壇行於海浜) 대연황제 모용수(慕容垂)는 모용광의 제5자인데 때에 중원에서 大魏 天王 요와 대진 황제 근신 대한제국 황제 유연(유연은 흉노 모돈의 자손 단우로써 한나라 공주와의 사이에서 나온 자로써 유씨성을 가졌다.) 등과 상호 충돌 견제하는 상황에서 고구려가 요동을 공격하여도 모용수는 요동으로 출병을 못하여 요동을 구하지 못하였다. 제는 11년 다시 일지군을 파견하여 요서를 공격하고 연의 평주 자사 모용귀(慕容歸)는 패전하고 성을 버리고 도주하였다. 평주는 山東省 수도이다. AD 407년에는 백제가 약속을 어기고 왜를 불러 신라를 치니 신라가 구월을 요청함에 제는 수륙군 5만을 이끌고 수륙 양로로 백제를 공벌하여 신라에 침입한 왜구를 소탕하여 만 여명을 참수하고 백제의 항복을 받고 조선 반도의 소요를 안정시켰다. 이로부터 왜는 상당 기간 침입하지 못하였다. 그리고 이후로 신라 백제 왜는 고구려 관할 하에 예속하였다. 이후부터 日本九주 대마도 등지를 통치한 高句麗人의 후예로 보이는 무내(宗)氏가 近世까지 통치하였으나 日本에 병탐되고 千九百年代에 와서 日本은 宗氏가 소장한 방대한 조선 관계 문헌을 수탈해 갔는데 무려 六만 六千四百六十九점에 이른다고 하였다. 

 

조선 영토라는 증거를 없애고자 한 것이다. 제는 이들의 항복을 수용하고 멸하지 않고 옛 단군 제국의 열후국제도를 본따서 동방 대제국의 재현을 성취하고자 노력한 것이 그 후 정책에도 엿보인다. 중원에서는 전술한 한 황제 유연의 아들 유총(劉聰)이 대를 이어 낙양을 함락하여 진휘제를 포로로 하고 세력이 확장됨에 유총황제는 사치가 극심하고 대소 정사를 비빈에게 맡기고 유흥에 몰두하였다. 다시 대장 유요(劉曜)가 추대되었다. 유요는 성정이 자상하고 용약관인하여 전일 유총황제?에 상국을 지냈고 어려서 난리를 피하여 조선에 와 있었다고 하였다. 한수(漢水)를 따라 적벽(赤壁)으로 와서 황제를 자칭하고 다시 장안으로 천도한 후 대조황제(大趙皇帝)라 하였다. 父와 처의 묘를 높혀 백척의 둘레 삼리의 석축을 하는 등 백성을 전휼하고 사방을 정복하였다. 그리하여 조 황제는 낙서에서 흉노별부 출신 석늑(石勒)에게 패하여 일당이 모두 참살되었다. 北晋 태부동해왕 월이 낙양병 삼십만을 이끌고 석늑을 토벌하다가 패하여 전몰하고 진종실 26왕과 백관은 모두 屠戮당하였다.  

 

진원제 10년 석녹은 조황제(趙皇帝)위에 올라 군신을 모아 큰 잔치를 열고 국상 서광에게 물었다. "짐이 옛날의 어느 황제와 겨눌 만한고."하니 대답하여 가라대, "폐하의 신무 모략은 한고조 우방보다도 능하오니 후세 누가 따를 자가 있겠습니까?" 이에 조왕이 말하였다.

"대장부 치세하는 대는 당당하고 명명백백할 것이고 조맹덕(曺操)이나 사마중달과(司馬애) 같이 사람을 속이고 고아, 과부를 농락하여 천하를 얻는 것은 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군신이 모두 이 말을 듣고 만세를 불렀다. 그는 학문은 못하였으나 독서는 좋아하였다. 이 시대를 가리켜 후세 사가는 중원 무주(中原無主)-중원에 임자가 없다-라 하였다. 군웅이 궐기하여 사방에서 황제를 참칭하였다. 한족아닌 타민족이 중원의 주인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晋書}에 진도는 낙양에서 영가 때에 와서는 남으로 건강에 옮기고 송 제 양 진 모두 건강에 와서 같은 지역에 있었고 양의 원제와 후연왕 소는 강능에 별거하였다. 성능은 유주왕 왕준의 수하 장수였다. 전쟁에 이기고 돌아옴에 왕준은 석녹이 돌아온다는 말을 듣고 술상을 크게 차려 놓고 대소 관료들과 함께 기다리고 있었다. 석녹은 문을 박차고 대청으로 올라왔다. 놀라는 왕준을 잡았다. 왕준이 석녹을 보고 꾸짖었다. "오랑캐가 감히 공무흉역을 하는가?" 그러자 석녹이 말하였다. "강병을 거느리고 본조가(晋나라) 망하는 것을 보고만 있다가는 나라가 망하니 왕자 자리를 노리고 있음은 흉역이 아니고 무엇이냐?"하며 목을 쳤다. 후세 사람 우군 왕의지와 진태부 사안(右軍 王義之와 晋太傅 謝安)은 폐허가 된 진나라의 유적을 보고 그 감회를 읊은 시에 가라대,

 

'晋室昔黃潰 永嘉遂南奔 沙塵河?? 龍虎鬪朝昏 胡馬風漢草 天驕蹙中原

 

 진나라 사직이 여기서 무너지고 영가지년에는 남으로 다다랐네. 사진은 망망하고 군웅이 밤낮으로 다투니 오랑캐는 한나라 땅을 휩쓸고 창검은 중원 하늘을 휘두르네'

 

이때 중원에는 五胡16국이 있었고 각기 도읍을 정하고 진나라는 낙양에서 영가지년에 이르러 남으로 건강에 옮기고 송나라, 제나라, 양나라, 진나라도 함께 건강에 도읍 하였다. 양나라 원제와 후양의 소황은 강능에 별거하고 진나라가 난리가 일어나 16국이 각기 도읍을 정하니 수나라는 양제가 장안에서 낙양으로 옮기고 당나라는 장안에 도읍 하였다. (晋都洛陽至永嘉南居建康宋齊梁陳?居建康梁元帝及後梁蕭察文別居江陵晋亂有十六國各建都邑隋都長安煬帝遷洛陽唐都長安 {帝王紀}) 이때 연 황제는 요동에서 고구려와 싸움을 포기하고 중원에서 세력 확충에 열중하였다. 그러나 못난 자손들의 문중 싸움으로 소멸하고 그 자리는 새로이 일어나는 魏가 차지하였다. 趙皇帝를 李農과 함꼐 살해한 조민석(趙石閔)이 황제를 자칭하고 국호를 大魏라 하였다. 그리하여 조황제 석씨 一門을 모조리 죽였다. 魏王 석민은 동이족의 유능한 인물들의 도움으로 황제 위를 차지하였으나 차츰 방자하여 조정에서 조선말을 못하게 하고 조선말을 하는 자는 발견하는 대로 파면하였다. (魏主下詔不得魏北俗之語朝廷違者免所居官)

 

그리하여 차츰 조선족 고위관직자를 제거한 후 다시 국민 풍속을 한족풍으로 바꾸고자 명령을 내려 조선옷을 입지 못하게 하였다. 이에 국민들이 불만을 품고 옛날을 생각하게 되었다. (魏主欲變易舊風乃詔禁士民胡服國人多不悅 {鑑易}) 이로부터 국민의 불만은 쌓여 가고 이 나라 사직은 오래가지 못하였다. 낙양에는 조선옷과 조선말이 차츰 없어졌다. 이것은 또한 단군 제국 북방열후의 세태를 의미하고 중원을 영영 잃고 조선족은 만주로 또 한반도로 위축되어 가는 현상이기도 하다. 위황제 석민(석민은 흉노 성 석씨를 버리고 '再'씨로 바꾸어 제민이라하고 또한 흉노가 성할 때에 양자로 가서 흉노족이 되었다가 흉노가 망하니 다시 재씨로 돌아왔음)은 국민의 인심을 잃고 유능한 신료가 없음을 탐지한 연 황제 暐가 태재(太宰) 모용각을 정외 장군에 임명하여 위를 공격하여 대파하고 위주 재민을 사로잡아 돌아와서 참수하였다. (夏四月燕慕容恪等擊魏大破之執其王閔以歸殺之 {鑑錄}) 조선족의 나라 황제가 되어 조선족을 천대하다가 조선족의 손에 죽었다. 이로써 위나라는 망하였다.  

 

조조가 세운 위나라는 사마씨가 멸하고 석민이 세운 위나라는 모용씨가 멸하고 위는 재기하지 못하였다. 살피건대 이?의 위나라 영토는 백제의 하남과 서하국의 일부 혹은 대부분을 포함한 것으로 보이는 바, 그곳 주민의 대부분이 부여족임음 명백하며 이때에 하남 백제 본국과 같은 부여족인 선비의 서하국이 趙의 석늑에세 망하였거나 명맥만 유지하고 있었다고 보여진다. 그것은 중원에 오른 주인이 없고 소위 5호 16국 시대에 접어들어서는 중원 북부의 강국이라는 백제의 이름이 나타나지 아니함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