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역사 침탈(侵奪)

BC 28세기 요하문명의 濊貊族이 남하 하여 夏, 商, 周를 건국하면서 황하문명을 일구었으며, 鮮卑族이 秦, 漢, 隨, 唐을 건국했습니다. - 기본주제 참조

홍익인간·인류공영/환단고기·한민족역사

30. 河南百濟本國의 敗亡과 廣開土大王의 中原 占領과 崩御

자연정화 2013. 8. 24. 12:51

三十. 河南百濟本國의 敗亡과 廣開土大王의 中原 占領과 崩御

 

사기에도 백제는 요서에서 요동의 고구려와 2백여년간 함께 존립하였다고 했으니 진나라 말기에 하남 기주 지역에서 군웅이 쟁패하였는바 이 때가 백제의 하남입국 2백여 년간에 해당되는 것이다. 광개토대호태왕비에 백제로부터 공취한 64성과 58성 중 대체로 조선 반도에 있는 것이 아닌 것을 후세에 와서 지명을 만들었다. {高句麗榮樂大帝碑考} 저자인 왕지수(王志修)는 다음과 같이 기술하였다. 비에서 이르는 성들의 소재지에 관하여 {삼국지} 위지 동이전({三國志} 魏志 東夷傳)에 80국 중 평양성은 애양국이고 아단성은 일사오단국이고 고리성은 고리국이며 모도성은 모로국이고 낙서성은 월지국인 것으로 추측된다. 그 위는 고증하기 쉽지 않다. (碑所稱諸城名當在三國魏志東京傳三韓所屬八十國之中平壤城疑卽愛(爰)兩國阿且城疑卽日斯烏旦國古利城疑卽古離國牟盧城疑卽牟盧國樂(迎)彌城疑卽月持國其他則不易考矣)  

 

이것은 요동 요서에 있는 성으로서 조선 반도에 애초부터 없었던 지명이다. 하남 백제국이 중원에서 색외의 요서로 밀려나온 후에 일어난 사태로 보여진다. 식민 사관은 廣開土大王 碑文 까지도 중원에서 지명을 조선 반도에 가져다가 놓고 있다. 그리고 호태왕비의 무위에 대하여 지은 시를 보면 동진 시대 중원은 군웅이 할거하여 후연의 모용보는 자립하고 연합하기도 하여 위세를 떨치고 있었다. 두 나라 모두 군주가 되어 요동 요서에서 대방까지 접해 있다. 대방은 발해변 대방이고, (維時中原屬東晋粉割據旋更張後燕自立慕容寶聯合欲使兵威揚?以二國作君主遼方舊郡連帶方) 여기 二國 군주란 그 한 사람은 大燕帝國 皇帝 모용보니, 후연을 일으킨 모용수의 태자로서 읍군으로 천도코자 모용수가 二十萬 군사를 이끌고 읍군을 칠적에 공을 세우고 뒤를 이어 대연 황제가 된 인물이며, (王師衆二十余萬長驅向? {鑑易}) 하나는 好太王 廣開土皇帝로서 四方을 정복하고 위진사국이라 하여 百濟 燕 晋 宋에 위엄이 진동하여 중원과 중원 동북에서 두 사람의 임금이 병위을 떨쳤다는 것이다. 훗날 이태백은 이 상황을 본 감상문에 '조선의 명월이 중화를 비치니 삼광은 세상을 어지럽게 하고 영웅은 회해를 진압하여 늠름하게 요사함을 물리치니, 유악지중에 모사한 것이 공을 세워 빛내기는 어려움이나 나는 연의 서릿발같은 함성은 모르나 모든 것이 부서져 버렸으니 다만 한 줄기 눈물뿐이다. 옛 도읍지에 간들 무슨 할 말이 있으랴!' 광무기적 옹이 가라대 "조선족이 구름 떼같이 모여들어 싸움을 버렸다."고 하였다. (李太白曰胡月人紫微三光亂天文高公鎭淮海(淮揚洲)談笑却妖氣採爾幕中?戡難光殊勳我無霜喊玉石俱焚但麗一行淚臨岐竟何云光武紀赤伏翁曰四夷雲集龍鬪野 {李太白詩集) 여기 그 시대의 동이족중에서 고구려와 백제의 중원 한족과의 관계를 살펴본다. 東夷高句麗國今治漢之遼東郡高句麗王高璉安帝義熙九年遣長史高翼奉表獻赤白馬以璉爲使持節都督營洲諸軍事征東將軍高句麗王樂浪公高祖踐?詔曰使使節都營河諸軍諸征東將軍高句麗王樂浪公璉使持節督百濟諸軍事鎭東將軍百濟王暎?執義海外遠修貢職惟新告始宜荷國休璉可征東大將軍暎可鎭東大將軍持節都督王公如故三年加璉散騎常侍增督平洲諸軍使少帝景平二年璉遣長史馬累等諸闕獻方物遣使慰勞之曰皇帝問使持節散騎常侍都督營平二年洲諸軍事征東大將軍高句麗王樂浪公纂戎東服庸績繼軌闕惠旣彰誠亦著諭遼越海納貢本朝朕以不德黍承鴻緖永懷先?思覃遣澤今遣謁者朱邵伯副謁者王邵子等宣旨慰勞其茂康惠政永隆闕功式昭王命稱朕意焉 {宋書}  

 

이것은 중원의 5호16국 시절 고구려 백제와 중원 중남에 위치한 송나라와의 교류 서신으로 황제가 제후에게 보내는 조서같은 문구이나 무슨 왕을 봉했느니, 무슨 주의 도독을 삼았느니 하는 것도 이미 점령하고 있는 것을 인정하는 것을 중국 사가들의 고정 필치이니 그런 것을 이해하고 또 서두에서 한의 요동군이라 한 것도 요동은 원래는 한나라 땅이라고 소위 한사군설을 강변한 것이니 그것도 기자조선 통치설과 함께 허망한 것인데도 알면서도 항상 역사 기록에는 그대로 남겨 두어야 한다는 망자존대사고인 것을 염두에 두어야만 이해가 가는 것이다. 당시 송은 고구려같은 강대국에 비하여 미약한 나라로서 오래지 않아 수가 중원을 통일하였다. {송서} 원문(동이 고구려국이 다스리는 곳은 옛날 한의 요동군이라 고구려왕 고연[고국양왕]이 진 안제 9년에 장사 고익봉을 사신으로 하여 붉은 말과 흰말을 바쳤다.

 

이에 고연에게 절월을 가지고 가서 영주의 여러 군사 [요동군]을 총괄하는 도독으로서 정동 대장군 고구려왕 낙락공이라 하였다. 고조가 창업하여 [송나라를 창립한 자] 사신을 고구려에 절월을 가지고 가서 전자 진 안제와 같은 절차를 행하였다. [이것은 우리와도 진나라 시절과 같이 잘 지내자는 사절을 보낸 것이다. 고구려에서도 화친을 허락한 것으로 보여진다.] 백제에도 송 고조의 창업을 알리는 사신을 보내어 백제 제군-사진→동장군 백제왕 영 [直支王]이 의리를 지켜 해위에서 멀리 수교하고 새로이 화친을 통고하였다고 했다. [백제가 멀리 해위에서 사신을 보내여 세로이 화친한다 하였으니 이 때는 진이 쇠약하고 송 고조가 창업한 후이니 송과 백제의 교신 내용으로 보아 그 사이 백제가 하남에서 망하고 백제 국민이 모두 조선 반도로 넘어 오지는 못하였을 것임] 중원의 나라들과 교신이 끊어졌다가 백제분국이였든 조선 반도에 있는 백제가 백제로 자처하고 새로이 강남 월주에 남은 백제와 함께 중원의 송과 수교를 시작한 것으로 보여진다. 위서에 백제가 공손씨와 사돈을 맺고 강국으로 등장했다. 그런데 晋나라의 의희때에 백제도 여영(진지왕)이 진과 소교했다고 전한다. 晋나라가 망한 무렵 秦나라 부견(符堅)이 황제를 자칭하고 연의 모용위가 낙양을 점거할까 두려워 하남을 공격 침략하니 의리라고는 없다.

 

符秦旣??懼慕容暐先據洛故侵河南春秋之義無 {鑑易} 이것으로 보아 진은 백제의 도움을 받고 창업을 하였는데 은혜를 모르고 백제를 침략한 것으로 해석된다. 진과 연이 모두 접경 이였다. 어느 쪽이든 백제를 치는데는 이웃 그 상대와도 싸워야 하는 것이다. 진이 연을 치고자 군사를 일으킴에 연은 정병 30만으로 항거하였다. 중위정병이라 했으니 백제가 참전함이 분명하다.

 

燕主暐命太傳評將中外精兵三十萬以拒之 {鑑易} 연은 이 전쟁에서 결국 패하였으니 백제가 이번 전쟁에서 연하여 패하고 하남에서 패망한 것으로 보아 틀림없는 것 같다. 진과 업군에서 연과 요서에서, 고구려와 요동에서 접하였으나 이 무렵 고구려가 호태왕 황제의 붕어로 화북 공략을 포기한 상태여서 백제는 고구려와 진과 연과 모두 적대 관계로 결국 패망하였다. 秦은 그후 백만 대군으로 晋을 공격하였는데 백제가 비록 强大하다고 해도 그와 동맹한 공손씨가 망하고 고구려와 적대하고 있는 상태에서 진을 당할 수 없었음이랴!] 고구려王 연을 정동 대장군에 백제왕 영을 진동 대장군에 절월을 가지고 가서 전례대로 왕과 공으로 수교한다 하였다. 3년에는 고구려王 연에게 산기상시를 더하고 평주 산동의 여러 군사를 감리하는 일을 더한다. 고구려 왕이 장사(長史) 마루 등을 방물을 가지고 파견하여 답례하였다.

 

송왕은 고구려 사신을 위로하고 송의 사신으로 하여금 절월을 가지고 가서 상기상시 도독 영평 (요동과 산동) 二주의 군국대사를 총괄하는 진동 대장군 고구려왕 낙랑공이 난적들을 토벌하고 잘 다스리어 은혜를 베풀어 그 정성이 이미 잘 나타나고 또한 강과 바다를 건너 방물을 보내니 고마우나 짐은 덕이 없어 선제의 흥업을 빛내지 못하고 옛 은덕을 생각하면서 여기 알자 [타국 황제를 배알하는 사신] 주소백 부사 왕소자 등을 파견하여 위로의 말을 올리게 하고 귀국의 강성하고 발전하는 그 공을 밝혀 짐의 뜻을 고하게 하오.)이것으로 보아 고구려는 광개토대왕이 즉위하기 전에 요동과 요서 산동을 이미 점유하고 있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 송왕은 스스로 덕이 없이 선대의 융성함을 이어가지 못하고 중국의 종주국이 되지 못함을 부끄러워하고 고구려가 요동 요서와 산동을 점유한 강대국이 됨을 축하하는 국서이다. 이 때에 백제가 고구려와 적대 관계를 청산했더라면 동이족은 고리국故土를 회복하고 동이와 한은 중원에서 병입하는 나라로 아마도 오늘에 이르렀을 것이다.

 

민족 분열이 가져오는 비극은 當代의 지각없는 집권 집단들에 의하여 민족 통일의 성업을 미루어 온 결과이다. 당시 광개토 대황제께서는 선대에서 이루어 온 업적을 토대로 전술한 바와 같은 원정의 위업을 달성하였던 것이다. 물론 이것은 고리국 고토 회복의 전제 노력이다. 개선할 때에는 역성를 거쳐 양평도로 해서 돌아왔다고 하였다. 역성은 제남에 있다고 하였다. 양평도는 후일 수 양왕과 당이세민이 고구려를 침공할 때 통과한 길이다. 하남 대동부에서 사성 평주(北京城)로 이어지는 통로라고 알려져 있다. 제가 원정군을 친히 이끌고 개선 장군이 대동부에 이르니 연군 태수와 범양 대사가 멀리 나와서 영접하여 대연을 베풀어 원정군을 위로하였다. 천자는 그들이 원정군 군량 수급에 힘쓴 노력을 찬양하고 위로하였다. 출정군이 사주에 이르니 어양태수와 대군 내사(內史)가 출정군 환영을 준비하고 출정군을 위로하였다. 

 

천자는 태수와 내사의 그 동안 출정군 내왕에 수발과 군량 운송에 공을 치하했다. 제는 평주에 이르러 북평태수와 요서태수 창여태수 요동태수 현도태수를 소집하여 그간 국경 수비의 노력과 징병 수급에 노고를 치하하고 이제 회복한 고토 수호에 만전의 준비를 하도록 지시하였다. 고구려가 요동 요서 산동을 領有한 경위를 보면 太祖 大王 때 요서에 十城을 쌓았다. ({高句麗 本紀} 所在) 하였으니 요동과 요서를 이때에 영유하고 漢寇를 막기 위하여 출정한 것인바 송 고왕의 국서에 난적들을 토벌하고 영평 2주를 영유하고 왔음을 축하한 내용과 일치하나 우리 나라 {삼국사기}에는 평주 즉 산동에 관하여는 기록이 없다. 당나라 숭배주의 결과이다. 중원 각국 고사 기록에 의존하니 축소했을 것이나 우리 나라의 남아 있는 史書에는 기록조차 안하였으니 고구려가 망한 후 '事大主義'의 팽배는 국민을 위축시킨 것으로 관습화해 버렸다.   

 

이 무렵 진나라와 연나라가 모두 고구려와 싸웠으니 진이 대병으로 요서에 침공하다가 대패하고 달아났으나 추격한 고구려 군에게 전멸 당하고 한 사람도 살아서 돌아오지 못하였다.(匹馬不歸)하였으니 진이 고구려와 이 전쟁에서 수 십만 군이 전멸함에 국력이 쇠하여 진의 멸망을 가져온 것 같다. 하남에서 패퇴한 백제도 요서에서 광개토대왕에게 패하고 항복할 것이다. 제는 요동 요서 산동의 방위를 철통같이 하고 침범자는 철퇴를 가하니 중원 열국들의 승패흥망이 무상하였으나 광개토황제의 위엄이 화북에 진동하여 감히 고구려를 침공하는 자가 없었다. 제는 18세에 즉위하여 재위 22년을 마상에서 지냈다. 제는 중원 다른 나라의 봉작 따위는 일체 받지 않았다. 백제가 왜구를 불러들여 신라를 공격하고 왜가 대방 지경까지 침입하니 제는 이를 섬멸하고 왜국(구주 대마도 등)을 영토로 관할하였다고 보여진다. 광개토太王 담덕황제는 치우천왕 병법을 깊이 익혀 大小 수백회 전쟁에서 百전 百승하고 한 번도 패한 일없는 용병의 귀재였다. 그러나 왜의 침범을 봉쇄한 것이며 목표는 중원의 고리국고토 회복에 있었다. 국내의 원정 여건을 정비하고 웅지를 펼 시기에 이르러 하늘은 이 동방의 게세(盖世) 영웅에게 수명을 주지 않았다. 

 

하늘은 어찌하여 이 세상을 평정하여 홍익인간 사회를 건설할 기회를 주지 아니하고 享年 불과 40세에 세상을 떠나니 이 무슨 운명인고, 온 국민이 호천망극하여 슬픔이 나라안에 가득하였다. 제는 신라 백제의 남계를 침범함에 대하여도 동족 지정으로 항상 강화하고 멸하지 않았다. 그러나 신라 백제는 북으로 올라가지 않으면 국가 발전의 여지가 없어 항상 조금씩 북으로 영토를 확장을 시도하였다. 후세에 결과로 보아서는 고구려는 신라와 백제의 왕조를 제어하고 통합을 이루었다면 조국의 영구 분열을 막았을 것으로 추측된다. 당시 고구려는 능히 그렇게 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음에도 통일의 대업을 성취하지 못한 것은 광개토대왕의 목숨이 길지 못한 불운으로 보아진다. 그후 고구려 백제 신라의 삼국 내란으로 고구려는 중원 영토를 잃고 다시 요서의 대부분을 잃고 만주 요동으로 후퇴하여 요하를 취한 후 방위선으로 삼았다. 광개토대왕은 당시 北魏 北齊 陳 周 隋 등을 대제국의 열국으로 봉작을 내린 것으로 보이나(비려 정복 위치로 보아) 남아 있는 기록이 없다. 고구려 역사 기록의 멸실은 실로 개탄하여 마지않는다. 고구려 양원제(陽原帝) 시대에 이들 나라와 교류하였으나 그 중 수나라가 통합하고 중원을 모두 차지하였다. 광개토대왕 시대에는 隋王은 大王, 帝 등의 호칭을 사용하지 못하였고 廣開土[太王]이란 상위를 의미한다. 신라 백제등은 국역이 고구려에 크게 미치지 못하였으나 통합에 불응하고 각기 자기 나라가 통일 주체가 되고자 하는 의지를 굽히지 아니하고 모자라는 국역을 타민족의 후원에 의존하는 정책을 썼다. 그것은 국토를 타민족에 넘겨주는 결과를 가져오고 타민족의 부용국으로 실추하는 결과를 가져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