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역사 침탈(侵奪)

BC 28세기 요하문명의 濊貊族이 남하 하여 夏, 商, 周를 건국하면서 황하문명을 일구었으며, 鮮卑族이 秦, 漢, 隨, 唐을 건국했습니다. - 기본주제 참조

홍익인간·인류공영/환단고기·한민족역사

32. 隋 陽帝의 大運河建設과 戰爭 準備完了하고 運河로 軍需物資 大量으로 輸送과 三百萬 動員 高句麗로 出兵

자연정화 2013. 8. 24. 12:53

 三十二. 隋 陽帝의 大運河建設과 戰爭 準備完了하고 運河로 軍需物資 大量으로 輸送과 三百萬 動員 高句麗로 出兵

 

隋王은 이번 敗戰으로 그 동안 天下 第 1 人者로 無所不通을 자랑하다가 오만이 꺾이니 性情이 殺伐해지고 反亂을 두려워하여 주위를 의심하였다. 그래서 太子 勇이 各地에 百官의 賀禮를 받는 것을 중지하게 만들었다. 이러한 상황을 便用한 次子 廣이 近臣과 짜고 妃嬪을 買收하여 太子를 모함하여 隋 文왕이 좋아하는 독고 后를 시켜 왕을 움직여 太子를 廢하고 廣이 太子 자리에 올랐다. 그리고 신앙을 금하고 동이족의 三神像과 佛像 성황당 등을 모조리 파괴하고 祭壇 寺刹을 불태웠다. 敗戰이 하느님탓인양 이러한 폭행을 보고 監察御使 방원경이 친구보고 말하였다. "주상이 선량한 태자를 卑弱하다는 이유로 가혹하게 廢庶人하고 왕들이 저마다 권력을 남용하니 천하가 비록 평안하다 하나 爲難의 근심을 안고 있다."하였다. 그 아들 현영이 비밀스럽게 말하기를 "주상이 본래 공덕이 없는데 속임수를 써서 천하를 얻었고 그 자식들도 교만하고 사치하며 불안하니 반드시 장차 서로 다투고 죽일 것이니 지금 비록 평안하다 하나 망할 것이 뻔하다."하였다. 隋 文왕은 국내 사정이 다시 군사를 일으킬 형편이 못되니 고민으로 병이 되어 무절제한 생활 속에 태자 광이 양위를 공작하다 탄로되어 수문왕이 급사한 바 때에 문왕이 태자를 바꾼 것을 후회하여 다시 바꾸어 환원코자 하다가 급사하니 임종한 자가 아무도 없고 태자 광의 호위병이 수직하고 출입한 후이니 그의 소행으로 보여졌다. 광은 황제위에 나아가 그의 형인 전태자도 살해하였다.

 

양광이 왕위에 오르니 이가 후일 중원에서 그 시대까지 역사상 최대 병력을 동원하고 최다 전사자를 낸 수양왕 광이다. 그가 집권 후 그의 아비 문왕의 죽음에 대한 의문으로 전일 고구려 원정의 도원수였던 문왕의 제오자 한왕 양이 변고를 듣고 그를 따르는 오초십구주 병력 수십만을 일으켜 경사로 진격하다가 패망하고 내란이 수습된 바 있다. 정국이 안정될 때 요서 국경에 돌궐과 사돈을 맺고 계민소를 설치하고 고구려를 정탐하며 군비 확충에 주력하였다. 그는 중원 변방이 모두 굴복하고 동방의 고구려만이 굴복하지 아니하니 천하에 유일무이한 황제의 존칭을 듣고자 하는 무한의 욕심을 충족하고자 함에 항상 고구려가 거슬렸다. 그리고 고구려는 항상 하남 동지를 그들의 고토라 하여 침략할 계책을 세우고 있으니 순종토록 회유하지 아니하면 화근이요 잘못 공격하다가는 화북 전체를 잃는 지난날의 한나라 전철을 밟는 것이다. 신중에 신중을 기하였다. 지난날 진나라 목왕은 대병을 일으켜 환온으로 하여금 고구려를 치게 하였다가 대패하고 도리어 화북의 전부인 사주, 기주, 옹주, 양주, 청주, 병주, 연주, 예주, 유주, 평주, 등 하북 산동 산서의 화북을 고구려가 병탐 하였다. (晋穆帝時桓溫北伐敗自夷狄亂華司冀?凉靑幷?豫幽平諸洲一時淪沒 {宋史}) 이 전쟁으로 진나라는 사마애가 창업한지 불과 4대에 망국의 길을 걷게 되었다. 이후 모용씨와의 동족 전쟁에 패한 고구려의 비극은 요동뿐 아니라 이곳 주민의 비극 이였다. 진이 망하고 중원이 분열하여 이곳 위와 진에 있던 주민은 한족에 동화하지 않고는 살아 남을 수가 없었다.

 

위의 주민들은 옷을 바꾸어 입어야 하고 조선말을 아니 해야 하고 진에서도 그렇게 해야만 했다. 진의 양평공 융이 진(秦)왕에게 상소를 올려 말하기를 동녘 오랑캐가 육주에 웅거하여 남면하고 황제를 자칭하고 있는 터에(중국 분열 후 황제위에 오른지가 동이 조선족이 여러 명이라는 쪽이다) 폐하께서 여러 해를 전쟁으로 얻은 나라이지 그들이 의를 사모하여 돌아온 것이 아닙니다. 지금 폐하 친히 그들을 돌봐 부자 형제가 조정에 가득 차고 권력을 잡고 해가 갈수록 훈구 대신으로 자리 잡으니 신의 생각으로는 호랑이를 기르는 결과가 될 것임을 유의해야 할 것이 옵니다. 신이 천문을 보니 혜성이 나타나 그 꼬리가 십여 장이고 태미를 거쳐 동정으로 이르고 4월에서 시작하여 추동에 이르도록 불멸하였습니다. 참고하옵소서 하였다. 그러나 진왕 견은 듣지 아니 하였다. (秦陽平公融上疏曰東胡고據六洲南面稱帝陛下勞師累年后得之本非慕義而來今陛下親而行之使其 父子兄弟森然滿朝執權履職歲傾勳舊臣愚以爲狼虎之心終不可養星變如此願少留意孝武帝寧康元年有慧星出於尾箕長十余丈經太微掃東井自四月始見及秋冬不滅秦王堅不聽 {鑑易}) 이러한 상황에서 여기 사는 조선 고구려인과 백제인이 어찌 국적을 보전 할 수 있으랴 진이 하남의 백제를 공략함을 의리를 모르는 짓이라 한 것이 의미 있는 말이라 보여진다. 

 

(여기 말하는 진은 진시황의 진나라가 아님 ) 옛날 진시황이 연을 정벌한 후 당시 중원의 선진 지식층 이였던 연인즉 동이족은 한고왕 유방을 도와 진을 치는데 크게 기여하고 중원 열국의 지도층에 상당수가 조선족 이였다. 그러나 고구려의 고토 회복이 신라 백제와의 통일을 이루지 않은 상태에서 추진 한 것이 실패의 원인이 였다. 수나라의 계속된 고구려 침공도 수가 백제 신라와 연휴 하여 백제가 고구려의 배후를 위협하였음으로 이루어 진 것이다. 고구려가 패주하는 수왕을 추격하여 잡지 못한 것도 백제의 배후 습격이 두려워 나라를 비울 수 없는 형편 때문에 추격 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중원의 옛 동이 열국민은 한족화로 그 생존을 찾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수양왕은 지난 요동 패전을 설욕코자 계속하여 서서히 전쟁 준비를 하고 있었다. 백제를 통한 정보 수집에도 빈틈이 없었다. 그리고 탁녹에 이르는 병력과 군량 수송을 위한 대운하도 완성하였다. 이 운하 건설에 희생자만도 수십만명 이라 하였다. 수 문왕의 대를 이은 수양왕은 대업 삼년에 하북의 조위(동이족의 나라) 두 나라를 순방하여 위세를 보이고 안문을 지나서 패수의 유림관을 나와 신사 오십만의 기치와 치중은 천리를 이었고 관풍전을 지어 둘래 이천보의 성을 이루고 위엄을 떨쳤다. 

 

4년에는 하북의 여러 곳 군사 백여만을 동원하여 황하에 운하를 만들어 하북에서 탁군에 이르는 수로를 만들어 부역에 참가할 남자가 없는 집을 부녀자가 노역에 나왔다. 이와 같이 수육으로 신속히 전국 징병과 군량미를 탁녹으로 수송할 수 있는 준비를 갖추고 한편 동경을 동도로 개칭 수축하여 금왕 자신이 장기 체류 할 수 있도록 하고 다시 이십만 부역민을 동원하여 유곡(패수지역)에 서동으로 장성을 쌓아 장차 있을 고구려와의 대전에 대비하였다. 이러한 수 왕의 무모한 전쟁 준비로 중국이 피폐하여 망하게 된 것은 배거가 창도한 것이다. (令中國疲弊以至於亡皆?之唱導也) 고구려 정벌을 수양왕에게 권한 자임)라고 하였다. 후일 중국 역사 기록은 색위의 여러 오랑캐들이 돈을 벌기 위하여 군현을 출입하는데 경비 과다 지출로 피폐 한 것이라 하여 침략 전쟁 준비 관계라고 쓰지 아니 하였다. 침략전쟁이라는 사실을 감추기 위하여 이와 같이 이치에 맞지 않은 이상한 변명을 한 것이다. 수 왕은 이와 같은 원대한 계획의 성공으로 고구려 정벌에 삼백만의 대병역을 단시일에 동원 할 수 있게 하였다.  

 

그는 부왕이 삼십만의 적은 병역으로 고구려를 얕보고 싸우려다 실패하고 특히 지원 병력이나 군량의 운반 불편으로 패잔군을 구출하지 못하고 수수 방관하여 전체로 백만의 전사상자를 내는 비운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하여 만반의 준비를 한 것이다. 수 양왕의 동방 수송도 완성을 전해들은 고구려는 수의 동정을 살피고자 요서에 수의 계민소에 사자를 보내어 동정을 보고 오라 하였다. 수 왕은 마침 그곳을 시찰하러 왔다 계민소는 감히 고구려 사자가 와 있음을 감출 수 없었다. 황문시랑 배거가 양왕에게 고자질하였다. "고구려 왕이 입조하지 아니하니 이곳에 온 사자를 친히 보고 교화하면 고구려는 본래 한 진의 군현에 불과한 소국이 오니 폐하를 두려워 할 것인바 사자를 위협하면 고구려 왕이 입조 할 것이옵니다."하였다. 수왕은 말을 바꾸어 고구려 왕을 초청 한다 하고 입조를 권하였다. 입조란 소국왕이 대국 조정에 황제를 배알하러 가는 절차이다. 그러나 고구려는 건국이래 자주 독립을 고수하고 대국 황제를 자처하였다. 수 양왕은 정실과 첩실 몸에서 난 수십명 자식을 모두 각 지방 왕에 봉하고 타성 왕후를 전해져 오는 왕후 봉작 제도를 이때부터 없애 버렸다. 천하에 고구려만을 왕으로 인정하고 달래였으나 고구려는 결코 동앢 황제의 위치를 굽히지 아니 하였다.  

 

배거는 다시 말하였다. "고구려를 멸하고자 함은 선제때 부터 오랜 숙원 이였습니다. 다만 양량이 불초하여 출정하였다가 실패하였으나 폐하께서 어찌 그냥 둘 수 있사오리까, 관대를 한다 하여도 오랑캐입니다."(군자의 의관) 하고 기다려도 고구려는 조공하지 아니하였다. 수 양왕 광은 천하에 영을 내려 돈 있는 자로 하여금 전마 십만 필을 구입하고 무기를 준비케 하였다. 명을 어긴 자는 참하고 칠년 봄에는 강도에 행차하여 유주총관 원홍으로 하여금 동래에 가서 전함 삼백척을 만들게 하고 주야로 쉬지안코 만들도록 감독하여 수중에서 조선공이 끝날 때까지 나오지 못하게 하여 하체가 수중에서 불어 터져 썩어 죽는 자 부지기수이고 양왕 광은 탁군에 이르러 구품이상 문무백관을 집을 지어 안치한 후 천하 병력을 원근을 불문하고 징발하여 탁군에 총집결하라 명을 내리고 강희 이남의 뱃사공 일 만인 궁노수 삼만인 영남의 배참수(적은 창을 쓰는 자) 삼만 인을 징발하여 사방의 수송을 돕게 하고 하남 희남 강남에서 전차 오만을 만들어 고양으로 모으게 하여 동시에 군복 갑옷 만막을 싣고 군사들로 하여 끌게 하고 하남 하북민으로 하여금 군을 공양케하고 희남민을 동원하여 예양과 낙구에 있는 창고 양식을 탁군으로 수송케 하니 수송 선박이 천리를 잇고 병갑 및 여러 장비의 왕복하는 행열은 수십만 명이 길에 깔려 주야로 끊이지 아니하니 죽는 자도 무수하여 시체가 길가에 흩어져 악취가 코를 찌르니 천하가 소동 이였다고 {史記}에 기록하였다.

 

수송에 일년간을 쉬지 않고 준비하여 팔년 정월에는 사방의 병력도 탁군에 모두 모였다. 준비가 완려함에 수양왕은 말하였다. 고려의 무리는 우리의 일군도 당하기 어려울 것이다.(일군 병력은 이십만 정도이나 그 군비는 고구려보다 우월하니 비슷한 병력으로 한개군의 능력 밖에 안된다는 뜻이다) 수왕은 영유에게 "이번 전쟁에 경의 생각은 이길 것으로 보느냐?"하고 물었다. 영유가 대답하여 말하기를 "신도 이길 줄 아옵니다. 그러나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폐하께서 친히 출정하는 것을 원치 아니 하옵니다."하였다. 수왕은 얼굴 색이 변하면서 반문하였다. "짐이 대군을 거느리고 여기 와서 어찌 승전하는 것을 보지도 아니하고 돌아간단 말이냐 적이 먼저 후퇴하는가?"하였다. 대답하기를 "전쟁에 아직 이기지 못하였사오니 폐하의 위엄이 손상될까 두렵습니다. 어가가 여기 유하시면 장수들은 싸움의 방략을 지시 받아야 하오니 싸움은 주야 강행군하여 불의에 의해 습격해야 이기는 것인데 승부의 기틀이 빠르고 느리고 하는 자유 자재함이 있어야 하옵니다."하였다. 수왕은 이 말을 듣고 매우 불쾌하여 "그대의 생각이 그러하다면 너는 여기 머물고 있거라."하였다. 우상 방서 감사 경순 이 상소를 올려 같은 말로 간하였다.

 

수 양왕은 크게 노하여 좌우에 명하여 참수하라 하였다. 옆에 있던 하도가 누누이 간하여 겨우 살렸다. 각 군의 위치가 정해진 후 드디어 수양왕의 진군 명령이 내렸다. 좌십이군은 누수방 장잠, 명해, 계마, 진안, 남소, 요동, 현도, 부여, 조선, 옥저, 낙랑등 열두길로 나누어 진격하고 우이십이군은 점선 함자 희니 임돈 후성 제계 답돈 숙진 갈석 동시 대방 양평등 열두 길로 진격하여 평양을 목표로 집결하라 하니 그 병력은 무릇 일백십삼만삼천팔백이니 호왈 이 백만이라 하고 군량 군 귀품 수송 병력이 또한 그 배수를 넘었다. (凡一百一十三萬八百人號二百萬其墩運者倍之宜社於南桑乾水 {隋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