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역사 침탈(侵奪)

BC 28세기 요하문명의 濊貊族이 남하 하여 夏, 商, 周를 건국하면서 황하문명을 일구었으며, 鮮卑族이 秦, 漢, 隨, 唐을 건국했습니다. - 기본주제 참조

홍익인간·인류공영/환단고기·한민족역사

33. 수(隨)나라의 水軍 대장군 내호아가 평양성을 공격하다가 고구려 황제(皇弟) 건무태자에게 대패하여 전멸함

자연정화 2013. 8. 24. 12:55

三十三. 수(隨)나라의 水軍 대장군 내호아가 평양성을 공격하다가 고구려 황제(皇弟) 건무태자에게 대패하여 전멸함

 

隨王은 高句麗와 戰爭에 그의 運命을 걸었다. 한편 高句麗 朝廷에서는 수 양왕 광의 출병을 전하는 파발마의 보고가 잇달았다.. 平壤의 皇帝는 廟議를 열고 백관의 의논을 들었다. 平陽皇帝는 후에陽(영양)皇帝로 불렀다.고구려 제25대왕 평원 황제의 장자로 나면서부터 총명하고 성장함에 담대하고 명민하며 문무를 겸비한 명군으로서 일찍이 모용구와 모구검의 난리로 고구려 사서가 대부분 멸살함을 근심하여 대학 박사 제도를 두어 사기 편찬을 하고 『留記』 100권을 편수하였다. 이것은 백제와 신라의 건국이래 가장 완비된 삼국 사서이기도 하다. 영양황제는 지난 9년 麗 隨大戰을 승리로 이끄는데 대공을 세운 강이식장군을 병마 도원수로 삼고, 을지문덕을 서부총관 진서 장군에 제수하였다. 제는 백제와 신라가 연달아 수양왕에게 사자를 내여 고구려 국정을 염탐한 정보를 제공하고 전루에서 고구려를 협공할 것을 제의하고 있으니 수나라 실정에 보다 밝은 강이식을 측근에 불러 사후책을 의논하고자 함이였다. 수가 일단 패하여 심한 타격을 입었으니 가까운 시일내 재침을 할 수는 없을 것으로 보고 백제와 신라를 무력 통합할 것을 계획함이라.  

 

그러나 강이식 장군이 자신의 생각을 사뢰기를, "수나라가 한 번 패하였다고 하나 우리가 신라와 백제를 분국을 공벌하려면 반도 깊숙이 진격해야 하는데, 협소 험산에 각지 요새로 숨어들면 이를 토벌하는 데는 五年의 세월이 걸릴 것이옵니다. 그 두 나라 중 하나를 설득하지 않고서는 이것은 우리가 신라 백제와의 전쟁에서 깊숙이 들면 수가 침입해 올 것은 필연 지사이오니 그 일은 지금으로서는 아니되옵니다. 때가 오면 가능하옵니다. 그리고 수는 우리를 침공할 적에는 반드시 신라 백제가 우리의 배후를 공략하는 전략을 전제로 하고 있으니 그것이 우리의 우환이기도 하오나 신라는 동부의 물길 숙신이였으므로 우리의 동북영토 일부를 점령하는 것이 고작이고 반도의 백제는 압록수 (반도에 있는)을 건너지 못할 것이오니 유사시에는 압록수변을 굳게 지킬 수 있사옵니다."하였다.

 

 그리고 이것은 수나라와의 전쟁이 오래가면 반도에 있는 남평양성 별궁은 최악의 경우 함락을 각오한 전략이다. 조선 반도에 있는 평양성은 고구려의 남쪽 전략 기지이며 백제는 항상 위협의 대상 이였다. 강이식은 발해변의 창해 근처에서 태어나 고구려 변방을 수호하는 직무에 오래 있으면서 인격을 도야한 문무를 겸한 장수였다. 한 무왕이 창해군을 만들어 한나라 영토로 편입했다가 고구려 개국 성조 주몽황제에게 패하여 군을(郡) 철파한 곳으로 주나라 강태공의 출생지로서 강이식은 그 가문의 출신이다. 그가 서북 총관으로 있으면서 수나라 문왕의 삼십만 대군을 파할 적에 부총관으로 있으면서 대공을 세운 을지문덕을 그의 후임으로 추천하고 영양 황제가 아직 서열이 낮은 을지문덕을 발탁한 것도 인재를 알아보는 현명함이 있어 그러한 것이다. 강총관은 재임시 契丹과 靺鞨 두 열후를 잘 사궈 친교를 하여 수양왕 부자의 꾀임에 넘어가지 말도록 하고 돌궐은 고구려 열후는 아니나 친선을 도모하여 최선을 다하여 수의 고구려 침공에 동참하지 못하게 했다. 

 

을지문덕도 이와 같은 외교 전략에 임무를 띠고 여러 차례 그들과 내왕하며 교류하였다. 契丹과 靺鞨은 고구려 열후로서 세가 크지 아니하나 수나라는 고구려 분열 정책으로 백제 신라와 같이 만들려고 갖은 계교를 부렸으나 강이식 을지문덕은 그것을 막았다. 돌궐은 수왕이 공주를 시집보내서 돌궐왕을 사위를 삼아서 서북 정복에 성공하고 마음놓고 고구려 침공을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러나 돌궐은 을지문덕의 설득을 지켰다. 을지문덕은 천자의 입조하라는 명을 받고 수군의 동태에 관한 보고서를 가지고 평양에 입궐하였다. 백관이 도열한 후 제는 조서를 내리어 말하기를,  

 

"수문왕은 까닭 없이 우리를 침공하여 백성을 노략질하고 천도를 역행하다가 30만 군이 몰살되고 천벌을 받았거늘 이들은 北狄 돌궐로써 수문왕의 아들 廣은 잔인 무도하여 중원 백성을 잔휼하고 그의 본국 돌궐왕을 사위로 삼아 유대를 강화한 후 흉노를 물리치고 서북 일대의 각 이민족을 항복 받아 세를 과시하고 중원 열후를 진압하여 돌궐 諸國 隨를 창업한 자인바 오랑캐 廣은 그 아비를 모살 하고 형제도 죽여 황제를 참칭하니 짐이 일찍이 출사 벌주고자 하였으나 백제 신라가 용렬하여 거리낌없이 이를 행하지 못하고 있던 중 수왕 광이 이제 수백만 군을 일으켜 우리를 역공하려 하니 실로 분함을 참을 수 없는지라 만조 신료는 합심 전력하여 국난을 극복할 것이며 짐도 구룡산 별궁으로 나아가 출정군을 독려할 것이며 태자 건무는 유관수 장군과 어림군을 통솔하여 평양성을 지키고 발해에 침입하는 수나라 수군을 막고 을지문덕은 서부 총관 관내의 모든 성주 장수들을 전선에 동원하고 필요한 인원과 물자를 징발하는 일을 임의 수행할 것이며 군율을 어기는 자는 신분의 여하를 가리지 말고 임의대로 처리하라.  

 

이것으로 짐을 대신하여 군법을 시행하라"하고 보검을 전수하였다. 을지문덕은 사은 숙배하고 어전에서 제장을 모아 명령을 내렸다. "제1군 이민수 장군은 步騎 精兵 1만 8천을 이끌고 요하좌안을 수호하라. 제2군 정태구 장군은 보기정병 1만 5천을 이끌고 은 우측을 수호하라. 제3군 조학성 장군은 정병 1만5천을 이끌고 요하우측을 수호하라. 제4군 최일만 장군은 정병 1만 5천을 이끌고 요하우측 제3군의 우측을 수호하라. 아장 을서 삼용 장군은 제5군 정병 1만 2천을 이끌고 각 4군의 허실에 상응하여 적시에 접응하라. 각 군은 강변 요소 요소에 참호와 방책을 구축하여 적병의 도하를 막는데 전력할 것이며 착오 없이 세심한 주의를 하고 적이 요하를 건너는데 그 전력의 대부분을 소모해야만 요동 각성을 보전할 수 있고 각성을 지키지 못하면 왕검성을 보전할 수 없다. 내가 황제 폐하의 명을 받들어 나라를 지키는데는 신명을 국가에 바쳐 소임을 다 할 것을 이미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으니 제장은 나와 함께 충성을 다하기 바라며 폐하를 대신하는 나의 호령은 일호의 사정도 용납함이 없을 것인즉 명심하고 착오 없기 바라오.  

 

나 또한 중군을 회동하여 전면에서 적을 섬멸할 것이오. 이제 제장은 즉시 출발토록 하라"하였다. 諸將은 본부를 하직하고 각기 요하변으로 군사를 이끌고 떠났다. 요서의 각성과 패수의 요새지를 수군 200만과 평지에서 항전할 수 없음으로 전략상 철수하고 요하를 방위선으로 설정한 것이다. 여기 고구려 장군들의 이름은 중국식으로 전해 온 것을 인용하였으나 당시 고구려 인의 이름이 우리 나라 옛날식 이였음으로 후세 사기에 음독 성명이며 본명은 불명하다. 고구려 장군들의 성명은 고사적으로 강여수저서 을지문덕에 상세하고 한단고기 신라, 백제, 고구려는 한반도에 없었다 등, 잃어버린 고대사 회고의 기풍이 일어남은 다행한 일이다. 한편 수군은 치중 산병(輜重 散兵, 군의 보급 물자 수송 병력)도 전투 병력과 같은 편제로 모조리 4방을 에워싸고 행군하고 돈영하는데 절차가 있고 1군이 출발하여 하루만에 사십리 간격으로 둔영하고 점진하여 40일에 首尾가 서로 이어져 고각이 서로 들리고 성기가 960리에 이어져 휘날리고 어영내에 12 위술소 3대 五성 9사에 나뉘어 내위전후 좌우로 6군이 차례로 출발하여 다시 80리에 이르니 고금에 보지 못한 출사지성(出師之盛)이라고 장관을 이루었음을 역사서에 기록하였다. 당년 十二月에 단문진(段文振)이 좌우위 대장군으로 출전하였다.  

 

과로로 병을 얻어 임종에 수왕에게 표를 올려 아뢰기를, "夷狄이 속임수가 많으니, 깊이 유의하고 속전속결로 불의에 수륙으로 평양을 공벌하면 나머지 여러 성은 힘들이지 아니하고 함락할 것입니다. 일시 지체하면 추위가 닥쳐와서 운량이 어려워지고 앞은 고구려 후는 말갈이라 전후로 협공 당할 것이니 지체하면 아니되옵니다."하고 죽었다. 수왕은 몹시 애석하였다. 그러나 수양왕 광은 이와 같은 전법이 고구려와 같은 강병에게는 통하지 아니함을 모르고 이러한 전법으로 싸우다가 도합 200만 군을 요하변에 장사지내고 끝내 수나라는 망하고 만 것이다.  

 

당시 말갈은 중원 하북과 몽고 사이에 있는 고구려 열후로서 고구려를 지원하였다. 수나라는는 출병한지 두달만에 요수가에 총집결하여 도하 작전을 강행하였다. 浮橋를 만들어 건너고자 하면 고구려군이 습격하여 파괴하고 또 만들면 불태우고 수나라 장수 전사웅 맹사 등은 전사하고 강을 건널 수 없었다. 수왕은 전군에 명령을 내려 '강을 건너는데 공을 세운 자는 봉작을 하고 큰상을 준다.'하고 장병을 격려하였다. 좌돈의 대장군 맥철장이 자진해서 선두에 나서겠다고 청하였다. '대장부가 어찌 방안에서 부녀자의 간호를 받아 죽을까?' 보냐 하고 그의 세 자식들에게 국가에 목숨을 바칠 것을 명하였다. 수왕은 그의 세 아들에게 봉작을 내리였다. 수군은 다시 3개 부교를 만들어 도하를 강행 하였다. 맥철장은 선두에서 장금을 휘둘렀으며 시석이 비오듯 쏟아지는 부교를 건너 동안에 올랐다. 뒤를 따라 수군이 대거 상륙하였다. 강변에 진치고 있는 고구려 군은 상륙하는 수군을 닥치는 데로 격살하였다. 그러나 맥철장은 수군을 지휘하여 이제 우리는 물러가면 몰살하니 죽도록 싸워 고구려 군을 물리치는 수밖에 없다 하고 후퇴하려 하지 않았다.  

 

상륙한 수군은 아무리 죽어도 그 수는 점점 불어났다. 수군은 양왕의 독려 하에 아무리 죽어도 계속 도하하여 온 것이다. 고구려 총관은 역시 진두에서 각 군을 지휘하여 수군을 격살하였으나 점점 불어나는 수의 대군을 평지 접전으로 막을 수가 없었다. 후퇴 명령을 내렸다. 질서 있는 후퇴 작전에 수군은 추격할 수 없었다. 이 도하 작전에 수군은 10만의 사상자를 내었다. 고구려 군도 만 명에 가까운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수군은 이것을 대승이라고 기록하였다. 이리하여 수군은 요동성과 ?城을 포위하였다. 을지총관은 각 성주에게 성을 굳게 지키고 절대로 출격하지 말라는 명령을 내렸다. 성중에는 모두 1년 양식이 준비되어 있었다. 총관은 굳게 지키고 있으면 공성군의 사상자는 수성자의 몇 배가되는 것이고 장차 엄동이 닥쳐오면 수군은 운량이 어려울 것임으로 저절로 총공격할 기회가 올 것임으로 추정하였다. 수군은 이 두성을 함락하지 않고는 평양성을 향할 수가 없었다. 그것은 평양 왕검성을 공격하는데는 전군이 총공격을 해야만 이길 수 있는데 수도 평양성을 둘러싸고 있는 10여개성의 주성인 두 성을 함락하지 않고 평양을 공격하면 앞뒤로 적의 포위망에 들게 되니 어찌하여도 이 두 성을 공략해야 하는데 공성한지 3개월에 이르도록 함락하지 않으니 수 양왕은 초조하였다. 단문진의 유언대로 엄동이 닥치기 전에 평양 왕검성을 공략하지 못하면 큰 낭패가 닥쳐옴을 깨닫고 있는 것이다.  

 

수 양왕은 참다 못하여 위험을 무릅쓰고 요하를 건너 요동성밖에 행재소를 정하고 요동성 공격의 실태를 답사하였다. 그리고 각 군 공성 장수들을 소집하였다. 그는 장수들을 힐책하여 말하기를, "공등은 높은 벼슬자리에 가문의 명예에 의지하여 앉아 암약하게 나를 대하는가? 도성에 있을 적에 내가 여기 오는 것을 원치 않고 내가 직접 보는 것을 두려워함은 병패이라. 내 지금 여기 와서 공 등의 소위를 보니 죽이고 싶다. 지금 공등이 죽음이 두려워서 힘을 다하지 않으면 내가 공들을 죽이지 못할 것이라고 여기는가?"하니 제장이 모두 두려워 안색이 변하였다. 이에 수 양왕은 요하변 본진으로 돌아가지 않고 요동성 서쪽 수리밖에 있는 조그마한 두 성에 유숙하면서 독려하였다. 그러나 아무리 맹공격을 하여도 시일만 가고 전사자만 불어날 뿐 성은 함락되지 않았다. 수 양왕이 생각대로 공성 장군들이 죽을힘을 다하면 함락할 것이라는 계산은 옳지 않았다. 고구려군은 엄청난 전력을 발휘하였다.

 

한편, 右翊衛大將軍 萊護兒는 강희 각 군 전함을 이끌고 수 백리 바다를 운항하여 浿水에 이르러 패수에서 평양 60리 해역까지 진격하여 고구려 군과 만나 크게 파하고 승리를 타고 평양성 공격에 나서고자 하니 부총관 周法商은 全軍이 집합하여 함께 힘을 모아 공격하기로 결정하였으니 기다리는 것이 옳다 하여도 萊護兒는 공을 세울 욕심으로 듣지 않고 정예갑병 4만을 선발하여 왕검성에 접근하였다. (萊護兒帥江淮水軍軸?數百里浮海先進入自浿水去平壤六十里與高麗相遇進擊尤破之護兒欲乘勝趣其城副總管周法尙止之請이諸軍至俱進護兒不聽簡精甲四萬直造城 {鑑紀}) 당초에 고구려군은 수나라군을 유인하기 위하여 패하고 달아나서 수군이 깊이 들어온 후에 복병으로 역습하여 섬멸하니 수군 대장군 내호아는 겨우 수천 명을 이끌고 달아났다. 당초 우문술의 9군이 도착하면 래호아의 수군과 함께 총공격을 가하고자 하였으나 오지 않고 내호아는 초전에 쉽게 고구려 군을 이겼음으로 한 번 해볼 만 하다고 생각하였다. 래호아는 혹여 복병이 있는지 진군을 중지하고 4방을 수색대를 보내어 조사하였으나 전혀 그러한 준비는 없었다. 이에 계속 추격해 가니 고구려 군은 평양성 위각에 있는 빈 절간에 들어갔다. 수군은 대군으로 공격하여 고구려 군을 또 한차례 격파하였다. 이어 수군은 평양성하에 다다랐다. 수군은 평양성을 서쪽에서 공격하였다.

 

부총관 주법상은 후군을 이끌고 뒤를 따랐다. 수군 정병 4만은 평양성 위성의 고구려 군 방위진을 뚫고 외성안에 진입하였다. 성안에 진입한 수군 병사들은 민가를 뒤지어 노략질에 바빴다. 이 때에 주위에 숨어 있는 고구려군이 4방에서 에워싸고 총공격을 시작하였다. 대오가 흩어진 수군은 도망가기에 바빴다. 萊護兒는 수습 불능의 혼란에 빠진 수군 장졸을 그냥 버리고 성을 빠져 나와 달아나기 시작했다. 성내를 빠져 나오지 못한 수군은 무기를 버리고 항복하였고 수군 대장을 잡으라고 소리치며 추격하는 고구려군은 도처에서 수군을 섬멸하였다.

 

후군을 지휘하여 뒤를 따르는 부총관은 중도에서 복병의 습격을 받아 대패하고 해로로 돌아와 패잔군을 수습하여 고구려군의 추격에 대비하고 있었다. 이와 같이 래호아의 6개(水軍) 군단이 파멸하는 동안 우문술의 9개(육군) 군단은 악전 사투로 요하를 건너 요동성과 영성을 공격하는데 수양제의 열화 같은 독전에 내호아의 휘하 군단이 무엇을 어찌 하고 있는지 돌아볼 겨를이 없었다. 이와 같이 9군이 요동성과 영성을 함락하지 못함에 수양왕은 평양성으로 갈 수 없었다. 요동성에서 발이 묶여 오지 않고 6군 20만의 병력을 잃고 대장군 래호아는 살아남은 수 천명을 이끌고 배로 돌아와서 기다리고 있는 부총관 주법상이 고구려 추격병을 물리치고 구하였다. (護兒大敗僅而穫魚士卒還者不過數千人高麗追至船所周法商整陳待之高麗乃退 수서) 내호아는 패잔병을 이끌고 海浦에 일단 돌아왔으나 고구려의 습격이 두려워 감히 다시 머물 수 없어 우문술 대장군의 접응으로 그곳을 떠났다. 해포란 요하입구 우안 포구이다. 

 

이 수륙 대전으로 수나라는 패수에서 요하 입구에 연하여 발해 안에 장관을 이룬 그들의 자랑하는 巨艦과 數千隻의 군소 선단은 파멸하고 말았다. 수서를 이용한 {唐書}에 당시 수나라 수군의 위용을 기록하되 등주(지금의 발해변 봉래시)를 동북으로 바다를 가서 남쪽 바닷가에 패강 입구를 지나면 숙도이고 신라의 서북이 된다. 또 수 양제의 동군이 인솔하는 12로 군중의 해군 돗대는 하늘 높이 솟고 크고 큰 전함은 구름을 나르고 패강을(패수)가로 막고 평양쪽을 멀리 바라본다. (登洲東北海行南傍海?過浿江口淑島得新羅西北又隨煬帝東征訴曰滄海道軍舟?千里高帆電逝巨艦雲飛橫絶浿江搖造平壤) 이와 같이 자랑하는 거함들도 발해를 지키고 있던 고구려 수군 도원수 황제(皇弟) 건무에게 패하여 화공에 불타고 기절해 태풍에 침몰하고 고구려 수군의 기습에 지리멸렬하여 맥없이 함몰하였다. 이러한 전함 건조에 수양제는 3년간에 막대한 인적 물적 큰 희생을 치르었던 것이나, 단 한 번 전쟁에 20만 명의 수군은 발해에 고기밥이 되었다. 수천 척의 수군 함대는 패잔병 기 천명을 태운 100 여척의 선단이 패수구에 머물고 있다가 내호아는 요하변 우문술군에 의지하고 감히 수왕을 가보지 못하였다. 이때 수군의 함대는 그들이 자랑한 것과 같이 국역을 기울여 전쟁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다년간 건조한 거대한 수천 척의 전함과 중원 전국에서 모은 수송 함대가 발해와 패수 어구에서 고구려에게 전멸되었으나 수군의 수군 대장군 내호아의 패전 기록은 우리에게는 없고 수나라 기록에 나오니 당시 고구려의 적은 수군(水軍) 함대가 이러한 대승전을 거두었다고 우리측 기록만 있다면 후세 사람은 믿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 나라가 수군의 편제와 주도면밀한 전술은 그 전통이 후세에 이어져 임진왜란에도 이순신 장군의 1대 20의 기적을 이룬 승전을 기록하였거니와 고구려 수군의 돌격하는 용맹과 기발한 전술에 수나라 수군은 손을 쓰지 못하고 수십만 수군 장병과 수천척 거대한 전함을 포함한 함대는 불과 몇 달만에 함몰되었다. 전해 온 기록은 없으나 임진왜란에 실용한 잠수함에 비견하는 철감선이 이때부터 실용되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수나라의 수군 패멸은 을지문덕 장군이 살수 요하변에서 마음놓고 후고의 걱정 없이 수군 30만을 섬멸 할 수 있게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