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역사 침탈(侵奪)

BC 28세기 요하문명의 濊貊族이 남하 하여 夏, 商, 周를 건국하면서 황하문명을 일구었으며, 鮮卑族이 秦, 漢, 隨, 唐을 건국했습니다. - 기본주제 참조

홍익인간·인류공영/환단고기·한민족역사

35. 高句麗 征隋軍의 班師와 隋나라의 內亂

자연정화 2013. 8. 24. 12:57

三十五. 高句麗 征隋軍의 班師와 隋나라의 內亂

 

高句麗 乙支文德 總管은 遼河 건너 遼東 고성에 있는 산과 같이 쌓인 수군의 군수 물자를 收獲하고 군사를 휴식시킨 후 천자에게 表를 올렸다. 西部總管征西大將軍臣乙支文德上表于皇帝陛下尊許耳今而隋王廣狂暴自慢滅趙國以來其放恣日益今至侵入我國以無禮不遜於皇上以犯陛下之虎威臣惟惶恐無至焉今幸爲天道垂恩德與陛下忠良赤子武威能滅難敵此陛下之洪福也我軍雖大勝於隋然隋王不降而遠遁矣由兒彼必敗軍整備後再侵可想也是今我軍士氣衝天以可呑中原之意氣臣愚料隋敵之況彼屢敗於遼東無數戰死者屍放山積棄於遼東曠野以彼國內疲弊國人背怨隋主國無余穀兵無戰意民無公信將必有變亂乎臣麾下將兵旣具整備只待國命眞天下進運之秋也吾使雄擧一決可圖中原楊廣雖還有百萬之衆彼士氣梢沈不可爲效用則必能破潰可期矣若如中原之民亦幸乎玆以專要本國之接應則後方兵站運糧以大事期必可成乎西部總管征西大將軍臣乙支文德頓首百拜伏願陛下之英斷伏惟上表矣 漏錄補記 西部 總管 征西大將軍 臣 乙支文德은 皇帝陛下 御前에 表를 올리나이다. 隋王 廣은 狂暴하고 自慢하여 趙나라를 멸한 후부터는 그 방자함이 날로 더하여 우리 나라를 침략하고 無禮 不遜하게도 陛下의 威嚴을 범하였사오니 황공함이 이를 때 없사옵니다. 이제 다행이 천도가 무심치 아니 하와 恩惠를 내리고 陛下의 충성스러운 병사들의 용맹은 능히 어려운 적을 멸하였사오니 이는 참으로 陛下의 洪福이옵니다. 우리 군사가 비록 대승을 거두었으나 隋 楊帝는 降服하지 아니하고 멀리 달아났사옵니다. 그러하옴에 그들은 필연코 敗軍을 다시 整備 收拾하여 敗戰의 수치를 씻고자 다시 침입할 것으로 추측되옵니다. 이제 우리 군사는 사기 충천하여 가히 중원 천지를 삼킬 의기가 있습니다. 臣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수나라 도적은 그 형편이 여러 차례 요동 싸움에 패하여 무수한 전사자를 내고 산과 같이 쌓인 시체를 요동 벌판에 버리고 갔으니 그들의 국내는 疲弊하여 국민은 수왕에게 속으로 원망하고 나라안에는 양식이 여유가 없고 士卒은 싸울 의사가 없고 나라의 公信力이 없으니 장차 變亂이 일어날 것이옵니다. 臣의 麾下 將兵들은 이미 遠征 準備를 해 놓고 다만 나라의 명령만 기다리고 있사옵니다. 실로 天下 運氣가 나아갈 때라 우리 대군이 한 번 蹶起하여 中原을 圖謀할 것이오니 隋 楊帝 廣이 비록 백만 군을 아직 가지고 있다 하나 사기 초침한 군사는 그 몫을 다하지 못할 것이오니 가히 壞滅시킬 수 있사오니 이같이 하면 중원의 만백성 또한 다행한 일이옵니다. 이에 오로지 後方에서 兵站 糧食을 보급하면 대사를 성취할 수 있사옵니다. 西部 總管 征西大將軍 臣 乙支文德 頓首百拜하옵고 陛下의 英斷을 엎드려 비옵니다.)하였다. 천자는 이에 백관을 모아 여러모로 공론하였으나 일단 을지총관을 소환키로 하고 사자로 하여금 고유문을 전하고 함께 입조하라 하였다.  

 

大高麗國皇帝告諭于西部總管征西大將軍乙支文德矣壯乎朕之忠義勇士矣將軍之神技勇武運疇智謀壓倒隋敵群將戰慄狼敗我使勇將强兵大軍到處隋軍百萬之衆潰滅我軍馬蹄之下以隋魁望風逃走而實萬世不朽之大功也朕願相見將軍則當入朝留照 漏錄補記 (高句麗大帝國 皇帝는 西部總管 征西大將軍 乙支文德에게 告諭하노라 장할 시고 짐의 충성스러운 용사들이여 장군은 神技 勇武로 용이 주도한 智慧 謀略으로 隋軍 將軍들은 戰慄하고 敗亡하였으며 우리의 强力한 將兵들의 大軍이 이르는 곳에 隋 나라의 百萬 大軍은 我軍의 말굽 아래 潰滅하여 隋 나라의 괴수 隋 楊王 廣은 망풍 도주하였노라! 실로 만세에 빛나는 대공을 세웠음이라 짐 또한 여러 신료들과 장군을 보고자 하니 즉시 입조하기 바라오.)하였다. 조정에서는 을지문덕 총관을 일단 입조하라 하고 전쟁을 종결하였다. 천자는 제장을 공적에 따라 포상하고 전사상자들을 구휼하여 전쟁의 상처를 고치는데 힘을 기울였다. 그리고 말하기를 "짐이 자나깨나 잊지못하는 것은 고토회복이다. 수의 돌궐 괴수가 요서를 점령하고 그것도 모자라 중원의 수백만 백성을 징발하여 우리를 침략하니 하늘이 무심치 아니하고 열성조께서 돌보시어 오랑캐를 멸하였으나 우리 백성들의 고통이 너무 심하니 여기서 추격을 멈추고 휴전코자 함이니 제장은 짐의 뜻을 따라 주기 바라오"하였다.

 

전일 을지문덕은 요하를 넘어 수군을 추격하는데 급히 서둘지 않았다. 수양왕은 이미 멀리 달아나 잡을 수가 없고 요하를 건너온 수군을 9군이 전멸하였으나 요동고성에는 수십만이 남아 있다가 수왕을 호위하여 달아났다. 급히 추격하다가 수군의 함정에 빠질까 두려워함이다.그러나 패전으로 의기소침한 수군은 고구려군의 적수는 안되었다. 장차 수의 동도를 포위해서 함락하면 수양왕을 능히 사로잡을 수 있으니 수군이 고구려 원정군의 뒤를 끊지 못하도록 고구려 본국에서 후속 지원군을 파견해 줄 것을 요청하였던 것이다. 하지만 왕검성의 백제를 막고 있는 防衛 兵力은 十萬에 미치지 못하는 수도 방위군에 불과하였다. 수와 백제는 후방 병력의 감축만을 노리고 있는 터에 후방 지원군의 지원 출병은 불가능하다는 결론을 도원수 강이식장군 등과 상의한 결과였다. 수 양왕은 고구려가 후방을 비우고 추격해 오지 못할 것을 짐작하고 전후 사태를 수습한 후 다시 고구려 원정군을 징발하기 위한 준비를 시작하였다.  

 

다음해 9월 수 양왕은 위문승을 병부상서에 제수하고 서경에 머물러 代王을 보필하라고 하고 우문술은 전일 살수 대전에서 실패한 것은 군량관의 실수로 양식이 떨어져 패한 것이고 우문술의 잘못이 아님에 관직을 회복한다 하여 다시 대장군을 임명하여 楊義臣과 함께 대군을 이끌고 평양으로 진격하라 하니 광녹대부 곽영이 간하여 말하기를 "오랑캐가 신하의 예를 아니한다 하여 만승천지가 작은 적과 싸우는 것은 옳지 못하옵니다."하였으나 듣지 아니하였다. 광녹대부 王仁恭은 부여도로 나아가 新城을 공격하라 하였다. 왕인공은 10萬軍을 이끌고 신성(평양을 수호하는 위성, 지금의 심양 北 百里 지점. 신성자)을 공격하니 고구려군 수만 명이 항거하다가 성을 버리고 영성으로 후퇴하였다. 장군 우문술과 상장군 양의신의 20萬군은 평양을 공격하기 위하여 선착으로 요동성을 공격하였다. 지난번과 달리하여 높은 누각을 성안을 볼 수 있도록 지어 거기 사다리를 걸쳐 사면에서 공격하여도 고구려군은 임기응변으로 방위하여 20여일 을 특별 연구한 방법으로 공격하여도 성은 함락하지 아니하고 사상자만 늘어났다. 요동성은 오래도록 아무리 공격하여도 함락하지 아니하니 수 양왕은 백만 개의 포대에 흙을 넣어 쌓아 올려 성벽보다 높은 곳에서 아래로 보며 공격하여도 고구려군은 용감하게 방위하였다.

 

수 양왕은 이번에도 민부상서 樊子皆로 하여금 동도 수비를 도우라 하고 친히 요수를 건너 요동성 공격에 직접 참여하였으나 물자와 인명은 아끼지 아니하고 대량 투입하여 강공하였다. 그러나 피해만 누적할 뿐 어찌할 수 없었다. 1월에서 6월까지 같은 방법을 다하여도 성공을 못하고 40도의 뜨거운 여름 볕에 열병이 만연되니 수양왕은 이번 세 번째 출병에 앞서 신하들에게 말하기를 "고구려 조그마한 것들이 상국을 업신여기니 이제 바다를 말리고 산을 옮기는 일도 해치우는데 하물며 작은 것들이랴! (高麗小虜侮慢上國今拔海移山猶望克果?以虜乎)"하며 대군으로 깔아뭉개 버리겠다고 큰소리치고 총공격을 하여도 고구려는 끄떡도 하지 아니하였다. 지난날의 패전의 원인은 양식이 떨어져 진 것이고 군사를 배불리 먹이면 고구려를 파하는 것은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고 더욱이 신라 백제의 배후 협공이 있음으로 고구려는 반드시 항복할 것으로 믿었으나 결과는 또 다시 패전의 비극이 닥쳐 왔다. 장차 추위가 닥쳐오면 군량미가 떨어질 형편이고 돌아가려 하니 고구려의 추격을 받아 또다시 전멸의 비극을 맞게 될 것이니 進退兩難이다.

 

그리고 이대로 패전하고 돌아가면 무슨 낯으로 백관을 대하며 고구려가 깊이 추격해 오면 나라안 인심이 급변할 것이니 사직을 보전할 수 없다고 생각하였다. 근심에 잠겨 있노라니 본국 도성에서 사자가 와서 변고가 있다고 전해 왔다. 수 양왕은 퇴군할 명분을 얻었다. 이 때 중원에서는 거듭되는 징병과 식량의 징발로 이재민이 무수히 생겨 도적이 4방에서 일어나니 그 수가 많은 자는 10여만 에서 적게는 수 만 명에 이르니 산동민의 고통은 격증하여 평화는 사라진지 오래였다. 예부상서 초공 楊玄感은 항상 그 친지에게 수 양왕의 황음무도하고 백성을 혹사하고 무고한 전쟁으로 죽이는 자도 부지기수라 수나라는 오래지 않아 멸망할 것이라고 한탄하였다. 하루는 그의 친지와 상의하였다. "지금 4방에서 도적이 일어나고 양왕 광은 전쟁을 그치지 아니하여 민심이 흉흉하니 고구려에 출정하고 없는 틈에 양왕을 토벌함이 어떠한가?"하였다. 李密이 말하였다. "천자는 멀리 출정하여 유주 천리밖 요동에 가 있으니 공은 불의에 군사를 일으켜 멀리 ?洲에 들어가서 그 인후를 끊으면 고구려가 이를 알고 추격해 올 것임으로 불과 수일에 양식이 떨어져 항복하지 아니하면 궤멸할 것이니 싸우지 아니하고 광을 잡을 수 있을 것이오." 

 

"그 다음은 어떠한가?" 이밀이 말하기를 "관중성지는 천부지 요새지라 비록 위문승이 지키고 있으나 그까짓 상관없으니 지금 군사를 거느리고 북을 울리며 나아가 서쪽으로 돌아 성을 치지 말고 곧바로 장안을 취하여 그 곳 호걸 인사들을 수용하고 그곳 백성들을 위무하여 험지에 의거하여 지키고 있으면 천자가 비록 돌아와도 그 근본은 잃었으니 가히 도모할 수 있을 것이오" "다음 또 어떤 계책이 있소." 이밀이 말하기를 "간병 배도하여 동도를 습취하여 4방을 호령하고 단지 고수하면 만일 군사를 이끌고 공격하여 와도 백일을 버티어 저들이 이기지 못하면 천하 병마가 사면으로 일어날 것이다. 그 다음은 이 사람이 알 수 없는 일이오"하였다. 현감이 말하기를 "그렇지 않소 지금 그 하계가 오히려 상책이오. 지금 백관 가솔이 모두 동도에 있으니 이 곳을 선취하면 족히 인심을 움직일 수 있을 것이니 이것이 상책이요."하고 드디어 군사를 일으켜 낙양을 향하여 나아가 동도를 포위하였다. 양현감은 폭군을 축출하고 나라를 구하겠다는 일념으로 반란을 일으켰다. 백성을 잔학한 隋 楊王 廣의 폭력에 가담케 하는 것이 싫었다. 그는 높은 도덕성을 가진 학자이기도 한 인물 이였다. 이밀이 말한 첫째 계책이 가장 확실하나 남의 나라의 힘을 빌어 동족을 상하는 것을 꺼렸다. 동도를 포위하고 고구려로 하여금 양광의 뒤를 엄습케 함도 쉽게 대사를 정할 수도 있으나 그 일을 하지 않았다.  

 

고구려는 수양왕이 본국의 반란으로 중도에 퇴군하는 것을 그들이 퇴군한지 3일이 지나서야 첩보를 받았다. 수왕은 경오 밤 2시경에 제장들을 모아 군사를 이끌고 돌아가도록 명령하고 모든 물자를 버리고 조용하고 신속하게 철수하라 하니 버리고 간 수군 물자가 산과 같이 버려졌다. 고구려군은 수군이 회군한다는 것은 전혀 생각 않고 있었다. 수군은 양식이 충분하였고 그간 싸움에서 크게 손실을 입는 일도 없었다. 뜻밖에 후퇴하니 필연 무슨 사술을 부리는 것으로 추측하고 요하를 미처 건너지 못한 만 여명이 후군을 격살한 후 추격하지 않고 퇴군한지 2일이 지난 후에야 수 만 명으로 조심조심 시험적으로 추격하여 보니 벌써 8, 90리 앞서 갔고 요하는 건너지 못하고 뒤쳐진 낙오병 수 천명을 격살하고 돌아갔다. (隋軍詐之經二日乃出數千兵追?畏隋軍之衆不敢逼常相去八九十里將至遼水知御營畢度乃敢逼後軍時後軍猶數萬人高麗隨而招擊最後羸弱數千人爲所殺略 {鑑記})

 

이리하여 수왕은 자칫 휘하 수십만 군이 몰사할 뻔한 위기를 모면하고 고구려군은 이번에야말로 수 양왕을 잡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감쪽같이 속이고 은밀히 조속 철수한 수양왕은 상상밖에 큰 인명 손실 없이 반란군에 대처하였다. 양현감은 수 양왕의 퇴각을 고구려에 알려서 즉각 추격케하면 수군은 전멸할 것이나 타민족과 손잡고 동족을 해칠 수 없었다. 수 양왕의 그와 같은 신속한 철수로 동도 공략에 실패한 양현감은 운명으로 체념하였다.  

 

양현감이 예양에서 군사를 일으키니 유원진이 호응하여 기병하고 수양왕이 재차 삼오병(三吳兵)을 징발할 적에 그들은 서로 이르기를 '지난해 천하 전성시에 우리들의 부형들은 고구려 정벌에 나가서 태반이 돌아오지 못하였는데 이번 또 다시 징발하니 우리들은 살아남을 자가 없을 것이다.'하고 도피하였다. 그러다가 많이 잡혀 죽었으나 이번에는 유원진이 반란 거병한다 하니 구름같이 모여들었다. (帝再發三吳兵征高麗三吳兵皆相謂曰往歲天下全盛吾輩父兄征高麗者猶太平不返不己罷弊復爲以行吾屬無遺類矣由是多亡命郡縣捕之及聞元進擧兵亡命者雲集旬月間衆至數萬 {鑑記}) 수양왕은 돌아와서 출정군 장수 우문술 내호아 등을 시켜 양형감을 공격하게 하였다. 양형감은 동관에서 패하고 그 동생이 죽였다. 수왕은 唐公 이연을 홍화유수에 임명하였다. (帝引軍還遣于文述來護兒等擊楊玄感敗死以唐公李淵爲弘化留守 {綱易}) 수왕은 무자비하게 항복한 반란 가담자들을 학살하고 생매장한 자만도 3만여인이였다. 수왕은 공포 정책으로 모든 소요를 진압하고자 하였다. 양현감은 수양왕이 그와 같이 빠르게 돌아올줄은 생각지 못하였다. 그리고 고구려가 신라 백제에게 후방을 위협받아 수양왕의 뒤를 전혀 추격하지 못하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였다. 수양왕은 후고의 염려없이 고구려를 대비할 필요없이 마음놓고 반란군을 공격하여 진압에 성공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