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역사 침탈(侵奪)

BC 28세기 요하문명의 濊貊族이 남하 하여 夏, 商, 周를 건국하면서 황하문명을 일구었으며, 鮮卑族이 秦, 漢, 隨, 唐을 건국했습니다. - 기본주제 참조

홍익인간·인류공영/환단고기·한민족역사

34. 隨 煬帝의 九軍 潰沒과 隨 煬帝의 敗走

자연정화 2013. 8. 24. 12:55

三十四. 隨 煬帝의 九軍 潰沒과 隨 煬帝의 敗走

 

수 양왕 광은 백제군과의 작전계획에 평양을 협공할 기일이 닥쳐오고 있었다. 백제의 첩자는 끊임없이 고구려 군의 동태와 평양성의 내부 정보를 수 양왕에게 보내 왔다. (百濟王璋遣使請討考慮帝使之觀考慮動靜璋內與高麗潛通隋軍將出璋使其臣國智牟來請師期帝大悅厚加賞賜遣尙書起部郞席律詣百濟告以期會及隋軍度遼百齊亦嚴兵境上聲言助隋實持兩端是行也) 수 양왕은 그대로 위험을 무릅쓰고 곧 바로 평양성을 공격키로 결심하였다. 수의 정동군 전진 기지 요동고성 즉 지금의 永平府 대정부의 예비군 4개 군단을 요하를 건너 요동의 영성과 요동성을 포위하고 그 곳 공성군 9군 30만 5천을 평양성 공격에 투입키로 하고 압록강 서편에 집결하라고 명령하였다. 평양성 주위에는 수 10개 위성이 있고 그 중에 요동성과 영성은 주전 요충으로 이 곳을 함락하지 않고는 평양성을 공격하다가 후방을 끊으면 수나라 군은 포위 섬멸당할 위험이 있음에도 수 양제는 평양성 주위에 보위하는 고구려성들을 그대로 두고 평양성을 공격하기로 한 것이다. 그리하여 양도가 끊어진 것을 각오하고 군사들에게 백일 양식을 후대하고, 무리한 행군을 강요하였다. 

 

여기 죽음을 무릅쓰고 평양성 공격에 나선 수 장군들은 좌우위대장군 우문술 우우위대장군 우충문 좌요위대장군 형원항 우우위장군 설세웅 좌돈위장군 신세웅 우어위장군 장근 우무위장군 조효재 탁군태수 취홍승 호분낭장 위문승 등이다. 우문술 등은 노하 희원 2진에서부터 아마도 모두 백일 양식과 기타 전쟁에 필요한 무기 등 물자를 지급하고 중간에 짐이 무거워 버린 자는 참수하였다. 그러나 강행군에 그 무거운 양식을 운반할 수가 없었다. 하루에 十리를 가지 못하였다. 반이나 땅에 모르게 묻었다. 수군은 고구려군의 기습에 대비하여 엄중하고 세밀한 주의를 하고 철저한 대비를 하면서 진군하여 압록강 서안에 집결하였다. (大將軍于文述出扶余道…衛文昇出增地道皆會於鴨綠水西) [註. 여기 나오는 패수 압록수 살수 평양 등의 지명이 조선 반도에 있는 것이 아니며 다음에 설명을 할 것이나, 옛 중국 기록에 있는 것임으로 본문에서는 혼돈을 없애기 위하여 미리 주시하는 것임] 고구려 서부 총관 을지문덕은 요동의 각 성은 굳게 지키고 출격하지 말라. 이르고 대군을 수군의 진격에 맞추어 후퇴시키고 수군의 압록강 서안에 집결하는 것을 막지 않고 중간에 약간의 저항을 하다가 후퇴하곤 했다. 을지총관은 중도에 진을 치고 있는 우중문 장군에게 화친을 요청하는 서한을 보냈다.  

 

大高句麗國西部總管鎭西大將軍乙支文德傳書于大隋國右翊衛大將軍于仲文麾下而凡治國之道則保衛民生之安危以國有憐交之信義焉今如大隋國出兵於無名之師以招萬民之苦因及橫死於編野以亦爲統兵之帥者省慮之信也公如出樂浪道以連捷至此也又爲何欲之加耶望願以此自制尊詣以班師則誠萬民之爲幸也留不俱矣倂添拙作短詩 謹拜 漏錄補期

 

神策究天文 - 모책은 천문을 통달하고

妙算窮地理 - 묘산은 지리를 궁달하니

戰勝功旣高 - 싸움에 공이 이미 높은지라

知足願言止 - 만족함을 알고 그만하시오

 

('대고구려국 서부 총관 을지문덕은 수나라의 대장군 우중문에게 서찰을 전하노니 무릇 나라를 다스리는 데에는 국민의 안위를 보위하고 이웃과 신의로서 사귀어야 하는데 지금 수나라는 까닭 없이 전쟁을 일으켜 만백성을 고통받게 하고 마구 살육하니 군사를 지휘하는 자 근심해야 할 일이라! 공은 낙랑도로 출정하여 여기에 이르기까지 승전하여 왔는데 더 무엇을 바라오. 군사를 거두어 돌아가면 만백성을 위하여 다행한 일이오 겸하여 시 한수를 전하는 바이오'하였다.)

 

을지총관은 사자에게 은밀히 일러 수나라 군사들의 안색과 형편을 자세히 살펴보라고 하였다. 그리고 사자는 말하였다. "저희 총관께서는 대장군이 좋으시다면 면담도 하실 용의가 있다 하였나이다."하였다. 이에 수군은 군영에서는 사자를 기다리게 하고 회의를 열었다. 우문술과 우중문은 을지문덕을 면담차 초청하여 암살하기로 의논을 모았다. 그러나 상서 우승상 유사용은 慰撫使의 임무를 띠고 종군하고 있는 터이라 그러한 신의를 저버리는 암살 행위는 수나라의 정통성을 손상시키는 것이라고 극역 만류하였다. 을지문덕은 사자의 희보를 보고 즉시 수군 진영으로 갈 준비를 명하였다.

 

부총관과 참모진에서 모두 말렸다. 잘못하면 화를 입을 위험을 무릅쓸 필요가 없다는 것이였다. 그러나 을지문덕은 화의를 제안하였으나 수나라 장수가 화의에 응할 것이라고 믿지는 않았다. 그는 그치지 않고 이 기회에 수군의 동태를 살펴 실상을 파악해야만 마음속에 구상하고 있는 일대 결전을 실행할 수 있다고 단정한 것이다. 총관은 말하였다. "지금 우리는 수군 30만이 평양을 포위하면 단독으로 오래 지키기는 어려운 형편인데 각성 수장들은 각기 수군이 수십만이 포위하고 있음으로 평양을 후원할 수 없고 남으로 백제의 공격이 있어 남 평양 별궁도 주위에 수호하는 보조성이 하나도 없는 허술한 외로운 곳이다. 지금 형편으로는 오래 지탱하기 어려운지라 만일에 남평양이 백제에게 함락하면 수나라의 평양 포위군은 백제로부터 군량 보급을 받게 될 것인즉 우리 군사가 비록 날래나 어찌할 수 없는 것이다.

 

지금 저들의 허실을 확실히 살피고자 하는 것은 승패의 기틀이 바로 여기 있습이니라. 다만 내가 저들 진영에 들어가도 우리의 준비가 완벽하면 저들이 나를 감히 해치지 못 할 것이다."하고 호위 갑사 1개부대를 부관이 이끌고 가서 수군진영앞에 대기하고 을지문덕은 단신으로 우문술의 막사로 안내되었다. '일정한 시각이 지나도 나오지 않으면 사고이니 즉시 행동하라.'라고 일렀다. 을지문덕은 우문술 우충문등과 인사를 나눈 후 말하였다. "우리는 수나라를 존대하고 인사를 다하는데 수는 군사를 일으켜 이와 같이 침략하니 이것이 무슨 까닭이오?"하였다. 우충문이 거드름을 부리며 말하였다. "우리 대수황제국은 사원(四苑)정벌하고 천하의 모든 왕들이 황제를 배알하고 충성을 맹세하였는데 그대 고구려국만이 이 세상에 홀로 신칭하지 않고 황제를 배알하로 입조하지 아니하니 어찌 두고 볼 수만 있겠소?"하였다. 을지문덕이 말하였다. "우리 대고려국은 창업이래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 어느 나라에도 칭신(稱臣)한 일이 없고 다만 중원 황제에게 존칭하고 사절을 교환하여 예절을 지켜 왔소. 그러므로 지난날 진대위황제나 대진 황제 대송황제는 우리 선황제폐하 붕어 하심에 조문 빈소를 차려 애곡하고 조문사를 보내 왔소. 隣國간의 신의를 이와 같이 두터이 함은 귀공께서 아는바 이온데, 어찌 칭신을 강요한단 말이오."하였다." 우충문은 詰難하였다. "이 세상에 수황제의 절제를 받지 않는 王候는 결코 용납할 수 없소. 돌아가 곧 고구려왕이 입조하여 사죄하지 않으면 평양성을 우리 백만 대군으로 포위하여 몰살할 것이오."하였다. 후세 중국사기는 을지문덕이 항복하러 왔다고 날조하였다. 을지문덕은 "되돌아가 수양제 폐하의 상견 요청을 전하겠소."하였다.우문술 등은 한 번 손을 들어 신호하면 숨겨 둔 도보수가 달려와 을지문덕을 생포할 계획 이였으나 유사용의 권유도 있고, 그 대비가 불확실하여 을지문덕의 기상에 눌려 잘못하면 고구려 호위군의 습격으로 함께 죽을 형편의 위험이 있어 결행을 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놓치고 나니 분하여 다시 파발마를 보내여 할 말이 새로 있으니 잠깐만 돌아와 달라고 하였으나 을지문덕은 손을 저어 뿌리치고 본진으로 돌아왔다. 을지총관은 돌아와 희색이 만연하였다. 제장이 물었다. "총관꼐서는 무슨 일이 있습니까?" 총관은 말하였다. "수군은 굶주리고 있소. 그들은 수천리 운량에 지쳐 있는 것이오. 이제 그들을 파할 계책을 확정할 수 있소."하였다.  

 

그리고 군사를 압록강변으로 점점 패하면서 후퇴하였다. 수군은 큰 손실 없이 압록강까지 추격하여 강가에 다다랐다. 압록수는 부교 없이 건널 수 있는 적은 물이 흐르고 있어 요하와 같은 어려움은 전혀 없었다. 그러나 우문술은 도강을 주저하였다. 휘하 장병 10만 군이 이미 양식이 없어 하루 두끼도 제대로 먹이지 못하는 형편에 평양성을 포위한들 싸울 힘이 없었다. 우충문이 말하기를 이제 을지문덕이 연패하여 다달으니, "우리가 정병으로 추격하면 을지문덕을 대파할 수 있을 것이니 총력 추격하자." 하였다. 우문술이 말렸다. "이제 양식 공급이 어려우니 여기서 그만 돌아가자."하였다. 우충문이 노하여 큰 소리로 말하였다.

 

"공이 10만 군을 수하에 거느리고 적을 파하지 못하고 돌아간다면 무슨 낯으로 황제 폐하를 볼 것이오. 공이 따르지 아니하면 우리들 20만 군으로 싸우겠소."하고 형편을 수양왕에게 고하였다. 수왕은 우충문이 계책이 있는 것을 믿고 그의 말을 따르라 하였다. 우문술은 불길한 예감이 드나 어쩔 수 없이 그를 따라 대군이 큰 저항이 없이 압록수를 건넜다. 그리하여 달아나는 고구려군을 쫓아 하루에 일곱 번을 싸워 모두 이기고 살수를 건너 달아나는 고구려군을 쫓았다. 그러나 굶주리고 피로한 군사는 더 싸울 힘이 없고 수 양왕이 말한 백제군은 오지 않았다. 백제군은 남평양을 함락하지 못하였다. {三國史記}에 {唐書}를 인용하여 백제 근초고왕이 고구려의 남평양을 점령하였다고 하였다. (至二十世近肖古王取高句麗南平壤)  

 

그러나 후에 광개토대왕이 백제를 정벌하여 이미 고구려가 점유하고 있으면서도 남쪽 방어 기지로 별궁을 지어 쓰고 있었음으로 수군과 접선할 수 없고 따라서 군량을 수군에게 수송해 줄 수 없었다. 4.5만에 불과한 백제군은 남평양을 돌파할 수 없었다. 한편, 평양 왕검성 30리 지점에 있는 살수변에 진을 친 을지문덕은 명령을 내렸다. "이제 우리의 공격할 때가 왔다. 적이 비록 숫적인 면에서 우세하나 굶주리고 피로하여 싸울 힘이 없다. 적이 지금 반수가 살수를 넘어 왔으니 지처있다. 제1군운 우문술의 진영을 습격하라. 제2군은 우충문의 진영을 습격하라. 제3군은 형원황진영을 습격하라. 제4군은 신세웅진영을 습격하라. 제5군은 지금 곧 살수 상류 막아 놓은 제방을 헐어 일시에 물을 방류하여 강을 지금 건너고 있는 인마를 수장케하고 살수를 건너고 있는 수군의 퇴로 변에 매복하여 있다가 옆에서 사살하라. 내 전군을 몰아서 추격해 나갈 것이니라. 각 군은 반드시 고각을 크게 울리고 함성을 크게 질러 위세를 돋구어라."하였다.

 

수군은 진영을 치고 삼엄하게 경계 태세를 갖추었다. 고구려군의 기습에 대비하여 밤을 세우는데 야심해서 고구려 기병이 진문을 습격하고 이어 고각 함성이 천지를 진동하며 고구려군이 숩격해 오니 잠자는 군사뿐 아니라 진문을 지키는 수직 군사까지도 배고프고 피로하여 임무를 수행하지 못하고 졸고 있다가 불시에 당하니 싸우고자 하는 자 없고 달아나는데 분주하여 병장기도 버리고 달아났다. 그러다가 살수를 미쳐 건너지 못하고 있는 설세웅 장군 조호재·취홍승 등은 각기 군사를 이끌고 살수 주변의 수군을 구원하고자 살수에 이르니 되돌아오는 패잔군과 마주쳐 혼란에 빠지고 돌아서 달아나니 소리쳐 말려도 잡을 수가 없었다. 이 소동 속에 우돈위장군 신세웅은 난군 중에 전사하고 달아나는 수군 장졸들은 추격하는 고구려 군에게 칼맞고 창에 찔리고 화살에 맞아 비명 소리와 함께 아수라장이 되어 각 군 대장들도 도망가기에 바빴다. 고구려군은 추격을 늦추지 않고 요하에서부터 신중하였다. 이 전쟁에서 요하를 건너온 수나라 군사는 9군 30만 5천명이 살아서 돌아간 자가 겨우 2천 7백명뿐이고 군기 물자 기계의 망실은 헤아릴 수 없었다. 호분낭장 위문승의 군사만이 온전하였다. (初九軍度遼凡三十萬五千及還至遼東城唯二千七百人資儲器械巨萬計失亡蕩盡 鑑易) 隋王은 大怒하여 우문술등 패군한 장수들을 모조리 묶어서 끌고 돌아갔다. 수군은 구군 위에도 치중 兵과 民間人 徵發과 人夫등戰死者는 백만이 넘었다.  

 

* 겸하여 지난날 필자가 요하변에서 옛날을 회상한 拙詩 한구를 첨함.

 

군사를 그대로 보전한 위문승은 금자괄록대부에 제수되고 패전의 책임을 유사용에게 씌워 참수하여 천하에 사죄하였다. 제장들은 모두 우충문이 무리한 진격을 요구하여 따라가 실패하였다고 책임을 미루어 모두 풀어 주고 우충문만 가두었다가 근심으로 병이 위독하여 귀가시켜 집에서 죽게 하였다. 이와 같이 패전의 책임을 출전장수에게 미루고 수양왕 자신은 아무런 죄책감을 느끼지 않았다. 수양왕은 고구려에게 패한 것이 부끄럽고 위신이 추락하여 어찌하든지 고구려를 이기지 못하면 황제위를 지키기 어렵다고 판단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