三十六. 고수대전장(高隋大戰場)의 위치와 수양왕의 죽음
국정이 안정된 후 갑술 10년 봄에 다시 천하에 징병령을 내려 고려 정벌에 나섰다. 태사령 유(庾)가 간하여, "백성이 너무 피폐하니 관내를 진무하고 三 五년간 농상(農桑)에 힘써 四海가 풍요로이 된 연후에 널리 살피시옵서."하였다. 수왕이 노하여 하옥하였다가 죽였다.
廟議에서 나온 백관은 요동 출병 명령에 며칠 동안 입을 열지 않았다. (十年春二月詔百僚議伐高麗數日無敢言者수서) 우후위 장군 주천 조재 간하여 가라대 "지금 백성은 피폐하고 창고는 비여 있고 도적은 점점 더 많이 일어나니 경사로 돌아가서 억조 창생을 편하게 하옵소서."하였다. 모든 신료들이 출정을 반대하였으나 수왕은 결의가 확고하여 더 이상 간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조정 백관은 아무도 전쟁에 이긴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었다. 다만 수양왕을 둘러싸고 있는 장수들은 수차의 패전수치를 씻고저 출병을 서둘렀다. 앉아서 고구려군에게 당하는 것보다 낫다고 생각함이다. 그것은 그들군벌들도 수양왕과 같은 운명에 놓여있기 때문이다. 그 시기에 고구려가 수를 침공해 오면 수의 인신은 거국적으로 고구려에 대항하여 싸우기 보다는 수양제가 망해야만 백성이 살아남을수 있다고 믿기 때문으로 四方에 내란이 일어날 형편에 있음은 필연적 사실이었다. 그러하니 수가 망하면 그 일당은 살아남지 못함을 인식하고 있음이다. 수양왕 일당은 고구려를 정복할 수 없음을 이미 인식하고 있었다.
그러나 고구려에 선수로 침공하여 기세를 약화 시키는 것이 고구려 침공의 이유의 하나이오 수가 아직도 고구려를 침공할 수 있는 여력이 있음을 보여 주는 것이 그 둘이요, 백제와 신라에 수의 강대함을 보여 게속해서 수를 두려워 하고 따르게하여 고구려와 함유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 그 셋이다. 이러한 모략은 요동출병을 아니 할수 없는 것이었다. 건절위 임종(建節尉 任宗)이 상서 극간하니, 수왕은 즉시 조당(朝堂)에서 곤장으로 쳐서 죽였다. 봉신랑 취면성이 건국문에서 표를 올려 간하다가 수왕이 노하여 斬首하였다. 수왕 일행이 기수에 이르니 봉신랑 왕애인(奉信郞 王愛仁)이 다시 표를 올려 서경으로 돌아가도록 간하였다가 또 斬首하였다. 그해 7월에 수양왕이 희원진에 이르렀을 적에는 이미 천하가 어지러웠다. 징병도 제때에 요동으로 모이지 않고 내호아대장군은 필사성(畢奢城)에 이르러 포위한채 그냥 통과하고 평양성을 공격할 준비를 하였다. 수양왕은 징집한 각군 병력은 오지 않고 공성준비하는 병력을 준비도 다 하지 못한채 성을 치니 공성 병력은 사상자가 심하여도 보충이 안되니 수왕은 멀리 회원진(懷遠鎭)에서 백만 병력이 총집결한 후 요동으로 본거지를 옮겨 독전하고자 했으나 중원의 각지 반란으로 그가 계획한 공성군 백만은 기대할 수 없는 형편이 되었다. 수양왕은 來護兒 원수(元帥)를 반사하라 소환하였다. 중원내의 반전 세력이 심상치 않고 고구려 평양성 함락은 요원하니 불안하여 더 이상 머무를 수가 없었다. 이 때 수양왕은 감히 수하에 있는 수십만 병력으로는 요동에 들어가지 않고 내호아의 일군 20여만이 철수하면 되니 큰 손실 없이 신속 철수할 수 있었다.
처음 내호아는 이제 공격하면 평양을 공략할 수 있을 것이라고 여겨 후군이 도착하는 것을 기다리고 있는데 철수하기로 했다하니 후속 부대의 도착하지 않는 사유를 알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철수를 주저하고 있으니 장사취숙군이 만일 반사하라는 어명을 어기면 문죄할 것이다 하고 여러 부장들에게 선언하니 내호아는 회군하였다. 내호아는 중원의 내란 사건을 점차 짐작하고 거기에 버티고 있다가 수양왕이 돌아간 후에 대세를 보아 처신하고자 반심을 품고 있었던 것으로 보여진다. 백만 대군으로도 평양성 함락을 못했던 것을 후군이 안 오는 형편에 외로운 단독 군단으로 고구려와 싸워 이기겠다고 장담하는 내호아의 태도에 장사(長史) 위숙은 그가 딴 마음이 있다고 짐작하고 설득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그들 부장들에게 큰 소리로 그와 같이 외쳤던 것이다. 그러나 중원은 이미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고구려 출병을 반대하는 반란과 분열이 시작되었다. 지난번 양현감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그가 고구려와 통모하면 일거에 수 양왕을 잡을 수 있었는데도 일차 수양왕의 요동 정벌에 백만의 수나라 출정 인원이 수 양왕의 무모한 고구려 침공으로 목숨을 잃은 비극을 생각하니 이번에 수양왕을 잡기 위해 고구려와 협공하면 다시 지난번의 百만 대군이 몰사하는 비극이 재연될 것임에 남의 나라를 연합하여 동족을 죽일 수 없다는 선비 정신이 오히려 자신은 망하고 말았으나 그는 후회하지 않았다.
함께 거사한 이밀(李密)은 자기의 계책 중에 상책을 채택하지 않고 실패하니 다시 사방의 호걸을 모아 수왕의 무도하고 백성을 잔학한 부도덕을 들어 격문을 4방에 보내면서 말하기를, "양왕 광(煬王 廣)의 죄는 죽서에 쓰면 남산만큼 높고, 그 죄악은 파도같이 많아 동해로 흘러가도 못 다할 것이다."하였다. 산동 일대에 널리 불려지는 요동낭사가(遼東浪死歌)는 全中原에 퍼져 백만 生靈의 비극을 그 유족들이 불러 세상 사람들의 심금을 울렸다. 양왕은 이 노래를 부르는 자를 잡아 죽였으나 더욱더 퍼지는 것을 막지 못하였다.
- 我兄征遼東 내 형은 요동에 출정하여
- 餓死靑山下 청산 밑에서 굶어 죽고,
- 今我挽龍舟 나는 지금 임금탄 배를 끌며
- 又困隨提道 피곤한 몸을 제방 길을 가네
- 方今天下飢 온 세상이 지금 굶주리는데
- 路松無자소 연도에는 아무것도 없구나
- 前去三千程 앞길은 삼천리인데,
- 此身安可保 이 몸이 살아남을까
- 寒骨枕荒抄 버려진 백골은 황사에 누었고,
- 幽魂泣煙草 외로운 넋은 숲속에서 울고,
- 悲換門內妻 사랑하는 아내는 대문 앞에서 슬퍼하고,
- 望所吾家考 기다리는 우리 부모
- 安符義男兒 남아다운 의리를 취향 삼아
- 焚此無主屍 임자 없는 시체라도 거둬 태워
- 引其孤魂回 혼이라도 돌아갈 수 있도록
- 負其白骨歸 백골이라도 고향에 가져가면 좋으련만
수 양왕의 명분 없는 전쟁의 희생은 백성들의 반항으로 이밀의 거사에 너도나도 운집하였다. 낙양 북쪽에 있는 낙창(洛倉)의 동도병을 공파하고 자칭 위공(魏公)이라 하고 하남의 여러 고을을 점령하고 양사도는 조음 홍화 연안등 여러 고을을 점령하여 양 황제라 자칭하고 이연(李淵)은 돌궐을 치라는 수 양왕의 명령을 받아 군사를 일으켜 병권을 잡고 돌궐에게 甘言利說로 화친을 청하여 돌궐과 손을 잡고 세를 확장하여 唐王을 자칭하고 이밀과도 연계하여 각지 군현을 공략하여 낙양 장춘궁(長春宮)에 웅거하고 세자 건성(建成)은 유문정을 장수로 하여 왕장해 등 여러 장군을 영풍에서 주둔하게 해서 군량창과 동관(東關)요세를 지켜 東方兵(高句麗)를 대비하고 이세민(李世民, 후에 당태종)을 장수로하여 유홍기 등 여러 군은 위북(渭北, 황하 상류)을 지키게 하고 고구려를 경계하였다. (淵遣世子建成劉文靜帥王長諧等諸軍屯永豊倉守潼關以備東方兵世民帥劉弘基等諸軍徇渭北) 당왕은 수 양왕은 망할 것을 전제로 무시하고 두려운 것은 고구려의 침입이었다.
수 양왕은 또 다시 요동 원정군을 일으키고자 군신들을 모아 징병을 강요하였다. 이 때는 수 양왕의 요동 출병은 고구려 군에 屠戮당하러 가는 것과 다름이 없이 가면 돌아오지 못하고 운량의 어려움과 직간접적 재해로 여름 혹서와 겨울 혹한에 굶어 죽고 얼어죽고 병들어 죽는 일이 허다했다. 그러므로 인명을 초개와 같이 죽음으로 몰아 넣고 출병을 말리는 신하는 곤장으로 쳐죽이고 목을 잘라 죽이고하여 군신의 간하는 입을 막고 출병을 강행하였으나 수 백만 명의 생령과 수천 척의 대소 선박과 수만 대의 전차 기계와 산과 같이 쌓아올린 피복 군량의 전지 비축 물량을 모두 괴멸당하고 탕진하여 당시 인구의 큰 비중에 해당하는 중원 장정을 잃고 물자는 고갈하여 민간에서 징발한 차용 물자도 갚을 길이 없고 하여 인심이 흉흉한데 고구려의 침공이 두려워 안절부절 못하였다.
백제 신라의 후방 견제를 기대하고 있었으나 안심할 수가 없었다. 고구려에 출병하는 것은 그것이 곧 고구려 군의 보복 침입을 방어하는 수단으로 생각하였다. 수 양왕은 이제 고구려에 대한 무력 정벌은 불가능함을 알고 있었다. 백제 신라가 강성하여 삼면 협공을 할 수 있는 시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지금 고구려가 백제 신라와 통일 화해하고 군사를 일으켜 수를 침공한다면 수는 4방에 반란이 일어나서 결과적으로 고구려의 중원 정복은 쉽게 이루어질 것임으로 수 양왕은 살아남지 못할 것이 분명하였다. 수 양왕으로서는 고구려 정벌 명목의 징병은 불가피한 것이였다. 한편으로는 신라 백제에 위엄을 보임으로서 조선 통일을 막아야만 했다. 이에 국민은 반발하였다. 민간에 이르기를 '임금이 사람 죽이는 것을 낙으로 삼으니 천하 만민이 또한 죽음으로 반대한다. 저 요동의 구슬픈 노래는 애처로와 발해의 맑은 밤에 꿈을 깨어 잠 못 이루니 서합의 인정이 이와 같으니 어찌 혼자서 천도라 할까!' 여기 천도란 군왕의 도리를 이른 것이다. (天子以人之死爲樂天下亦必以死反之彼遼東之歌哀淸夜江都之夢微於西閤人情實然豈獨天道 {隋書}) 이와 같이 민심은 완전히 이탈하고 요동에 출정하는 것은 그것이 곧 죽음을 뜻하는 것으로 온 나라안에 퍼졌다. 관가에서도 처음 요동낭사가를 부르는 자는 잡아서 처형하였으나 널리 퍼져 부르는 국민을 모조리 죽일 수는 없어 포기하였다. 여기서 그간 여수대전(麗隋大戰)에 관계되는 지명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當初에 麗隋大戰은 요동 요서에서 있었고 조선 반도에 관하여는 신라 백제가 후방을 공격한 것뿐 수가 조선 반도에서 고구려와 싸운 기록은 없다. 다만 신라가 고구려를 정벌하자는 표문을 수양왕에게 올려 이를 동의했다는 기록뿐이다. 이 때 신라 진평왕 30년 수양왕에게 군사를 일으켜서 고구려를 치자는 표를 올렸다고 하는 {삼국사기}의 기록과 일치한다. 고구려가 수와 싸우는 틈에 신라는 고구려땅 오백리를 약취 회복하였다.
一. 패수는 옛날 秦나라가 설치한 空地에 속한다.(浿水屬秦故空地) 여기 공지라는 것은 지금의 하북성 요서 지경에서 산동에 이르는 곳이다.
二. 한나라가 일어났을 때에 요동은 멀어서 지키기가 어려워 요동의 옛 요세(要塞)를 수리하여 패수를 국경으로 하였다. 즉 진시황 당시 설치한 국경이다. (漢興爲遠難守復修遼東故塞至敗水爲界 한서)
三. 옛날 위만이 천명의 무리와 함께 국경을 넘어 진나라의 옛 공지에 있는 패수를 건너 도주하였다. 상하장(上下障) 가까이의 진번조선의 도읍지인 왕검성에 속한다. (滿亡命聚黨千余人椎結蠻夷服而東走出塞渡浿水屬秦故空地上下障梢役眞番朝鮮之都王儉城 {書傳}, {漢書}에 있는 기록) 상하장은 하북 운장이다.
四. 浿水의 支流인 ?水는 하남소현에 있다. (?水在河南召縣爲浿水的支流)
五. 패수는 요동 색위 임유관 유림관 서에서 나와 남으로 낙랑군현에 이르러 서로 바다에 들어간다. 낙랑에는 운장과 요동험독현 조선왕 옛 도읍지가 있다. (浿水出遼東塞外西而至樂浪郡縣西入海 樂浪有雲障遼東險察縣朝鮮舊都也 {東越列傳}) 險察은 山東省 平洲이다.
이것은 浿水와 樂浪郡의 位置를 동시에 서술한 歷史 地理志 記錄이다. 따라서 지금의 난하가 浿水이다.
다음은 살수를 살펴보자
一. 살수는 요동군 사성동북오백육십리 지점에 압록강 동쪽이며 평양서쪽에 있다. (薩水在遼東郡司(蛇)城東北五百六十里鴨綠江東平壤西)
二. 압록강을 건너간 수나라 군은 동으로 나아가서 살수를 건너 평양성을 삼십 리터에 이르렀다. (進東濟薩水去平壤城三十里以土 {隋傳}, {鑑記}) 이와 같이 살수는 평양성 서쪽에 있고 수군은 동으로 나아가서 살수를 건너 평양성으로 향하였다.
다음은 압록강이다.
一. 옛날 유명한 시인 주희 가라대 여진은 압록강을 근거로 일어났다. (女眞起據鴨綠江)
여진 숙진 오손 오환 선비등으로 불리는 동이족의 대표격인 부여족의 발상지가 흑룡강에서 송화강에 이르는 지역임은 여러 사서에 나타난 사실이며 흑룡강 송화강의 본류 혹은 지류를 압록강 압록수로 지칭하고 요하 또한 그러하였다. 마자수를 압록수로 지칭한 것과 같이 전술한바 압록은 푸른 강물을 형용한 것이 였음인데, 요동에는 당시 漢式 지명이 드물었고 강들의 漢式 명칭이 없음에 그들의 역사 기록에 어느 강이든 필요에 따라 압록강이라 지칭한 것이다. 조선 반도에는 그러한 지명은 아직 없었던 시절인 것으로 조선 반도는 중원의 여러 민족간에 이해 관심밖에 있는 벽지였고 새로이 탄생한 신라와 백제 분국은 수당이 고구려와 싸우는데 후방 교란의 이이제이(夷以制夷) 정책에 이용한 것뿐이고 그 위에는 중원의 각 민족과 북적으로 불리는 여러 민족들도 고구려의 동족이 조선 반도에 약간 있다는 인식뿐이었다. 조선 반도에 있는 지금의 압록강도 조선 초기까지 확정된 강명이 없고 위화강, 압록강 등으로 임의 호칭한 것으로 보인다. 이와 마찬가지로 평양의 명칭도 역시 허다하다. 조선 반도에 있는 지금의 대동강변 평양은 당나라 이전의 중국 역사 기록에는 찾아볼 수 없다. 따라서 여기에 수나라 당시의 평양 위치를 본다.
二. 평양은 곧 왕검성이다. {漢書 集解}에 심흠한이 가라대 '명지 해주위는 본래 옥저국의 땅인데 봉천 행성현 또 봉천 계평현 고려국 계모성 또한 그 땅이며 낙랑군 옛 조선국이다. 여기 봉천이란 심양의 별칭이고 개평은 개원이며 개모성은 개원 옆에 있는 수호성, 즉 건안성이다.'
三. {삼국사기}에 '평원왕 28년에 평양을 환도성에서 장안성으로 옮겼다.'하는 기사가 있다. 지금의 평양을 장안성이라 한 적은 없다.
四. 전술한 바 '백산에서 나온 물의 色이 오리머리같다'하여 '압록이라 하고 나온 압록수가 염난수와 합쳐 安市城을 거쳐 바다로 들어가는데 평양은 압록강(마자수) 동남에 있고 서남으로 서안평에 이르러 바다로 흘러간다.'했다. 환도성이라고도 한다. 서안평은 요하의 서류변이다. 안시성은 사평시와 개원시 사이에 있다. 安市城은 개평 북70리 故墟에 있다. (四曰 {史記} 地理志)
五. 엄류수는 압록강 상류이다. 불류수 보술수 모두 명나라 시대에는 파저강이라 하였다. 지금의 훈강이다. (奄流水 鴨綠江 上流 불流水 普述水 明代 稱婆猪江今日之渾江, 魏書 叢書)
六. 요동군 사성 동북 560리의 압록 강변에 평양이 있는 것으로 역지록에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지금의 요양시가 평양이다. 上記二項平壤則王儉城漢書集解沈欽韓曰明志海洲衛本沃沮國地今奉天海城縣又奉天盖平縣高麗國盖牟城亦其地樂浪郡故朝鮮國也上記四有馬?水西北入鹽難水出靺鞨之白山色若鴨頭?鴨綠水歷國內城西與鹽難水合又西南至安市入于海而平壤在鴨綠東南西南至西安平入海
이상은 隋가 高句麗를 치고자 數年間 高句麗 地理를 연구하고 輸送路를 改設하여 철저한 조사와 실측을 거쳐 개전한 것으로 이설(異說)의 餘地가 없는 것이다 . 지명은 확실한 고증없이 추상적으로 적당하게 꾸며 넣으면 그것은 곧 거기서 일어나는 사건들의 양상을 사실이 아닌 방향으로 바꾸어 놓는 결과를 가져 오는 것으로서 과거 식민 사관을 고구려의 영토와 국력을 축소표현하기 위하여 고수대전장을 조선반도에 끌어들어 마구잡이로 요동에 있는 고구려 지명을 조선반도에 갖다 부치는 어처구니 없는 오류를 범하였다. 당시의 수나라 출병 상황에 수반한 시간관계 수송일정 등등을 수나라의 기록과 기타 여러 역사기록을 살펴보아도 조선반도서 전쟁했다는 것은 지명 관계를 떠나서라도 전혀 이치에 맞지 않는 불가능 한 일이다.
패전으로 수왕의 권위는 땅에 떨어져 통치 능력을 잃었다. 그의 옛 동족인 돌궐도 등을 돌렸다. 수 양왕이 군사를 징발하면 요동 사지로 간다 하여 회피하고 도적떼로 변하고 집합지인 탁군으로는 결사적으로 모이지 않았으니 어찌할 수 없었다. 다만 이 시기에 다음 당나라 시대를 열고자 하는 이연과 이세민의 무리들이 음모를 꾸미고 있었으나 두려운 것은 그들 또한 고구려였다. 고구려가 백제 신라와 손을 잡고 통일한 후 중원을 공략하면 분열 상태에 있는 중원 동북의 고구려 고토는 말할 것도 없이 중원 전체를 점령하려 할지도 모를 일이였다. 당시 중원에서 황제와 왕을 일컫는 군벌들 중에서도 唐王 이연과 이세민이 가장 동북 사정에 정통하고 그 역시 북적(北狄) 출신으로 중원에서도 문무의 학업을 닦고 출세를 하였으나 고구려 조선족과 옛날에 접촉이 많았고 수 양왕 부자를 따라 요동 출전도 하였기에 고구려의 강함을 인식하고 누구보다도 東方 방위에 힘쓰고 있었던 것이다.
여기 그간 우리나라 역사 기록의 地名과 地域의 位置에 관한 기록의 오착된 原因이 된 三國史記의 기록을 잘못 해석함을 규명할 필요가 있다고 사료된다. 古記에 이르기를 평양을 장안으로 천도 하였다고 하였다. 그리고 고구려는 처음 중국 북쪽에 있었는데 점차 東으로 옮겨가서패수가로 천도 하였다. (즉 요동의 영주) 또 당나라가 신라의 원조와 협역으로 고구려를 정복하여 발해 말갈 등의 그 많은 땅이 당나라 영토로 들어왔다. 신라도 역시 그 남쪽 영토를 점령하여 한주 삭주 명주의 삼주 및 그 군현을 설치 함으로서 九주를 갖추었다. 古記云 自平壤移長安高句麗始居中國 北地則 漸東遷于浿水之側 渤海人武藝曰昔 高麗盛時士三十萬抗唐爲敵則可謂地勝而兵强至于季未君臣昏虐失道大唐再出師新羅援助討平之其地多入渤海靺鞨 新羅亦德其南境以置漢朔溟三州及其郡縣以備九州焉 이와같이 [고구려는 패수이동 발해변과 요동 만주의 광할한 영토를 영유하고 당나라의 침략에 三十萬정예군사와 지리의 잇점을 가지고 당나라의 침략자를 파멸 시겼다.]
이와같이 고구려는 그 국토가 혹한 혹서의 기온차가 많은 지방이였으나 산이 험준하고 물이 깊으며 평야가 넓어 지키기에 좋은 여건이 구비되고 농업과 목축에 유리한 광활한 평야를 갖어 남자는 어려서부터 마상에서 적과 싸우는 훈련을 쌓았다. 한서 지리지에 기록하기를 요동군은 낙양에서 三千六百里 지점에 있고 속현으로 무려가 있으니 즉 주례 북진이 무려山이다. 대요(大遼)제국 시대에는 그 밑에 의주(?州)를 두었다. 거기 현(縣) 이삼개가 있는데 그 하나가 고구려 현이다. 즉 주몽이 도업지로 정했다는 휼승골성 졸본이며 현도군계(界)이고 훗일 대요국 동경의 서쪽이다.(漢書志云遼東郡距洛陽三千六百里屬縣有無慮則周禮北鎭醫巫閭山也 大遼於其下置醫州 玄?郡距洛陽東北四千里 所屬三縣高句麗是其一 焉則所謂朱蒙所都紇升骨城 卒本者蓋漢玄?郡之界大遼國東京之西
옛날 대요제국이 망하기전 대요 황제가 연경에 있을 적에 우리가 초빙되어 입조하는데는 동경을 거처 요하를 건너 이 틀길을 가면 이주에 도착한다고 하였다. (昔大遼未亡時 遼帝在燕京則五入朝撞者過 東京涉遼水一兩日行至醫州) 이상 기록들로 미루어 보아 고구려와 백제 신라의 원류인 부여국의 수도는 처음 창업지가 지금의 장춘이 합치하고 심양 근처에 있는 부여 고허(古墟)는 그 후 천도한 곳으로 보인다. 그리고 고구려 주몽天王의 창업지 휼승, 골성, 졸본은 지금의 봉천에 합치하고 당시의 평양성은 개원에 합치한다. 여기서 부여국의 위치를 살펴 보면 부여국은 현토 北쪽 千里며 南으로 고구려와 동으로 선비와 접하고 北에는 약수가 있다. (夫余國在玄?北 千里南與高句麗東與把婁西與鮮卑接北有弱水(後漢書) 영주 유성현 동남에 요락수 즉약수 이다. (營州 柳城縣東南有饒樂水卽弱水也 通典) 심흠한이 가라대 일통지에 봉천부 개원현이 부여국 땅이다.
(沈欽韓曰一統志奉天府開原縣扶余國地) 고구려는 개마산 동쪽인데 개마현은 현토군에 속하며 그 산에 지금의 평양성이 있고 서쪽에 평양 즉왕금성이 있으며 명지 해주위는 본례 옥저국 땅이라 지금의 봉천 해성현이고 또 봉천 개평현 고려국 개모성 역시 그곳이다. (高句麗蓋馬大山之東蓋馬縣名屬玄?郡其山在今平壤城西平壤卽險城也 [集解沈欽韓曰明志海州衛本沃沮國地今奉天海城縣又奉天盖平縣高麗國盖牟馬城亦其地] 북 부여는 장성 (萬里長城) 북이며 북에는 약수가 있고 즉 지금의 송화강유역 일대이다. (北扶余在長城北北有弱水卽北扶余當在今第二 松花江之地, 魏書 三國志) 지금의 부여국은 즉 예맥의 옛땅이며 장성의 북에 있다. 지금의 성경(長春)에 있으니 압록강 지역에 속하고 조선고성 만포성 지경안이다. [여기 압록강이란 송화강이 해당된다.] (今扶余國卽濊 故地也在長城北 在今盛京鴨綠江屬朝鮮高山城滿浦城境內, 山海? 郭璞注) 이와 같이 부여 고구려는 중원의 하북 산동의 동북지역과 요동 만주에 걸쳐 광범한 영토를 영유하고 있었다. 백제는 전술한바와 같이 중원의 하북에 있는 하남 지역에서 산동 절강의 월주(상해지역)에 걸쳐 공손도 왕국과 중원에서 병존하고 조선반도 서부지역과 왜국중부지역 (교도 나라)을 관활 하였다.
신라는 조선반도 동부지역에서 만주 동남부에 이르는 영토를 보유하고 고구려 백제에 비하여 적은 영토를 보유하고 있었다. 고구려는 한때 조선반도의 남평양까지 그리고 함경도까지 광개토대왕 시절 점유한 일도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당시 조선반도를 관활 하기위한 일시적 현상 일뿐 고구려 영토라 할수 없고 조선반도에 있는 고분을 단군성조의 분묘로 단정하고 개촉봉현 하였다고 하는 것은 그 진실을 믿기 어려운 처사이다. 그러한 문제는 보다 신중하고 깊은 연구가 있어야지 쉽게 민족적 대사를 경솔히 단정해서는 아니되는 것이다. 여기에 그 신빙성이 없다고 생각되는 사유를 들어본다. 단군 성조는 그내력이나 치적에대한 기록이 없어졌다고 하나 고대 사기에 단편 적으로 나오는 기록 들과 단군기선 二百年전 시대의 치우천왕의 행적과 약 二千년전 위에서 기록에 단군왕검이 아사달에 도읍했다.
(이 시대에 조선반도에는 아사달이 없었고 지명자체가 없었다.)는 것과 우리 동이족은 시베리아 지역 즉 북방민족이였슴을 감안 한다면 도읍지 아사달이 만주 북녘임을 의심치 않는다. 그리고 정착한 영토가 중원의 황하를 중심으로 한족의 우순과 조선의 단군제국이 東西로 갈라져 관활 하였다는 사실은 많은 고사 기록들이 명백히 하고 있는바 특히 황하변 기주 지역의 대부분을 단군에게 양도 했다고 우순의 四죄라고까지 비난한바 그 옛날에 인적이 없었던 것으로 추상되는 조선반도에 단군성조의 분묘가 어찌 있을 수 있으랴 이역시 조선반도에 다 동이 조선족의 본국을 같다 놓는 식민사관의 잘못된 발상이 아닌가 한다. 단군제국의 뒤를이은 고구려도 조선반도에는 없었는데 그 옛날의 단군성조 묘가 어찌 조선반도에 흔적인들 있을 수 있으랴 단군 제국은 약 二千年간 계속 되었으니 그 정확한 대수와 연대는 알수 없으나 누대 천왕이 모두 단군으로 통칭 하였으니 평양이나 강화도나 조선반도에 있는 유적이나 전설은 누대 단군중의 한위일 것이고 옛단군의 관경비가 요하변 서남쪽에 있었다는 기록도 참고이니 시조단군성조를 조선반도와 고정하여 연관시켜 생각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다만 어느 시대엔가 조선반도에 중원으로부터 이주한 조선족이 신위를 뫼셔와서 재향한 것으로 보여진다.
단군성조께서 백두산 단목하에 하강하사 건국을 선포했다는 것도 장백산 백두산도 압록강 평양등과 같이 북만주에 있는 지명이며 조선반도에 훗일 영산영지에 같은 지명으로 그곳에 와서 성스러운 산천에서 천재에게 제사를 올렸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각설하고 요동에서 고구려에게 연이어 참패한 수양왕은 그의 陸海軍 모든 것을 걸고 고구려와 최후의 승부를 거는 결전을 할 각오를 하였다. 그는 모든 힘을 동원하여 고구려와 대전에 임하도록 노력하여도 요동 출전을 기피하는 국민이 따르지 않았다. 불복하는 국민을 공포정치로 통제하였다. 그러나 이미 통제력을 상실한 수왕은 고구려가 일단 침공하면 항거할 능력은 없었다. 당왕은 이에 백제와 긴밀히 친교를 추진하여 고구려를 배후에서 위협하도록 조종하였다. 이러한 중원의 통제 불능 상황에 수양왕은 모든 것을 체념하고 주색으로 세월을 보냈다.
어느 날 수왕은 강도에 머물고 있었다. 장안에서 그를 따라온 신료장상들은 패전으로 意氣銷沈하고 장차 고구려를 정복할 아무런 희망도 없고 언제 고구려가 보복 침공할지 모르는 위험 속에 우울한 나날을 보내고 있으나 수양왕은 돌아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래서 大小 臣僚들 중에는 고향 처자가 그리워 도망가는 자가 많아 기마로 추격하여 참수하였으나 그치지 않았다. (多關中人久客思鄕里見帝無西意多謀反歸鄕將竇賢遂師所西走帝遣追斬之而亡者猶不止) 수왕은 그의 심복 호분낭장 사마덕감을 호위대장으로 삼아 거느리고 주위에 두었으나 국내에는 인심이 이미 수 양왕을 떠나 언제 수나라가 망할지 위험이 목전에 다가 오고 있었다. 이때 당왕 이연과 이세민 등은 능히 수를 멸할 수 있는 강력한 세력을 형성하였으나 시군(弑君)의 오명을 면하고자 은근히 다른 손을 빌어 수왕을 처치할 것을 획책하고 있었다. 독고덕감은 수가 망하면 심복인 자신은 滅族之禍를 당할 것임으로 불안하였다.
同僚輩友 이효상 원민 조행 맹병부 이복우 허홍인 설세랑 장계 양사랑 등 여러 장군들은 고구려가 쳐들어오기 전에 양왕을 처치해야만 살 수 있음으로 반란 모의가 계속되었다. 궁인을 통해 들어오는 반란 소문에 궁안이 떨고 있었으나 수왕은 그런 말을 하는 자를 斬首하였다. 반란에 가담한 군사 수 만 명이 성밖에 집결하였다. 성밖에 거화(擧火)하고 성내가 호응하여 반란이 실행되었다. 처음 수 양왕은 "성밖이 왜 이리 소란하냐?"고 물으니 성밖에 주둔한 군사들이 "실화입니다."라고 고하였다. 반란을 입에 담는 자는 모두 참하니 아무도 실상을 고하는 자가 없었다. 한 번은 술에 만취한 수 양왕은 거울을 보고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나의 좋은 머리와 목을 누가 자를 것인가?" 그 말을 들은 簫皇后가 깜짝 놀라 "그 무슨 말씀이오?"하니 수왕이 웃으면서 말하기를 "인간은 귀천고락이 바뀌는 것이니 무엇을 상심하랴!"하였다.
이 때 어영군도 반란에 가담하였다. 낭장 사마덕감(郎將 司馬德戡)이 군사를 이끌고 현무문으로 들어가고 배우통이 칼을 빼어 들고 궁밖으로 수왕을 나오게 하여 시립하였다. 수왕은 탄식하며 말하기를 "내가 무슨 죄가 있어 이 지경에 이르렀는고!"하였다. 옆에 마문거(馬文擧)가 말하기를 "패하는 종묘를 버리고(수왕은 종묘가 있는 장안을 떠나서 고구려를 치기 위하여 항상 동도에 아니면 강도에 주류하고 있었다.) 돌아다니며 전쟁과 유흥을 그치지 않고 밖으로 남의 나라 정벌에 힘쓰고 안으로는 사치와 음탕하고 사방 민중은 생업을 잃고 도적떼가 일어나며 독재자가 되어 고구려 출병을 하면 안된다고 간하는 것을 막았으니 어찌 죄가 없다는 말이요!"하였다. 왕은 "이것이 모두 백성과 너희들의 영화를 위함이다."하였다.
양왕의 愛子 조왕은 이때 나이가 十二세였다. 수양제가 사랑하여 항상 옆에 있었다. 놀라서 울부짖으니 배우통이 칼로 참수하여 목이 땅에 떨어지고 피가 수왕의 옷을 적셨다. 다시 왕을 참하려고 하니 왕이 말하기를 "자고로 황제는 죽는 법이 있느니 독주를 가져오라."하였다. 문거 등이 허락하지 않고 목을 졸라 죽였다. 이와 같이 수양왕은 파란 많은 일생을 마쳤다. 그가 당시 불가능한 고구려 침공을 강행하고 불가함을 간하는 신하들을 모두 참살하는 만행을 저지른 것은 백제와 신라의 배후 공격을 기회 삼은 것이나 백제와 신라는 아직 효과적인 지원을 할 능력이 없었던 것이다. 고구려는 전략 전술 등 용병술이 수군보다 우월하였으나 거기에 충성심이 투철한 호국 정신과 죽음을 돌아보지 않는 기적 같은 一當百이란 것을 사실로 증명하였다. 이러한 고구려의 진취적인 국민정신에 대항하는 세력 즉 수를 이은 唐과 백제 신라의 정략은 어떠하였는가? 고구려와의 통일을 거부하고 남의 나라 唐에 칭신하고 충성을 바친 사연은 무엇인가? 당나라 군신들의 夷以制夷(오랑캐로 오랑캐를 제도하도록 만드는 정책)사상과 대단군제국 이래의 천자위를 이제 당이 차지하기 위하여는 고구려를 정복해야 한다는 운명적 적대 관계에 있어 백제 신라의 고구려와 동족 분열은 아세아 대륙의 역사를 바꾸어 놓았다. 독재자 수 양왕 광과 함께 그의 일족 수백 명도 남김없이 죽였다. 이를 계기로 唐王 이연은 정권 인수를 위한 활동을 강행하여 수왕의 잔당 건덕(建德)의 領地 山東 30 余洲를 平定하고 高句麗 侵入에 對備하고 李世民은 장안에 이르러 무장하고 이세운 등 35 장군을 이끌고 철기 萬匹과 甲士 3萬人이 앞뒤를 호위하고 북을 울리며 수의 잔당을 위압하였다. 수왕과 같은 돌궐 출신 왕세충(王世充)이 수 양왕의 뒤를 이으려 하였으나 미치지 못하였다. 산동의 건덕이 이세민에게 망하였음이다. 건덕은 이떤 인물인가? 의협심이 강하고 다역이 과인하고 용맹하여 고구려 원정군 200長으로 뽑혔다.
한 고향 사람 손안조(孫安祖) 또한 용맹한 장사로서 함께 징집되었다. 손안조는 요동에 출정하면 살아서 돌아오지 못하니 집에 남은 처자도 비참한 굶주림으로 고생할 것임에 죽는 것이 낫다 하여 물에 던져 죽게 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현령이 그를 잡아다가 곤장을 쳤다. 그는 현령을 찔러 죽이고 도망쳐 건덕의 집에 숨었다. 관가에서 관원이 건덕의 집에 잡으로 오니 건덕이 안조에게 이르기를 수 문왕 시절 천하가 은성 부강하여 백만의 군사로서 고구려를 쳐도 도리어 패하고 지금 요동의 재난으로 백성은 곤궁한데 작년에 다시 출정한 군사도 전사하고 돌아오지 않고 곤궁은 더욱 심한데도 주상은 백성을 구휼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군사를 일으켜 고구려를 친다 하니 필연코 천하가 크게 어지러울 것이다. 대장부 세상에 나서 큰공을 세워 출세할 것이지 어찌 고구려 병에게 억울하게 죽을까 보냐? 하고 수백 명의 소년을 모아도 적으로 변하여 출정기피자를 모아 차츰 군세를 이루어 수가 망하는 틈에 수만 명의 군사로 산동을 점거하였던 것이다.(征士安祖辭以家爲水票妻子婚死縣令怒笞之安祖刺殺令亡抵建德?之官司遂捕踵迹至建德家逮德謂安祖曰文皇帝時天下殷盛發百萬之衆以伐高麗尙爲所敗今水僚爲災百姓困窮加之往歲西征行者不的瘡痍未復主上不恤乃更發兵親擊高麗天下必大亂丈夫不死當立大功豈可但爲亡虜耶易知錄)
수양왕이 비록 민심을 잃었으나 왕세충은 弑君의 불명예로 수 양왕의 잔당들이 왕세민은 수양왕을 모살하는데 관여한 불충한 인물이다하여 비난하고 이세민을 따랐기에 왕세민은 이세민에게 토벌되었다. 중원의 이러한 소란에도 불구하고 고구려는 이 기회에 승전의 여세를 몰아 失地 回復(회복)을 않고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당왕은 이런 위기를 어떻게 넘겼는지 살피건대 唐의 用意周到함은 實로 謀事는 在人이고 成事는 在天이라 는 말 그대로다. 당은 수를 이어 중원에서 정권을 장악하였으나 미처 통일을 이루기 전에 재빨리 고구려 백제 신라에 사신을 보내 친선을 도모하였다. 당은 수양왕의 독재정치에 등을 돌렸던 유용한 인사들을 광범하게 포용하여 기용하고 역대로 군사정권은 오래지 못하여 반드시 비참하게 망하는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하여 고구려에 대항하기 위한 군사력을 강화하면서도 문화정치의 기틀을 마련하는데 전념하였다. 이무렵 고구려 또한 년년 계속된 계속된 전쟁으로 온국민의 희생이 너무 클 뿐 아니라 신라 백제와의 화합을 이루지 않고는 후방을 비우고 중원고토 회복에 위험을 무릅쓰고 나설수없었다. 그것은 백제뿐 아니라 신라도 이 때는 미약한 지난날의 신라가 아니였다. 三국은 통일 보다는 오히려 대립이 심화해 가고 있었다. 이 시기 三국의 국토 형태를 살펴보면 고구려는 만주 요동과 조선반도의 지금의 평양 대동강까지의 일부 지역에 진출하고 백제는 중원 하남을 잃고 중원상해 지역의 월주 지경과 조선반도 대동간 이남과 호남지역을 영유하고 신라는 조선반도 영남 강원도 함경도와 두만강 이북 간도 연변 지역을 영유하고 있었다. 신라 영토의 일부가 발해변에 있었는데 그것이 고구려가 망한 후에 것으로 추측된다. 신라 영토에 관하여는 하권에서 자세히 기술할 것이다. 그간 고구려 영토가 조선반도 북부모두였다는 인식은 잘못이다. 당초에 고구려는 그 본토가 만주요동 중원 북부이며 조선반도와의 인연은 백제 분국과의 전쟁으로 광개토대왕이 당시 남평양을 한 때 점령하여 병력을 주둔한 것이고 조선 반도의 북부가 고구려 영토는 아니다. 고구려는 요동과 만주의 광활한 영토를 영유하고 있었으나 나라안의 군신간의 분류로 내란이 일어나 혼란에 빠짐에 당에게 침략의 기회를 주어 당은 신라의 후원을 얻어 전후에서 협공하여 千년 간 중원에서의 패권 다툼에 종지부를 찍고 고구려를 파하였다. 당은 이로부터 천하에 유아독존으로 유일한 황제가 되어 안하무인의 독선이었다. 신라의 지원으로 성공 하였으나 당나라 황제만이 유일한 황제이고 신라는 부용국으로 취급하여 스스로 종주국 행세를 하고 조공을 강요하기에 이르렀다. 신라·백제·고구려는 같은 동족으로 통일을 이루지 못하고 남의 나라의 압제하에 들어가는 비참한 지경에 이르렀다. 사대주의의 뿌리가 생겼다. 수천년간 동방에 군림하여 중원을 통제하고 위세를 떨치던 동이조선족의 자존심은 살아졌다. 항거 능력없는 신라도 칭신하고 당을 종주국으로 추앙하였으나 자주독립의 기본의지는 굽히지 아니하였다. 그러나 당은 신라가 요동에 조금이라도 영토를 가지면 고구려의 잔존세력과 합칠까봐, 계속 압력을 가하여 신라는 협소한 조선반도로 밀려나는 민족적 비극을 맞고 중원 북부 요동 만주의 모든 조선 영토는 고스란히 잃어 버렸다. 실로 민족 분열의 소산이다. 이리하여 동이 조선족은 고구려 패망기에 와서 국토를 모두 잃어버리고 험한 산악지대로 평야가 적은 조선반도로 몰려와서 반도인 小國人 등의 호칭을 감수해야하는 절제를 받게되었다. 화합과 타협의 기교를 모르는 완고일변도의 군사독재 정치의 비참한 결과는 그들 권력집단 자체의 멸망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고 전체민족의 비극을 가져온 것이다. 그러나 동이족은 단념하지 아니하였다. 신라는 계속 옛 요동 영토의 회복을 꿈꾸고 있었으나 완전 화해된 옛 부여, 고구려의 뿌리인 여진과의 오랜 단절로 연계가 어려워 쉽사리 고토회복의 기회는 오지 아니하였다. 차츰 서로 다른 생활권에서 장기간 살아왔기에 문화적으로 이질화하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고토 회복의 시도는 신라의 후에 입국한 고려에 와서는 더욱 적극화하였다. 그것은 고려 시조 왕검의 건국 이념이 국토 회복이고 고구려 정신을 이었다. 중원의 한족이 몽고족의 元에게 정복되는 과정에서 절호의 기회가 왔던 것이다.
(以下次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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