二十五. 高句麗 百濟의 建國記年 축소와 역사 왜곡 왜구(倭寇)의 신라 침략
동이 조선의 古代를 중원 본토가 아닌 조선 반도에 갖다 놓고 중원에 있는 지명도 그렇게 하여 역사를 기술하려고 하니 조선 반도는 애초에 없고 중원에 있는 지명을 반도에다 갖다 부쳐 모순된 역사서가 생기고, 거기다 고의적인 식민사를 침략자가 만들어 내어 어처구니없는 착오를 가져온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굳히기 위하여 남아 있는 우리 古代 史書까지도 모조리 태워 버린 침략자의 역사 왜곡은 오늘날에도 그 잔재가 살아지지 않고 있다.
조선 반도 인구가 조금씩 불어난 것은 진시왕이 연 나라를 파하고 몽활군이 하남 三十주를 유린함으로서 동이족이 큰 타격을 입고 조선 제국은 三조선으로 분립함으로서 九환의 열후가 분열하는 비극 속에 고대사가 소멸되었다. 많은 역사 서적에 기록된 고구려 건국년도의 오류를 검토할 필요가 있다. 그 예로 한무왕 유철이 번조선을 정벌하여 우거王영토를 병합하고 고구려에 대하여는 전혀 당시 싸움을 피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멋대로 고구려를 고구려 현(縣)으로 했다고 깔아 낮추어 기록하였다. 그러나 이때 BC 108年 이전에 이미 고구려 국이 있었다는 증거이다. 고구려 건국 시기에 대하여는 한서 동이 열전에 그 나라가 흥성한 것은 서한초라고 여러 전기에 기록되어 있다.(漢書東夷諸傳其興國倂載西漢之初) 三國史記에도 왕의 母 유화가 동부여에서 흉하시니 금계 왕이 태후예로 장사 지내고 사당을 지어 모셨다(王母柳花於東扶余王金蛙以太后禮葬之遂立神廟) 하였는데 금와王이 자기의 비(?)를 태후의 예로 장사 지내고 사당을 지었다고 하면 사리에 맞지 않는 것이다.
유화는 해부루왕의 비이고 그의 생전의 덕행과 그 친손(親孫)인 북부여王에 대한 예절로 태후예로 장사 지내고 사당을 지어 제사를 모셨다는 것이 분명하며 유화는 기후 생산을 하지 아니 하였으며, 금계王의 여러 王子들은 금와의 王비에서 나온 王子이다. 유화는 분명 금와王의 서모 혹은 계모이다. 유화 해부루 왕비를 금와(金蛙)王비라 한 것도 고구려의 연대 축소 시키는데서 나온 모순이다. 태조 주몽 후 대주류왕의 연대에서 왕비 대비가 되었다가 태자가 王子가 되었다가 三代로 二代로 바뀌었다가 三國사기 고구려 본기의 모순된 기록은 年代 축소의 흔적이 노출된 것으로 보여진다. 주몽성王의 太子 유타를 빼고 孫子 유리를 太子로 기록하였다. 廣開土大王碑에 고명 世子하고 유리王을 大주류王이라 기록하였으니 上下 분리하여 해석함이 타당하다고 보여진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국조王 宮皇帝는 七세에 즉위하여 太后가 수렴 청정하였고 한의 光武왕은 국조환제 재위 四年에 죽었다. 중국 사기에 중원에서 고구려가 위세를 떨친 고구려王은 宮황제 시대이며 북경 태원까지 中原北반부를 점령한 시대는 평왕에서 광무왕에 이르는시대이다. 국조황제의 직위가 三十年이상 앞당겨야 사리에 맞는 것이다. 고구려의 年記 축소는 이러한 모순을 가져오고 있다. 그 년기 축소는 고구려 건국 시조 주몽성왕에서 국태조 궁황제에 이르는 사이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중국 여러 古史에는 주몽성王의 왕위를 이을 자는 여달(閭達)이며 유리王은 손자이고 태조王 宮도 大武神王의 조카나 아들이 아닌 후손이라 하였다.(朱蒙死閭達代立閭達死子如栗代立如栗死子莫來 ∼ 子孫相傳至裔孫宮 漢魏총書 通典) 여기 王名 글자는 漢字 표음이니 일정하지 못한 것이다. 안컨데 중국 고사 기록도 우리 나라 고사에 기의한 것이지 우리의 왕조 기년을 중국서 알 수도 만들 수도 없는 것인바 참고함이 그릇되지 아니한다. 따라서 주몽성王의 본처 예氏 소생은 류타이며 유리는 손자인 것으로 보여진다. 기년 문제는 역사상 바르게 고치는 것이 국사 편찬 諸賢의 課題일 것이다. 唐나라 학자 賈言忠의 저서에 고구려는 한나라 때부터 九00年간 있었던 나라 이다라고 하였다. 그들의 史記外에 당시 당나라에는 소정방이 가져간 留記를 위시하여 많은 고구려 서적들이 있었을 것이고 역사 연구에 자료가 충분하였을 것임에 그러한 자료에 의하여 우리 나라에 관한 역사 기록에 참고했을 것임에 고언충의 기록은 틀림이 없다고 믿어진다. 倭가 朴赫居世 十一年 병선 百여척을 동원하여 해변의 민가를 약탈하니 군사를 동원하여 막는 중 낙랑이 이러한 틈을 타고 다시 침공하여 도성을 포위 공격하였다.신라는 국난을 극복하고 차츰 발전하였으나 왜구(倭寇)는 이때부터 시작하여 그들의 노략질은 千年을 끝치지 아니하였으나 신라는 단 한 번도 왜를 토벌한 일이 없고 다만 방비와 방어에 전념하였으니 이것이 무슨 연유인가.
평범한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신라는 박씨 왕조 왕을 거쳐 석탈해가 계승하여 석씨 王朝 八王을 거치고 다시 김알지가 계승하여 三十七王의 金氏왕조에 이르렀으나 전혀 倭를 토벌한 원정군의 출전 흔적은 찾아볼 수 없다. 한반도 역사상 그 많은 왜구의 침략 약탈을 막기 위한 원정은 李朝 世宗시대에 단 한 번 대마도의 왜구 소굴을 소탕한 것으로 그것도 왜구를 소탕 섬멸 한 것이 아니고 항복 받고 三百석의 구휼미를 보내어 그들의 굶주림을 구호 한 것이다. 다시 말하여 국내의 민란을 진압한 것이다. 신라는 발전 과정에서 예맥국과 옥저 국을 통합하여 후당 시대의 신라 영토는 北으로 만주 동북 지방 옛 동부여 지역에 이른 것으로 당서는 기록하고 있다. 당시 왜는 五十여 분국으로 각기 번주(藩主)가 통치하였고 통일 정권은 없었다. 그럼으로 왜가 곳 지금의 일본이라고 단정하는 것은 옳지 않다.
또 왜구가 곧 일본을 대표하는 해적인지 의문이다. 우리 나라의 광개토大王 시절 大大的 中原영토 확장전 太祖王 말기 왜국王 흥(興)이 中原順帝에게 올린 表文에 먼 나라 구석의 몽매인에게 나라를 봉해 주시어 이 지역 二百여 나라를 정복하여 항복 받고 종주국에 신하의 도리를 다하지 못하였사오니 비록 저의 어리석음이오나 先代의 그러하였던 것은 멀리 백제가 함선을 띄워 막고 고구려가 불법으로 무도한 침략을 하려고 변경 침탈을 그치지 아니하니 매양 기회를 놓치고 풍파가 없어 진로가 비록 트인다 하여도 신의 亡父濟(죽은 아비 제(濟)가 그들이 天子에게 배알하는 길을 막는데 대해 분개 하였사온데 그것을 쳐서 길이 트인다 하오니 百萬의 후원을 으뜸이오. 감격 하옵고 ∼ 順帝는 이에 自假(가정하여) 開府儀同三司와 여타 모두 가정 咸假)으로 충절을 권하는 조서를 내려 [도독왜 신라 임나라가 타진한 묘한 六國제군사 안동 대장군 왜왕을 제수 했다] (여기 假라함은 사실은 아니나 충성을 맹세하고 그러한 명칭을 원하니 가字를 부쳐서 제수하였다는 것임) 이 시대는 한반도에는 이미 백제가 신라 건국 三十여 년후 지금의 전라도에 百濟 분국을 설립하였고 고구려가 요동 요서를 공략하여 중원의 한에 압력을 가하는 때 인대 중원 南쪽에서는 송무왕이 일어났다. 그러나 순왕(順王) 時代에 와서는 황제를 자칭하여도 미약한 존재로서 다만 수식적인 조서를 보내고 벼슬을 고구려 백제에도 봉작을 하였으나 고구려 백제에 항거할 힘은 없었다.
아직은 중원은 한과 위의 세력권이 남아 있었다. 여기 왜가 순왕을 섬긴 것은 지리상 멀리 갈 수 없는 처지였음으로 그리 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그 시대 왜王을 자칭한 濟나 그 아들 興은 일본 역사에나 우리 나라 역사에 존재하지 아니한 인물이며 왜란 전술한 바와 같이 지금의 일본 구주 대마도 이끼 시고꾸의 고구려가 건국 초기에 지배 하던 곳의 王이 아닌가 한다. 중국측 기록이나 광개토大王 비문의 기록과 같이 신라와 백제를 고구려에 속한 백성이다. (그 시절) 하였은 즉 신라 혹은 백제 지역에 주둔하고 있던 고구려 군이 고구려의 통치를 불복하는 四개 섬을 토벌하는 상황을 그곳 왜가 순왕에게 구원을 호소 한 것으로 보여진다. 이보다 앞서 왜가 처음으로 중원과 소통한 것을 보면 왜가 자칭 대부왜국王이라 하고 왜국은 南쪽 끝이라 하며 使者가 와서 조공을 바쳤다. 광무왕이 인수를 내리고 영초 원년에 왜국왕 수승등이 사람(종복을 뜻함) 160人을 바치고 배알을 청하였다. 환재, 영제지간에 왜는 대란이 일어나 서로 치고 오래 계속되어 王이 없었다. 즉 이로부터 내왕이 끊어졌다는 것을 뜻한다.
그러니 BC 三十年경부터 AC 100年 사이는 倭王의 사자가 가끔 오갔다는 것이다.(倭奴國奉貢朝賀使人自稱大夫國之極南界也光武賜以印綬安帝永初元年倭國王帥升等獻口百六十人願請見桓靈間倭國大亂更相功伐歷年無主, 宋書) 大夫國이란 한나라 太守격에 해당하는 계급의 벼슬 명칭이다. 자칭이라 한 것으로 보아 光武왕이 大夫벼슬을 내린 것은 아니다. 후세 일본 도꼬가와바구후(幕府)시대에는 왜구를 통제하여 조선과 중국에 출입하는 선박은 고슈인생(御朱印船)이라고 하는 면허증을 가진 선박만이 출입 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로부터 왜는 완전 통일국가 일본으로 문명화의 길로 들어섰으며 왜구의 침입도 일단락하였다지난번 일본이 그들의 천왕 묘로 추정 하여 발굴한 아쓰가古 분묘가 벽화 등 매장품으로 보아 고구려인 이라는 것이 확인됨으로서 그냥 복원한 사실과 겨누어 볼 적에 백제가 일본 왕실과 혈육 관계가 있고 아마도 조정을 세워 문화의 꽃을 피운 그 시기보다 한발 앞서 그들 아쓰가 지방의 王이였고 야마도 민족이라고 일컫는 기마 민족은 고구려 인으로 추측된다.
이러한 역사 문제의 거론은 일본인들이 극히 꺼리는 것인바 그것을 그들 국민의 수치로 생각하는 사고는 중국인이나 조선인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라, 그들 역사에는 그 누구에게도 정복되었거나 고대에 패전 한일이 없어야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소년 영웅심 같다 할까 왜구에 관한 역사적 깊이 있는 연구가 필요한 것이다. 백제도 조선 반도 분국을 설치한 후 머지 않아 왜국에 건너가서 국가 형태를 갖춘 정부를 개설하고 비록 지역적이기는 하나 미개한 주민에게 문명 제도를 수출하여 문화 개혁을 이룩하였으니 피난민의 집단이 아니라 백제의 분국 형태였다. 그것은 당시 왜국 조정이 백제王실 인물들에 의하여 운영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리하여 백제국이 멸망할 때까지 그들의 동맹 관계는 굳건히 유지되었고 신라는 한 때 백제와 왜의 공동의 적이였다. 연에 속했다는 邪馬臺國이 백제南쪽 대해중에 있다고 하였고 유귀(流鬼)도 거기 있다고 하였다. 유귀는 流球國 즉 지금의 오기나와를 일컫는 것이며 李朝 時代까지 사절이 선물을 가지고 우리 나라에 오갔다.
사마대(邪馬臺)는 일본의 야마도 (大和)의 원명(原名)이며 고구려인 이 이주한 나니와 (難波國)와 邪馬臺는 일본 열도 안에 있는 지역인 것이다. 고대 중국의 여러 역사 기록에 동이족 연인의 풍속에 관한 것을 기록하였다. 한민족 풍속과는 너무나 다름으로 특기 하였다. 동이족인 연 나라 사람들은 남녀가 어울려서 노래하고 춤추고 풍악을 좋아하고 한낮에도 그렇게 놀고 그러면서 남녀 불륜 행위와 기타 범법 행위는 엄격한 처벌을 한다 라고 하였다. 이것은 아마도 세계에서 특유한 동이 족의 풍속이며 일본도 차이는 있으나 비슷한 풍속이 있다. 南方의 원주 민족이 사는 일본에 동이 민족이 문화를 이식하여 일본국을 창조한 것은 그들의 부인에도 불구하고 사실로 인식된다. 그것은 사마도 민족이란 그들이 한 때 주장한 하늘에서 하강한 민족도 아니고 남방에서 온 왜소한 남방 민족도 아니며 용기와 희생정신이 강한 옛 고구려인의 품모가 남아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일본 열도에 거주하고 있는 몇 종의 원주민보다는 인구수는 적었을 것이나 모든 면에서 월등한 문화적 능력을 가졌기에 원주민을 지배하는 상위 층이 되었다고 보여진다.
지금은 전혀 연고 없는 타국이나 조선 족의 고대 역사 관계를 기술하니 남의 나라 같지 않게 서술하였다. 신라는 박혁거세 王朝 창업후 일체 부정이 없는 정치로 국민 생활이 부유해지고 부양할 자식이 없는 노약자는 국가에서 구호한다는 소문이 四方에 퍼져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국기가 안정됨에 王은 건국 공신 六부장에게 성(姓)을 사(賜)하니 양산부는 양부 李氏 고허부는 사양부 催氏 대수부는 점양부 孫氏 간지부는 본피부 鄭氏 가리부는 한지부 裵氏 명활부는 습비부 薛氏라 하였다. 이어 十七 등의 관제를 공포하고 가무의 곡을 제정하여 예술을 진흥케 하였다. 신라는 혁거세王朝에서 석탈해 王朝로 그리고 다시 김알지 왕조로 이어가면서 모두 현인을 찾아서 선위 하였고 친자식이 王의 자질이 없다고 보면 결코 친자식에게 계승케 하지 아니하였으며 王位계승 문제로 다투거나 싸운 일이 없다. 이러한 전통은 역대 신라 조의 미풍으로 세상 어느 나라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도덕 사회였다. 신라의 이러한 국가 발전은 인국 백제에게는 불안을 안겨 주었다. 백제는 신라가 강대해지는 것을 막을 필요가 있었다. 석탈해王 八년 八月 백제는 군사를 일으켜 계산성을 공략하고 이어 구양성을 공격하였다. 王은 二千의 기병으로 격퇴시켰다. 백제는 十四年에 또다시 침입하였고, 十七年에는 왜구가 침입하여 방어군 대장 각간 우오가 전사하였다.
十八年에는 백제가 또다시 변경을 침략하였다. 二十年에는 군사를 일으켜 계산성을 회복하고 수성군 二百명을 섬멸하였다. 二十 一年에는 가야(加耶)와 황산진(黃山津)에서 크게 접전하여 千여명을 섬멸하였다. 신라는 계속되는 외침 속에서도 영토를 차츰 확장하여 인구도 크게 늘었다. 지마니사금 壬午年에 군사 萬명을 일으켜 가야국 영성을 포위 공격하였으나 실패하였다. 가야는 당시 신라 보다 먼저 건국한 나라로서 그 세가 신라에 미치지 못하였으나 능히 신라의 침략을 막아냈다. 이후 오랜 세월 신라와 가야는 수교하여 충돌을 피하였다. 나해니사금朝 十三年에서 十四年에 이르는 동안 왜가 침입하고 남해 일대의 八개 나라가 결속하여 가라를 침공하니 가라王子가 신라에 구원을 청함에 王은 六부의 군사를 일으켜 그들을 격퇴하고 六千명의 포로된 사람들을 돌아오게 하였다.
十九年에는 백제가 다시 요차성을 공격하여 성주 설부가 전사하니 신라 왕은 이벌손 이음으로 하여금 정병 六千을 거느리고 백제의 파사현성을 공격하고 이로부터 양국간의 전쟁이 자주 일어났다. 이러한 틈에 왜구는 조분니사금王 三年에 신라를 급습하여 곧바로 수도 반월성을 포위 공격하였다. 그러나 이때 신라는 국력이 신장하여 왜구는 패하여 달아나니 王은 친히 왜를 격퇴하고 달아나는 적을 추격하여 千여명을 참 하였다. 十六年에는 고구려가 北변을 침략하여 방어군이 패퇴하였다. 신라는 백제와 왜가 번갈아 침입하여 견디기 어려운데 고구려가 北변을 공격하니 어려움은 겹쳤다. 첨해니사금王 二年에 고구려에 王子를 볼모로 보내고 화친하였다. 왜구가 년년 침입하여 노략질하고 주민을 납치 하니 나라안이 편할 수가 없었다. 유래니사금王 十二년 王은 백관을 모아 놓고 묘의를 열었다.
王이 이르기를 왜구가 끊임없이 침입하여 백성이 편할 날이 없으니 과인이 백제와 상의하여 함께 군사를 일으켜 왜국을 정벌코자 하니 어떠한가 하였다. 서불 감홍권이 아뢰었다. 우리 군사는 수전을 익히지 못하였고 모험을 무릅쓰고 원정하였다가 혹여 잘못될까 두렵습니다. 더욱이 백제와 함께 도모한다 하오나 백제는 사술이 많으며 항상 우리를 넘보고 있는 형편이오니 함께 큰 일을 도모하기에는 어렵습니다 하였다. 王은 그 계획을 포기하였다. 왜구는 그후도 계속 침입하여 그 규모도 점차 커지고 백성을 납치하여 신라 발전을 저해하였다. 왜구 침략이 계속 되던 中 실성니사금王 七年봄 왜가 대마도에 병영을 설치하고 사방에서 집결하여 침입 준비를 하고 있다는 정보가 신라에 들어왔다. 신라王은 묘의(廟議)를 열어 대책을 강구하여 王이 말하였다.
왜구의 침탈로 우리 나라는 편할 날이 없고 국민은 계속되는 약탈과 납치로 그 참상은 심화되고 있으나 나라에서 백성의 고통을 덜어 주지 못하고 있으니 이것은 과인의 부덕한 탓이라 이제 군사를 일으켜 저들이 침입할 준비를 하는 중에 선제 공격을 하여 일거에 섬멸코자 하니 경들의 생각은 어떠한고 하였다. 이에 서불함 미사품이 아뢰었다. 신이 듣사온데 兵은 흉기라 하였사옵니다. 전쟁은 위험한 일이 온데 군사를 크게 일으켜 하물며 먼 곳에 바다를 건너 남을 치다가 불리한 결과가 되면 후회하여도 미치지 못할 것이옵니다. 이대로 험한 곳에 관을 설비하여 적을 막고 적이 물러 날 적에 치면 이는 편한 것으로 수고로운 자를 치는 병법이오니 헤아려 주시기 바랍니다 하여 그치고 말았다. 十七年에는 나물(奈勿)王子를 고구려에 볼모로 보냈다. 신라가 거국적으로 왜구 침입에 대비하여 침입하는 왜구를 섬별 할 준비를 갖추고 있으니 이러한 정보가 왜구 대마도 본영에 입수된 탓이리라 이후 약 三十年은 왜구의 침입은 해안 지역에 소규모적 약탈이 있었을 뿐 대규모 침공은 없었다.
그러다가 납지마리간王 二十八年에 왜는 대규모 침입을 감행하여 南과 東에 양로로 침입하여 노략질을 자행하고 주민을 납치해 간 후 익년 다시 침입하여 도성을 포위 공격하였다. 王은 친히 군사를 이끌고 위험을 무릅쓰고 선두에 나서서수성 장병을 위로 격려하여 적을 막았다. 적은 성은 함락되지 아니 하고 성밖 주민은 모두 도피하고 약탈한 양식은 떨어지니 더 이상 싸울 수 없어 군사를 이끌고 퇴각하기 시작하였다. 王은 군신의 만류를 듣지 아니하고 선두에서 군사를 지휘하여 물러가는 적을 추격하였다. 적은 중도에 복병을 해 두고 추격에 대비하고 있다가 王의 군사가 깊이 추격해 들어온 후 복병이 내 달아 후군을 공격하고 물러가는 군사가 돌아서서 王을 공격하니 王은 진퇴 양난으로 좌충우돌하여도 포위망을 벗어 날수가 없었다. 그러자 큰 안개가 주위를 덮어 지척을 분간 할 수 없게 되니 王은 계교로서 적을 속이고 혈토를 뚫어 탈출하였다. 적은 王이 이미 탈출 한 것을 알고 하늘이 돕는구나 하고 군사를 이끌고 돌아갔다. 이 전쟁으로 신라는 수많은 장병을 잃었다. 자비마입간王 二年에 왜는 병선 百여척을 편성하여 다시 대규모 침탈을 시도하고 월성 도성을 포위 공격하였으나 성의 수비가 공고하여 함락 할 수 없음에 적이 물러나니 신라군이 추격하여 영덕 방면 北해구에 이르러 태반을 섬멸하여 왜구는 큰 손해를 입고 돌아갔다.
적은 두 달 후에 다시 그들 피해의 보복으로 활개 성을 습격하여 성을 파하고 千여명의 주민을 납치 해 갔다. 신라는 千년을 두고 무수한 왜구의 침공을 막아내고 사직을 보존하였으나 단 한 번도 원정군을 파견하여 토벌한 사실이 없다 함은 전술하였거니와 그 수수께끼는 무엇인가. 하물며 왜구는 왜국 지방의 해적 집단일 뿐 전체 왜국군은 아니며 또 그러한 통일국가도 왜에는 없었다. 안컨데 신라는 건국 당시의 조선 반도 인구는 회소 하다 함은 전술한 바이다. 건국 전반기까지는 원정군을 파견하여 왜구의 본거지를 섬멸할 만한 국력이 없었다고 보여진다. 두 번의 원정 논의가 있었으나 그 논의의 내용을 본적 한가지는 수군을 창설할 병력이 없어서 수군 조련을 하지 못하였고, 둘째는 수전 준비가 있다고 가정하여도 인구가 취대동원 병역 萬명을 넘지 못하였을 것임에 원정군 五千을 편성하는 것이 고작일 것임에 그러한 병역은 확고한 성공을 보장할 수 없었다고 보여지며 백제가 이미 분국을 설치하여 세력 확장에 힘쓰고 있는 상황에 나라를 비울 수 없는 여건으로 그러한 정세가 계속 되었다는 것이다.
또 고구려와 똑같은 민족이면서도 고구려는 처음부터 만주 중원 대륙에서 황야에 말을 달려 횡행하며 전쟁에 익숙하여 무수한 승패를 겪은 農牧(농업과 유목)을 겸한 생활양식이 다르게 살아왔음에 고구려 같으면 패할 때는 패하더라도 적국을 공격하고 본다는 진취적 행동을 취했을 것이나 신라는 신중하고 합리적인 사고로 모험은 아니한다는 정책을 일관 하여오니 그러한 무기력한 소극적 결과가 아닌가 한다. 후반기에 접어들어서는 중원과 만주의 거침없는 전쟁으로 동이족 피난민이 계속 몰려오고 낙낭국을 고구려가 멸하여 그곳 피난민이 몰려오고 하여 상당수의 인구가 되었으나, 백제 또한 같은 형상으로 발전하여 신라는 조선 반도와 동북 만주의 고구려 영토가 아닌 지역을 합친 王國을 건설코저한 건국 이념은 실현이 어려워졌다.
건국 초기부터 왜구의 계속된 침략은 백제가 강성하기 전에 신라가 반도 내에 영토를 확장하여 백제가 설 땅이 없게 하고 반도 전체를 장악할 기회를 가질 여유가 없었다. 물론 당시 이미 수십만중을 동원 할 수 있는 인구와 국토를 보유하고 있는 고구려와 맞설 생각은 가지지 아니하였고, 고구려도 반도의 협소한 속에 자리잡은 신라나 백제 분국에 대하여 큰 관심을 가지지 아니 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고구려의 오산이었다. 신라와 백제는 서로가 적대하면서도 고구려가 치면 서로 돕고 고구려는 반도 안에 깊숙이 들어가려고 하면 중원에 있는 역대왕朝는 그들이 눈에 가시로 생각하는 고구려를 칠 기회를 노리고 있으니 고구려는 단군 조선의 대통을 이어 중원 고토 회복을 열망하고 있으나 지난날 대단군 조선 제국이 팔굉(八紘)을 집을 삼고 九桓을 관장한 것은 그것이 병마로서 마상에서 무력으로 복속케 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아들로서 삼신의 점지를 받아 이 세상에 하강 하사 만민을 통치한다는 종교적 교리로서 중원의 황하 이북, 이동, 요동, 요서, 만주의 열국(列國)들을 총괄 한 것인바 이제 고구려가 비록 단군 天王位를 계승한 天子라고 하나 열국 제후 들이 단군 제국의 옛 종교적 종주로 고구려에 추종하지 아니하고 중원의 상당수 동이족이 살아남기 위해 한족에 동화하고 계속 그러한 상태에 놓여 있으니 고구려의 그러한 노력은 중원에서 한족은 조선의 失地 회복이 아닌 침략으로 간주하기에 이른 것이다. 그러나 단군 대제국이래 계속되어 온 三神祭는 민족 종교로서 계승 되었고 불교가 들어온 후에도 사찰을 건립하면 三神堂을 따로이 축조하여 공양하였으니, 그것은 석가모니도 하느님의 뜻으로 세상을 구제(救濟)하기 위해 三神이 점지 하사 이 세상에 태어난 것으로 인식된 것으로 해석된다.
그러므로 해모수가 천재의 아들로서 이 세상에 태어났다는 四月 初八日을 석가모니 탄일로 기념하고 사찰에 부처님을 모시는 큰 건물을 환웅(桓雄)의 집이라 하여 大雄殿(대웅전)이라 하였다. 이것은 단군古記이며 불전의 기록은 아니다. 그러나 四月 八日의 석가모니 탄신일 기념은 우리 나라 뿐이며 출생지인 인도에도 그러하지 않다 일본에서도 우리 나라의 神宮制度(신궁제도 신라 소지마입간王九年二月置神宮於寮乙 史記新羅本紀)와 같이 신궁을 세우고 제사를 올리는데 지금도 그의 식은 고대三神祭儀式과 거의 동일하다 신라는 선조王을 모신 신궁에 王이 친히 제사를 올렸는데(十七年春正月王親祀神宮王) 지금 일본도 이와 같이 하고 있다. 古代 우리 나라 三國王室과 日本 王室의 연고를 연상케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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