二十三. 百濟 건국과 위(魏)와 전쟁 공손도(公孫度)의 온조(溫祚)지원
요동 요서 정세에 관하여 여기 추모王의 전처 예씨와 아들 유리의 출현은 서소노비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서소노비는 자기의 아들이 王位를 이을 것으로 믿고 있다가 첫째, 소생 유타를 太子로 봉하니 추모王의 공명정대하고 추호도 속일 줄 모르는 고매한 성품은 의심의 여지가 없이 온조와 비류를 맡겨 부족함이 없으나, 太子유타가 어떠할 지 정권 분쟁은 친형제도 믿을 수 없는 것인데 자기 아들이 어찌 될지 불안하였다. 서소노는 추모王과 의논하여 적당한 지역에 王국을 건설하여 자립하도록 한다는데 의견을 모았다. 그리하여 서소노는 많은 재물과 두 아들을 데리고 전부터 무역으로 연고가 있는 동이족이 모여 사는 요서창예로 건너가서 재물을 헐어 정착지를 확보하고 인재를 모았다. 오간(烏干) 마예(馬예) 등 十여명의 (賢臣) 어진 신하들은 건국에 힘을 모아 옛날에 부여王이 庶子 위구대에게 물려주었던 한 地方 인근 추장들을 통합하고 세를 확장한 후 대방 지경에 이르러 나라를 세워 백제라 하였다. 서소노의 두 아들 중 비류는 이곳 대방이 건국의 適地가 아니라고 다른곳을 찾아 떠나고 온조가 혹은 그 아들이 백제王에 즉위 하였다. 고구려 건국보다 약 七·八十年후로 추측된다.北史에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東明至夫余而王至仇台篤始立國於帶方遼東公孫度以女妻之遂爲東夷强國初以百家濟因號百濟(서소노가 부여에 와서 대방에 나라를 세워 요동 공손도의 여식에게 아들이 장가를 가서 동이족의 강한 나라가 되었다. 처음 百가구가 왔다 하여 백제국이라 불렀다.) 이 때는 백제 전국이 요하서남의 대방군이며 중원하남에 천도한 것은 한영왕(漢靈王)시대이다. 여기 東明이란 서소노를 일컫는 것이고 구대독은 온조의 생정(生庭)三寸 혹은 五寸일 것이다. 구대(仇台)氏는 서소노의 全亡 夫姓이다. 이와 같이 요동에 강력한 군사력을 편성하여 하남 위례성(河南慰禮城) 위례성은 어디서 나온 것을 삼국사기에 기록한 것인지 확인 할 수 없음)을 공략(攻略)하니 당시 漢은 동이족의 하남지역 침공이 끊이지 아니하여 거기에 대비하는 재정 지출이 막대하였으나 하남을 수복하지 못하였다.(夫不息無寇而戒爲費漸多河南非復國有褐虜難宋書) 고죽은 하남군 광역 지경이다. 하남의 개봉중모양무 산조권은 모두 위나라 땅이다라고 하였으니, 한편 위가 백제와 싸워 하남에서 이기지 못하였다는 위지의 기록으로 보아 상기한 것은 일부는 위가 회복 점유한 것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河南一之開封中牟陽武酸棗卷皆魏地) 개봉은 중원의 요지로서 백제의 하남은 위 나라의 개봉부와 접견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河南은 東南쪽에 있다.
이것으로 보아 백제가 창예에서 하남에 입국하는 데는 한과 상당한 전쟁을 치른 끝에 천도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서소노의 아들 온조가 요서에 가서 건국한 것은 물론 공손도의 도움이다. 그의 아비 위구대가 건국한 곳은 하남이 아니다. 魏元嘉 六년 七月에 백제는 위나라에 사신을 보냈으며 十二月에는 이웃에 있는 서하국과 하남국이 함께 사신을 보냈다. (魏元嘉六年七月百濟國遺使來貢 十二月西河 河南國遺使來貢魏志) 서하국은 선비 지유의 자손이고 하남국은 선비 모용혁락의 자손이다. 두 나라가 모두 중원의 東北으로 통하는 진농의 옛 유사의 땅이다. (西河者鮮卑祉兪之後也河南者其先亦鮮卑慕容奕洛于之後也二國皆東北通秦?古流沙之地焉, 漢魏叢書) 유사란 하남의 옛 명칭이며 선비는 고려 별종 혹은 부여 별종이라 하였으니 모용혁락은 부여 天子의 형제들로 보인다. 서하국에 관하여 자세한 우리 나라 역사 기록이 없으나 그 위치(位置)는 중원 山西 大同府의 大同江 하류이고 北京 南北쪽이고 東은 백제의 河南과 접경한 역시 부여족의 나라이니 안컨데 한무왕 중기 고구려가 中原北部를 점거하고 위세를 떨치던 때에 그 일익을 담당한 후, 백제의 옆에 하서 四郡을 점령하여 西河국을 창업한 부여족이다. 때에 한(漢)은 東夷 조선의 중원 북부 지역 점거에 대하여 화전(和戰) 양론이 분분하였다. 漢의 낙농후 장궁과 양허후 마무등이 표를 올려 가라대 고구려 오환 선비(高句麗烏丸鮮卑)는 모두 부여 출신이다.
흉노의 위쪽에서 河西四郡을 공격하고 또한 동이족이 右측을 공격하니 北녘 오랑캐를 멸한지 불과 몇년사이 또 이러한 사태가 일어나니 이것은 폐하께서 그들에게 은혜로서 베푸는 결과이옵니다. 신등이 정책을 펴 나가는데는 萬世에 공을 세워 비석에 새겨 둘 일을 아니함은 후세에 의아(疑訝)해 할 것이옵니다 하였다.(高句麗烏丸鮮卑攻其左發河西四郡天水?西姜胡擊其右如此北虜之滅不過數年臣恐陛下仁恩不忍謀臣孤疑令萬世刻石之功不立於聖世, 鑑易)漢王의 답하는 조서에 가라대 황석공기에 (한고왕의 一등공신 장자방에게 황석공이 건너 준 처세 철학과 병서를 겸한 책) 가라대 유한 것으로 강한 것을 제어하고 약한 것으로 강함을 능히 제어하고 가까운 것을 버리고 먼 것을 도모하면 수고롭고 공은 없으니 먼 것을 버리고 가까운 것을 도모하면 빨리 끝나는 것이라, 그럼으로 넓은 땅을 관할하면 거치르고 널리 덕을 베푸는 자는 강함을 가지는 것이라 하였나니 군사를 거두고 백성을 편하게 할 것인즉, 적을 치는 것은 그 때(時)가 아니면 軍事 행동은 쉬는 것이 좋다 하였다.
이것은 적이 유연하지 못하고 강함을 믿고 영토를 강점하면 언젠가는 망하는 것이니 강함을 뽐내면 반드시 변란이 생기는 것이니 그 때에 치면 성공한다는 것이다 하였다. 이와 같은 王의 교시를 듣고 군신은 다시 병사를 거론하지 아니하였다. 요컨대 한은 백제의 하남과 서하국 四주를 공략할 능력이 없었으며 위王조조는 한나라 사직을 찬탈하기 위하여 오히려 도움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전술한 바와 같이 위나라가 집권한후 백제와 하서국은 위나라에 친선 사절을 보냈다. 거기 조공했다는 것은 물론 과장이다. 하서국에 관하여는 우리 나라 역사의 현재 알려진 기록에서는 빠져 있고 옛 古史는 보전 된 것이 없으니 그 내력을 알 수 없으나, 옛날 중원 북부에 있던 고리국을 통치한 부여족이 고리국 망할 적에 해모수 해부루 등 일족은 만주로 후퇴하고 일부 제후는 그곳에 남아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우리 나라 三國史記는 많은 오류가 있음이 인정되나 거기에 겹쳐 식민 사관의 여독은 그 자체를 왜곡하고 있다.
김부식은 하남을 조선 반도에 갔다 놓치는 아니 하였다. 그러한 흔적은 없음에도 불구하고 식민 사관은 하남을 조선 반도에 갔다 놓고 반도에는 없는 지명을 조작하였다. 비류와 온조가 한반도 전라도 땅에 가서 나라를 세웠다면 그곳에 나라가 될 만한 인구가 살고 있어야 하고 인구가 있었다면 나라가 있었을 것인즉, 몇 사람 혹은 몇 十명 몇 百명이 가서 그 나라를 차지할 수 있으랴. 三國史記에 비류 온조가 가서 나라를 세웠다고 하였지, 조선 반도 전라도로 갔다고는 하지 아니 하였으며, 분명 하남(河南)이라고 지명을 명시하고 있다.
그 시대 고대 가야국이 南쪽에 있었는데 北쪽에 인구가 있었다면 가야의 영지일 것이고 신라 건국 百餘年前 일 것이다. 전술한 바와 같이 부여王의 서자이고 해모수의 庶동생 혹은 손자벌 되는 위구대가 父祖王의 지원으로 나라를 창업하려다가 죽고, 그 후에 서소노가 비류 온조를 데리고 와서 온조의 아들은 공손도의 딸에게 장가가서 그곳에서 강국이 되었다.(百濟者其先東 三韓國中諸小國之一也後偉强大魏志) 그 후 약 二百年 후인 위나라 조조의 손자 위王 조예 시대에 하남을 회복코저 북녘 여러 軍도독에게 명하여 北녘을 공략하였다. 그러나 書典에 가라대 위군에 항거하였다고 했으니 스스로 고수(固守)하여 이기지 못했다는 뜻이다, 라고 하였고 위나라 군은 三十여회나 싸워서 많이 이겼으나 역성(歷城)까지 가서 군량이 떨어졌다 하였으며(역성은 백제의 월주(지금의 상해) 지경이다.) 이로서 위가 중원을 평정하였다 하고 위가 하남을 평정 했다 하나 江위쪽은 회복 할 수 없었다고 기록 하였다. (魏河南復爲 魏所克於是詔遣都督諸軍 北若地書曰拒魏師言苟自固守非制勝之詞也 魏師 三十余戰多捷軍至歷城資運竭書曰魏定河南言江左不能與爭也自是中原定於魏矣, 漢魏叢書)
서하국은 이때 망한 것일까 위나라는 백제가 도읍한 하남이 위의 경사(京師)에 너무 가까워 위협을 느꼈다. 그리하여 하남을 회복코자 거침없이 백제를 공격하였다. 그러나 백제에게 패하고 목적 달성을 못하였으니 당시 위나라 조예왕 시대에는 위나라의 전성시대이니 백제가 얼마나 강력하였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이때 요서(遼西)도 백제 영토이니 그리로 쫓아내고자 하였으나 백제는 단호히 항전하였다. 近哨 古王시대이다. 百濟국 年紀 축소로 약간 차이가 있음. 遼東太守(漢이 임의로 태수라 불렀으나 공손도(公孫度)자신은 연王이라 하였음. 사위가 되어 동이의 강국이 되었다고 漢書에도 기록되어 있다. 위는 유비가 건국한 후한의 서촉을 정복하였음으로 백제도 능히 정복할 수 있다고 자만 하였던 것이다. 온조 百濟王이 천도한 하남은 北平郡 여성현 서남 하구의 땅이며 지금의 산동 평주의 남쪽이며 기주의 북쪽 공부의 동쪽으로 해서 북해에서 바다로 들어가는 곳이니 하남은 서쪽으로 돌아서 갈석이 그 뒤에 있다 라고 하였다.(北平郡驪城縣西南河口之地今平州之南也冀州北方貢賦之東自北海人河南向西輾而碣石在其後, 碣石地志) (갈석은 월주의北 발해 창해가에 있다.)
그리고 공손도의 영지(領地)는 요동을 거점으로 청주에 이르러 청주 자사라고도 하고 발해 건너 여러郡을 차지하고 요동의 조선 영토와 청주 지경으로 역시 그곳은 조선의 너른 땅이다. 설씨 가라대 지금의 등주 땅 내이내산의 동이 재 나라후가 있고 내인 즉 지금의 내주의 땅으로 목축업을 한다. 하여 목이인 이라 하고 목축을 생업으로 한다 하였다.(公孫度據遼東自號靑州刺史越海而有諸郡遼東朝鮮皆其地廣?寓夷薛氏曰今登州之地萊夷萊山之夷齊有萊候萊人卽今萊之地作牧者言可 收牧夷人以蓄牧爲生也, 漢地理志) 처음 서소노가 두 아들을 데리고 출발 할 적에 一족 백戶를 이끌고 扶余王을 찾아갔다. 처음 百家즉 백가구가 와서 나라를 세워서 백제라고 하였다. 라고 北史에 기록되어 있다. 추모王은 숙진말갈 예맥 걸안 등 여러 종족을 융합하였고 분립한 중원에서 백제의 창업을 돕는 공손씨에 관하여 살펴본다. 옛고리국 열후인 동이족으로 요동 요서 일대에 근거지를 두고 있던 公孫度는 부여王 해모수의 아들 혹은 족하 위구대(尉仇台) 고구려 주몽천왕과는 이복형제 뻘이고 그 아들 즉 서소노의 아들인 온조(溫祚)의 아들을 사위로 삼았다. 그리하여 부여王으로부터 물려받은 요동의 小國 백제를 하남(河南)으로 옮겨 위례성에 도읍을 정하였다. 하남 천도를 한 백제왕이 온조의 손자인가 한다.
위례성은 百濟의 수도권에 있는 北京 西南의 慰縣과 ?水의 머리字를 따서 그렇게 한것이 아닌가 한다. 그리고 하남은 공손도의 오랜 영토로서 西漢말기에 한(漢)과 다년간 싸워 영유한 곳이다. 부여와 공손씨의 합작은 연王과 백제가 다같이 강국으로 부상하고 연王 공손도의 위엄과 덕망은 해내위에 떨쳐 중국인도 유명 인사들이 다수 피난 와서 공손씨에게 귀의하였다. 그 중에는 북해 태수 영병원 왕열등도 와서 귀의하였다.(公孫度威行海外中國人士避亂者多數之北海官寗?原王烈適遼東 綱易) 북해는 산동이다. 백제가 본거지 하남과 요서에서 멀리 월주(上海지역)까지 뻗친 것은 공손도의 손자 공손연이 죽고 그 영토를 인수 한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백제가 중원에서 강국으로 등장했다는 기록은 있으나 지난날 중원에서 패권을 다투던 조조 유비 손권의 각축지였던 월주를 백제가 직접 약취한 기록은 없다.
공손도는 동이 군자로서 학문이 깊고 인후 관대하여 남과 다투지 아니하고 남을 돕는 것을 좋아하고 중국인 유명 인사들과도 널리 사귀었다. 때에 한나라에서는 동탁이 왕권을 장악하고 반대파의 원소 원술을 토벌하고 있었다. 원소는 동탁과 싸우고 있는 강남 손권의 본거지 양성을 대장 주앙(周昻)을 보내서 공탈 하였다. 이에 四寸 동생 원술은 공손氏에게 원조를 청하였다. 공손도는 원소 원술의 인간 됨이 옳지 못하다 하여 이를 거부코자 하였으나 문중의 당내 공손찬이 원술과의 지난 교분을 생각하여 동생 공손월을 구원사로 특파하였다. 공손월은 군사를 이끌고 가서 손권을 도와 주앙을 공격 하다가 화살에 맞아 전사하였다. 이에 공손찬은 원소로 인하여 아우가 죽었다. 하고 크게 노하여 大軍을 일으켜 원소를 공격하여 기주 제성(冀州 諸城)을 공략하였다. 공손찬도 인망이 높은 동이 족의 군자지풍을 갖춘 현인이었다.
이로 인하여 원소는 본거지를 잃고 조조에게 패망하였다. 탁군에 유비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이 사람은 한 경왕(景王)의 여덟째 아들의 후예로서 인품이 인후하고 기우 헌앙 하며 귀가 커서 스스로 돌아볼 수 있는 인물로서 후에 조조가 대이적(大耳賊)이라고 욕하였다. 어릴 적에 공손찬과 함께 노식(盧植) 선생의 문하에서 학문을 닦았다. 노식은 동이 족이라도 유비가 거기서 학문을 배운 것은 그 당시 조선 사람과 한나라 사람이 함께 東北중원에서 혼거 하였기에 공손찬과 함께 수학할 수 있도록 언어가 통 하였다. 이러한 인연으로 유비는 어려운 시기에 공손찬에게 의지하고 있었다. 어느 날 공손찬의 관역 상산군(常山郡)의 수장 조운(趙雲)이라는 장수가 군사를 이끌고 공손찬에게 배알하였다. 여기서 유비는 조운의 행동 거지와 인물됨을 자세히 살펴보고 한눈에 반하였다. 은근히 친절을 베풀면서 그에게 접근하였다.
그가 한인으로서 조선국(동이족)의 장수로 있었는지 조선족인지 당시 상산은 백제 영토였으니 이상하게 여겨 설득 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여러모로 의논하였다. 그리고 장차 대사를 도모 하고저 한다는 희망을 피력하고 대장부 어찌 이런 한 지방에서 주저앉을 수 있겠느냐 하고 극역함에 대사를 도모하자고 역설하였다. 이에 조운이 응낙하고 유비를 따르기로 하였다. 그의 자는 자룡으로 훗일 위나라 조조와의 싸움에서 상산 조자룡 이라는 명장으로 조조군을 놀라게 하였던 장수이다. 공손찬은 큰 뜻을 펴겠다는 그를 막지 아니 하였다. 한편 공손도에게 귀의한 많은 중국인 名士중에 영병 원왕과 화흠(華歆)세 사람은 어떤 인물인가 이들은 모두 공손도와 품성이 상통하였다. 영은 젊은 시절 화흠과 친구 사이로 지내 왔었다. 한 번은 두 사람이 함께 밭에서 괭이질을 하고 있었다. 거기에 금덩이가 하나 발견되었다.
영은 그것을 보고도 그냥 지나쳤다. 그러자 화흠이 그것 금덩이 아니냐고 주워서 보고 그대로 버렸다. 사람들은 그것을 듣고 두 사람의 우열을 가렸다. 병영은 항상 공손도에게 말하였다. 경전(經典)은 세상사 시국 문제에는 어려움을 해쳐 나가는 학문의 경지에는 미치지 못하는 것인데 원왕열은 성격이 너무 곧아 청이 결백한 특이한 품성이라 물 속에 잠겨 있는 용은 눈에 보이지 아니하여도 성덕(成德)이 있으니 때가 아니라고 가만히 있으면 이것은 모두 장차 화를 부르는 것이라 하였다. 그러다가 그는 도망가 버렸다. 공손도는 그를 쫓지 아니하고 그대로 보냈다. 공손도는 능히 대군을 일으켜 天下를 다툴 수 있는 처지인데도 백성의 살상을 피하여 덕으로 다스리고자 하여도, 그것은 난세 영웅의 길이 아님으로 자멸의 길이 될 수 있어도 그는 조선 족의 군자 도덕성을 고수하였다. 영은 달아나서 원소의 막료로 있다가 원소에게 한실에 거역하는 것은 옳지 못한 배신이라 바른 소리로 간하다가 처형당하였다.
원왕열은 항상 사람은 선도하면 쓸모 있는 것이라 하여 인심이 흉흉한 난세에 공손도에게 의지하여 있으면서도 난민을 구호하고 선도하는데 힘을 기울였다. 그리하여 인근에 덕망이 높았다.한 번은 소 도둑질한 자가 잡혀 왔다. 관가에 취조를 하니 도둑이 말하기를 죽을죄를 지었으니 달게 형벌을 받겠습니다. 다만 이 일을 원왕열 大人에게 알리지 말고 처리해 주시기 바랍니다 라고 간청하였다. 조사관은 귀이히 여겨 원왕렬에게 전후사를 고하였다. 이에 원왕열은 포목 한 필을 주어 석방하였다. 도둑은 더욱 원왕렬의 인덕에 감복하였다. 주위에서 귀이하여 원왕열에게 물었다. 도적을 처벌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벼필을 주어 석방하니 무슨 연고입니까 하니 원왕열이 말하기를 도적이 그 죄를 부끄러워 나에게 알리지 말라고 한 것은 이미 깊이 뉘우치고 있습이다. 그의 마음을 돌려 선행토록 한 것이로다 하였다.
후에 한 노인이 길 가다가 가는 곳에 도착하여 보니 보검을 중도에서 빠트린 것을 알았다. 노인은 볼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며 보검 잃은 것이 몹시 아쉬웠다. 이미 날이 늦었는데 한사람이 길가에 섰는데 보니 거기 그 칼이 땅에 떨어져 있었다. 그 사람은 길 가다가 그 칼을 보고 칼 잃은 주인이 돌아오도록 종일 지키고 있었던 것이다. 노인은 그런 일이 있었다는 것을 원왕열에게 고하였다. 원왕렬은 사람을 시켜 어떤 사람인가 알아보았더니 전에 소도둑이었다. 사람들이 다툼이 있어 관가에 소송하러 가다가 원왕열을 만나기 부끄러워 뒤돌아 가고 혹은 가서도 서로 미루고 감히 원왕열에게 묻지 못하고 되돌아가서 화해하였다.
원앙열의 민원 처리가 이같이 공정 무사 하니 소송 사건이 거의 없었다. 공손도는 원왕열을 장사에 임명하였으나 열은 굳이 사양하고 그곳을 떠나서 시중에 장사꾼으로 연명하고 정승 벼슬을 마다하였다. 추측컨대 공손도와 같은 인현군자는 난세에 나라를 지킬 수 없을 것으로 생각하고 그렇다고 패자의 길을 택하기에는 피차 천성에 맞지 아니하니 그곳을 떠났음이 아닌가 한다. 위지(魏志)에 의하면 위구대가 죽고 三世 의려代에 와서 같은 동이 족인 모용귀(慕容?)의 공격으로 나라가 亡하고 王은 자살하였다. 그로부터 백제의 나라이름은 모두 없어졌다. 백제가 망할 적에 王실의 一족이 모두 옥저 (沃沮)나라로 달아났다.
그런데 진(晉)나라 이후부터는 옥저의 이름이 없어지고 백제의 나라가 다시 등장한다. 미루어 보건대 백제의 유민은 옥저와 합하여 다시 백제국을 회복 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하여 백제와 고구려는 二百年간 중원에게 병입하였다. 라고 수사(隋史)에 있다. 동진 (東晋) 시대에 고구려는 요동을 점유하였고 백제는 요서를 점거하고 있었다.(東晋世高麗崙有遼東百濟亦據有遼西姚察書) 이런 것으로 보아 百濟는 一단 모용귀에게 패망하였다가 옥저 후(沃溫後)옥저후는 해모수의 아들이니 여기서는 온조의 三寸인지 할아버지뻘인지 不明에게 의지하여 다시 힘을 합쳐 나라를 회복하였던 것으로 추정한다. 원래 옥저는 요서의 한 지방을 점유하였을 뿐인데 百濟와 합병하여 큰 나라를 이룬 것이다. 이상은 필자가 진서, 위서, 송서, 수서, 북사, 한서 등의 기록을 그대로 정리한 것이고 原文수식은 아니하였다. 참고로 百濟가 영유한 요서가 얼마나 큰가. 여기 지도를 참고하거니와 오월 춘추에 백제의 중원 서해 북쪽 영토는 서쪽은 월주 즉(지금의 상해 北지방)에 이르고 옛 월나라의 주위 千里의 땅이 모두 백제땅이라 하였다. 中原에서 오호(五胡 十六국 시대를 연 주류(主流) 민족이 부여족이니 백제의 옛 모습을 알 수 있다.
高句麗, 百濟, 河西國 公孫度, 領土 地圖
백제의 영토는 하남에서 월주에 이르는 수천리의 긴 영토이다. 월주는 원래 온조의 처가인 공손도의 영토였다. 위 나라가 백제를 공격할 적에 월주의 역성까지 진격하였다가 군량이 떨어졌다. 하고 싸움에 대하여는 그 이상 기록하지 아니하였다. 여기 관하여 수용문왕통경(隋龍文王通經)에 기록은 다음과 같다. 전에 가라대 위군이 역성에 가서 양식이 떨어져 밤에 모래를 쌓아서 곡식 같이 해 두고 군량이 풍족하여 여유가 있다고 하고 도망갔다하고 위군이 패주한 사실을 폭노하였다. (歷城資運竭夜晶籌量沙以爲未魏人謂資糧有余緩之乃돈歸)
근간 일간 신문지상에 실린 기사에 지난이차 대전 당시 대한민국 임시 정부 김구주석이 중국 장개석 총통과 만난 자리에서 장총통이 자기는 절강성이 고향이라 하고 옛날에는 거기가 백제 였다고 하기에 김주석은 자기나라의 그러한 역사를 몰랐든것을 매우 부끄럽게 여겼다고 후일 술회했다는 기사를 보고 중국인 지도층 인사는 우리의 고대사를 잘 알고 있음을 인식한다. 여기 東明王이 부여에 이르르고 仇台代에 이르러 입국했다고 했으니 백제를 입국한 위구대는 추모王의 아들은 아님이 분명하나 서소노의 아들 비류 온조와의 사이가 삼촌간인지, 손자간인지, 규명할 수가 없다. 다만 분명한 것은 전술한 고추모(周夢)의 건국이 서한 초기 일진데 한반도에는 인구 희소하고 개간되지 않는 산악 지대로 나라를 세울 땅도 사람도 거의 없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하남이니 위례성이니 하는 지명도 물론 없었다. 아마도 신라가 건국한 세기(世紀)초에 이르러서야 만 건국이 가능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이시기도 지명 같은 것은 없고 주민이 모여 사는 부락에 우리 동이족의 古語 명칭이 약간 있었다.
신라의 수도 경주도 그 시대는 서라벌로 호칭하고 경주는 신라 중기후 당나라의 慶州를 본따서 부친 것이다. 신라와 당이 백제와 싸울 때에도 신라에는 경주라는 地名은 없고 금성(金城)이라고 임의로 호칭 한 것으로 서 금성이란 염은 성 즉 수도의 대명사이다. 우리 동이 족의 지명 인명이 중국식으로 바뀐 것은 신라 통일 후기부터 이조 末까지의 오랜 세월을 거처 이루어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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