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사이트에 kingstone91님, 이희석님, 신선님 등 여러분이 만주원류고 파일을 올려 주셨으나,
아직 한글로 번역이 안되어 여러분이 활용을 못하고 있는것을 늘 안타깝게 여겨왔습니다.
제 한문실력이 번역을 하기에는 무리라서 망설이고 있다가,
일단 초역을 올리면 회원 여러분이 도와주실 것으로 믿고 일부 번역을 시도해 보았습니다.
우선 논란이 많은 신라부분을 선택하여 번역을 해 보겠습니다.
ms word로 된 파일을 근거로 ms word로 작성하였습니다.
원문에서 뜻이 잘 통하지 않는 부분은 국사편찬위원회의 중국정사 번역문과 삼국사기(이재호 옮김, 솔)
를 참고하였음을 밝혀 둡니다.
원문은 모두 뛰어쓰기가 되어 있지 아니하지만, 본 번역문에서는 제가 번역을 하는데 편리하도록
임의로 띄어쓰기를 하였습니다.
저의 번역이 이 사이트 운영자이신 신완순님과 송준희님의 노고에 조그만 보답이 되었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번역문에 사용된 부호중 < >는 관직명칭에, { }는 제가 뜻이 통하게 첨가한 글이며, ( )는 원문에 있는
지은이의 설명문입니다.
혹시 이 사이트에 올려진 번역문을 퍼 가는 분은 반드시 coo2.net에서 인용한 사실과 번역자가 백송임을
밝혀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한꺼번에 여러페이지를 올리면 읽기 지루하기에 조금씩 나누어서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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欽定滿洲源流考卷四(흠정만주원류고 권4)
部族 부족
新羅(一作斯盧 一作新盧雞林附) 신라(사로 또는 신로 계림부로 쓴다)
三國(삼국시대)
三國志魏書 辰韓(另條見前)十二國 有斯盧國 通典 新羅國 魏時新盧國 其先本辰韓 辰韓始有六國 稍分為
十二 新羅其一也 魏将毌丘儉 討髙麗破之 髙麗王奔沃沮 其後復歸故國 留者遂為新羅焉
『삼국지 위서三國志魏書』에는 “진한辰韓 (다른 조에서 이미 보았음) 12국에 사로국이 있다.”고 되어
있다. 『통전通典』에는 “신라국은 위魏라때 신로국新盧國으로 기록되었고, 그 선조는 본래 진한辰韓 이다.
진한辰韓 은 처음에 6국이었는데 점차 나누어져서 12국이 되었다. 신라는 그 중의 하나이다. 위魏나라
장수 관구검毌丘儉이 고구려를 쳐서 이기자 고구려왕은 옥저沃沮로 달아났다. 그 뒤에 옛나라로
돌아왔으나 남은 사람들이 신라를 세웠다.”고 되어 있다.
通考 新羅國 在百濟東南 五百餘里 (亦在 髙麗東南 兼有 漢時 樂浪郡之地)初曰新盧 或曰新羅 東濵大海
魏毌丘儉破髙麗 奔沃沮 其後復歸故國 留者遂為新羅 故其人雜有華夏 髙麗百濟之屬 兼有沃沮
不耐韓濊之地 其王本百濟人 自海入新羅 遂王其國
『통고通考』에는 “신라국은 백제 동남 5백여리에 있다.(또한 고구려 동남에 있고, 한나라 때의 낙랑군
땅을 차지하고 있다), 초기에 신로 또는 신라로 불렀다. 동쪽 끝은 대해이다. 위魏의 관구검이 고구려를
쳐부수자 옥저로 달아났다. 그 뒤에 옛나라로 돌아왔으나 남은 사람들이 신라를 세웠다.
그래서 그 나라 사람들은 화하 華夏 고구려 백제 사람이 섞여 있다. 옥저沃沮 불내不耐 한韓 예濊의 땅을
차지하고 있다. 그 왕은 본래 백제인인데 바다를 통해 신라로 들어와 그나라 왕이 되었다.”고 되어 있다.
晉(진대)
前秦錄 新羅 在百濟東 符堅建元十六年 符洛反 遣使徴兵 於百濟新羅等國 並不從 秦書 符堅建元十八年
新羅國王 樓寒(按 蒙古語 謂 龍曰婁 寒字 當即 汗音之訛)遣使朝獻 通志 新羅國 在百濟東南 五百餘里
東濵大海 其王本百濟人 自海入新羅 遂王 其地其國 初附屬于百濟 後因百濟伐髙麗 人不堪戎役 相率歸之
遂致强盛 因襲 伽羅 任那 諸國滅之 其西北界 出髙麗之間 先是其國小 不能自通 符堅時 其王樓寒
遣使衞頭朝貢 堅曰卿言 海東之事 與古不同 何也 對曰 亦猶 中國時代變革 名號改易今焉 得同
『전진록前秦錄』에는 “신라는 백제의 동쪽에 있다. 부견符堅 건원建元 16년 부락符洛이 반란을
일으키자 사신을 보내 백제, 신라 등의 나라에 군사를 요청하였는데 모두 따르지 않았다”고 되어 있다.
『진서秦書』에는 “부견 건원 18년 신라국왕 루한樓寒 (살피건대 몽골어로 용龍을 누婁라 하는데
한寒은 곧 칸汗의 발음을 다르게 적은 것이다.)이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고 되어 있다.
『통지通志』에는 “신라국은 백제 동남 5백여리에 있다. 동쪽끝은 대해이다. 그 왕은 본래 백제인으로
바다를 통해 신라로 들어와 왕이 되었다. 그 영토와 나라는 초기에 백제에 부속되었다. 뒤에 백제가
고구려를 칠 때 사람들이 노역을 참지 못해 서로 가솔을 이끌고 신라로 들어와서 드디어 강성해지자,
가라伽羅 임나 任那 등 여러 나라를 쳐서 없앴다.
그 서북 경계는 고구려 사이로 튀어 나왔다. 일찍이 그 나라가 작아서 스스로 {진나라와} 통할 수
없었다. 부견符堅때에 그 왕 누한樓寒이 사신 위두衞頭를 보내 조공을 하니, 부견이 말하길 “그대는
해동의 일이 옛날과 같지 않다고 말하는데 어찌된 일이오?” {위두가} “중국 또한 시대에 따라 변혁이
일어나며 나라와 율령이 바뀌는 것과 같습니다” 라고 대답하였다.
南北朝(남북조 시대)
宋書 元嘉二年 倭國 遣使 自稱 使持節 都督 倭百濟新羅 任那秦韓 慕韓六國 諸軍事 (按 宋書 無新羅傳
其名 但見 于倭國傳中 南齊書同) 通志 新羅 魏時 新盧國也 宋時 曰新羅 或曰斯羅
『송서(宋書) 』에는 “원가元嘉 2년 왜국이 사신을 보내면서 자칭 <사지절 도독 왜 백제 신라 임나 진한
모한 6국 제군사>라고 하였다.(살피건대 송서에는 신라전이 없다. 그 이름은 단지 왜국전에 보이는데
남제서와 같다)”고 되어 있다.
『통지(通志) 』에는 “신라는 위(魏)나라때 신로국으로 기록되었다. 송나라때 신라 혹은 사라斯羅로
불렀다”고 되어 있다.
梁書 新羅者 其先本辰韓也 辰韓亦曰秦韓 相去萬里 傳言 秦人避役 來適馬韓(另條見前) 馬韓 割其東界居之
辰韓始有六國 稍分為十二 新羅其一也 其國在百濟 東南 東濵大海 南北與句驪 百濟接 魏時 曰新盧
宋時曰新羅 或曰 斯羅(南史同) 國小 不能 自通使聘 普通二年 王名 募秦(按 南史 通志 太平御覽
皆作姓慕 名秦 通考 引梁史 亦同且云 未詳 易姓之由 新羅 金姓相承已久 不應于梁時 忽稱 姓慕 考
中國人本稱秦人 此慕秦二字 當為書語 非姓名也) 始使使 隨百濟 奉方物
『양서(梁書) 』에는 “신라는 본래 그 선조가 진한辰韓이다. 진한辰韓은 또한 진한秦韓으로도 부른다.
{양나라와} 서로 만리가 떨어져 있다. 전하는 말에 따르면 진秦나라 사람들이 부역을 피해 마한
(다른조에서 이미 보았다)에 찾아오자, 마한은 그 사람들에게 동쪽땅을 떼어 주어 살게 하였다.
진한辰韓은 처음에 6개국이었는데 점차 갈라져 12개국이 되었다. 신라는 그 중 하나이다.
그 나라는 백제의 동남에 있다. 동쪽 끝은 대해이다. 남과 북은 고구려 백제와 접한다. 위魏나라 때는
신로, 송宋나라 때는 신라 혹은 사라(남사와 같다)로 불렀다. 나라가 작아서 스스로 사신을 보내 조빙할
수 없었다. 보통普通 2년 이름이 <모진募秦 >인 왕(살피건대 남사 통지 태평어람 모두 성이 <모慕>,
이름이 <진秦>으로 기록되어 있다. 통고 通考 에는 양사梁史를 인용하면서 ‘또한 이와 같다’ 라고
하였는데, 성이 바뀐 연유를 자세히 모르겠다.
신라는 <김>씨가 왕위를 계승한지 오래되었는데, 양나라에 이르러 갑자기 성을 <모慕>이라 하니,
고찰해 보건대 중국인을 본래 진인秦人이라 부르는데 이 <모진慕秦> 두 글자는 책에서 그렇게 되어 있으나 당연히 성명은 아니다)이 처음으로 백제를 따라 사신과 방물을 보냈다.”고 되어 있다.
陳書本紀 廢帝光大 二年六月 新羅國 遣使獻方物 宣帝太建 二年六月 三年五月 十年七月 並遣使 獻方物
南史 新羅在 百濟東南五十餘里 其地東濵大海 南北與句麗 百濟接
册府元龜 北齊 河清四年 詔 以新羅國王 金真興 為 使持節 領東夷校尉 樂浪郡公 新羅王 自河清三年
至武平四年 並遣使 朝貢
『진서 본기陳書 本紀 』에는 “폐제의 연호인 광대光大 2년 6월 신라국이 사신과 방물을 보냈다.
선제宣帝 태건太建 2년 6월, 3년 5월 10년 7월 또한 사신과 방물을 보냈다.”고 되어 있다.
『남사南史』에는 “신라는 백제의 동남 50여리에 있다. 그 영토는 동쪽끝이 대해이고, 남북은 고구려
백제와 접한다”고 되어 있다.
[역자 주] 만주원류고에는 “南史 新羅在 百濟東南 五十餘里”라고 되어 있으나, 국사편찬위원회의
중국정사 조선전 「남사南史」에는 “新羅,.. 在百濟東南 五千餘里” 즉, “신라는 백제의 동남쪽
오천여리에 있다”라고 다르게 기록되어 있다.
『책부원구册府元龜』에는 “북제 北齊 하청河清4년 조칙으로 신라국왕 김진흥 金真興 에게
<사지절 영동이교위 낙랑군공 신라왕>의 직함을 주었다. 하청河清3년부터 무평武平 4년에 이르기까지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고 되어 있다.
北史 百濟居漢時 樂浪地 或稱 魏將 毌丘儉 討髙麗破之 奔 沃沮 其後 復歸故國 有留者 遂為新羅 亦曰斯盧
其王本百濟人 自海入新羅 初附庸于百濟 百濟征髙麗 不堪戎役 民相率歸之 遂强盛 傳世三十 至真平
『북사北史』에는 “백제는 한漢나라 때의 낙랑땅에 있다.. 혹은 위나라 장수 <관구검毌丘儉>이
고구려를 쳐서 이기자 {왕이} 옥저로 날아났는데 그 후 옛 나라에 돌아왔으나, 남은 사람들은 신라
또는 사로를 세웠다. 그 왕은 본래 백제인으로 바다를 통해 신라에 들어왔다.
초기에는 백제에 부용되었는데 백제가 고구려를 정벌할 때 부역을 감당하지 못하여 백성들이 서로
이끌고 오니 점차 강성해졌다. 30대를 전하여 <진평真平>에 이르렀다.”고 되어 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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