隋(수나라 때) 大業以來 嵗遣朝貢 地多山險 雖與百濟搆隙 百濟亦 不能圖之 이르렀는 바, 개황開皇 14년 사신을 보내 조공하니, 고조가 진평真平 에게 <상개부 낙랑군공 신라왕> 의 직함을 주었다. 대업大業 이래 매년 조공을 하였다. 지형은 산이 많고 험하다. 김이다”라고 되어 있다. 地多山險 王姓金 貴人姓 朴 民無氏 有名 初百濟伐髙麗 來請救 悉兵往破之 自是相攻 不置 後獲百濟王殺之結怨滋深 쳐서 없앴다.(삼한의 땅도 함께였다.). 그 서북경계는 개이빨과 같이 고려와 백제 사이로 튀어 나왔다. 땅은 산이 많고 험하다. 왕은 성이 김씨이고 귀인의 성은 박씨이다. 백성은 성이 없고 이름만 있다. 공격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뒤에 백제왕을 붙잡아 죽이자 깊은 원수를 맺었다.”고 되어 있다. 武徳四年 王金真平 遣使朝貢 髙祖親勞問之 遣通直散騎侍郎 庾文素 往使焉 賜以 璽 書 及 畫屏風 錦綵三百段 自此 朝貢不絶 왕이 있는 곳을 금성金城이라 부르며 둘레가 7,8리이다. 지키는 군사가 3천명이다. 사자대獅子隊를 두었다. 무덕武徳 4년 그 왕 김진평이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고조는 친히 그 노고를 위로하였다. <통직산기시랑> 유문소庾文素를 사신으로 보내어 새서璽 書와 그림을 그린 병풍 그리고 비단 3백단을 주었다. 이로부터 조공이 끊어지지 않았다. 百濟往伐髙麗 詣新羅請救 新羅發兵 大破百濟國 因此為怨 每相攻伐 新羅得百濟王 殺之 怨由此始 七年 遣使册拜 金真平為 柱國 封樂浪郡王 新羅王 貞觀五年卒 無子 立其女 善徳為王 宗室大臣 乙祭(案 蒙古語 謂 全部之部 曰伊濟 與 乙祭音近) 總知國政 나라가 예로부터 원한이 많고 사이가 나빠서 서로 공격한다는 것을 듣고서, 사신에게 원한이 어떻게 생겼는지 물었다. 대답하길 “이전에 백제가 고려를 칠 때에, 조칙을 내려 신라에 지원을 요청하였습니다. 그런데 신라가 군사를 보내 백제를 크게 쳐 부쉈는데 이것이 원한이 되어 매번 서로 공격하였습니다. 신라가 백제왕을 사로잡아 죽였는데 그 원한의 유래가 이때부터 비롯되었습니다.” 라고 하였다. 몽골어로 전부의 부部를 이제 伊濟 라고 부르는데 을제乙祭와 발음이 가깝다)가 국정을 총괄하여 맡아 보았다. 乞偏師救助 太宗 遣相里元奨齎 璽書賜 髙麗不聴 太宗 将親伐髙麗 詔 新羅纂集 士馬 應接 大軍 新羅遣大臣 領兵五萬人 入髙麗南界 攻水口城降之 17년 사신을 보내 말하길 “고구려와 백제가 여러차례 공격하여 수십성을 잃었으니 군대를 보내 구원해 주십시요”라고 하였다. 태종이 <상리원장相里元奨>을 통해 새서璽書를 보냈으나 고구려가 듣지 않았다. (按 唐會要 以春秋 為真徳子 誤) 及 其子 文正(按 新書 作文王)來朝 詔授春秋 為特進 文正為左武衛将軍 春秋請 詣國學觀釋奠 及 講論 太宗 因賜以 所制温湯 及 晉祠碑 并 新撰 晉書 将歸國 令三品以上 宴餞之 그 여동생 진덕真徳을 왕으로 세웠다. 22년 진덕이 그 동생 국상 이찬伊贊의 아들 김춘추金春秋 (살피건대 「당회요」에는 춘추를 진덕의 아들이라 하였으나 잘못이다)와 그 아들 문정文正 (살피건대 신당서에는 문왕文王으로 되어 있다.)을 보내 수호하였다. 조칙을 내려 국학에서 석전과 강론하는 것을 볼 수 있도록 하였다. 태종은 직접 지은 온탕温湯과 진사비晉祠碑 및 새로 쓴 진서晉書를 주었다. 돌아가려고 할 때 3품 이상의 관리를 참석시키고 연회를 베풀었다. 遣春秋子 法敏是也) 帝嘉之拜 法敏為太府卿 五年 真徳卒 詔以 春秋嗣 立為王 加授 開府儀 同三司 樂浪郡王 六年 百濟 與髙麗 靺鞨率兵 侵其北界 攻陷 三十餘城 春秋 上表 求救 (살피건대 아래의 문장에서는 춘추가 죽자 그 아들 법민이 이었다고 되어있다. 여기서 弟자는 당연히 잘못이다. 신당서에 춘추의 아들 법민을 보냈다고 말한 것이 맞다) 조칙으로 춘추가 왕위를 잇게하고, 더하여 <개부의 동삼사 낙랑군왕 開府儀 同三司 樂浪郡王 >의 직함을 주었다. 6년 백제가 고구려 말갈과 함께 군사를 이끌고 그 북쪽 땅을 침범하여 30여 성을 함락하였다. 춘추가 구원을 요청하는 글을 보냈다. 新羅漸有 髙麗 百濟之地 其界益大 龍朔 元年 春秋卒 詔其子 太府卿 法敏 嗣位 為開府儀 同三司 上柱國 樂浪郡王 新羅王 거느리게 하였다. 또한 영을 내려 춘추春秋에게 <우이도 행군총관嵎夷道行軍總管>의 직함을 주어 정방定方과 함께 백제를 평정하게 하였다. 죽었다. 조칙으로 그 아들 <태부경> 법민法敏 이 뒤를 잇게 하고 <개부의 동삼사 상주국 낙랑군왕 신라왕 開府儀 同三司 上柱國 樂浪郡王 新羅王 >의 직함을 주었다. 與 靺鞨 故設 都督府 于此 俾王 領之 以重其鎮耳) 授法敏 為雞林州 都督 法敏 以 開耀 元年卒 其子 政明嗣位 垂拱 二年 遣使來朝 天授 三年(按 册府元龜 作長壽 二年) 政明卒 立其子 理洪為王 仍令 襲父 輔國大將軍 行豹韜衛大將軍 雞林州都督 理洪 以長安 二年卒 <길림吉林> 은 발음과 지리가 함께 부합한다. 이때 신라는 이미 백제 고구려의 땅과 말갈을 함께 아울렀다. 그래서 도독부를 설치한 것이다. 여기에서 <비왕俾王>이 다스리도록 하였는데 이것은 그 진鎮을 소중하게 여겼기 때문이다.) 법민法敏에게 <계림주도독雞林州都督>의 직함을 주었다. 수호하였다. 천수天授 3년(살피건대 책부원구 册府元龜 에는 장수長壽 2년으로 되어있다.) 정명政明이 죽었다. 그 아들 이홍理洪을 왕으로 세우고 영을 내려 아버지의 직함인 <보국대장군 행표도위 대장군 계림주 도독>을 잇게 하였다. 이홍理洪은 장안長安 2년에 죽었다. 雞林郡公為髙麗封號 葢新羅嗣王 既世襲 都督 雞林 遂為新羅之 通稱 迨渤海盛而 新羅偏 安南境 又 為髙麗所併 故髙麗 亦襲是 稱號 雖地非其舊 而 名仍 沿之耳) 호칭을 이어 받았다. (살피건대 요나라 송나라 이후 매번 계림雞林은 고려를 부르는 호칭이었다. 금나라 원나라때 또한 <계림군공 雞林郡公>은 고려왕의 봉호가 되었다. 흥성하자 신라는 남쪽경계로 밀려나 있다가 또 고려髙麗에 병합되었는데 그래서 고려 또한 이 호칭을 이어받았다. 비록 차지하는 땅은 그 옛날과 같지 않으나 이름은 그대로였다.) 為明皇初 即位 改元之號 其非 則天所改 益明葢 舊唐書記載 之 訛耳) 開元 二十一年 渤海 靺鞨 越海 入登州 時 興光 族人 金思蘭 先因 入朝 留京師 至是拜為 太僕員外卿 令歸國 發兵 以伐靺鞨 仍加授興光 寧海軍使 “흥광興光의 본명은 숭기崇基”로 되어 있는데 명황明皇과 같고 태종太宗이 아니다. 또한 선천先天은 명황이 초에 즉위하여 바꾼 연호이다. 그 이름을 바꾼 것이 측천則天이 아닌 것이 분명하다. 『구당서』 에 기재된 것은 잘못이다.) 일찍이 입조해 경사에 머물러 있었다. 이때에 김사란에게 <태복원외경>의 직함을 주고 귀국하여 군사를 일으켜 말갈을 쳐 부수도록 하였다. 또한 흥광興光에게 <영해군사>의 직함을 더하여 주었다.(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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