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역사 침탈(侵奪)

BC 28세기 요하문명의 濊貊族이 남하 하여 夏, 商, 周를 건국하면서 황하문명을 일구었으며, 鮮卑族이 秦, 漢, 隨, 唐을 건국했습니다. - 기본주제 참조

홍익인간·인류공영/3)韓族,가야,신라

만주원류고 번역(권4, 부족 신라-3회)

자연정화 2013. 9. 2. 20:29

二十五年 興光卒 贈太子太保 仍遣左贊善大夫 邢璹 往弔祭 并冊立 其子 承慶 上 謂璹 曰新羅號為

君子之國 卿到彼 宜 闡揚經典 使知儒教之盛 又 聞 其人 多善奕碁 因令善碁人 率府兵曹 楊季鷹

為璹之副

25년 흥광興光이 죽자 <태자태보太子太保>를 추증하였다. 이에 <좌찬선대부 左贊善大夫> 형숙邢璹을

 보내어 조문하고 더불어 그 아들 승경承慶을 왕으로 책립하였다. 상(上)이 숙璹에게 말하길 “신라는

군자의 나라로 불린다. 경은 그 곳에 이르거든 마땅히 경전을 밝혀서, 유교의 흥함을 알리도록 하시오.

 또한 듣건데 그 나라 사람들 중에는 바둑을 잘 두는 사람이 많다고 들었소.

그러므로 바둑을 잘 두는 사람을  데리고 가도록 하시오”라고 하였다.  이에 영을 내려 바둑을 잘 두는

<솔부병조率府兵曹 >  양계응楊季鷹을 숙(璹)의 부사로 임명하였다.

天寶二年 承慶卒 詔遣贊善大夫 魏曜 往弔祭之 冊立 其弟 憲英為王 大厯二年 憲英卒 國人立

其弟乾運為王 遣其大臣 金隠居 奉表入朝 請加 冊命 三年 遣使 冊立 仍冊乾運母為太妃 建中四年 乾運卒

 無子 國人立 其上相 金良相 為王

천보天寶 2년 승경承慶이 죽었다. 조칙으로 <찬선대부贊善大夫> 위요魏曜를 보내 조문하게 하고 그

동생 헌영憲英을 왕으로 세웠다. 대력大厯 2년 헌영憲英이 죽었다. 나라사람들이 그 동생  건운乾運을

왕으로 세웠다. 그 대신大臣 김은거金隠居를 파견하여 글을 보내서 왕으로 책봉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3년 사신을 보내 왕으로 세우고 건운乾運의 어머니를 태비로 책봉하였다. 건중建中 4년 건운乾運이

죽었다. 자식이 없었으므로 나라사람들이 상상(上相) 김양상金良相을 왕으로 세웠다.

貞元元年 授良相 檢校大尉 都督 雞林州刺史 寧海軍使 新羅王 其年卒 立上相 金敬信為王 敬信

即從兄弟也(按 敬信 即從兄弟 句詞意未為明晰據 通考 葢即 良相之從兄弟耳)十四年 敬信卒 其子先亡

 國人立 敬信嫡孫 俊邕

정원貞元 원년 양상良相에게 <검교대위 도독 계림주 자사 영해군사 신라왕 檢校大尉 都督 雞林州刺史

 寧海軍使 新羅王>의 직함을 주었으나 그해에 죽었다. 상상上相 김경신金敬信을 왕으로 세웠다.

경신은 곧 종형제이다.

(살피건대 ‘경신 즉 종형제 敬信 即從兄弟’라는 자구는 「통고」를 근거로 분석해 볼 때 양상良相의

종형제라는 뜻이다) 14년 경신이 죽었다. 그 아들이 먼저 죽었으므로 나라사람들이 경신의 맏손자

준옹俊邕을 왕으로 세웠다.

十六年 遣 司封郎中 韋丹 持節冊命 至鄆州 聞俊邕卒 丹還 永貞元年 遣兵部郎中 元季方 冊俊邕子

重興(按 冊府元龜 作重熙)為王(按 冊府元龜云并冊 其母 和氏為太妃 妻朴氏 為妃)

16년 <사봉낭중司封郎中> 위단韋丹에게 부절符節을 가지고 책봉을 하라고 보냈으나 운주鄆州에

이르러 준옹俊邕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단丹이 돌아왔다. 영정永貞 원년 <병부낭중兵部郎中>

원계방元季方을 보내 준옹俊邕의 아들 중흥重興 (살피건대 책부원구冊府元龜에는 중희重熙로 기록되어

 있다.)을 왕으로 책봉하였다.

(살피건대 책부원구 冊府元龜에는 ‘그 어머니 화씨和氏를 태비太妃로, 처 박씨朴氏를 비妃로 함께

 책봉하였다’고 되어있다.)

元和三年 新羅使人 金力奇 上言 前 貞元十六年 奉詔 冊臣 故主 金俊邕為王 母申氏為太妃 妻叔氏為王妃

 冊使 韋丹 至中路 知俊邕薨 其冊却迴在 中書省 今臣還國 請授臣 以歸 勅鴻臚寺 于中書省 領受 至寺

宣授與力奇 令奉歸國

원화元和 3년 신라 사신 김력기金力奇가 말하길 “정원貞元 16년 돌아가신 고주故主 김준옹金俊邕을

왕으로, 그 어머니 신씨申氏를 태비太妃로 처 숙씨叔氏를 왕비王妃로 책봉하는 조칙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책사 위단韋丹이 도중에서 왕이 돌아가셨다는 것을 알고 책봉을 취소하고 돌아간 뒤 문서를

중서성中書省에 두었습니다.

이제 신이 환국을 하는데 신에게 주어 돌아갈 수 있도록 청합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홍로시鴻臚寺에

조칙을 내려 “중서성中書省에 가서 책서를 받아 역기力奇에게 주어 돌아가게 하라”라고 하였다.

七年 重興卒 立其相 金彥昇為王 授彦昇 開府儀 同三司 檢校太尉 持節大都督 雞林州諸軍事 寧海軍使

上柱國 新羅王 妻貞氏 冊為妃 命職方員外郎 崔廷 持節 弔祭  冊立以其 質子 金士信 副之

7년 중흥重興이 죽었다. 그 상(相) 김언승金彥昇을 왕으로 세우고 언승彥昇에게 <개부의 동삼사

검교태위 지절 대도독 계림주 제군사 영해군사 상주국 신라왕 開府儀 同三司 檢校太尉 持節大都督

雞林州諸軍事 寧海軍使 上柱國 新羅王>의 직함을 주고,

처 정씨貞氏를 비妃로 책봉하고 <직방원외랑職方員外郎> 최정崔廷에게 명하여 부절을 가지고 가서

조문하게 하였는 바, 인질로 와 있는 김사신金士信을 부사副使로 삼았다.

太和五年 彥昇卒 以嗣子 金士徽 為開府儀同三司 檢校太尉 使持節 大都督 雞林州諸軍事 充寧海軍使

新羅王 母朴氏為太妃 妻朴氏(按 冊府元龜作 貞氏)為妃 命太子左諭徳源寂 持節 弔祭 冊立

태화太和 5년 언승彥昇이 죽었다. 왕위를 이은 아들 김사휘金士徽에게 <개부의 동삼사 검교태위 사지절

 대도독 계림주 제군사 충녕해군사 신라왕 為開府儀同三司 檢校太尉 使持節 大都督 雞林州諸軍事

充寧海軍使 新羅王>의 직함을 주고,

왕모王母 박씨朴氏(책부원구에는 정씨貞氏로 기록)를 태비太妃로 처 박씨朴氏를 비妃로 책봉하고

<태자 좌유덕左諭徳> 원적源寂에게 부절을 가지고 가서 조문하고 책봉하도록 명하였다.

新唐書 新羅國 東距長人 東南日本 西百濟 南瀕海 北髙麗而 王居金城 長人者人 長三丈 或搏人以食 其國

連山數十里 有峽 固以鐵闔 號闗門 新羅 常屯弩士 數千 守之

『신당서新唐書』에는 “신라국은 동쪽으로 장인長人국에 막혀 있고 동남쪽은 일본, 서쪽은 백제, 남쪽은

 바다와 접하고, 북쪽은 고구려와 접한다. 왕은 금성金城에 산다. 장인長人은 사람으로서 키가 세길이나

되며 또는 사람을 잡아 먹는다고도 하였다.

그 나라는 산이 수십리를 연이어 있고, 입구의 골짜기에 튼튼한 쇠문을 달아서 관문이라 부른다. 신라는

 항상 노사弩士 수천을 주둔시켜 이를 지킨다”고 되어 있다.

貞觀二年 獻女樂二 太宗曰 比林邑 獻鸚鵡 尚思鄉丏還 况於人乎 付使者 歸之 王金真平 無子 立女善徳為

王國人號 聖祖皇姑 二十一年 其妹真徳襲王 明年 遣子 文王及弟 伊贊子春秋 來朝 拜文王左武衞將軍

春秋 特進 因請 改章服 從中國制 内出珍服賜之

정관貞觀 2년 여악공女樂工 두명을 보냈다. 태종이 말하길 “근간 임읍林邑에서 바친 앵무새도 고향을

 그리워하여 돌려보내 달라고 말하였다. 하물며 사람은 어떠하겠는가?” 하고 사자편에 돌려 보냈다.

왕 김진평金真平이 아들이 없어 딸 선덕善徳을 왕으로 세웠다.

나라 사람들이 <성조황고 聖祖皇姑> 라 부른다. 21년 그 여동생 진덕真徳이 왕위를 이었다. 다음해에

아들 문왕文王과 동생 이찬 伊贊 의 아들 춘추春秋를 보내 래조하였다. 문왕文王에게 <좌무위장군左武衞將軍>을, 춘추에게는 <특진特進>의 직함을 주었다. 복장을 고쳐서 중국의 제도를 따르기를 원하므로 궁중의 진복珍服을 내어 주었다.

龍朔三年 詔以其國 為雞林州大都督府 授其王 法敏 都督 咸亨五年 納髙麗叛衆 略 百濟地 守之 詔削法敏

官爵 以其弟 右驍衞大将軍 臨海郡公 仁問 為新羅王 自京師歸國 詔劉仁軌 為雞林道 大總管 發兵 窮討

용삭龍朔 3년 조칙으로 그 나라를 <계림주 대도독부雞林州大都督府>로 삼고, 그왕 법민法敏 에게

<도독都督>의 직함을 주었다. 함형咸亨 5년 신라가 고구려의 항거 무리를 받아들이고 백제의 땅을

경략하여 지키게 하였다.

이에 조칙으로 법민法敏의 관작을 삭탈하고 {인질로 와 있는} 그 동생 <우효위대장군 임해군공

右驍衞大将軍 臨海郡公> 인문仁問을 신라왕으로 임명하고 경사京師에서 돌아가도록 하였다.

조칙으로 유인궤劉仁軌를 <계림도 대총관 雞林道 大總管>으로 임명하고 군사를 이끌고 가서 힘써

토벌하게 하였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