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역사 침탈(侵奪)

BC 28세기 요하문명의 濊貊族이 남하 하여 夏, 商, 周를 건국하면서 황하문명을 일구었으며, 鮮卑族이 秦, 漢, 隨, 唐을 건국했습니다. - 기본주제 참조

홍익인간·인류공영/3)韓族,가야,신라

만주원류고 번역(권4, 부족 신라-4회)

자연정화 2013. 9. 2. 20:31

法敏 遣使入朝謝 仁問乃還辭王 詔復法敏 官爵 然多取 百濟地 遂抵髙麗南境矣(按唐會要言 盡有百濟之地

及髙麗南境 盖髙麗北境 已屬渤海 故新羅既有百濟之地 又兼有 髙麗南境 非得百濟而 始抵髙麗之南也

新書誤 會及字之意 與髙麗傳不合 謹詳訂于從)

법민法敏이 사신을 보내 사과하였다. 인문仁問 또한 왕위를 사양하고 돌아왔다. 조칙으로 법민法敏의

관작을 회복시켰다. 그러나 백제의 땅을 많이 차지하여 드디어 고구려의 남쪽 지경과 접하였다.

(살피건대「당회요唐會要」에는 “백제의 땅과 고구려의 남쪽 지경을 모두 차지하였다”고 기록하였다.

고구려의 북쪽 지경은 이미 발해가 차지하고 있었다. 따라서 신라는 이미 백제의 땅과 고구려의 남쪽

지경을 차지하였다. 백제땅을 얻거나 처음으로 고구려의 남쪽과 접한 것이 아니다. 신당서가 당회요의

글자의 의미를 오해한 것으로서 고구려전과 합치되지 않는다. 삼가 상세히 정정하고 이에 따른다.)

開元中 王金興光 數入朝 帝賜興光 瑞文錦 五色羅 紫繡紋袍 金銀精器 興光 亦上 異狗馬 黄金 美髢 諸物

初渤海 靺鞨 入登州 興光 擊走之 進興光寧海軍大使 使攻靺鞨
二十五年 冊其子 承慶為王 承慶妻朴氏為妃 卒 弟憲英嗣王 帝在蜀遣使泝江 至成都朝 正月

개원開元중에 왕 김흥광金興光이 수차례 입조하였다. 황제가 흥광興光에게 서문금 瑞文錦 오색능라五色

羅 자수문포紫繡紋袍 금은으로 만든 기물을 주었다. 흥광興光 또한 기이한 개와 말, 황금 미발美髢 등의

물건을 보냈다. {개원}초에 발해 말갈이 등주登州를 공격하였을 때 흥광興光이 이를 물리쳤다.

흥광興光 을 <영해군대사 光寧海軍大使 >로 올려주고 말갈을 공격하게 하였다. 25년 그 아들 승경承慶

을  왕으로 승경承慶의 처 박씨朴氏를 비妃로 책봉하였다. {승경承慶이}죽으니 그 동생 헌영憲英이

왕위를 이었다. 황제가 촉蜀에 있었는데 사신이 양자강을 건너 성도成都에 이르러 정월 하례에 참가하였다.

大厯初 其子乾初立 甫丱█其宰相争權 相攻 國大亂三嵗 乃定 建中元年卒 無子 國人共立宰相金良相 貞元

元年 遣户部郎中 葢塤持節冊命之

대력大厯초에 그 아들 건초乾初{신당서에는 乾運으로 기록}가 왕위에 올랐으나 나이가 어려 재상이

권력을 다투어 서로 공격함으로써 나라에 대란이 일어나 3년 후에 비로서 안정되었다.  

건중建中 원년 {건초가}죽었다. 아들이 없어 나라사람들이 함께 재상 김양상金良相을 왕위에 세웠다.

정원貞元 원년 호부낭중户部郎中 개훈葢塤에게 부절을 주어 보내어 이를 책봉하도록 하였다.

永貞 三年 使臣 金力奇為其宰相 金彦昇 金仲恭 王弟 蘇金添明丏戟 詔皆可凡 再朝貢 七年 彦昇立 長 慶

寶厯間 再遣使者 來朝 留宿衞 開成五年鴻臚寺 籍質于 及 學生 嵗滿者 一百五人 皆還之

영정 永貞 3년 사신 김역기金力奇를 그 재상으로 김언승金彦昇 김중공金仲恭 왕제 소김첨명蘇金添明

등에게 문극門戟을 내려 달라고 요청하자 조칙으로 이를 들어 주자 다시 조공하였다. 7년 언승彦昇이

왕위에 올랐다. 장경長 慶, 보력寶厯년간에 다시 사자를 보내 내조하고 숙위하며 머물렀다.

개성開成 5년 홍려시鴻臚寺에 籍을 둔 質子와 유학을 온 학생으로서 연한이 찬 사람 1백 5명을 모두 돌려

 보냈다.

[백송 주]삼국사기의 기록으로 비추어 볼 때 면극丏戟은 문극門戟으로 보인다.
삼국사기 제10권 신라본기 10 애장왕
9년춘2월…仍賜王叔 彦昇 及其弟 仲恭 等門戟 令本國 准例 給之
(인하여 황제는 왕의 숙부 언승과 그 아우 중공 등에게도 문극을 주되 본국으로 하여금 예에 따라 주도록

하였다.)
※門戟 : 옛날 귀인의 집 문앞에 꾸미개로 늘어놓던 창

有張保臯 鄭年者 皆善戰 工用槍 年復能沒海  履其地 五十里 不噎 角其勇健 保臯不能也 年以兄呼保臯

 保臯以齒 年以藝 常不相下 自其國皆來為武寧軍小将 後保臯歸新羅 謁其王曰 遍中國以新羅人為奴婢

願得鎮清海 使賊不得掠人西去 清海海路之要也 王與保萬人守之

장보고張保皐• 정년鄭年이라는 사람이 있는데, 모두 싸움을 잘 하며 특히 창을 잘 쓴다. 정년은 또 능히

 바닷물 속에 잠겨서 50리를 헤엄쳐도 숨이 막히지 않으며, 용맹스럽고 굳건한 것은 보고保皐도 따르지

못한다. 정년은 보고保皐를 兄이라 부르는데, 보고保皐는 나이를 내세우고 年은 재주를 내세워 늘 서로

 뒤지지 않으려 하였다. {두 사람이} 다 新羅에서 들어와 무령군武寧軍의 소장小將이 되었다.

뒤에 보고保皐는 新羅로 돌아가서 그 나라 왕을 알현하고 말하길 “온 中國에 新羅 사람이 奴婢가 되어

있습니다. 바라옵건데 청해淸海에 鎭을 설치하여 해적海賊이 西方으로 사람을 사로 잡아가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청해淸海는 해로海路의 요충지要衝地입니다.”라고 하였다. 王은 보고保皐에게 군사 1만

명을 주어서 지키게 하였다

自太和後 海上無鬻新羅人者 保臯既貴于其國 年饑寒客漣水 一日謂戍主馮元規曰 我欲東歸乞食于保臯

元規曰 若與保臯所負 何如 奈何 取死其手 年曰 饑寒死 不如兵死快 遂去謁保臯飲之極歡 飲未卒 聞大臣

殺其王 國亂無主 保臯分兵五千人 與年 持年泣曰 非子不能平禍難

태화太和(A.D.827~835)이후로는 海上에서 新羅 사람을 사고 파는 자가 없어졌다. 保皐는 본국에서

富貴를 누리고 있었으나 年은 연수漣水에서 나그네로 궁색스럽게 살고 있었다. 하루는 술주戍主 풍원규

馮元規에게 말하길 “나는 동쪽으로 돌아가 張保皐에게 乞食을 할까 하오.”라고 하였다.
元規가 말하길 “당신이 보고保皐를 저버린 것은 어떻게 할 것인가?  어찌하여 그의 손에 죽으려 하는가?

”라고 하니, 정년이 말하길 “굶주림과 추위로 죽는 것보다는 통쾌하게 싸우고 죽는 것이 낫다.”하고,

드디어 길을 떠나 보고를 만나니 보고는 주연을 베풀어 극진히 환대하였다.

연회가 미처 끝나기도 전에, 대신이 그 왕을 죽여서 나라가 어지러워져 주인이 없어졌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보고保皐는 병력을 나누어 5천명을 정년에게 준 뒤, 정년을 붙잡고 울며 말하기를 “자네가 아니고서는 환난을 평정할 수 없다.”라고 하였다.

年至其國 誅反者 立王以報 王遂召保臯 為相 以年代守清海 會昌後 朝貢不復至
정년이 그 나라에 이르러 반란을 일으킨 자를 주살하고 왕을 세워 보답하였다. 왕은 드디어 보고保臯를

불러서 상相으로 삼고, 정년으로 하여금 장보고를 대신하여 청해를 지키게 하였다. 회창會昌  이후로는

 조공이 다시 들어오지 않았다.

唐會要 新羅者 本弁韓之地 其先出髙麗 魏破髙麗 其衆保沃沮 後歸故國 其留者號新羅 國多金朴兩姓異姓

不為婚 永徽元年 王金真徳 大破百濟 遣使金法敏來朝 五年 真徳卒  髙宗為舉哀于永光門  使太常丞張文

收弔祭之 贈開府儀同三司 仍賜綾綵三百段

「당회요」에는 “신라는 본래 변한의 땅이다. 그 선조는 고구려에서 나왔다. 위魏나라가 고구려를 쳐서

이기자 그 무리들은 옥저沃沮로 가서 보존하였다. 뒤에 옛 나라로 돌아갔다. 그 곳에 남은 사람들을

신라로 불렀다. 나라에는 김金 박朴 두 성씨가 많고 다른 성과는 혼인을 하지 않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영휘永徽 원년 그 왕 김진덕金真徳이 백제를 크게 쳐서 이겼다.

김법민金法敏을 사신으로 보내 래조하였다. 5년 진덕真徳이 죽었다. 고종髙宗이 영광문永光門에서

애도를 표하였다. 태상승太常丞 장문수張文收로 하여금 조문하게 하고 <개부의 동삼사開府儀同三司>를

 추증하고 릉채綾綵 3백단을 보내 주었다.(계속)

[백송 주] 릉채綾綵 : 능라(綾羅). 채단(綵緞) ⇒비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