十一年 十一月 其入朝 王子 金士信 等遇風飄 至楚州 鹽城界 淮南節度 李鄘以聞 十五年 遣使 來朝貢
長慶二年 使金柱弼 來朝 寶厯 元年 王子金昕 來朝 兼 充宿衞 太和 四年(舊唐書 作五年)彦昇卒 太和五年
四月 詔以金景徽為國王 母朴氏太妃 妻朴氏為妃
11년 11월 입조入朝 하기 위해 오던 왕자 김사신金士信 등이 풍랑을 만나 초주 楚州 염성鹽城 지경에
표착하였다는 사실을 회남절도淮南節度 이용 李鄘 이 보고하였다. 15년 사신을 보내와 수호하였다.
장경長慶 2년 김주필金柱弼을 보내 수호하였다.
보력寶厯 원년 왕자 김흔金昕을 보내 수호하고 겸하여 숙위宿衞하였다. 태화 太和 4년(구당서에는
5년으로 기록) 언승彦昇이 죽었다. 태화 太和5년 4월 김경휘金景徽를 국왕으로 어머니 박씨를 태비
太妃로 처 박씨를 비妃로 책봉하였다.
開成元年 王子義琮來 謝恩宿衞 會昌元年 七月 勅歸國 新羅官 前入新羅 宣尉副使充兖州都督府司馬
賜緋魚袋 金雲卿可淄州長史 唐六典 河南道控新羅之貢獻
册府元龜 唐武徳九年 新羅遣使 訟髙麗王 建武 闗其道路 不得入朝 又相與有隙屢相侵掠 詔員外散騎侍郎
朱子奢 和解之 建武奉表謝罪 請與新羅對 使會盟
개성開成 원년 왕자 의종義琮이 와서 사은하고 숙위하였다. 회창會昌 원년 7월 칙명으로 귀국하도록
하였다. 칙명을 내려 신라관원으로서 이전에 당에 들어온 <선위부사 충연주도독부 사마 宣尉副使
充兖州都督府 司馬> 김운경金雲卿( 비어대 緋魚袋를 하사받았다.)을 치주장사淄州長史의 직위를 주었다.
『당육전 唐六典 』에는 “하남도河南道를 치는데 신라가 공헌하였다”고 하였다.
『책부원구 册府元龜 』에는 “당唐 무덕武徳 9년 신라가 사신을 보내 ‘고구려왕 건무가 도로를 막아서
입조할수 없게 되었고, 서로 사이가 벌어져 침략을 한다’라고 고발하여 오므로 <원외산기시랑
員外散騎侍郎> 주자사朱子奢 를 보내 화해하도록 하자, 건무가 표表를 보내 사죄하고 ‘신라와는
사신을 교환하고 맹약을 맺겠다’고 하였다”고 되어 있다..
貞觀十七 年 九月 新羅遣使言 髙麗百濟 侵陵臣國 累遭攻襲數十城 兩國連兵 期于必取 将以今兹 九月
大舉 謹遣陪臣 歸命大國 願乞偏師 以存救援 帝謂使人曰 我頻使人和爾三國 髙麗百濟 旋踵翻悔意
在吞滅 我少發邊兵 總契丹靺鞨 直入遼東 爾國自解 可緩一年之圍 此後知無繼兵 還肆侵侮然 四國俱擾
于國未安 此為一策
정관貞觀 17년 9월 신라가 사신을 보내 말하길 “고구려와 백제가 우리나라를 수차례 침략하여 수십개
성을 공격하였고 두 나라 군사가 연합하여 기어이 뺏을 것을 기약하고 이번 9월에 크게 군사를
일으키려 합니다. 삼가 배신陪臣 귀명歸命을 보내니 원하건대 약간의 군사를 보내어 구원해 주시기를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황제가 사신에게 말하길 “나는 자주 사신을 보내 그대들 세 나라가 화해하도록 하였소. 그러나 고구려
백제가 돌아서면 후회하는 뜻을 번복하여 삼켜버리니, 내가 변방의 군사를 조금 일으키고 거란 말갈을
거느려 곧바로 요동으로 들어가면 그대 나라는 1년 정도 포위를 늦출수 있을 것이오.
{그러나 그들이} 이후에 계속하여 군사가 나오지 않는 것을 알면 침략과 모욕을 마음대로 하여
네 나라가 같이 소란스러워 질 것이오. 그대 나라에는 미안하지만 이것이 첫 번째 계책이오.
我又能給爾 數千株袍丹幟 二國兵至 建而陳之 彼以為我兵 必皆奔走 此為二策 百濟負海之險 不修兵械
我以數十百船 載卒泛海 直襲其地 此為三策 爾國 以婦人為主 為隣國輕侮 我遣一宗枝 以為國主 待爾國安
任爾自守 此為四策
내가 또한 그대에게 수천의 붉은 옷과 붉은 깃발을 줄 수 있는데 두 나라 병사가 왔을 때 세워서 벌려
놓으면 저들이 나의 군사인 줄 알고 모두 도망 갈 것이오. 이것이 두 번째 계책이오. 백제는 바다를
등지고 있는 험함을 믿고 병장기를 수리하지 않고 있으니 내가 수십 수백의 군선에 군사를 싣고 바다를
건너 곧바로 그 땅을 공격하는 것이 세 번째 계책이오.
그대 나라는 부인이 임금이 되었기에 이웃나라가 가볍게 여기고 모욕하니 내가 종실 중에서 한 사람을
보내 임금으로 삼아 그대 나라가 안정되기를 기다린 뒤 그대들에게 맡겨 스스로 지키도록 하는 것이니
이것이 네 번째 계책이오.
爾宜思之 将從何事 使者但唯而無對 帝於是 遣相里元奨 齎璽書 賜髙麗曰 新羅委命國家 朝貢不闕
爾與百濟 宜即戢兵 若更攻之 明年當出師 擊爾國矣 葢蘇文 謂元奨曰髙麗 新羅 怨隙已久 往者隋室相侵
新羅乗釁奪髙麗五百之地
그대는 마땅히 이를 생각하여 장차 어느 계책을 따르겠소?” 라고 하였다. 사자는 단지 듣기만 하고
대꾸하지 않았다. 황제가 이때에 상리원장相里元奨에게 새서璽書를 주어 가지고 가서 고구려의
전하여 말하길 “신라는 나의 명을 따르고 조공을 그치지 않았소.
그대와 백제는 마땅히 군사를 거두어야 할 것이오. 만약 또다시 공격하면 내년에 반드시 군사를 보내
그대 나라를 칠 것이오.” 라고 하였다. 개소문葢蘇文이 원장元奨에게 말하길 “고구려와 신라는
원한으로
사이가 벌어진지 오래되었소. 이전에 수隋나라와 싸울때 신라가 그 기회를 틈타서 고구려의 오백리
땅을
뺏아갔소.
自非反地還城 此兵恐未能已 元奨曰 既往之事 安可追論 蘇文竟不從 十八年 元奨還元奨初至平壤 葢蘇文
又破新羅兩城 詔以髙麗侵逼新羅 令營州都督 張儉等 率幽營二都督府 兵馬問罪 屬麗東水泛 儉 等
兵不能濟
스스로 땅과 성을 돌려주지 않으면 이번 군사는 철수하지 않을 것이오”라고 하였다. 원장이 말하길 “이미
지난일을 어찌 거슬러 논란하겠습니까?’ 하였으나, 소문은 끝내 이를 따르지 않았다. 18년 원장이
돌아왔다. 원장이 처음에 평양에 이르렀을 때 개소문은 또 신라의 두 개 성을 쳐부수었다.
고구려가 신라를 침략하여 핍박하므로 <영주도독營州都督> 장검張儉 등에게 영을 내려 유주幽州 영주
營州 두 도독부 병마를 거느리고 죄를 묻도록 하였으나 고구려가 강을 굳게 지키므로 장검張儉등의
병사가 건널 수 없었다.
二十二年 新羅國 伊贊於(於字 新舊唐書 俱作子) 金春秋 及其于文王來朝 帝遣光祿卿栁亨 持節郊勞之
是年
百濟復破 其一十三城 永徽元年 六月 新羅王 金真徳 大破百濟之衆 遣使以聞
22년 신라국 이찬어 伊贊於 (於자는 신구당서에 모두 子로 기록됨) 김춘추 金春秋 와 그 아들 문왕
文王이 래조하였다. 황제가 <광록경光祿卿> 유형栁亨에게 부절을 가지고 가서 노고를 위로하게
하였다. 이해에 백제가 다시 13개 성을 쳐 부쉈다. 영휘永徽 원년 6월 신라왕 김진덕金真徳 이
백제의 무리를 크게 쳐 부수고는 사신을 보내 알려왔다.
六年二月 遣營州都督 程元振 左衞中郎将 蘇定方 發兵一萬 討髙麗以侵掠 新羅故也時新羅王 金春秋言
髙麗 百濟 靺鞨 相連侵 其北境 奪三十三城 乞兵救援 故遣元振經略之 顯慶元年 百濟伐新羅 新羅拒戰
破之 是年十月 遣王子 文王來朝
6년 2월 <영주도독 營州都督> 정원진 程元振 <좌위중랑장 左衞中郎将> 소정방 蘇定方 에게 군사
일만을 이끌고 신라를 침략한 고구려를 공격하도록 하였다. 이때에 신라왕 김춘추가 말하길 “고구려
백제 말갈이 서로 잇달아 그 북쪽지경을 침략하여 33개 성을 뺏았습니다.”라 하고, 군사를 보내 구원해
주기를 청하였다.
그래서 원진元振을 보내 경략토록 한 것이다. 현경顯慶 원년 백제가 신라를 공격하였는데 신라가 맞서
싸워 이겼다. 그 해 시월 왕자 문왕文王을 보내 래조하였다.
咸亨四年 燕山道總管 李謹行(按謹行 靺鞨人)破髙麗叛黨 于瓠盧河之西 髙麗平壤餘衆 遁入新羅 五年二月
遣劉仁軌 為雞林道行軍大總管 以伐新羅 又以靺鞨兵 浮海而南 略新羅之南境 仁軌還詔以 李謹行 為
安東鎮撫大使 屯兵於新羅之買肖城 以經略之前後 三戰皆捷
함형咸亨 4년 <연산도총관 燕山道總管> 이근행 李謹行 (살피건대 근행은 말갈인이다)이 고구려의 반란
무리를 호로하瓠盧河의 서쪽에서 쳐 부수었다. 고구려 평양의 남은 무리들이 신라로 숨어 들었다. 5년
2월 유인궤劉仁軌를 보내 <계림도 행군대총 雞林道 行軍大總管>으로 삼고 신라를 토벌토록 하고 또한
말갈병은 바다를 건너 신라의 남쪽지경을 공격하였다.
인궤仁軌가 이근행 李謹行 을 소환하여 <안동진무대사 安東鎮撫大使>로 삼고 신라의 매초성買肖城에
주둔하게 하였는데 전후하여 세번의 전쟁을 치루어 모두 크게 이겼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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