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역사 침탈(侵奪)

BC 28세기 요하문명의 濊貊族이 남하 하여 夏, 商, 周를 건국하면서 황하문명을 일구었으며, 鮮卑族이 秦, 漢, 隨, 唐을 건국했습니다. - 기본주제 참조

홍익인간·인류공영/3)韓族,가야,신라

만주원류고 번역(권4, 부족 신라-5회)

자연정화 2013. 9. 2. 20:33

詔以其子 春秋嗣位 顯慶元年三月 又破百濟兵 使來告㨗龍朔元年 春秋卒 子法敏嗣位 三年四月 詔新羅

置雞林大都督 仍授法敏 雞林州大都督 麟徳二年八月 法敏與熊津都督夫餘隆 盟于百濟之熊津城

조칙으로 그 아들 춘추春秋가 왕위를 잇게 하였다. 현경顯慶 원년 3월 또 백제병을 쳐서 이긴 것을

사신을 보내 알려왔다. 용삭龍朔 원년 춘추春秋가 죽었다.

아들 법민法敏이 왕위를 이었다. 3년 4월 조칙으로 신라에 <계림대도독 雞林大都督> 을 설치하고

법민法敏에게 <계림주대도독 雞林州大都督>의 직함을 주었다. 인덕麟徳 2년 8월 법민과  웅진도독

熊津都督  부여융夫餘隆이 백제의 웅진성熊津城에서 맹약하였다.

于是 帶方州刺史 劉仁軌 領新羅百濟儋羅倭人四國使 浮海西還 以赴泰山之下 上元元年(按新唐書

作咸亨五年 與此異)二月 新羅王 金法敏 既已納髙麗叛亡之衆 又封百濟故地 遣兵守之

이때 대방주帶方州 자사 유인궤 劉仁軌 가 신라 백제 담라儋羅 왜인 등 네나라 사신을 이끌고 바다를

건너 서쪽으로 돌아왔다. 태산의 아래에 부임하였다.

상원上元 원년(살피건대 신당서에는 함형咸亨 5년으로 되어 있어 여기와 다르다) 2월 신라왕 김법민

金法敏 이 이미 망한 고구려의 반란 무리들을 받아들이고, 또한  백제의 옛땅에는 왕을 봉하여 살도록

하고 군사를 보내 지키게 하였다.

帝怒 削法敏官爵 遣宰臣 劉仁軌討之 仍以法敏弟 金仁問為新羅王 時仁問在京師 詔令歸國 以代其兄

仁問 至中路 聞新羅降乃還

황제가 노하여 법민法敏의 관작을 삭탈하고 재신宰臣 유인궤劉仁軌를 보내 토벌케 하였다. 또한 법민

法敏의 동생 김인문金仁問을 신라왕으로 삼았다.

이때 인문仁問은 경사에 있었는데 조칙을 내려 귀국하여 그 형을 대신하도록 하였다. 인문仁問이

도중에 신라가 항복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돌아왔다.

二年二月 雞林道行軍大總管 劉仁軌 大破新羅之衆 于七重城而還 新羅于是 遣使入朝并獻方物 前後相屬

復 法敏官爵 既盡有百濟之地 及髙麗南境 東西約九百里 南北約一千八百里(按舊唐書云 東西千里

南北二千里 新唐書云 横千里 縱三千里 今既併百濟 髙麗無反 狹于前之理 葢專指新闢之地耳)

2년 2월 게림도행군대총관 유인궤가 신라의 무리를 칠중성에서 크게 무찌르고 돌아왔다. 신라가 이데

 사신을 보내 입조하고 방물을 바쳤다. 전후하여 법민의 관작을 회복시켰다. 이미 이미 백제의 땅과

고구려의 남쪽 지역을 차지하였다.

동서 약 9백리 남북 약 1천 8백리이다.(구당서에는 동서 천리 남북 이천리이다 라고 하였다. 신당서에는

 가로 천리 세로 삼천리라고 하였다. 이제 이미 백제 고구려를 병합하고 반란도 없는데 앞에 든

나라사이에 끼일 이유가 없으니 이것은 오로지 새로 개척한 강역을 가리키는 것이다.)

開耀元年法敏卒 遣使冊立其子政明為王 長夀二年(舊唐書 作天授三年)政明卒 冊其子理洪為王 三年遣使

來朝 其年理洪卒(舊唐書 作長安二年卒) 冊其弟崇基為王 仍襲兄輔國大将軍左豹韜衞大将軍雞林州都督

神龍三年 授驃騎大将軍 先天元年改名興光

개요開耀 원년 법민法敏이 죽었다. 사신을 보내 그 아들 정명政明을 왕으로 책립하였다. 장수長夀

2년(구당서舊唐書 에는 천수天授 3년으로 기록) 정명政明이 죽었다. 그 아들 이홍理洪을 왕으로

책봉하였다. 3년 사신을 보내 래조하였다. 그해에 이홍理洪이 죽었다.

(구당서舊唐書 에는 장안長安 2년에 죽었다고 기록) 그 동생 숭기崇基를 왕으로 책봉하고 형의 직함인

 <보국대장군 좌표도위 대장군 계림주도독輔國大将軍 左豹韜衞大将軍 雞林州都督>을 이어 받도록

하였다. 신룡 神龍 3년 <표기대장군驃騎大将軍>의 직함 주었다. 선천先天 원년 흥광興光으로 개명하였다.

開元十年 頻遣使獻方物 十二年 興光遣獻 果下馬二匹 及金銀等 仍上表陳謝 至十二年遣其臣 金武勲來賀正

 及武勲迴 降書賜之 又使其弟金嗣宗 來朝并貢方物 至二十一年 命太僕卿員外置 金思蘭 使于新羅 思蘭本

新羅行人 恭而有禮 因留宿衞 及是委以出疆之任 且便之也 是年興光 奏國内有芝草生 畫圖以獻

개원開元 10년 빈頻이 사신과 선물을 보냈다. 12년 흥광興光이 과하마果下馬 2필과 금은 등을 보내고

감사의 뜻을 담은 글을 보냈다. 12년에 이르러 그 신하 김무훈金武勲이 새해를 축하하고 무훈武勲이

돌아갈 때 조서를 보내 주었다. 또한 그 동생 김사종金嗣宗을 사신으로 하여 래조하고 선물을 보냈다.

21년 <태복경원외치 太僕卿員外置>에 김사란金思蘭을 임명하고 사신으로 삼아 신라로 보냈다.

사란思蘭은 본래 신라행인인데 공손하고 예절이 발라 숙위로 머물렀다.
강역을 나갈 때 소임을 맡긴 것이니 또한 편리를 도모한 것이다. 이해에 흥광興光이 국내에 지초가

난다고 하면서 그림을 그려 보냈다.

二十二年 遣大臣金竭丹來賀正 又遣姪志亷獻方物 授志亷鴻臚少卿員外置賜絹百匹留宿衞 二十三年十一月

遣從弟 金忠相來朝 卒於路 贈衞尉卿 二十五年興光卒 承慶嗣位

22년 대신 김갈단金竭丹을 보내 정월을 축하하였다. 또한 조카 지렴志亷을 보내 선물을 보냈다.

지렴志亷에게 <홍로소경 원외치鴻臚少卿 員外置>의 직함을 주고 비단 백필을 주어 숙위하게 하였다.

 23년 11월 종제從弟 김충상金忠相을 보내 래조하였는데 도중에 죽었기에 <위위경衞尉卿>을

추증하였다. 25년 흥광興光이 죽었다. 승경承慶이 왕의 자리를 이었다.

至二十八年 冊其妻朴氏 為新羅王妃 天寶三年卒 命弟憲英嗣位 是嵗四月 遣使獻方物 十月 遣使來賀正

授左清道率府員外長史 賜綠袍銀帶還畨 自後頻來朝貢 七載遣使獻金銀 及六十總布魚牙紬 朝霞紬 牛黄

 頭髮 人參

28년에 이르러 그 처 박씨를 신라왕비로 책봉하였다. 천보天寶 3년에 죽었다. 동생 헌영憲英이 왕의

자리를 잇도록 명하였다. 이해 4월 사신을 파견하여 방물을 보냈다. 10월 사신을 보내 정월을

축하하였다. <좌청도 솔부 원외장사左清道 率府 員外 長史>의 직함을 주었다.

녹포綠袍 은대銀帶를 주어 돌아가게 하였다. 이후로 빈번히 와서 조공을 하였다. 7년 사신을 파견하여

금 은과 60수 총포總布 어아주魚牙紬 조하주 朝霞紬 우황 牛黄 머리카락 인삼 人參 을 보냈다.

寶應二年 憲英遣使朝貢 授其使檢校禮部尚書 放還 大厯二年 憲英卒 子乾運立 三年命倉部郎中 歸崇敬

持節冊命 七年 使金標石 來賀正 授衞尉員外少卿 八年 遣使來朝 并獻金銀 牛黄 魚牙紬 等方物 建中四年

乾運卒 無子 國人 立其上相 金良相為王 貞元元年 令户部郎中  葢塤往 冊 其年 良相卒 立上相 敬信為王

보응寶應 2년 헌영憲英이 사신을 보내왔다. 그 사신에게 <검교 예부상서 檢校 禮部尚書>의 직함을 주어

돌아가게 하였다. 대력大厯 2년 헌영憲英이 죽었다. 그 아들 건운乾運이 왕위에 올랐다. 3년 창부낭중

倉部郎中 귀숭경 歸崇敬 에게 명하여 부절을 가지고 가서 책봉하게 하였다. 7년 사신 김표석金標石을

보내와서 정월을 축하하였다.

<위위원외소경 衞尉員外少卿>의 직함을 주었다. 8년 사신을 보내 래조하면서 금 은 우황 牛黄 어아주

魚牙紬 등 방물을 보냈다. 건중建中 4년 건운이 죽었다. 아들이 없어서 나라사람들이 상상上相 김양상

金良相을 왕으로 세웠다. 정원 貞元 원년 호부낭중户部郎中 개훈葢塤을 보내 책봉하였다. 그 해에 양상

良相이 죽었다. 상상上相 경신敬信이 왕이 되었다.

十四年 敬信卒 其子先卒 國人 立敬信嫡孫 俊邕為王 元和元年 放宿衞王子 金獻忠 歸本國 仍加試祕書監

三年 遣使金力奇 來朝 四年 遣使金陸珍 等來朝貢 五年 王子金憲章 朝貢 七年 重興卒 其相金彦昇

遣金昌南 等告哀 其年 七月 授彦昇 開府儀 同三司 檢校大尉 新羅國王 彦昇妻貞氏 冊為妃 仍賜 大宰相

金斌等三人戟

14년 경신이 죽었다. 그 아들이 먼저 죽었기에 나라사람들이 경신의 적손 준옹을 왕으로 세웠다.

숙위하던 왕자 김헌충을 본국으로 돌아가게 놓아 주고 시비서감試祕書監의 작위를 더하여 주었다.

3년 사신 김역기金力奇를 보내 내조하였다. 4년 사신 김육진金陸珍 등을 보내 수호하였다.

5년 왕자 김헌장 王子金憲章 이 와서 수호하였다. 7년 중흥重興이 죽었다. 그 상 김언승金彦昇이 김창남

 金昌南 등을 보내 상喪을 알려왔다. 7월 언승彦昇에게 <개부의 동삼사 검교대위 신라국왕 開府儀 同三司 檢校大尉 新羅國王>의 직함 주었다. 언승彦昇의 처 정씨貞氏를 비妃로 책봉하고 대재상大宰相 김빈金斌 등 3인에게 문극門戟을 내렸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