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역사 침탈(侵奪)

BC 28세기 요하문명의 濊貊族이 남하 하여 夏, 商, 周를 건국하면서 황하문명을 일구었으며, 鮮卑族이 秦, 漢, 隨, 唐을 건국했습니다. - 기본주제 참조

고고학·유적 자료

<9> 수메르인들의 이상향

자연정화 2015. 3. 16. 13:13

<9> 수메르인들의 이상향


저자 : Zecharia Sitchin     번역/편집 : 주동주


지상낙원엔 노인-미망인 없다"

 

"히말라야 설산-티벳 어딘가에…"

 

점토판에 흔적

 

 

 인류 문명의 첫 뿌리는 잊혀진 수메르 문명에서 찾아야 할 것 같다. 흔히들 인류 문명의 4대 발상지를 말하지만 이들보다 훨씬 전에 지구상에서 문명의 꽃을 피우고 다른 문명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친 수메르는 중앙 아시아에서 시작해 그들만의 독특한 문명의 꽃씨를 가는 곳마다 뿌렸다.

 

 히말라야의 거대한 빙하가 녹아 폭포수처럼 쏟아져서 유럽과 미국 북부를 강타, 고대의 온세상에 대홍수의 전설을 남긴 빙하기 말기에 수메르인들은 천산과 곤륜 산맥을 넘어 남하하는 민족의 대이동을 겪었다.

 

 영국의 한 고고학자에 따르면 메소포타미아 남부로 내려온 수메르는 그들의 왕국 이름인 '구스다나'란 이름으로 각지에 문명의 꽃씨를 전달했다. 그들의 유적지에선 화려한 팔찌와 단검, 악기, 채색한 도자기, 금 은 동의 식기류가 나오고 현대 여성 못지 않게 치장한 아름다운 샤바트 왕비의 전신상은 오늘날에도 영국박물관에서 요염한 자태를 뽐내고 있다. 근처에 금광도 없는 척박한 토지에 자리잡은 이들은 금은보화로 몸을 치장하기 위해서 먼 나라들과 활발한 무역, 상업 거래를 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수메르 인들은 중앙아시아에서 남하하면서 인도에선 모헨조다로란 도시를 건설했다. 기원전 2300년에 도로 폭이 10m에 이르며 상수도와 쓰레기 처리장은 물론 공동 목욕탕까지 갖춘 계획 도시를 만든 것이다. 이들은 멀리 일본까지 와서 설형문자를 전했다는데 한국에도 오지 않았나 하는 의문이 생긴다.

 

 미국의 한 학자가 수메르 점토판을 발견, 해석했는데 그 내용이 놀라웠다. 평화와 행복이 가득하고 노인이나 미망인도 없으며 영원한 행복의 시간만이 흐르는 이상향이 히말라야 설산이나 티벳 어느 곳에 있다는 것. 이들은 히말라야의 설산과 불교의 티벳 문화속에서 인간들이 꿈에도 그리던 환상의 세계와 이상향의 꿈을 키워왔음이 분명하다. 이같은 무릉도원은 지금도 인간의 손길이 닿지않은 어딘가에 숨어있는 것은 아닐까. < 출처=일본 가쿠엔사의 월간 'MU', 번역 및 정리=최 호(칼럼니스트)>

수메르의 다른 물질적 성취 중에는 직물과 의류 산업의 발전도 있다.근대의 산업 혁명은 1760년대에 영국에서 방적과 방직 기계가 발멸되면서 시작되었다.그후 대부분의 나라들이 산업화를 위한 방적 산업을 발전하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수메르에서 발굴된 증거를 보면 이것은 기원전 3800년경에 메소포타미아에서 처음 직물이 나타났다.
고대 수메르는 직물보다는 장신구 옷이 더 유명했다.구약의 여호수아7장21절에는 여리고를 공격한 후에 한 사람이 전리품 중에서 시날에서 만든 아름다운 외투 한 벌을 취햇다 그런 행위에 대한 벌이 죽음이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그당시 그것을 얻기 위해 목숨가지 바치는 사람이 있었다.수메르 옷을 투그라고 불렀는데 로마시대 토가의 원형이 된 것이다그런 옷들은 통칭해서 투그투셰라고 불럿는데 이는 둘러 입이는 옷이라는 뜻이다.수메르의 유물들을 보면 옷의 다양함과 화려함뿐만 아니라 옷과 머리 모양 ,장신구의 조화와 고급스러운 취향에도 놀라게 된다.

 

고대 수메르인은 이러한 환유적인 방식을 즐겨 사용하였는데,이는 체계를 갖춘 텍스트로 지금까지 현존하여 현생인류의 인식의 근원 및 심층구조에 대한 귀중한 자료로서 자리매김하고 있다.

가령, 수메르인들의 샹그릴라이자 에덴으로 여겨졌던 ‘딜문’은 질병도, 또 죽음도 없는 불멸의 땅으로 생각되었는데 이는 ‘딜문에서 갈가마귀는 울지 않는다.’는 환유적인 표현으로 바뀌어 표현되고 있으며,이는 갈가마귀와 시신의 환유적인 인접성을 통한 의미의 확장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방식의 인식적 확장은 비단 시의 영역에서만 머무르지 않는다. 니푸르에서 발견된 기원전 2000년 경의 의학서에는 ‘바다’기름, ‘강’기름 등 재료의 산지와의 인접성에 의한 명칭이 부여된 기표를 볼 수 있는데 이 역시 일상적인 명명에 있어서도 환유가 쓰였음을 보여준다.

 

이와 같은 브리콜뢰르로서의 사고방식, 즉 현실에서의 인접성을 통한 의미의 확장은 단일화된 원리로서 세계의 원리를 구속시키지 않음으로써 보다 창의적이고 자유로운 인식의 확장을 가능하게 하며,실제로 이러한 장점을 구조로써 체득하고 있던 수메르인들의 사고방식은 대단히 독창적인, 폭 넓은 스펙트럼을 가지고 있었다. 반면에 이러한 환유적인 인식은 그 환유가 빚어진 환경에서 벗어나면 기표가 아하(aha)단계로 진입할 수 없게 된다는 약점을 지니고 있다.

 

환유에서 기표와 기표를 엮어주는 요소는 실제적인 경험에서만 인식될 수 있는 인접성에 있기 때문이다.그러한 까닭에 기원전 3000년 전의 환경과 현실 기표들의 관계를 심도 깊게, 또한 한편으로는 게슈탈트적으로 인식하지 못한다면, 혹은 나아가 이러한 환유적인 맥락을 은유로서 인지하려는 오류를 범한다면 고대 수메르에 대한 원형적인 복원은 요원할 것이다.

 

즉, 다시 말해 그들이 남겨놓은 다양한 메시지를 은유와 논리, 그리고 통시적 환유 요소들의 중층 구조로서 이루어진 오늘날의 철학과 종교를 통해 그들을 고찰하려 하는 것은다소 위험할 수 있다는 것이다.

언뜻 보기에는 신화구조의 유사요소들의 근본으로서 존재하는,코어이자 메타데이타로 고대 수메르의 텍스트를 인식하는 것이 옳다고 볼 수 있으나,아직 그들의 환경에 대한 텍스트와 과학적 데이터가 턱없이 부족한 상황에서 구조적인, 혹은 몇몇 기표의 유사성에 대한 은유적인 직관만으로 현대의 철학과 종교와 맞물리게 엮어 놓는다면 이것은 고대 문명에 대한 폭력일 수도 있다고 본다.

 

유사기표의 통시적인 맥락으로서의, 나아가 그러한 맥락의 원형으로서 수메르의 문명을 인식하는 일은  조금 더 풍부한, 그리고 조금 더 과학적인 수메르에 대한 사료와 기표, 그리고 구조를 복원할 수 있을 때에 비로소 가능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