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역사 침탈(侵奪)

BC 28세기 요하문명의 濊貊族이 남하 하여 夏, 商, 周를 건국하면서 황하문명을 일구었으며, 鮮卑族이 秦, 漢, 隨, 唐을 건국했습니다. - 기본주제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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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강 문명(長江文明) / 허무두 문화(河姆渡文化)

자연정화 2018. 7. 4. 11:22

장강 문명(長江文明) / 허무두 문화(河姆渡文化)

 

장강 문명(長江文明)

 

장강 문명(長江文明)은 중화인민공화국 장강 유역에서 일어난 고대 문명의 총칭이다. 황하 문명과 함께 중국의 대표 문명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장강 문명의 시기는 기원 전 14,000년경부터 기원 전 1,000년경으로 추측되며, 이후의 초나라, 오나라, 월나라 등의 국가로 발전해 갔다.

 

발견

20세기 전반에 황하 문명의 양사오 문화가 발견된 이래, 황하 유역에서 많은 유적이 발견되었으며, 중국 문명의 발상은 황하 유역이며, 그 후 점차 장강 유역 등의 주변지역으로 확대되었다라는 견해가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1973년, 1978년의 발굴조사에서 발견된 저장성 위야오 시의 하모도 유적(河姆渡文化)에 의해, 이 설은 뒤집어졌다. 하모도 유적은 기원 전 6000년 ~ 기원 전 5000년경으로 추정되어 대량의 볍씨 등의 벼농사의 흔적이 발견되었다. 벼농사를 짓고있었기 때문에 그 주거형식은 고마루식(高床式)이었다.

 

이와 같이 하모도 유적은 황하 문명과는 뚜렷하게 계통이 다른 것이어, 지금까지의 중국 문명이 황하 문명이라고 하는 공식뿐만 아니라, 고대 문명이 세계4대문명이라고 하는 공식도 타파되어 당시의 정설을 크게 뒤집는 일이 되었다.

 

더욱 동북지역의 랴오허 주변에서도 문명의 흔적이 발견되어, 현재는 랴오허 주변, 황하 상, 중, 하류 지역, 장강 상, 중, 하류 지역, 각각이 서로 서로 영향을 주었으며 한편으로 독자적인 발전을 이루어 갔다고 생각되고 있다.

 

 

특징

초기 단계에서는 벼농사가 중심이며, 밭농사 중심의 황하 문명과의 뚜렷한 차이를 보이기 때문에 모두 독자적인 농경을 발전시켰다고 할 수 있다. 장강 문명의 발견으로 벼(자포니카 쌀)의 원산이 장강 중류 지역으로 거의 확정되어 벼농사의 발상도 여기라고 볼 수 있다.

 

중류 지역의 추자링 문화(屈家嶺文化, 기원 전 3000년? ~ 기원 전 2500년?), 하류 지역의 량주 문화(良渚文化, 기원 전 3300년? ~ 기원 전 2200년?)의 시대를 최절정으로 이후에는 쇠퇴하였으며, 중류 지역에서는 황하 유역의 얼리터우 문화가 이식되었다. 황하 유역의 사람들에 의해 정복된 결과라고 추측되며, 황제와 신농이나 치우의 대립 등의 전설은 황하 문명과 장강 문명의 세력 다툼에 원인이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하모도 유적에서는 구슬로 만들어진 옥기나 칠기 등이 발견되고 있어 우청 문화(呉城文化, 기원 전 1400년? ~ 기원 전 1000년?)에서는 자기가 발견되고 있다. 중국 문화의 중요한 일익을 담당하는 이러한 문물의 원류가 여기에서 나왔다고 하는 설도 있다.

 

이러한 문화들은 이후 초나라, 오나라, 월나라에 계승되었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어떠한 흐름으로 연결되는지는 아직도 알 수 없다. 본격적인 발굴이 시작된지 30년 정도 밖에 되지 않았고, 발견된 유적의 물적 량에 비해 연구가 뒷받침 해주지 못하고 있다. 쓰촨 분지에서는 오랫동안 문명의 발견이 없었지만, 1986년에 쓰촨성 광한 시의 삼성퇴 유적(三星堆遺跡)에서 대량의 청동기 유물이 발견되어, 단번에 주목을 받았다.

 

 

이곳 유적지에서는 특이한 특징을 가진 유물이 많이 발굴되었으며, 청동상의 얼굴에 썼던 황금가면도 발굴되었다. 고대에 존재하였던 촉나라라고 생각할 수 있다. 이 촉나라는 《사기》에서는 거의 등장하지 않았고, 아직 중화문명의 시야의 밖의 지역이었다. 오직 기원 전 316년에 진나라의 혜문왕 사마착에 의해서 멸망당했고, 진나라의 세력권에 들어갔던 것만 기록되어있다.

 

또한 촉 지역의 지역 사서인 《화양국지》에서는 이 고대 촉에 대한 자세한 기술이 있었지만, 황하 문명 중심의 사관에서는 이러한 문헌이 상상의 산물이라고 생각되고 있었다. 그러나 삼성퇴 유적의 발견으로 현실성을 띤 것으로 증명되었다.

 

2004년까지도, 장강 문명, 쓰촨 문명에서도 체계화된 문자는 발견되지 않았다. 다만, 문자모양의 기호는 발견되었으며, 그 연대는 기원 전 2000년 ~ 기원 전 600년으로 추측하고 있다. 현재 출토하고 있는 최고의 갑골 문자가 기원 전 1,300년 정도(무정기)의 것이므로, 이것이 문자라고 증명되면 갑골 문자에 앞선 문자가 된다.

 

 

허무두 문화(河姆渡文化)

 

허무두 문화(河姆渡文化, Hemudu culture, 기원 전 5000년경-기원 전 4500년경)은 중화인민공화국에 존재하는 신석기 시대의 문화로 항저우만 남안에서 저우산 군도에 걸친 지역(현재의 저장성 동부, 닝보 시에서 저우산 시)에 펼쳐져 있다. 위야오 시의 하모도촌의 하모도 유적에서 발견되었다고 하여 하모도 문화라고 불린다.

 

허무두 문화의 돼지 그림 토기 / 벼농사를 특징으로 하는 허무두 문화에서는 개, 돼지 등 가축을 길렀다.

 

개요

허무두 문화는 마자방 문화와 공존하였으며, 이 두 문화는 두 개로 분리되어 뚜렷한 특징을 가지고 있었고, 문화적 교류를 하였다.

 

허무두 유적은 1973년에 발견되어 1973년부터 1974년 그리고 1977년부터 1978년의 두 번에 걸친 발굴 작업을 했다. 수도의 볍씨가 대량으로 발견되었기 때문에, 인공적으로 대규모의 벼를 재배한 것이 밝혀졌다. 이것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벼 재배의 예이다. 벼 이외에도 호리병박, 마름, 대추, 연, 도토리, 콩 등의 식물이 유적에서 발견되었다. 이외에도 양, 사슴, 호랑이, 곰, 원숭이 등의 야생 동물이나 물고기 등의 수생생물, 돼지, 개, 소 등의 가축도 발견되었다.

 

CMOC Treasures of Ancient China exhibit - black pottery cauldron

 

유적에서는 고상식 주거(高床式住居, 지상보다 마루를 높게 한 건물)가 많이 발견되고 있다. 유물들 중 석기는 비교적 적고, 돌도끼 등 공구로서 사용된 마제 석기나 장식품으로서 사용된 것들이 많이 발견되고 있다. 또한 목기나 뼈로 만든 도구도 많이 발견되었다. 그 중 목조어(木雕魚)는 중국 최고의 목제 장식물이다. 또한 나무로 완성된 모양이 붙은 견갑골제의 사(논을 경작하는 도구)나 도, 섬, 활과 화살, 방추나 바늘 등 대량의 방직용의 도구, 뼈로 완성된 피리나 나무북도 발견되었다.

 

허무두에서는 중국 내에서는 가장 오래된 칠기도 발견되었다. 도기는 흑도, 홍도, 홍회도 등 1000도 전후의 비교적 높은 온도로 구운 것을 볼 수 있어 일정한 기술 수준을 가지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기하학모양이나 식물문양, 노끈 무늬 등이 새겨져 있고, 안에는 사람의 머리를 본뜬 것이나 배를 본뜬 토기도 있다.

 

허무두 문화는 태호 주변에서 항저우만 북부에 분포한 마자방 문화(馬家浜文化)와 거의 같은 시기에 해당해, 다른 문화가 서로 서로 영향을 주면서 공존하고 있었다고 추측하고 있다. 허무두 유적에는 근처를 흐르는 요강이 두 번 큰 홍수를 일으켜 유로를 바꾼 자취나, 홍수로 소금물이 논을 침식한 흔적 등이 남아있어, 이러한 재해로부터 유적이 버려졌다고 생각할 수 있다.

 

미생물이나 꽃가루 등의 분석으 허무두 문화는 홀로세의 기후 최온난기의 한중간에 성립되었다고 추측된다. 항저우만 부근의 해면 수위의 연구 결과에서는 7000년 전부터 5000년 전까지는 해면이 낮은 위치에서 안정되어 있었지만, 5000년 전부터 3900년 전에는 빈번히 범람하고 있었다. 고마루식의 주거도 잦은 비 등 고온 다습한 기후의 특징에 속하는 산물이다.

 

 

 

하모도(河姆渡)문화 - 양자강 문화와 하모도 유적지

출처 : 황세옥의 전통건축이야기

 

신석기 중기 앙소문화 시절 니조반축법으로 만든 도자기.

 

하모도 동이족 유적지 가옥

 

신석기 시대 주요 도기제작방법 중 하나인 니조반축법(흙덩어리로 쌓아가며 만드는 법) 신석기 중기 앙소문화 시절 이미 출현. 그릇형 솥과 속이 깊은 항아리 심복관.모두 니조반축법으로 흙덩어리를 가공해 붙여 만든 것이다. 양자강 하류 상해 항주 소흥 부근의 동이족 유적지인 하모도 유적지의 간란식 방옥 구조도.

 

중국 고고학계에서는 중국에서 가장 이른 목구조 건축물이라 자랑한다. 양자강 하류는 하천이 그물처럼 얽힌 습한 지대로 아래는 돼지 등 가축을 기르고 사람은 위에서 생활했다. 건축은 기후와 풍토를 반영하므로 지금의 한반도 건축 습성과는 당연히 다를 수밖에 없다. 길이가 23미터이므로 70평 이상의 대단히 큰 가옥이다.

 

중국의 가장 대표적인 신석기 유적은 누구나 황화강 유역의 문명을 든다, 앙소 문화에서 용산 문화로 발전하여, 용산문화 세력이 은나라 건국에 상당한 영향력을 주었다는 것이 지배적인 이견 이었다. 이것은 중국의 고대사에서 가장 전통적인 견해인 문화 일원론인데, 이러한 일원론을 전면적으로 수정하게 되는 유적지가 발견되었다.

 

그것은 황화문명과 대비되는 양자강 문화이다. 양자강은 황화와 상당한 거리가 있을 뿐 아니라, 황화와 풍토와 기후가 전혀 다르다.

황화는 비록 범람을 반복하는 척박한 땅이었지만, 범람지를 피하면 비교적 농사짖기 적합한 농토를 어렵지 않게 구할 수 있었다. 반변 양자강 유역은 덥고 습한 지역이어서, 농사짖기가 오히려 더 까다로웠다.

 

양자강 유역의 문화는 한수지대에 굴가령 문화, 회수 지역에 청련강문화, 절강성 북부와 강소성 남부의 양저 문화, 양자강 하류지구의 호숙문화등 총 4개로 나눈다.

그런데 호숙문화를 대표한다고 할 수 있는 하모도 문화는, 그 독자성으로 인해 이질적인 문화로 받아들여지기 까지 한다.

 

우선 기원전 5000년경까지 소급될 뿐 아니라, 땅을 일구는데 쓰이는 뼈 보습이 대량으로 출토되어 관심을 촉발 시켰다.

뼈 보습의 대량 출토는 강남지방이 재래적인 화전농법에서 벗어나, 물을 대어 농사를 짖는 水田농법으로 발전하여 수도작이 시작되었음을 입증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가옥역시 앙소문화에서는 수혈식인데 비해, 하모도에서는 난간식 건축양식을 사용하고 있다. 즉 구덩이를 파는 것이 아니라, 목조건축 기술이 발전되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더구나 양자강 일대의 신석기 문화가, 황화강 유역의 신석기 문화보다 앞서기 때문에, 해석하기에 따라서는 오히려 이곳이 중국 문명의 시발점이 되었다고 볼 수도 있는 문제이다.

 

현재까지는 가설에 불과하지만 양자강 문화가 중국 문화의 시원이라면, 보다 복잡한 문제가 초래 될 수 밖에 없다. 비록 신석기 문명의 발생을 중국 자생론으로 하여, 우월함을 주장 할 수는 있으나, 그렇게 되면 중국 최초의 왕조로 평가되는 상(은허)은, 동이족이 주체세력이 된다. 그리고 동이족 계열 중에서도 현재까지의 정통성을 주장 할 수 있는 것은 우리민족 밖에는 없다.

 

이것은 환단고기의 진위여부와는 무관하다. 굳태어 환단고기가 진서임을 밝히지 않는다고 하여됴, 세계 4대 문명으로 평가되는 은허 문명의 주체가 우리민족이 되는 것이다.

 

아무튼 중국은 양자강 문화의 발굴 성과에 힘입어, 문화의 다원성과 자생론등으로 해석 하고 있다. 서방 문명의 전파로 탄생된 앙소 문화와는 달리, 중국민족 스스로도 신석기 문명을 창조 해 샐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같은 설명은 앞서 지적 하였듯 은허 문명의 주체를 어떻게 볼 것인가란 문제가 있어, 최근에는 중국내 소수민족이 세운 다양한 신석기 문화역시, 모두 중국의 문화라는 중화주의적 입장을 유지해 나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릉하 동쪽방면에서 발굴되는 이질적인 문화의 주체세력을, 과연 중국내 소수민족으로 볼 수 있느냐는 문제제기에 대해서는 아직 분명한 입장이 나오고 있지 상태이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대릉하 동쪽 방면의 문화 주체세력은 당연히 고조선이며, 우리민족은 고조선을 계승 발전한 주체세력임으로, 대릉하 동쪽 방면 문화의 주인은 바로 우리임을 의심하지 않는다.

 

장강 중하류 신석기 중기 하모도(河姆渡)문화의 상아비상기(象牙匕狀器)

 

*봉조형 상아비상기(象牙匕狀器)-상아비수

 

-아주 오래전 고대 동방민족은 새(鳥)로써 민족의 도등(圖騰:부족국가 부대깃발 로고)을 삼거나 혹 숭배대상으로 삼은 예가 많았는데, 이 상아 비상기는 전체 모양이 봉조(鳳鳥)의 형태를 띄고 있어, 당연히 봉(鳳) 도등(圖騰) 숭배의 반영으로 보인다. 좌측은 봉조 머리형의 머리 손잡이이고, 그 오른쪽의 사각형부분은 봉조 몸체형의 손잡이 부분이다. 제일 오른쪽은 봉조 꼬리 형태의 비수 몸체이다.-(중국고고학계)

 

하모도 유적지에서 이러한 봉 도등 숭배의 상아 비상기가 나오고 또 이를 중국 고고학계가 그대로 소개하는 것으로 보아도 하모도 유적지는 동이민족의 문화권임을 재삼 확인할 수 있다. 하모도 유적지에서 상아비상기의 출토는 그 주인의 정체를 밝혀주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 한민족에게 대단히 중요한 의의를 갖는다. 반도 고고학에 매몰된 한국고고학계는 이러한 중국측의 연구결과에 대해 입한번 벙긋한 사실이 없다. 참으로 안타까운 사실이다.

 

동이족의 상고 웅거지 장강(양자강)의 놀 정경. 장강 유역의 신석기 시대 유적지 하모도(河姆渡)유적지는 전형적인 동이족의 유적지이다. 당시의 취락은 지면 위에 대형으로 건축한 것과 반 지혈식 소형 건축이 있어서, 취락지 외부에는 둥근 해자(도랑)와 담장으로 에워싸고 있어서, 야수들이 침입해 들어오는 것을 방어했으니, 이는 선사시대 성(城) 담의 맹아이다.

 

취락내의 건축은 반 지혈식, 지면식 및 방패 울타리식인 간란식(干欄式)으로 건축했다. 간란식 방옥은 길이가 수 십 미터에 달했는데, 이들 일부 약간을 나누어 기본 단위 개체가 주거했으며, 작은 방에는 통상 개개 소 가정이 입주하고, 동일 건축내에 일개 가족 혹 씨족 단위가 주거했다. 일개 촌락은 곧 이러한 모습의 약간의 방옥이 합한 것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씨족 집단이었다. 이러한 류의 간란식(干欄式) 건축은 20세기 50년대까지 곧바로 이어져 중국 해남도(海南島) 동이족인 여(黎)족 거주지구에서 거듭 볼 수 있다.

 

이러한 간란식 건축은 지면 위에 당시 거주민이 고각란(高脚欄)이라 부르는 높은 시렁을 걸어놓아 위에는 사람이 거주하고 아래에는 가금(家禽)이나 가축을 사육하는데 이는 양자강의 온습 다우한 환경에 적합하다. 이러한 거주습성이 한반도에서 가장 유사한 것이 바로 온습다우한 제주도인데 제주도에서도 아래층이나 화장실에 토종 돼지를 키웠다.(보통 똥돼지라 한다)

 

동이 제족이 사용했던 항주 부근 하모도(河姆渡) 유적지의 골사(骨 :뼈보습)

 

장강 유역 식기 주발인 붉은 칠 오이 모서리형 주발

 

*골사(骨 :뼈보습)사진을 한번 보자. 골기는 항주 부근 하모도(河姆渡) 유적지의 주요 생산도구로 하모도 유적지에 공히 백 여 건 이상 발굴되었다. 사진의 골사(骨 :뼈보습)는 사슴, 물소의 견갑골로 가공해 만든 것이다. 그 형상이 후세 토지를 갈아엎어 경작하는 용도로 사용하는 가래( )와 유사함으로 말미암아, 학자들은 이것이 흙을 깊게 가는 농구이며, 토지를 평평하게 고르고 제초용 농구라 인정했는데, 이는 하모도(河姆渡) 문화의 전형적인 농기구이다.

 

* 신석기시대 장강 유역 식기 주발인 붉은 칠 오이 모서리형(朱漆瓜 形) 주발(碗= )

식기 주발. 식기내외에 한결같이 주홍색 안료를 사용했는데, 원시사회 시기의 이른 시기에, 성능과 칠이 서로 동일한 칠기(漆器)가 생활용품가운데 이미 출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