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역사 침탈(侵奪)

BC 28세기 요하문명의 濊貊族이 남하 하여 夏, 商, 周를 건국하면서 황하문명을 일구었으며, 鮮卑族이 秦, 漢, 隨, 唐을 건국했습니다. - 기본주제 참조

홍익인간·인류공영/한국(BC7197)

황하문명(黃河文明) / 양사오문화(仰韶文化)

자연정화 2018. 7. 3. 22:02

황하문명(黃河文明) / 양사오문화(仰韶文化)

 

구석기시대

중국의 역사는 구석기시대 초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지금까지 란톈 원인[藍田猿人], 베이징 원인[北京原人 Homo erectus pekinensis] 등의 인류화석이 출토되어 구석기시대 중국 대륙에 호모 에렉투스, 즉 직립원인이 살았음이 증명되었다.

 

특히 베이징 원인의 화석이 발견된 베이징 시 저우커우뎬[周口店]에서는 40여 개의 인골(人骨) 외에도 수많은 석기와 동물화석이 함께 발굴되어, 이를 통해 베이징 원인의 생활과 거주환경을 추측할 수 있다. 산시 성[山西省] 딩춘[丁村], 광시 성[廣西省] 마바[馬壩] 등에서는 중기 구석기시대 유물과 함께 호모 사피엔스의 화석과 치아가 발견되었다.

 

동아시아 구석기 유적 분포도

 

삽 모양의 앞니, 넓은 코, 앞으로 튀어나온 턱 등이 몽골 인종과의 관련성을 시사해준다. 허난 성[河南省] 안양[安陽]을 비롯한 북부지방 여러 곳에서는 후기 구석기시대의 유물도 출토되었다.

 

 

중국 문명의 기원

중국 민족의 문화 기원에 대해서는 아직 확실하지 않은 점이 많다. 현재 어느 정도 확실한 것은 기원전 3000년에 황하 유역을 중심으로 한 화북지대(華北地帶)에 성립되어 있다는 것이다. 중국 원주민은 황하나 그 지류에 연한 단구(段丘) 위를 주거로 삼고, 농촌 취락을 형성하고 있었다. 농경·목축을 하며 수혈주거(竪穴住居)에 살고, 토기·직물·마제석기의 기술을 가지고 있었다.

 

1921년, 스웨덴의 고고학자 앤더슨은 허난성(河南省)의 양사오촌(仰韶村)을 발굴하고 채도(彩陶)를 요소로 하는 각지의 같은 계통의 문화를 양사오 문화라고 이름붙였다.1929년 역사 언어 연구소는 산둥성의 룽산진(龍山鎭) 청쯔야(城子崖)를 발굴했다. 흑도를 요소로 하는 같은 계통의 문화를 룽산(龍山) 문화라고 한다.

 

양사오 문화와 룽산 문화와의 관계는 양사오 문화는 서방에, 룽산 문화는 동방에 각각 지역적으로 대립하여 발달했다고 하는 설과, 양사오 문화가 발달하여 룽산 문화가 성립했다고 보는 두 가지 설이 있는데, 후자가 유력하다. 또한 전후(戰後), 양쯔강 하류역의 장쑤·안후이·저장 지방에 두 문화보다 뒤진 선사 문화가 발견되어 주목받고 있다.

 

 

원중국인(原中國人) Proto Chinese

중국인의 직계인 선조로 신석기시대인(人). 허난성의 양사오 유적의 묘지나 산시성(陝西省) 시안(西安) 동남쪽의 반파(半坡) 유적에서 발굴된 인골을 측정한 결과, 현대 몽골인의 특징이 보임으로써 몽골 인종에 속하는 원중국인이라 이름붙였다. 그러나, 몽골인은 일반적으로 키가 작으며, 반파인(半坡人)은 평균 신장 169.45㎝로 커서, 이 점은 아직 문제로 남아 있다. 이 사회는 모계제(母系制) 사회임과 동시에 남자 노인이 권위를 갖는 연령적 위계제(位階制)가 발달해 있었다.

 

황허문명(黃河文明)

중국의 황허 유역에 성립한 옛문명의 총칭. 문명의 성립이란 일반적으로 국가·청동기·문자의 성립 등이 요소가 되는데. 이런 의미에서 황허 문명의 성립기(成立期)는, 오리엔트나 인도보다 늦은 기원전 2000년경이라 말하고 있다. 선사시대의 중국인의 생활구역은, 황허 유역 지대의 산기슭에 있는 물이 솟아나는 지대에 많으며, 수해를 피하기 위하여 단구(段丘) 위에 거주했다.

 

나일강이나 인더스강 유역에서는, 하천의 정기적인 범람으로 인한 비옥한 흙의 퇴적을 이용한 관개 농업이 성립했으나, 이 점은 중국 농업의 성립 조건과는 다르다. 황토는 잿빛이 나는 황색의 석영(石英)이나 장석(長石) 등의 미립(微粒)의 퇴적으로서, 빗물 속의 석회질을 모아 땅이 비옥하고 부드러워서 농경 생활을 하기에는 아주 적합했다. 이 황토 지대에서 농업 생산력의 발전을 기초로 문명은 성립된 것이다.

 

양쯔강 유역에 고문명이 성립하지 않은 이유는, 고온다습(高溫多濕)하기 때문에 초목이 무성하여, 철기시대 이전에는 개간이 곤란했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최근 양쯔강 중·하 유역의 문화 유적의 발굴 조사가 진척중이어서 그 결과가 주목된다.

 

 

채도(彩陶)

선사시대의 토기로 채색토기·채문토기라고도 한다. 질이 좋고 얇으며, 검은색이나 적색으로 채색된 기하학 무늬, 상징 무늬(象徵紋), 소용돌이 모양의 무늬, 동물 무늬 선 등이 나타나, 바탕색은 산화염(酸化炎)으로 구웠기 때문에 홍색이다. 일반적으로 질좋은 점토를 사용하여 만들고, 녹로는 쓰지 않았으며 표면을 매끄럽게 갈았다. 채색된 그림은 당시 사람들의 심상(心象)을 반영하는 정신적 소산으로, 양사오 문화 초기의 반포(半坡) 유적은 특정한 동물무늬와 삼각형 무늬·그물 무늬 따위의 기하학 무늬가 특징이다.

 

이후 먀오디거우(廟底溝) 유적은 동물 무늬에 새와 개구리가 있고, 기하학 무늬에 곡선의 느낌을 나타내는 선 등이 나타나 지역에 따라 약간의 그림의 변화를 보여준다. 중국의 채도는 간쑤(甘肅)·칭하이(靑海)·산시(山西)·허난(河南) 등지에서 출토되어 양사오 문화의 한 요소가 되었다. 채도는 서방 문화의 영향에 의해서 제작되었다고 하는 설이 일반적인데 독자적으로 중국에서 발생했다는 설도 있다.

 

동아시아 신석기문화

 

 

 

양사오문화(仰韶文化)

 

양사오 문화(중국어: 仰韶文化, 병음: Yǎngsháo wénhuà)는 황하 중류의 채도를 동반한 신석기의 농경문화이다. 채도가 특색으로 채도문화(彩陶文化)라고도 한다. 기원전 5000년 ~ 기원전 3000년 사이에 존재했다.

 

개요

유적의 대부분은 강기슭의 대지(臺地)에 있고, 거주지와 공동묘지가 있다. 정주생활을 했고 조·수수 등을 재배하고 가축 사육과 사냥, 고기잡이도 병행했다. 간석기·뗀석기·돌식칼 등으로 수확하고, 흙을 구워서 만들거나 돌을 갈아 만든 팔찌도 애용했다.

 

토기로는 붉은간토기와 바탕흙에 모래알이 함유된 회도(灰陶)가 있었는데, 특히 일부 붉은간토기에 기하학무늬와 사람 얼굴 등을 그린 채도는 제사라든지 묘장공헌(墓葬供獻)에 쓰였다. 성인(成人)은 공공묘지 안의 구덩이에 매장되었으며, 어린 아이는 옹관장(甕棺葬)으로 집 근처나 마루 밑에 묻혔다.

 

유적은 하남성(河南省) 서부, 산서성(山西省) 남부, 섬서성(陝西省) 중부 등지에 분포되어 있으며, 대표적 유적으로는 산시 성 서안시(西安市) 반파(半坡) 유적을 표준으로 하는 반파 유적과 하남성 섬현(陝縣)의 먀오디거우(廟底溝) 유적을 표준으로 하는 먀오디거우 유적이 있다. 시간적으로는 반포 유적쪽이 더 오래되었다.

 

양사오 문화는 황하 상류에 전파되어 간쑤양사오(甘肅仰韶)문화의 탄생과 산둥(山東)의 농경문화에 영향을 끼쳤다. 중원에서는 이 문화에 뒤이어 룽산 문화(龍山文化)가 성립했다. 최근의 새로운 조사를 통해 허난 성 신정 현(新鄭縣)의 배리강(裵李崗)과 허베이 성 무안 현(武安縣)의 자상(磁上) 등에서 양사오 문화보다 앞서 있었던 초기 농경문화의 존재가 알려지게 되었다.

 

 

중국 신석기 시대 양사오문화(仰韶文化)

중국 황허[黄河]의 중류 지역에서 나타난 신석기시대(新石器時代) 문화로서 기원전 5000년에서 기원전 3000년 무렵까지 존속하였다. 1921년 스웨덴 사람인 안데르손(Johan Gunnar Andersson, 1874~1960)이 허난성[河南省] 싼먼샤시[三門峽市] 민츠현[澠池縣] 양사오촌[仰韶村]에서 유적(遺蹟)을 처음 발견하여 양사오문화[仰韶文化]라고 불리며, 그 뒤 황허[黄河]의 중류(中流)와 그 지류(支流)인 웨이수이[渭水], 펀수이[汾水], 뤄수이[洛水] 유역에서 1,000여 곳의 유적(遺蹟)들이 발견되었다.

 

양사오문화[仰韶文化]의 유적은 산시성[陝西省]에서 가장 많이 발견되고 있으며, 허난성[河南省] 서부와 산시성[山西省] 남부를 중심으로 서쪽으로는 간쑤성[甘肅省]과 칭하이성[靑海省]의 경계, 남쪽으로는 후베이성[湖北省]의 서북지방까지 폭넓게 분포하고 있다. 라오관타이[老官台] 문화의 특징을 계승하여 나타난 것으로 여겨지며, 시대 순서에 따라 반포[半坡] 유형, 먀오디거우[廟底溝] 유형, 반포[半坡] 만기(晚期) 유형 등으로 나뉜다.

 

양사오문화[仰韶文化]는 농경(農耕)을 중심으로 경제 생활이 이루어졌지만, 수렵(狩獵)과 어로(漁撈)도 여전히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 주로 조[粟], 수수 등의 작물을 재배했으며, 일부에서는 보리나 벼의 재배가 이루어지기도 하였다. 돼지나 개, 양 등의 사육이 이루어졌는데, 개와 돼지의 뼈에 비해서 양의 뼈는 상대적으로 적게 출토되었다. 실로 뜨개질한 것과 같은 편직물(編織物) 무늬가 새겨진 토기(土器)가 출토되어 편직(編織) 등의 원시 수공업이 발달한 것으로 해석되며, 원시적인 형태이지만 양잠(養蠶)이 이루어졌을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다.

 

줄무늬 도기 CMOC Treasures of Ancient China exhibit - pottery ding

 

기둥을 세워 바닥을 지면에서 높이 올려 세우는 고상식(高床式) 건축물(建築物) 유적은 곡물창고(穀物倉庫)로 사용된 것으로 보이며, 이는 양사오문화[仰韶文化] 시대에 농업 생산력이 발달했음을 알려준다. 하지만 농지(農地)를 영속적(永續的)으로 이용하는 집약농업(集約農業)이 이루어졌는지에 대해서는 학계(學界)에서 다양한 주장이 나타나고 있다. 농경이나 수렵에는 돌도끼, 돌호미, 돌삽, 뼈삽, 돌가래, 돌낫 등의 간석기와 골각기 등이 사용되었는데, 석기(石器)의 종류가 쓰임새에 따라 매우 전문화되어 나타나는 특징을 지닌다. 돌을 갈거나 흙을 구워서 만든 팔찌 등도 발견되었다.

 

주거지는 주로 강변의 높은 지역에서 발견되며, 다양한 규모의 촌락(村落)들이 발견된다. 주거지는 대부분 원형(圓形)이나 네모반듯한 방형(方形)의 형태를 띠고 있는데, 초기에는 원형(圓形)이 많지만 뒤로 갈수록 방형(方形)이 주로 나타난다. 진흙에 풀을 섞어 수혈식(竪穴式)의 집을 짓고 살았는데, 집 부근에 따로 움구덩이를 파서 창고로 사용했다. 다른 부족이나 맹수의 침입을 막기 위해 촌락(村落) 주변을 띠처럼 둘러싸고 도랑을 파기도 했으며, 촌락 밖에 묘지(墓地)와 도요(陶窯) 등을 두었다.

 

시안[西安] 린퉁[臨潼]의 쟝자이[姜寨] 유적(遺蹟)은 이러한 양사오문화 시대의 촌락 구조를 잘 보여준다. 양사오문화는 후기(後期)로 갈수록 단혼 가정의 독립 등 부계사회(父系社會)의 특징이 뚜렷해져서 모계사회(母系社會)에서 부계사회(父系社會)로의 변동을 보여주며, 빈부 격차나 사회 내부의 계층화가 진행되는 모습도 나타낸다.

 

기원전 4800 경의 반포기 도기 Yangshao Cordmarked Amphora Banpo Phase 4800BCE Shaanxi

 

양사오문화[仰韶文化]는 백색(白色), 적색(赤色), 흑색(黑色)의 토기(土器)에 인면(人面), 동물(動物), 기하학적 무늬를 새긴 채도(彩陶)를 특징으로 하여 채도문화(彩陶文化)라고도 한다. 중기(中期) 이후에는 물레의 사용도 나타나며, 룽산문화[龍山文化]의 흑도(黑陶) 문화에 영향을 끼쳤다.

 

양사오문화[仰韶文化]의 채도(彩陶)는 시대와 지역에 따라 여러 유형으로 구분되는데, 산시성[陝西省] 시안[西安]의 반포[半坡] 유적을 표준으로 하는 반포 유형과 허난성[河南省] 산현[陝縣]의 먀오디거우[廟底溝] 유적을 표준으로 하는 먀오디거우 유형의 채도가 대표적이다.

 

반포[半坡] 유형에서는 사람얼굴, 물고기그림, 사슴무늬 등의 동물 무늬가 주로 나타나며, 22종의 각획부호(刻劃符號)도 나타나 고대문자의 발달과 관련해 주목을 받고 있다. 먀오디거우[廟底溝] 유형에서는 다양한 기하학적인 무늬의 채도가 주로 나타난다.

 

양사오 문화(仰韶文化) / 채도문화(彩陶文化)

황허강(黃河) 중류의 채도를 동반한 신석기의 농경문화. 채도가 특색으로 채도문화(彩陶文化)라고도 한다. 유적의 대부분은 강기슭의 대지(臺地)에 있고, 거주지와 공동묘지가 있다. 정주생활을 했고 조·수수 등을 재배하고 가축 사육과 사냥, 고기잡이도 병행했다. 간석기·뗀석기·돌식칼 등으로 수확하고, 흙을 구워서 만들거나 돌을 갈아 만든 팔찌도 애용했다.

 

토기로는 붉은간토기와 바탕흙에 모래알이 함유된 회도(灰陶)가 있었는데, 특히 일부 붉은간토기에 기하학무늬와 사람 얼굴 등을 그린 채도는 제사라든지 묘장공헌(墓葬供獻)에 쓰였다. 성인(成人)은 공공묘지 안의 구덩이에 매장되었으며, 어린 아이는 옹관장(甕棺葬)으로 집 근처나 마루 밑에 묻혔다.

 

유적은 허난성(河南省) 서부, 산시성(山西省) 남부, 산시성(陝西省) 중부 등지에 분포되어 있으며, 대표적 유적으로는 산시성 시안시(西安市) 반포(半坡) 유적을 표준으로 하는 반포 유적과 허난성 산현(陝縣)의 먀오디거우(廟底溝) 유적을 표준으로 하는 먀오디거우 유적이 있다. 시간적으로는 반포 유적쪽이 더 오래되었다.

 

양사오 문화는 황허강 상류에 전파되어 간쑤양사오(甘肅仰韶)문화의 탄생과 산둥(山東)의 농경문화에 영향을 끼쳤다. 중원에서는 이 문화에 뒤이어 룽산문화(龍山文化)가 성립했다. 최근의 새로운 조사를 통해 허난성 신정현(新鄭縣)의 배리강(裵李崗)과 헤베이성 무안현(武安縣)의 자상(磁上) 등에서 양사오 문화보다 앞서 있었던 초기 농경문화의 존재가 알려지게 되었다.

 

중국 신석기 시대 앙소문화(仰韶文化) 어문채도분(鱼纹彩陶盆) 높이 17cm 입지름 31.5cm

 

양사오 유적(仰韶遺跡)

허난성(河南省) 몐츠현에 있는 신석기시대 농경 취락의 유적. 1921년 스웨덴의 고고학자 앤더슨에 의하여 발굴 조사되었다. 수혈주거(竪穴住居)·우물·묘지나 돌도끼·돌로 만든 식칼·돌살촉 등의 마제(磨製)석기, 회도(灰陶)·흑도(黑陶)·채도(彩陶) 등의 토기가 발견되었다. 양사오에서 출토된 채도를 요소로 하여, 신석기시대 속에 양사오 문화기를 설정했다.

 

그러나 양사오 유적 그것은 단일한 문화기의 유적만은 아니고, 여러 시대가 뒤섞인 유적이다.전형적 유적은 산시성 시안 부근의 반포(半坡) 유적이 있고, 양사오 문화에의 과도기 유적으로 허난성 먀오디거우(廟底溝) 제2기의 문화 유적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