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제(炎帝) 신농(神農)
신농(神農)은 중국 삼황의 하나로 흔히 '염제(炎帝) 신농씨'로 불린다. 별칭으로는 열산씨(烈山氏), 염제주양씨(炎帝朱襄氏)라고 불리기도 한다. 황제 헌원씨 이전에 한족에게 농사짓는 방법을 알려주었으며, 한의학의 창시자로 불린다. 한의학의 최초의 저서로 유명한 '신농본초경'을 저술하였다.
염제신농씨는 5,300년전 중국 섬서성 강수에서 자라 지명을 따서 강씨(姜氏)를 득성하게 되었다고 한다. 춘추시대 제나라의 왕인 강태공(姜太公)도 염제신농씨의 후손이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염제신농씨는 세계 강씨(姜氏)의 시조이다. 염제신농씨는 황제헌원과 더불어 중화민족의 조상으로 숭배되고 있으며, 베트남 민족의 시조이기도 하다.(강씨 웅왕왕조가 베트남을 2,000년간 통치함.)
염제신농씨의 후손으로는 중국의 천수강씨(天水姜氏), 한국의 진주강씨(晋州姜氏), 중국 한족(漢族) 고씨(高), 한국 및 중국 범양노씨(盧), 여(呂), 오(吳), 중국 한족(漢族) 허씨(許), 평해구씨(丘,邱), 강(强), 온양 방씨(方), 중국 제양당 정씨(丁), 주(朱), 장(章), 사(謝), 제(齊), 습(習), 악(岳), 시(柴), 하(賀), 경(景), 신(申), 향(向), 가(柯), 뢰(賴), 상(尙), 중국 돈황 홍씨(洪)(남양홍씨 당홍계), 초(焦), 기(紀), 최(崔), 좌(左), 역(易) 등 통합 247여개 성씨가 있다.
한국에서는 고구려시대 이후로 농신(農神)으로서의 신농씨과 후직씨(后稷氏)에 대한 제사를 지냈음이 기록되어 있으며, 조선시대에는 선농단을 세워 매년 임금이 직접 밭을 간 후 제사를 지내기도 하였다.중국은 물론 한국, 일본, 베트남, 대만 등에서 지금도 신농의 은덕을 기리며 제향하고 있다.
중국 태고시절 제왕 염제신농씨의 무덤
중국에서 농업이 시작된 것은 염제 신농씨와 나누어 말할 수 없다. 염제는 중국 농업문화의 창시자로서 중국문명사에 위대한 공헌을 하였으며, 또 한 사람의 위대한 문화적 영웅인 황제 헌원씨와 같은 시기에 태어나 똑같이 중국민족의 시조신으로 높이 추앙되었다.
염제 신농씨는 중국 고대의 신화적이고 전설적인 인물이다. 역사책에 기록되어 있는 바에 의하면, 유웅씨의 수령인 소전이 유교씨의 여인을 부인으로 맞아 염제와 황제를 낳았다. 염제는 강수에서 자랐고, 황제는 희수에서 자랐다. 그래서 염제는 성이 강씨가 되었고, 황제는 성이 희씨가 되었다.
염제는 시조신과 농업신이 된다. 그의 경력은 옛사람들에 의해 신비하고 기이한 이야기로 무수히 윤색되었다. <<3황본기>>는 염제의 어머니 여등이 화양 땅을 지나다가 "신룡과 감통하여 염제를 낳았다."고 한다. 신룡과 교접을 하여 염제를 낳았다는 이야기라 하겠다. 이와 같이 신령하고 기이한 것과 감통하여 시조가 탄생하였다는 사실을 노래하는 신화는 고대로부터 이미 있어왔으니, 이는 인류역사의 아주 이른 시기의 산물이다. 이것은 당초에 "사람들이 그 어머니만을 알고 그 아버지는 알지 못하던" 모계사회의 특징적인 환경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원시시대의 사람들은 여인이 임신하고 출산하는 것에 대한 분명한 지식을 가지고 있지 못하여 아이가 씨족의 삶과 가까운 관계에 있던 어떤 외계 사물(토템동물 같은 것)이 여자의 자궁 안으로 들어와 태어나게 된 것이라는 잘못된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신룡은 중국민족이 가장 숭배하였던 토템(원시적 종교 숭배의 한 형태)이다. 위의 전설은 염제를 용의 후예나 용의 화신으로 바꾸어내어 비할 바 없이 존귀한 존재로 만들어 놓고 있는 것이다.
전설은 염제를 "사람의 몸에 소의 머리를 가진 인물"이라고 묘사한다. '소의 머리'로 이야기하는 것은 염제 씨족이 소를 그 씨족의 토템의 하나로 삼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원시 사회에서는 고기를 잡아 생활하고 사냥을 하여 먹고 살던 시기의 뒤에 농업경제 시기가 출현한다. 농업의 출현과 발전은 고대의 인간들이 대자연을 정복하여 위대한 승리를 거두게 만들어 준다.
인류역사가 단순하게 자연의 산물을 이용하여 살던 시기로부터 벗어나 자기 스스로가 생산한 물건을 가지고 살아가는 시기로 접어들게 되고, 인류의 삶은 원시 상태를 탈피하여 문명세계의 문턱을 넘어서게 되는 것이다. 어로와 수렵의 시대에는 중요한 가축들 중 하나였던 소가 농업시대로 들어가면 가장 중요한 가축으로 위상이 달라진다. 이것이 그것의 문화적 의미를 다시 두드러지게 드러내는 작용을 하는 것이다. 이로 말미암아 신농이 그 자신의 문화적 의미 위에 소의 형상을 중첩시키기에 이르렀다는 것은 그리 괴이한 이야기라 할 수도 없는 일이다.
옛날 중국사람들의 마음속에 염제는 민족을 행복으로 이끌어 가는 숭고한 사명을 띠고 있는 인물로 받아들여졌다. 그는 농업을 발전시키는데 커다란 능력을 발휘하였고, 저 높디높은 하늘의 전폭적인 도움까지 이끌어 낼 수 있었다는 이유 때문이다. 전설은 "신농의 시대에는 하늘이 곡식의 비를 내리고, 신농은 그것에 맞추어 땅을 갈아 곡식을 길렀다."라고 한다. 이와 동시에 "아홉 개 우물이 저절로 뚫렸고" 무수한 우물과 샘이 흘러넘쳤다고도 한다.
염제 신농씨는 쟁기, 도끼, 호미 등 농업기구를 발명하여 백성들에게 농경을 가르쳤다. 신농은 사람들이 뽕나무를 심고 마를 기르게 하고 잠사와 마 껍질 실로 옷감을 짜도록 가르쳐서 의복을 만들어 내었다. 신농은 또한 도기 그릇을 만들어 사람들이 생활에 편리하게 사용하도록 하였다. 그는 해가 중천에 떠올랐을 때 장을 열도록 하여 처음 시장제도를 만들기도 하였다. 5현금을 제작하여 연주토록 해서 사람들의 문화생활을 활성화시킨 것도 신농이었다.
또 하나, 염제 신농씨의 위대한 공적은 "처음으로 백가지 풀을 먹어보고 약성을 알아내서 의약의 역사를 개시"하여 의약의 신, 중국의약학의 시조가 되었다는 점이다. 그는 백가지 풀을 두루 길러서 중약학을 개창하고 중국의 풀로 약을 삼아 무수한 사람들을 치료하였다.
염제의 씨족은 후에 황제의 씨족과 연합하여 남방의 강적인 구여씨족을 탁록의 들판에서 격파하고 치우를 죽인다. 염제와 황제는 강대한 염제황제연맹을 결성하고 황제가 최고 우두머리가 된다. 염제는 만년에 남방을 순수하다가 피로가 누적되어 병을 얻고 도중에 죽는다. 일설에는 백성들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 백가지 약초의 맛을 보다가 불행히도 죽게 되었다고도 한다. 염제는 장사(長沙) 땅 다향의 발치에 묻혔으니 이것을 다릉이라고 한다.
서기 967년 송나라 태조는 사람을 파견하여 전국의 옛 묘지를 돌아보게 하고 염제의 묘에 사당을 지어 제사를 올리게 하였다. 제사는 오늘날까지 천년의 역사를 이어오고 있다. 염제의 릉침은 황궁의 양식을 따라 건조되었는데 기세가 웅대하고 건물들이 한데 어울려 장관을 이루고 있다.
전설 속의 염제 출생지인 섬서성 보안시 위하의 남쪽 기슭에 있는 곡천촌에는 염제신농의 사당이 있다. 사당은 남쪽으로 진령, 북쪽으로 위수와 접하여 있고 주변 풍치가 유려하다. 염제릉 신농사와 황제릉은 똑같이 중국민족의 성지이고 매년 뿌리를 찾아 시조를 알현하려고 하는 국내외의 염제와 황제 후손들이 무수하게 찾아와 엎드려 경배를 드리는 곳이다.
고시례高矢禮와 염제신농炎帝神農
조성제의 무교 '생생지생'<13> 불을 발견한 고시와 약초의 신 신농
신농이 농사의 신? 신농은 고시의 후손... "고시례"를 외치자!
우리는 농사의 신이라고 하면 주저하지 않고 누구나 신농씨를 말한다. 그러나 신농씨는 농사의 신이라기보다는 약초의 신이라고 하여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신농씨보다 훨씬 전인 「BC 3898년에 한웅천왕께서 신시를 여시고 고시례高矢禮로 하여금 먹여 살리는 임무를 담당하도록 하시고 주곡主穀이라 하였다.」는 기록이 <신시본기> 제3편에 나온다.
바로 여기 나오는 고시가 바로 농사의 신이기 때문이다. 이 기록을 더 살펴보면 고시는 불씨를 발견하여 백성들은 음식을 익혀 먹을 수 있게 되었고 쇠를 녹이는 기술도 일어나더니 그 기술도 점차로 진보하게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것이 부싯돌의 시작인데 지금우리가 부싯돌로 부르는 것은 이렇게 돌로 쳐서 불을 얻는 방법을 단군의 넷째 아들인 부소가 다시 재현하여 백성들을 습기와 추위로부터 벗어나게 했기 때문에 부소의 ‘부’자와 고시의 ‘시’자를 따서 부싯돌이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그리고 “소전少典, 소호少嘷, 신농神農이 모두 고시의 방계”라고 하였으며 여기서 “신농은 소전少典의 아들이다”이라고 분명히 밝혔다.
<단군세기> 「단군왕검조」에 보면, 단군왕검은 무진 원년(BC 2333년) 도읍을 아사달로 옮기고 신시의 옛 규칙을 찾고 국호 배달나라를 조선으로 고쳐서 선포한 후에 고시를 농사를 담당하는 사람으로 임명하여 농사를 관장하게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이러한 기록을 보면 고시의 집안은 한웅천왕 때부터 단군왕검에 이르기까지 약 1,600년 동안 신시, 청구, 조선을 거치면서 농사를 관장해 온 집안임을 알 수 있다. 이렇게 신농씨보다 훨씬 이전에 농사를 담당하던 고시씨는 신농의 조상이자 우리의 조상이었다.
우리가 음식을 먹기 전에, 특히 들판에서 음식을 먹을 때는 반드시 음식을 조금 떼어내어 고시례라고 하면서 세 조각 정도 버린다. 이것을 두고 혹자는 음식에 따라온 귀신에게 나누어 주는 것이라고도 하고, 들판에 있는 잡귀신에게 조금 나누어 주는 것이라고도 하는데 너무나 잘못 알고 있는 부분들이다.
우리들에게 먹을 양식을 주고, 불로 이렇게 익혀 맛있는 음식을 먹게 하여 주신 우리들의 조상인 고시高矢님에게 감사하다는 예를 표하는 마음에서 고시례를 하는 풍습이 생겼건만 지금에 와서는 왜 고시례를 하는지 그 의미를 모르고 재미로 고시례를 하면서 엉뚱한 소리들을 하고 있으니 조상님 뵙기가 죄스러울 따름이다.
그러면 우선 신농이 누구인가를 알아보기로 하자.
신농은 고시씨의 방계 소전의 아들로 몽산곡蒙山谷에서 태어나, 구룡천九龍泉에서 목욕하고 강수姜水에서 오래 살았다. 그가 강수에서 오래 살았기 때문에 강姜씨가 되었다. 강씨의 마을은 지금 보계寶鷄남쪽 교외의 강성보 일대가 된다. 보계는 신농의 고향이다. 보계와 강씨족의 족보를 연구하는 사람들의 말을 따르면 신농의 후예로 8대의 수령이 대를 이었으며 <자치통감 외기資治通鑒 外紀>에 기록되어 있다.
신농의 계보를 보면 「 제1대 염제신농炎帝神農부터 시작하여 2대 제괴帝魁, 3대 제승帝承, 4대 제명帝明, 5대 제직帝直, 6대 제리帝厘, 7대 제애帝哀, 8대 제유망帝楡罔까지 426년이 신농의 나라가 존속한 기간이다.
신농이라는 호를 부르기 시작한 것은 임괴臨魁(제2대 제괴)로부터 유망 사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면 왜 고시례를 농사의 신으로 말하지 않고 신농씨를 농사의 신으로 보게 되었는가를 알아볼 필요가 있다.
우리들이 모시는 신들은 대부분 중국의 도교에서 비롯되었다고 믿고 있으며 그렇게 전해졌다. 도교의 뿌리가 삼신 사상을 한웅천왕이 정립한 사상이건만, 뿌리를 잃어버린 우리의 중中 조상들은 중국을 상국으로 떠받들며 중국의 사상을 으뜸으로 여겨 무조건 시시비비를 가릴 것도 없이 모든 신들은 중국에서 비롯되었고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신농씨를 농사의 신으로 자기들 조상이라고 말하는 것은 황제 헌원이 동이족東夷族에서 갈라져 화서족華胥族이라고 하였고, 하나라를 세우면서 화하족華夏族이라고 한 것이 지금 중국 한족의 시조인 것과 같은 얘기다.
그 당시에 황제 헌원과 같은 시대에 신농의 8대손인 신농 유망이 있었다. 신농 유망의 딸 뉘조가 바로 황제 헌원의 부인이다. 뉘조嫘祖는 양잠의 신이라 한다. 아버지 신농이 농사와 약초의 신으로 추앙되고 있으니 그 딸 역시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누에를 치고 그 고치에서 비단을 생산해 내는 방법을 발견한 모양이다.
그러니 황제헌원은 유망의 사위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사위가 장인의 나라를 힘으로 정복하여 버림으로써 신농 계열이 황제헌원 계열로 흡수되어버렸다. 그러니 신농 유망의 조상인 염제신농도 자연스럽게 중국인들이 농사와 약초의 신으로 추앙하며 조상으로 둔갑시켜 버렸다.
그리하여 모화사상의 극치를 달리는 우리의 중中조상들이 중국을 따라 입으론 고시례를 하면서도 신농씨를 농사의 신으로 모시게 되었으리라 생각한다.
그러나 여기에는 무심코 지나가서는 안 되는 아주 중요한 역사적인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한웅천왕 시절의 고시씨보다 훨씬 후세 사람인 황제 헌원을 중국의 시조라고 사마천이 <사기>에서 기록하였기 때문에 중국 역사의 시작을 황제 헌원 시대보다 더 이상을 올라갈 수가 없는 우를 범하고 말았다.
그러니 황제 헌원보다 훨씬 이전에 농사를 관장한 고시씨를 인정할 수 없으며 또한 중화족의 전신인 화하족華夏族이 그 때에는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고시씨를 농사의 신으로 도저히 모실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고시씨의 후손으로 염제신농의 8대손으로 황제 헌원과 동시대에 살았던 염제 유망의 선조인 염제 신농을 농사의 신으로 추앙하게 된 것이라 생각한다
염제 신농을 농산의 신으로 추앙하면서 중국학자들은 중국의 역사를 약4백여 년이나 늘렸다고 볼 수가 있다. 중화의 시조라는 황제헌원에서 훨씬 위로 올라가서 염제신농도 자기들의 조상으로 만들어 농사와 약초의 신으로 추앙하고 있으니, 염제 신농의 조상을 자기들의 조상으로 만들기 시작하면 동이의 역사가 송두리째 중화의 역사로 탈바꿈하게 될 것이다.
중국 태고시절 제왕 염제신농씨의 무덤이 있는 중국 후난(湖南) 옌링(炎陵)현에서 ' 중국-대만 양안 2012 염제신농 문화제' 가 최근 막을 올렸다. 문화제 활동의 일환으로 지난 3일에는 염제신농씨를 기리는 제가 열려 더욱 이목이 집중됐다. [아주경제 2012. 11. 04.]
이러한 작업이 오랜 세월동안 정부와 학자가 머리를 맞대고 조금씩 계속 되어 왔건만 우리학계와 정부에서만 모르고 있는듯하다. 아니 우리는 상고사 자체를 인정하지 않고 설화나 전설이기 때문에 중국의 상고사 왜곡 및 잠식을 무관심, 모른척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우리 사학계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며 중심을 차지하고 있는 실증사학자들에 의하여 더욱 중국의 상고사 왜곡이 심화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이와 같이 지금 중국에서는 황제 헌원 이전의 역사를 자기들의 역사로 편입하고 만들기 위하여, 그리하여 황제 헌원의 시대를 뛰어넘어 보려고 70년대 후반부터 서서히 음모를 꾸미고 있는 것이 있다, 그것이 바로 산동성 탁록 귀근원歸根苑에 세운 중화삼조당中華三祖堂의 건립이다.
여기에 모셔진 중화민족의 세분 조상을 염황치라 한다. 염황치란 염제 신농, 황제 헌원, 치우천왕 세 분을 뜻하는데 황제는 행정의 신, 신농은 농사의 신, 치우는 전쟁의 신으로 둔갑시켜 이들이 중화민족의 삼조상三祖上이라고 음모를 꾸미기 시작하였다.
황제 헌원과 치우천왕은 탁록에서 패권을 다투면서 수많은 전투를 하였다. 그 결과 사마천의 <사기>에서는 치우천왕을 한족의 철천지원수라고 기록을 하였는데 어느 날 갑자기 자기네 조상이라고 이렇게 모시고 있으니 그 의도를 깊이 생각하고 대비하여야 할 것이다.
그리고 필자가 만나 본 북경대학교 교수들도 염황치 삼조에 대하여는 모르고 있는 듯하였다. 그러니 이러한 역사의 왜곡을 위하여 얼마나 정부와 학계가 비밀리 조심스럽게 천천히 추진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가 있다. 또 그는 치우를 자기들의 조상으로 인정하기는 어렵다고 말하고 있다.
신농씨는 차인茶人들은 차 잎을 처음 발견하고 마신 사람이라고 하여 다신茶神으로 추앙을 하고 있다.
우리는 신농씨를 약초의 신, 의약의 신으로 받들지만 농사의 신은 신농의 조상인 고시례란 우리의 조상님이 계셨다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하겠다. 농사의 신도 신농이라고 하면 우리는 음식을 버릴 때 ‘고시례’를 하지 말고 신농례라고 하여야 할 것이다.
우리가 무심코 의미도 모르며 장난스럽게 하던 ‘고시례’는 고시에게 예를 갖춘다는 의미가 되는 것이다. 우리는 무심코 하는 ‘고시례’ 속에 우리 민족의 정체성이 숨어 있었다는 사실을 깊이 깨우쳐야 한다.
우리가 미신이라고 업신여기는 모든 무교의식 속에는 우리 민족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아주 귀중한 자료가 살아있다는 사실을 인식하여야 할 것이다. 언제부터 우리의 전통적인 의식들이 미신이 되었는가?
우리의 정신, 우리의 시각, 우리의 사상 등 우리의 정신은 모조리 팽개쳐 버리고 남의 정신으로, 남의 시각으로, 남의 잣대로 우리의 문화를 바라보면서 미신이라고 폄하하게 된 현재의 우리는 하루빨리 우리의 정신을 찾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요즘은 그나마 고시례를 하는 사람들이 사라지고 있다. 우리가 고시례를 하는 것은 우리의 역사를 잊지 않고 상기하고 있다는 뜻도 되므로 우리는 절대 고시례를 잃어버리지 말고 계속하여 큰소리로 외쳐야겠다.
고시례의 의미를 알았으니 장난이라도 좋으니 제발 큰소리로 고시례!를 외치자.
그 외침 속에 우리가 잃어버린 우리의 상고사가 살아 있음을 훗날까지 전하여 올바른 우리 정신을 가진 사학자들과 위정자에 의하여 다시 우리 상고사를 찾을 때 이 고시례가 첫 단추가 될 것이다. [조성제 舞天문화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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