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역사 침탈(侵奪)

BC 28세기 요하문명의 濊貊族이 남하 하여 夏, 商, 周를 건국하면서 황하문명을 일구었으며, 鮮卑族이 秦, 漢, 隨, 唐을 건국했습니다. - 기본주제 참조

홍익인간·인류공영/한국(BC7197)

한국미술의 기원, 드디어 풀리다!

자연정화 2019. 5. 6. 10:24

[빗살무늬토기의 비밀]

한국미술의 기원, 드디어 풀리다! <1>

제주 고산리 융기문토기의 석 줄 덧띠 무늬

출처 : 광주드림 2019. 03. 29. 김찬곤 광주대학교 초빙교수

 

▲ <사진112> 고산리 유적 출토 융기문토기. 높이 27cm. 국립제주박물관. 보는 바와 같이 우리 신석기 그릇은 밑굽이 세모형이 아니라 이렇게 평형한 그릇에서부터 시작됐다. 이 토기가 중요한 까닭은 한국미술의 시원이자 기원이기 때문이다. <사진113> 대전선사박물관, ‘처음 만난 토기, 제주 고산리 유적’ 전시 포스터(2018년 11월 30일-2019년 2월 28일).

 

 1925년 을축년 대홍수 때 서울 강동구 암사동에서 빗살무늬토기가 나온 지 벌써 94년째 되어간다. 그 오랫동안 우리는 빗살무늬의 뜻을 풀지 못했다. 8000년 신석기인의 세계관을 ‘기하학적 추상무늬’라 하고 ‘생선뼈무늬’라 했다. 본보는 수 차례에 걸친 기획을 통해 세계 신석기 그릇 문화사 속에서 한반도 신석기 빗살무늬의 비밀을 풀어 보고자 한다. 한반도 빗살무늬의 비밀을 푸는 일은 한국·중국·일본·베트남 신석기인의 세계관에 한 발짝 다가가는 일이고, 그와 더불어 세계 신석기인의 세계관을 그리는 일이기도 하다는 게 저자의 주장이다. <편집자 주>

 

기원전 1만 년 전 고산리 신석기 마을

 

 제주도 북제주군 현경면 고산1리 자구내 마을 한 장밭 고산리 유적은 우리나라 신석기 유적 가운데 가장 이른 시기(기원전 1만 년∼8000년 전)로 알려져 있다. 제주 고산리 유적이 세상에 알려지게 된 내력이 있다. 1987년 5월, 고산리 주민 좌정인 씨는 흙이 필요해 한장밭에서 밭을 파다 이상한 둘 두 개를 발견한다. 한눈에 봐도 예사롭지 않은 돌이었다. 좌정인 씨는 이 둘 두 개를 마을로 가져와 대학생 윤덕중에게 보여준다. 윤덕중은 제주대학교 사학과에 다니고 있었다. 윤덕중이 봐도 그 돌은 사람의 손길이 닿아 있는 것이 분명했다. 곧바로 이청규(현 영남대학교 문화인류학과) 교수에게 알린다. 이 교수가 보니 두 돌 가운데 하나는 찌르개이고, 하나는 긁개처럼 보였다. 이렇게 하여 고산리 유적은 이 세상에 알려지게 된다.

 

<사진114-115> 제주 고산리 유적에서 나온 긁개와 창끝 석기(첨두기) 찌르개. 위쪽이 긁개(scraper)이고 아래쪽이 찌르개(point)다. 긁개는 한쪽 또는 양쪽 날을 써서 나무나 가죽을 손질할 때 쓰고, 찌르개는 짐승이나 물고기를 찔러 잡을 때 썼다. 동그라미 속 찌르개가 고산리 자구내 마을 좌정인 씨가 발견한 석기다. 아래쪽에 슴베를 따로 내 나무 막대기에 꽂아 묶어 썼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신석기 유적 고산리

 

 <사진114>에서 아래쪽 석기 찌르개를 보면, 자구내 마을 좌정인 씨가 발견한 찌르개(동그라미 안)와 달리 그 오른쪽 찌르개는 슴베가 달려 있지 않다. 또 자세히 보면 슴베 달린 찌르개는 정교하게 돌에 갈아 다듬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에 견주어 오른쪽 찌르개(②)와 그 위 긁개(①)는 단단한 돌로 두들기거나 눌러 떼서 날을 날카롭게 했다. 돌 도구를 만들 때 이렇게 눌러 떼서 만드는 방법을 ‘눌러떼기’ 기법이라 한다. 이러한 가공 기술은 후기 구석기 때 널리 유행했다. 그래서 제주도 고산리 유적을 후기 구석기에서 초기 신석기 유적으로 보고, 그 시기를 기원전 1만 년에서 8000년으로 잡고 있다. 우리나라 신석기 유적에서 가장 이른 시기의 유적인 셈이다.

 

<사진116> 고산리 바닷가 참호에서 융기문토기(<사진112>)가 나왔다. 동그라미 안을 보면 융기문토기 조각을 볼 수 있다. <사진117> 영남대학교 문화인류학과 대학원생 강창화(현 한국신석기학회장) 씨가 참호를 살펴보고 있다.

 

대학원생 강창화, 1만 2000년 전 그릇을 찾아내다!

 

 1987년 좌정인 씨가 고산리 유적을 발견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곧바로 발굴조사가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발굴조사를 할 기관을 정해야 하고, 발굴 조사비가 내려와야 한다.

 

 1988년 1월, 당시 영남대학교 문화인류학과 대학원생 강창화 씨가 고산리 소식을 듣고 이곳을 찾았다. 한겨울이라 바닷바람이 여간 시린 게 아니었다. 그는 직접 조사를 해 보고 싶어 저 멀리 경상북도 경산에서 제주까지 달려왔다. 그는 맑은 눈으로 고산리 일대를 샅샅이 살폈다. 그러다 제주 국토방위군이 파 놓은 참호에 다달았다. 뭔가 느낌이 왔다. 그는 참호에 들어가 마치 구덩이를 스캔하듯 훑으며 차근차근 살폈다. 그렇게 한참 참호를 살펴보는데, 뭔가 눈에 들어왔다. 가만가만 조심히 흙을 걷어내니 분명히 토기 조각이었다. 그의 손은 떨렸다. 기원전 1만 년 전, 지금으로부터 1만 2천 년 전, 우리나라 그릇 역사에서 가장 이른 시기의 그릇을 대학원생 강창화가 찾아낸 것이다. 이렇게 되자 발굴조사를 더는 미룰 수 없었다. 하지만 조사는 그로부터 3년 뒤인 1991년에 이르러서야 이루어졌다.

 

<사진118> 1988년 강창화 씨가 찾은 제주 고산리 융기문토기 조각. <사진119> 부산 동삼동 패총에서 나온 덧띠무늬토기 조각. 구름 띠 위 짧은 빗금은 수분(물기)을 표현한 것이다. <사진120> 경기도 연천에서 나온 빗살무늬토기 조각. 이 조각은 아가리 쪽에 ‘하늘 속’ 물(水)을 새겼다.

 

토기가 세상에 나온 지 벌써 22년째인데도

 

 <사진118> 고산리 덧띠(융기) 무늬와 <사진119> 부산 동삼동 덧띠 무늬를 보면 아주 닮아 있다. 고고학자들은 이렇게 비슷한 무늬가 나오면 두 지역의 영향 관계부터 따진다. 하지만 학자들은 이것을 밝혀내지 못했다. 부산 동삼동 유적은 최대 기원전 6000년까지 내려잡을 수 있고, 제주 고산리 유적은 기원전 1만 년까지 내려간다. 그렇다면 굳이 영향 관계를 따지지 않더라도 제주 고산리에서 부산 동삼동으로 이러한 무늬가 흘러갔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이 두 토기를 놓고 영향 관계부터 따지는 것은 본말이 전도된 경우라 할 수 있다. 문제는 이 무늬가 무엇인지, 무엇을 ‘구상’으로 한 것인지 먼저 밝혀야 한다. 이 토기가 세상에 나온 지 올해로 22년째 되어 간다. 그런데도 우리 고고학계와 미술사학계는 이 덧띠 무늬 세 가닥 가운데 어느 한 가닥도 아직 밝혀내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다.

 

<사진121> 아슐리안 주먹도끼. 프랑스 성 아슐(St. Acheul)에서 나왔다 해서 아슐리안 주먹도끼라 한다. <사진122> 전곡리 주먹도끼. 경기도 연천군 전곡읍 전곡리 유적에서 나옴. 높이 15.5cm. 1978년.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발견한 주먹도끼다. 전곡리 주먹도끼는 아슐리안 주먹도끼에 견주어 투박한데, 그 까닭은 돌의 성질에서 비롯한다. 전곡리 주먹도끼는 주로 자갈돌을 차돌로 내리쳐 깨뜨려 만들었다. 이 돌은 아주 단단하기 때문에 눌러떼기를 할 수 없다.  서울대학교박물관.

 

한국미술의 시원이자 기원

 

 한국미술사의 첫머리는 보통 평양 상원군 흑우리 검은모루 동굴에서 나온 찌르개(뾰족끝석기)와 경기도 연천군 전곡리에서 나온 주먹도끼에서 시작한다. 그런데 이 두 석기는 오늘날 우리가 보통 알고 있는 미술과는 좀 거리가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렇다면 이 두 석기를 넘어서 한국미술사의 시작으로 삼을 수 있는 것은 어떤 것이 있을까. 두말할 필요도 없이 <사진112> 고산리 유적 출토 융기문토기(덧띠무늬토기)를 들 수 있고, 이 토기야말로 우리 한국미술의 시원이고 기원이라 할 수 있다. 그런 만큼 이 토기의 무늬를 해석한다는 것은 한국미술의 시원과 기원을 밝혀내는 일이기도 하다. ‘빗살무늬토기의 비밀’ 연재글을 읽은 독자라면 이 무늬가 무엇인지 단박에 알 수 있을 것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사진112> 그릇 무늬에서 가장 위 한 가닥은 하늘(天)이고, 그 아래 두 가닥은 구름(雲)이다.

김찬곤<광주대학교 초빙교수>

 

 

 

[빗살무늬토기의 비밀]

한국미술의 기원, 드디어 풀리다! <2>

제주 고산리 융기문토기의 석 줄 덧띠 무늬

출처 : 광주드림 2019. 04. 12. 김찬곤 광주대학교 초빙교수

 

▲ <사진123> 고산리 덧띠무늬토기 그림. 이렇게 그림으로 그려 놓고 보니 꼭 우동 그릇 같다. 이 그릇은 높이가 27cm, 아가리 지름이 50cm나 되는, 아주 커다란 물독이다. <사진124> 미국 미시시피 알칸사스 신석기 토기. 구름이 한 가닥이지만 한 가닥을 세 선으로 그렸다. 고산리와 알칸사스 신석기 토기는 본질적으로 같은 무늬라 할 수 있다. 김찬곤.

 

신석기 미술은 ‘추상미술’이 아니라 ‘구상미술’

 

 <사진123> 고산리 융기문토기에 대해 국립제주박물관은 아래와 같이 풀이하고 있다.

 

 토기는 대부분 고산리식 토기로 불리는 원시무문토기와 융기문토기, 소량의 압인문토기가 출토되었다. 융기문토기는 아가리 부근에 3줄의 점토 띠를 에스(S)자 모양으로 곡선화 시킨 기하학 무늬로 태선융기문과 유사하다.

-국립제주박물관, 《제주의 역사와 문화》(통천문화사, 2001), 33쪽

 

 참으로 어려운 설명글이다. 여기서 눈여겨봐야 할 구절은 “아가리 부근에 3줄의 점토 띠를 에스(S)자 모양으로 곡선화 시킨 기하학 무늬”라는 말이다. 이 말을 우리 말법으로 고쳐 쓰면, ‘아가리 쪽에 흙 띠 석 줄을 에스(S)자 모양으로 덧붙인 기하학 무늬’쯤 될 것이다. 그런데 이게 과연 ‘무엇을 새롭게’ 알려주는 ‘설명글’이라 할 수 있을까. 더구나 흙 띠 세 가닥을 보는 눈도 잘못되었다. 가장 위 아가리 쪽 한 가닥은 아가리와 반듯하게 ‘평행’을 이루고 있고, 밑에 두 가닥만 구불하게 붙였다.

 

 유홍준은 양양 오산리, 부산 동삼동과 더불어 제주 고산리 덧띠무늬토기를 설명하면서 이 ‘덧띠 무늬’를 ‘추상 무늬’라 한다.

 

 덧띠무늬토기는 그릇을 성형한 다음 이를 단단하게 하기 위하여 표면에 굵은 띠를 서나 가닥 덧붙인 아주 세련된 토기다. (……) 덧띠 장식에는 자연스런 추상 무늬 효과도 있고 느릿한 동감과 진한 손맛이 느껴진다. (……) 이런 덧띠무늬토기에서는 모던아트modern art의 프리미티비즘primitivism 예술에서나 볼 수 있는 현대적인 아름다움까지 느껴지는데 원초적 삶의 건강성이 살아 있다는 점에서 예술성을 앞세운 모던아트의 그것보다 더 진한 감동을 받게 된다.

-유홍준, 《유홍준의 한국미술사 강의1》(눌와, 2012), 26-28쪽

 

고산리 유적 출토 융기문토기. 높이 27cm. 국립제주박물관. 보는 바와 같이 우리 신석기 그릇은 밑굽이 세모형이 아니라 이렇게 평형한 그릇에서부터 시작됐다. 이 토기가 중요한 까닭은 한국미술의 시원이자 기원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유홍준은 ‘융기문토기’라 하지 않고 ‘덧띠무늬토기’라 한다. 이것은 아주 알맞게 정정했다고 볼 수 있다. 보통 융기는 스스로 일어나는 것인데, <사진112>의 그릇 무늬는 저절로 융기한 것이 아니라 고산리 신석기인이 ‘일부러’ 흙띠(덧띠)를 붙여 ‘무언가’ 표현한 것이다. 그래서 ‘융기문’보다는 ‘덧띠무늬’가 더 알맞다. 그런데 그는 이 덧띠무늬가 무엇을 표현한 것인지 짐작조차 못하고 있다. 그래서 이 덧띠가 그릇을 더 ‘단단하게’ 하는 구실을 한다든지, 모던 아트의 ‘원초적인 삶’이 살아 있다 하고, 결국 국립제주박물관의 설명글처럼 ‘추상 무늬’로 보는 것이다.

 

 유홍준과 거의 같은 풀이는 김원룡·안휘준의 《한국미술의 역사》에서도 볼 수 있다. 더구나 이 책은 한국미술사 관련 책 가운데 기본서라 할 수 있는데, 2003년 개정판을 내면서도 한국미술의 기원 고산리 덧띠무늬토기는 다루지 않았다.

 

 덧무늬는 아마 토기 아가리에 보강을 목적으로 감아 돌렸던 끈에 착안하여 발생하였다고 생각되는데, (……) 빗살무늬토기에서처럼 덧무늬들이 모두 비구상의 기하학적 무늬라는 것이 우리 신석기시대 도안의 공통적 성격이라 하겠다.

-김원룡·안휘준, 《한국미술의 역사》(시공사, 2016), 36-37쪽

 

 토기 부분은 김원룡이 썼을 것이 분명한데, 그는 덧띠의 기원을 그릇 아가리 쪽에 감았던 끈에서 찾고 있다. 하지만 이는 세계 신석기 미술사나 문양사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주장이다. 또 신석기 무늬를 ‘비구상의 기하학적 무늬’라 단정 짓는데, 이 또한 잘못된 전제이다. 지금까지 나는 한반도 빗살무늬토기를 다루면서 빗살무늬가 희랍의 기하학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것을 증명했다. 무엇보다도 그는 신석기 미술을 ‘비구상의 미술’로 보고 있다. 이는 한반도 신석기인이 1만 년 남짓 ‘추상미술’을 했다는 말이고, 우리 미술의 시작을 추상미술로 보는 것과 같다. 하지만 그동안 ‘빗살무늬토기의 비밀’ 연재글에서도 밝혔듯이 한반도 신석기인의 무늬는 철저히 구상(천문, 구름, 비)에서 왔고(앞 글 ‘빗살무늬는 과연 암호일까?’ 참조 바람 http://omn.kr/1cns0), 그런 만큼 한반도 신석기인의 미술은 추상미술이 아니라 ‘구상미술’로 보는 것이 적절하다 하겠다.

 

<사진125> 광주대학교 다섯 학과 학생들에게 고산리 덧무늬토기의 무늬가 무엇을 표현한 것인지 물었다. 시간은 1분, 그래야 ‘직관의 답’이 나오기 때문이다.

 

아는 만큼 안 보일 때가 있다

 

 광주대학교 1학년 학생들에게 <사진112>를 보여주고 이 무늬가 무엇을 표현한 것인지 물었다. 조사 방법은 다섯 가지다. 경영학과 14명에게는 아무 힌트 없이 그릇 사진만 보여주고 이 무늬가 무엇인지 써 내게 했다. 구름이라 답한 학생은 두 명, 나머지 학생은 물결, 파도, 땅·바람, 연기, 바람·하늘·용이라 했다. 부동산금융학과 15명에게는 국립제주박물관 설명글(“에스(S)자 모양으로 곡선화 시킨 기하학 무늬”)을 힌트로 주고 물었다. 그랬더니 구름이라 답한 학생이 단 한 명도 없었다. 나머지 답은 파도, 용, 뱀, 물줄기, 냇물, 바람, 강, 하늘이다. 사회복지학부 19명에게는, “그릇을 볼 때는 아가리 쪽을 하늘로 생각하고 보면 잘 읽힌다”는 힌트를 줬다. 이것은 그릇 무늬를 볼 때 기본 상식이다. 그랬더니 10명이 구름, 3명이 바람, 한 명이 안개라 했다.

 

 나머지 두 과 학생들에게는 힌트 순서를 달리했다. 유아교육과 학생 19명에게, 그릇을 볼 때는 아가리 쪽을 하늘로 보고 보면 무늬가 잘 읽힌다 하면서 <사진112>의 무늬를 읽어 보라 했다. 19명 가운데 13명이 구름, 4명이 바람이라 했다. 다시 곧바로 두 번째 설문지를 나누어줬다. 이번 설문지에는 국립제주박물관 설명글이 힌트로 써 있었다. 결과는 아주 놀라웠다. 구름이 3명, 모르겠다가 5명이었다. 나머지 답은 산, 줄기, 바람, 파도, 바다, 밭이었다.

 

 호텔외식조리학과 학생 19명에게는 힌트 순서를 유아교육과와 반대로 했다. 먼저 국립제주박물관 설명글이 써 있는 설문지를 나누어 주었다. 구름 1명, 바람 3명, 바다 물결 3명, 안개 2명이고, 나머지 답은 물의 출렁거림, 시냇물, 산이었다. 그 다음 두 번째 설문지를 나누어 주었다. 그릇을 볼 때는 아가리 쪽을 하늘로 보면 잘 읽힌다는 힌트가 써 있는 설문지다. 19명 가운데 15명이 구름이라고 썼다. 나머지 답은 은하수, 바람, 번개, 바다·땅이다. 학생들이 낸 답 가운데 남다른 것 두 개를 아래에 들어 본다.

 

 세 선이 있는데 밑 두 줄은 물결 모양 선이고, 가장 위쪽 선은 일자 직선이다. 가장 아래쪽은 바다, 가운데는 산 또는 바람, 가장 위쪽은 하늘을 보고 그린 것 같다.

 

 맨 위 줄은 하늘, 중간 에스자 모양 곡선은 바람(구름), 맨 아래쪽은 땅(제주도)을 표현한 것 같다.

 

 위 두 학생은 국립제주박물관의 ‘기하학 무늬’ 설명글을 읽고서도 이런 답을 내놓았다. 지식(아는 것)에 흔들리지 않고 자신의 직관을 믿는 학생이다. 또 가장 위쪽 선이 ‘일자 직선’이라고 분명히 말하고 있다.

 

 나는 설문 조사를 하면서도 사실 이미 답을 정해 놓은 상태였다. 이것은 누가 보더라도 ‘구름’이 틀림없다. 내 예상대로 학생들은 거의 다 구름이라 했다. 다만 여기서 유아교육과와 호텔외식조리학과 학생들이 답한 경우를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두 과 모두 국립제주박물관의 설명글(“점토 띠를 에스(S)자 모양으로 곡선화 시킨 기하학 무늬”)을 읽고서는 답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이 설명글 자체가 무늬를 있는 그대로 못 보게 한 것이다. ‘기하학 무늬’라고 ‘알고 보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다시 말해 아는 만큼 안 보이는 경우라 할 수 있다. 어쩌면 ‘기하학 무늬’란 말이 21년 동안 이 토기의 무늬를 해석하지 못하게 하고 우리들의 눈을 가렸다고 볼 수 있다.

 

<사진126> 중국 네이멍구(內蒙古) 자치구 적봉시 대전자유적(大甸子遺蹟)에서 나온 채색 옹관(독널). 하가점하층문화(기원전 2000∼1400년). 요령성박물관. <사진127> 일본 조몬 만기 토기. 기원전 1000년∼400년. <사진128> 미국 호튼 신석기 빗살무늬토기. 기원전 4000년. 인하대학교 고조선연구소.

 

고조선과 일본·미국 신석기인의 구름무늬

 

 <사진126>은 고조선 전기(단군조선, 청동기시대) 옹관이다. 그릇 전체 무늬는 구름무늬인데(이 구름무늬에 대해서는 다음 글에서 자세히 다룰 것이다), 특히 아가리 쪽 무늬는 제주 고산리 덧띠무늬토기의 구름무늬와 비슷하다. <사진128>은 미국 미시간 주 호튼(Houghton) 신석기 빗살무늬토기다. 이 무늬 또한 고산리 덧띠 구름무늬와 닮아 있다. <사진127>은 일본 신석기 조몬시대 말기 토기다. 암사동 신석기인이 구름 속에 점을 찍어 구름 속 물(水, 수분)을 표현했듯 일본 신석기 조몬인 또한 똑같은 방법으로 구름 속 수분을 표현했다(앞 글 ‘6000년 전 암사동 신석기인이 그린 서울 하늘 뭉게구름’ 참조 바람. http://omn.kr/1eyhg). 그리고 구름 둘레에 점을 찍었는데, 이것은 봄비(雨) 또는 씨앗으로 볼 수 있다. 세계 여러 나라 신석기 그릇을 보면 일본 조몬인처럼 구름 둘레에 찍은 점무늬를 볼 수 있다. 이는 구름에서 봄비가 내리고 그 봄비를 맞고 싹이 틀 씨앗을 표현했다고 볼 수 있다. 즉 봄비이면서 씨앗인 것이다.

 

 나는 위 세 토기의 무늬를 구름(雲)으로 보지만 중국·일본·미국 고고학계와 미술사학계에서는 우리 학계가 ‘기하학적 추상 무늬’라 하듯 그들 또한 여전히 ‘기하학적 무늬’ 또는 ‘추상 무늬’라 하고 있다. 우리 학계가 그렇듯 그들 또한 신석기 세계관이 공백으로 남아 있는 것이다.

 

 다음 글에서는 ‘고산리식 토기’의 비밀을 풀어보고자 한다. 고산리식 토기는 흙반죽에 풀대나 풀잎을 버무려 구운 그릇을 말한다. 그래서 그릇 겉면에 풀대가 타고 남은 자국(무늬)이 있다. 고산리식 토기와 비슷한 토기로는 아무르강 하류 가샤 유적과 아무르강 중류 그로마투하 유적 토기를 들 수 있는데, 지금 우리 학계에서는 이 세 유적의 영향 관계를 따지고 있다. 그런데 정작 중요한 것은 이 무늬(풀대나 풀잎 자국)가 무엇인지, 당시 고산리 신석기인은 무엇을 표현하기 위해 흙반죽에 풀대를 섞어 구웠는지, 이것부터 먼저 밝혀야 한다.

김찬곤<광주대학교 초빙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