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역사 침탈(侵奪)

BC 28세기 요하문명의 濊貊族이 남하 하여 夏, 商, 周를 건국하면서 황하문명을 일구었으며, 鮮卑族이 秦, 漢, 隨, 唐을 건국했습니다. - 기본주제 참조

민족의 기원

② 한民族의 뿌리 묘족(苗族)이야기 2부

자연정화 2018. 7. 17. 09:11

② 한民族의 뿌리 묘족(苗族)이야기 2부

 

출처 : 수원객의 상고사 2005. 07. 20.

 

'흠정서역동문지'(欽定西域同文志)에서 단군신화의 태백산 위치를 규명

보도지면 : 대구매일신문 / 보도일자 : 2002년3월21일

 

단군신화에 기록된 우리민족의 기원은 중국의 천산(天山) 일대라는 문헌자료가 제시돼 학계의 비상한 관심을 모으고 있다. 이는 민족의 유래를 서역(西域)으로 확대시키면서 중국 신강위구르자치구에서 한반도에 이르는 민족의 동진을 뒷받침하고 있어 향후 우리 학계의 중요 연구과제를 제시하고 있다.

 

박은용(76) 전 효성여대 교수(인문대 국문과)는 중국 청(淸)나라 건륭 28년(1763년)에 편찬된 지리서 '흠정서역동문지'(欽定西域同文志)에서 단군신화의 태백산 위치를 규명할 수 있는 '삼위'(三危)에 대한 기록을 발견했다며 20일 이를 처음 공개했다.

 

흠정서역동문지 4권(卷之四) '천산남북로산명'(天山南北路山名)에 적힌 삼위에 대한 설명은

'古天山東盡境(山海經)三危山西三百五十里曰天山… 一統志天山一名白山自哈密東北境綿亘而西…'

 

등으로, 삼위산(三危山)의 위치와 삼위산이 곧 천산(天山)이며 이를 백산(白山)이라고도 한다는 사실을 '산해경'과 '대명일통지' 등의 고서를 인용해 기록하고 있다.

 

흠정서역동문지는 박 전 교수가 30년전 일본 도쿄대 객원교수 시절 우여곡절 끝에 입수한 지리서로 한자와 만주어.몽골어.아라비아어.타밀어.티베트문자 등으로 된 희귀본이며 '삼위'에 대한 기록을 남긴 현존 유일의 고서이다. '삼위'에 대한 이 같은 문헌학적 입증은 단군신화의태백산 위치 설명을 위한 결정적인 학술자료를 제시할 전망이다.

 

삼국유사 고조선 조는 '환인이 아들의 뜻을 알고, 내려다보니 삼위태백이 가히 널리 인간을이롭게 할만하다 (下視三危太伯可以弘益人間)…'란 기록을 남기고 있으나 지금까지 '삼위태백'(三危太伯)이란 글귀에 대한 설득력 있는 설명을 하지 못했던 게 우리 학계의 실정이다.

 

따라서 민족의 기원을 밝힌 단군신화의 태백산을 두고 주로 백두산을 가리키는가 하면 강원도 태백산과 북한의 묘향산, 구월산 등지로 해석하는 등 명확한 근거자료나 학설을 제기하지 못한 상태이다.

 

박 전 교수는 "우리 학계가 민족의 기원신화에 나오는 '삼위'란 글자가 태백을 수식하는 관용어인지, 별도의 지명인지에 대한 학술적인 규명도 못하고 있다"며 "천산 일대의 위구르족 등과 우리 민족은 인종적, 언어풍속학적으로 유사점도 많아 역사, 언어, 문화인류학계의 연구가 뒤따라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조향래기자 swordjo@imaeil.com

 

 

神市開天經 본문 4페이지

 

下視 三危太白, 三危, 山名, 非今 外興安嶺也, 叉 非今 文化九月山也, 乃今支那甘肅界,

하시 삼위태백, 삼위, 산명, 비금 외흥안령야, 차 비금 문화구월산야, 내금지나감숙계,

 

燉煌縣所在地 三危山也, 本黎苗祖盤古, 初降之地 是也

돈황현소재지 삼위산야, 본려묘조반고, 초강지지 시야

 

아래를 보니 삼위태백(三危太白)이 보였다. 삼위(三危)란 산의 이름(山名)으로 지금의 홍안령(興安嶺)이 아니다. 또한 지금의 문화구월산(文化九月山)도 아니다. 지금의 지나 서역편에 있는 감숙성 경계이다. 이곳은 돈황현에 있는 바로 삼위산이다. 본시 구려(九黎)와 묘족의 조상반고가 처음 내려온 땅이다. (신시를 정하다)

 

라는 내용이다.

 

天山은 지금도 天山山脈으로 불려오고 있다. 또 地名도 남아있다. 그러나 天山이 白山이니 雪山이니 하는 말은 아는 사람은 드물다. 일부 학자들은 白山을 白頭山이라 하여 억지로 끌어당기고 있다. 이런 행위는 참된 歷史를 오도하는 위험한 짓이다.

 

天山은 분명히 중국 서부 끝 국경선 주위에 있으며 따라서 南部까지 연결되어 있다. 하지만 반고환인(盤固桓因) 때부터 黃帝에 이르기까지 6250여년이 흐른 뒤에는 天山의 南部는 곤륜산(崑崙山)이란 이름을 갖게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BC.3898년까지 유소씨(有巢氏)는 天山이었던 곤륜산(崑崙山)의 이전동산(伊甸園)에서 서석기 文化時代에 평화롭게 살았다. 그러던 것이 이전(伊甸)은 우전(우전 또는 우진)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1988년 6월 북경에서 제작한 4백만분의 1로 된 중국지도에는 우전(于田)으로 지명을 바꾸어버렸다. 하지만 옛 문헌과 지도에는 우전(于  : 성할 전)으로 표기되어 있는 곳이 많다.

 

天山은 白山이다. 그렇다면 宇宙와 萬物 또한 흰색이다. 한民族은 대대로 흰옷을 입고 살아왔다. 이것은 우연이 아니며 필연적인 자연의 사상에서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한民族은 이전낙원(伊甸樂園)에서 점차 동쪽으로 이주해왔음이 밝혀지고 있다. 그 첫 번째가 돈황(敦煌)의 三危太白이다. 이것은 天山이 끝나는 동쪽 부분이다. 三危太白을 三危山이라고 하며 太白山이라고도 한다. 또는 黑水三危山이라고 말하기도 하고, 黑水太白이라고 불려지기도 한다. 天山의 남쪽 곤륜산 속에 이전원(伊甸園)이 있음은 명백한 사실이다.

 

이전 아니 이덴 또는 에덴동산은 분명히 天山이었던 곤륜산(崑崙山)에 있다. 그러므로 이전낙원(伊甸樂園)은 한民族의 樂園이자 故土였다. 왜냐하면 이전동산은 천제울국(天帝울國)의 아홉 나라이기 때문이다. 아홉 나라는 九族을 뜻하며 九夷族이다. 九夷의 선조는 앞에서 밝힌 것과 같이 반고한인(盤固桓因)의 나라였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東夷의 선조였던 桓因氏의 부족국가임은 부인할 수 없는 것이다.

 

桓因은 모든 史書에서 밝혀진 대로 天山의 남쪽 곤륜산(崑崙山)정에서 東으로 이주해왔다. 그러므로 天山과 白山, 雪山은 이전낙원(伊甸樂園)과 함께 잊을 수 없는 한民族의 靈山이자 故鄕인 것이다.

 

1981년 2월 홍콩에서 발행된 이당(李唐) 著「上古史」에는(본문 2쪽 참고) 上古 때부터 내려오던 민족은 모두 동방민족(東方民族)이며, 황제(黃帝) 이후 요, 순, 하, 은, 주 (堯舜夏殷周)로 부터 고구려 주몽(朱蒙)에 이르기까지 묘족(苗族)의 후예임은 의심할 바 없다고 기록하고 있다.

 

중국 삼조문화연구회 부회장 조육대(趙育大)는 치우학연구에 관하여라는 논문에서

 

"묘학(苗學)은 묘족(苗族)을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하나의 과학이다. 지금 국제학술계에서 苗學을 연구하는 것이 인기 있는 학설로 되었다.

 

중국·미국·영국·프랑스·러시아·일본·오스트리아·한국 등 여러 나라에서 많은 전문가들이 전문적으로 연구에 종사하거나 혹은 전문적인 연구기구를 설치하였다. (과연 한국에 그런 연구기관이 있는가 의문 스럽다! 水原客) 이것은 묘족이 과경 민족이기 때문이다. 지금 苗族의 인구는 600여만명인데 중국경내에 500만이 거주하고 100만이 세계 각지에 분포되어 있다.

 

묘학(苗學)연구를 어디서부터 시작할 것인가? 나는 마땅히 치우(蚩尤)를 연구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치우(蚩尤)는 묘족(苗族)의 선조이기 때문에 그는 중화문명사에서 전환적 의의를 띠는 인문시조이다. ...중략....

 

....필자는 봉건사회의 그러한 서적과 그때 사람들의 안광과 두뇌가 당시 전설의 기록 혹은 선진유적에 대한 전용, 그 단어사용과 표현이 황제후예 화하, 대한족주의의 입장에서는 것은 국한성이 있어 중화대지의 각 부락씨족의 평등성과 일체성을 보지 못하였다고 본다. 당시의 중화대지는 바로 원시사회말기에 처하였는데 이른바 국가와 민족이 없었고 한족, 묘족과 기타 소수 민족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중화민족이 아직 형성되지 않았다.

 

당시에 다만 각지에 줄 늘어 서있는 크고 작은 씨족, 부락과 부락연맹 뿐이었다. 그들은 지반을 서로 빼앗기 위하여 경쟁적으로 충돌과 전쟁을 발동하였다. 황제는 황제부락의 수령이고 치우는 구려(九黎 : 아홉나라)부락의 수령으로서 그들 사이의 전쟁은 원시사회말기 중원대지의 사회가 진보한 필연적인 현상이다. 누가 정통이고 누가 비정통이며, 누가 옳고 누가 그르며, 누가 존귀하고 누가 비천하다고 말할 수 없으며, 그들의 지위는 평등한 것이다.

 

맑스주의 민족관은 모든 민족은 크고 작고, 언어, 발전정도를 막론하고 모두 평등하다고 인정한다. 현대의 각 民族이 이러할 뿐만 아니라 역사상의 부락관계, 민족관계도 마땅히 민족평등의 시각으로서 대하고 인식하여야 한다. 이렇게 보면 황제와 치우 각자의 부락은 평등하고 사람도 평등한 것이다. 그들 사이에 누가 정통이라고 찬양해야 하고 누가 반역이라고 책망해야 하는 문제가 없다....

 

....중략....

 

....苗族은 우리나라(中國)의 비교적 큰 소수 민족의 하나로서 그 역사가 유구하다. 『苗族簡史』의 기록에 의하면 "우리나라 장강(長江) 중하류와 황하(黃河) 하류일대에 매우 오랜 시기 아주 많은 원시인류가 살았는데, 그들은 世世代代로 번성하여 뻗어나갔으며 간고한 노동을 거쳐 지금으로부터 5천년전에 점차적으로 부락연맹을 형성하였다. 그 중의 한 개 부락을 구려(九黎)라 하였는데 치우(蚩尤)를 그 수령으로 하였다."고 한다.

 

『묘족사』(오신복, 용백아 저, 사천민족출판사 출판)는 제 1장 "苗族의 원시시대"에 직접 "苗族의 원조 치우"를 제일 처음의 작은 제목으로 하였다. 그리고 漢族가운데 내려오는 전설, 한문문헌을 苗族가운데 지금까지 내려오는 "상보상낭가"(선조의 노래)의 전설, 풍속습관과 서로 비교하여 증명한 후 결론하여 말하기를 "전설시대의 치우구려부집단이 바로 이후 苗族의 최초의 先民이며 혹은 적어도 苗族의 先民을 포괄한다."고 하였다.

 

나는 치우는 苗族의 선조(苗族은 이미 확인하였음)일 뿐만 아니라, 그는 黃帝, 炎帝와 같이 중화민족역사에서의 3대 人文始祖라고 여긴다." 라고 하였다.

 

자세한 것은 " 한글 + 漢字문화 " 홈페이지 동이특집글을 읽어 주시기 바란다.

http://www.hanja-edu.com/0210_month/main.html

 

 

왜 천산(天山)에서 인류가 처음 생겼으며, 왜 '한民族'이라 할 수 있는가라는 문제에 대해서 율곤선생은 저서 "한民族史"에서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독자여러분에게 죄송한 말씀이지만 타법의 한계로 인하여 세밀한 설명은 생략하기로 한다. 다만 여기서는 간단히 개요만 논하고자 한다.

 

본시 생명의 생성요건은 크게 보아 물(水)·빛(光)·소리(音)이다. 다시 말해 氣의 분신인 3대 요건 속에 들어있는 탄소·질소·수소와 함께 단백질 입자인 미세한 유기체가 형성되어 단세포 아메바가 생긴 데서부터 생명체는 시작한다고 볼 수 있다. 과학자들이 보는 견해로는 생명체가 태어난 것은 대체로 35억 년 전후로 보고 있는 것이 지배적이다.

 

한마디로 아득한 옛날에는 지구의 북과 남부 지방은 극한 지대였으므로 생명체가 생길 가능성이 전무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극한 시대 즉 天山 즉 白山은 온난지대(溫暖地帶) 였으므로, 인류 최초로 인간의 씨, 즉 싹이라 할 수 있는 묘족(苗族)이 생기게 되었다. 묘족의 처음 시조가 바로 인류 최초로 나라를 세운 반고환인(盤古桓仁)이다. 반고환인씨는 모든 正史에서 기록한 것과 같이 한민족의 시조임을 입증하고 있다. 그래서 桓仁氏를 황묘(皇苗)라고 한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