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역사 침탈(侵奪)

BC 28세기 요하문명의 濊貊族이 남하 하여 夏, 商, 周를 건국하면서 황하문명을 일구었으며, 鮮卑族이 秦, 漢, 隨, 唐을 건국했습니다. - 기본주제 참조

민족의 기원

③ 한民族의 뿌리 묘족(苗族)이야기 3부

자연정화 2018. 7. 17. 09:23

③ 한民族의 뿌리 묘족(苗族)이야기 3부

 

출처 : 수원객의 상고사 2005. 07. 20.

 

이 장에서는 앞글(율곤선생의 苗族과 한民族)에서 소개되지 않은 몇 가지 묘족관련 인용문과 삼묘족에 대해서 그리고 묘족(苗族)이란 명사의 일반적인 개념과 세부적으로 검토해본 개념들을 정리 해 보기로 한다.

 

'처음으로 밝혀진 한民族史' 제1장 韓民族의 始原에 다 나와 있는 내용이므로 여기서는 원문은 생략하고 해석부분만 인용하여 기록한다.

 

소련 유엠 뿌진의 저서인 고조선편에도 중국의 돈황이 있는 삼위산이 그 모습을 갖추었을 때 삼묘족의 체제는 완전히 정비될 것 이라고 쓰고 있다. (國史編纂委員會譯刊行)

 

古朝鮮 제2章 第1절 神話時對, 壇君朝鮮 유엠 뿌진 著

 

"한국어 사전에서 삼위와 태백을 풀이해 놓은 것을 보면 아래와 같다. 삼위와 태백은 삼위산과 태백산이다. 삼위산은 중국 감숙성의 돈황현 남쪽에 있으며 태백산은 장백산의 이름이다. 삼국유사에 기술되어있다.

 

삼위산은 상서 우공편(禹貢篇)에도 언급되어 있다. 삼위산이 그 모습을 갖추었을 때 삼묘족의 체제는 완전히 정비 되었다. .....중략.... 중국의 사학자 고힐강(顧 剛)과 중국고대지명사전 역시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昭公9年 두정(杜頂)이 左傳에 붙인 주석을 보면 삼위산에 관하여 언급하기를 삼위산은 과주(瓜州) 즉, 현재의 돈황현에 위치해 있다. 돈황현 남쪽에 당하(黨河)근처에 삼위산이 있다. 이 산이 곧 우공편에 실려있는 삼위산이다. 수경주에도 역시 이 산의 소재가 삼위산은 돈황현 남쪽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마찬가지로 사기(史記) 역시 삼위산은 감숙성의 우산산맥(羽山山脈)과 섬서성의 진영산맥 아이에 있는 것이라고 하였다. 이처럼 몇가지 세부사항만 제외 한다면 중국의 모든 사료들은 삼위산의 위치를 감숙성으로 기술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

 

삼묘족의 발생지가 삼위산이라는 것을 중국고금지명대사전663쪽을 인용하여 아래와 같이 말했다.

" 모든 구려족도 삼묘의 후손이다. 태서인(泰西人) 즉, 실크로드에서 살았는데 모두들 깊은 산 계곡으로 들어가 높은 산에 사는 부족(高地族)이 되었다. 여러 종류의 인종들이 중국내륙 지방에 사는 최고 오래된 토착인이었다.

 

그 후 황제와 치우는 북경의 들에서 십년간 일흔세번을 싸웠는데, 전쟁으로 인하여 사람들은 황하 이남으로 내려갔다.

 

도당씨 때도 묘족이 항명을 했으며 요임검도 단수(丹水) 이남까지 원정을 갔다. 사실 강을 건너 무리들이 달아난 것이나 다를 바 없다.

순임검 때도 도망가서 삼묘의 본고향이었던 삼위산(三危山)까지 숨었던 때가 있었다. 즉, 수풀과 나무로 위장하여 숨어살았다.

 

중국고금지명대사전(772쪽, 한民族史 35쪽)에는 다음과 같은 글귀도 있다. (앞에서 밝힌바 있다)

" 고지족은 今苗人이다. ...중략...이름은 다음과 같다. 묘족(苗族), 요족( 族), 여족(黎族), 만족(蠻族), 이족(夷族), 북족( 族), 동족( 族), 요족( 族), 힐로(  ), 노이(怒夷), 라라(  ), 출이, 중가(仲家), 용가(龍家). 이들은 이름은 다르지만 모두 구려(九黎)와 삼묘(三苗)의 후예들이다. "

 

지금 중국의 복건성과 절강성에 흩어져 살고 있는 사람들은 모두 이들의 후예들이며, 물가나 산중에 흩어져 살고 있는 이들도 역시 상고 때 그들의 후예들이다. 한(漢)나라 때 산을 넘어왔으므로 태서인(泰西人)이라 하는데, 모두 깊은 산중이나 계곡의 동굴 등에 살았으므로 고지족으로 불리게 되었다.

 

산해경(山海經) 18권 중, 해내경(海內經), 제6 본문 p50

" 옛날에 삼묘국이 있었는데 적수(赤水)를 따라 동(東)으로 동(東)으로 사람들이 내려왔다. 삼묘국의 자손격이라 할 수 있는 순(舜)임금이 이어받았다. (다시 말해 삼묘국이 내려오는 동안 최고의 성인다운 성현(聖賢)을 배출 했다는 뜻이 된다. 上上古時代부터 삼묘국은 있었고 舜임검 이 후 春秋時代에도 있었다.)

 

순임검은 사람을 다치게 한 일이 없었다. 그러나, 묘족 가운데 백성이 반란을 일으켜 남해로 내려가 삼묘국을 세우게 되었다. 바로 삼묘국은 삼모국(三毛國)이라고도 한다. "

 

이상의 글에서 보면 대체적으로 묘족, 구려, 삼묘 순으로 서술하였고 苗, 黎, 三苗 모두가 묘족의 후손이라는 말을 하고 있다. 그리고 묘족의 근거지가 삼위산이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필자가 보기에는 천산에서 태초로 생겨났던 종족을 묘족이라 하였고 다시 묘족은 삼묘로 나뉘어져 서역과 천산의 동남으로 퍼져나갔다고 본다.

 

또한 구려는 치우가 세운 종족으로 삼묘와 함께 생겨났다. 엄격하게 대별하자면 삼묘에서 구려가 나왔는지 구려에서 삼묘가 나왔는지 분명하지 않다. 하지만 삼묘는 고산족(桓), 유목족(韓), 하백족(漢)으로 나누어지고 고산족(桓), 유목족(韓), 하백족(漢) 순대로 발전해 왔으므로 치우는 이들 삼묘 가운데 유목족에 해당한다. 결론적으로 치우가 삼묘족의 후손인지 묘족의 후손인지를 따지는 것은 무의미하다.

 

고산족(桓), 유목족(韓), 하백족(漢) 이라고 했을 때 桓, 韓, 漢을 환국(桓國), 韓나라, 漢나라 인 것으로 오해하지는 말 것이다. 단지, 글자 속에 담긴 뜻으로 종족을 분류한 것이다.

 

환단고기 제3 신시본기 본문에는 "진나라 天文志의 말을 인용할 것 같으면 치우천황의 깃발은 여러 종류였다. 똑똑하고 밝고 지혜 있고 민첩한 깃발 에서부터 어리석고 둔하고 잘못된 것도 그 후 생겨났다. 이 모두는 군병들의 규율을 상징 하는 것이었다. 깃발의 상징은 치우천황에 있어 크게 지키는 방패적인 역활을 하는 것 이었다. 치우씨는 통지씨의 후예이다. 혹 창힐과 더불어 고신씨 역시 모두가 묘족인 치우씨의 후예였다. 대극성을 함락 시키자 산동성은 물론 회수 북쪽까지 진출했다. 치우천황의 영웅적인 용맹성이 먼 지역까지 전파 되었고 심지어는 깊은 곳 그 어디 던지 모르는 곳이 없었다. "

 

창힐이나 고신씨는 모두가 치우천황의 후손들 이고 묘족의 후예라고 기록하고 있다.

 

태백속경(太白續經) 교정편

 

"태백속경은 해학 이기(海學 李沂)가 지었으며 1911년 환단고기의 저자인 계연수가 다시 베껴 쓴 것을 다시 이유립이 교정을 보았다고 한다. 상고사 로써 상당히 가치가 있는 사료이다. "

 

太白讀經 訂校增註後序 본문 2939.

前有盤古共工하야, 與我神市로 竝受安巴堅之符封而繼,有羲農舜湯하야,主東以就西而與西戎諸夏로, 聯治相混하야, 居中時用하니 亦一神市分境之始也라, 迫夫高句麗하야, 始祖 高朱蒙 聖帝는, 出自此夫餘하시니, 祖述 桓雄,蚩尤王儉之道統하시고, ---中略---

 

해설

전술한 바와 같이 반고씨는 더불어 신시를 정했다. 환인 안파견은 천부인을 받아 유업을 계승 하였다. 그 후 복희, 신농, 요, 순, 탕을 이어 서융이었던 서이는 서역에서 동으로 옮겼다. 모든 제후국은 물론 하나라 또한 혼란속에서도 서로 서로 연방제로 다스리며 그때 그때를 이용하여 살아 왔다. 역시 맨 처음 신시를 정한 것이 분계선이 되었다. 그 후 부여와 고구려가 나왔고 고주몽 성제는 시조가 되었다. 고주몽은 스스로 북쪽에서 부여의 조상이 되었다. 이는 모두 옛날의 환웅과 치우왕검이 도를 통한 도맥에서 비롯된 것이다.

 

태백속경에 보면 최초에 신시를 정한 사람은 묘조였던 반고성인 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신시개천경에서도 분명히 묘족의 시조인 반고가 처음으로 신시를 정하기 위해 삼위산에 내려 왔다고 되어있다. 반고가 최초에 신시를 정한 사람으로 환인 안파견이라고 한다면 환단고기도 정사이다.

 

마지막으로 이승휴의 제왕운기에는 이런 글도 기록하고 있다.

 

帝王韻記 正統相專頌 32쪽 본문에

自盤古室於此, 正統之國, 凡三十四 基合二百五十二也<中略>

반고 이후 정통지국은 모두 삼십사 代이고 그 합은 252명 이다.

 

앞서 소개한 중국 삼조문화연구회 부회장 조육대(趙育大)씨는 치우(蚩尤)가 묘족(苗族)의 선조라고 하였고 치우는 구려(九黎)의 수령이라 하였다. 苗族은 중국에서 비교적 큰 소수 민족의 하나로서 그 역사가 유구하다고 하면서『苗族簡史』의 기록을 인용하여 "장강(長江) 중하류와 황하(黃河) 하류일대에서 묘족이 번성한 것으로 적고 있다. 마치 구려(九黎)가 중국의 남부에 있었던 것처럼 기록하였다. 이는 지금 묘족이 남부일대에 많이 분포하고 있으므로 과거에 묘족이 감숙성동남의 삼위산에서 생겨나 북방을 근거지로 하였다는 사실을 숨기기위해서 그렇게 위장한 것일 뿐 이다.

 

아니면 중국이 공산화 되었을 때 역사연구는 전혀 할 수가 없었고 오히려 위대한 문화유산파괴를 조장했으므로 극히 최근에 와서야 고대사를 본격적으로 연구 할 수가 있었다. 그래서 과거 공산화시대의 영향으로 황제와 치우와의 관계를 올바로 정리하지 못 한데서 오는 오류일지도 모른다.

 

뿐만이 아니라 구려족(九黎族)을 인터넷에서 찾아보니 " 구려는 중국 남방의 전설시대에 활동한 민족이라고 소개하고 주로 지금의 장강 유역과 호북성(湖北省) 호남성(湖南省) 및 강서성(江西省) 일대에 분포하였다고 하였다. 이것도 마찬가지 수작 일 뿐이다.

 

더 한심한 것은 삼묘족을 說 한 것이다.

 

" 근대의 많은 사학자들은 구려와 삼묘를 지금의 묘족(苗族)의 조상으로 보고 있다. .... 삼묘족(三苗族)은 중국의 전설시대 중 황제에서 요 순 우 시대에 이르기까지 남방에서 활동한 고대민족의 하나로서 구려의 후예이다. "묘민(苗民)" 또는 "유민(有苗)"라고도 하며, 주로 동정호(洞庭湖, 지금의 호남성 북부)와 팽려호(彭 湖, 지금의 강서성 陽湖) 사이, 즉 장강 중하류 이남 일대에 분포하였다. " 라고 하였다. 주로 남방에서 활동한 민족으로 못을 박고있는 것은 아주 잘못 된 것이다.

 

사기 권일(史記卷一)에 "남만(南蠻)은 삼위산(三危山:감숙성 돈황현 남)에 살던 삼묘족이 옮겨와 변한 것이다. " 한 것과 앞서 언급한 것과 같이 중국고금지명대사전에 " 고지족(高地族)의 이름은 다음과 같다. 묘족(苗族), 요족( 族), 여족(黎族), 만족(蠻族), 이족(夷族), 북족( 族), 동족( 族), 요족( 族), 힐로(  ), 노이(怒夷), 라라(  ), 출이, 중가(仲家), 용가(龍家). 이들은 이름은 다르지만 모두 구려(九黎)와 삼묘(三苗)의 후예들이다.

 

지금 중국의 복건성과 절강성에 흩어져 살고 있는 사람들은 모두 이들의 후예들이며, 물가나 산중에 흩어져 살고있는 이들도 역시 상고 때의 그들의 후예들이다. 한(漢)나라 때 산을 넘어왔으므로 태서인(泰西人)이라 하는데, 모두 깊은 산중이나 계곡의 동굴 등에 살았으므로 고지족으로 불리게 되었다. "한 것처럼 고산족이면 서역에서 왔다는 이야기이며 바로 뒷문장에 태서인(泰西人)이라 하여 한(漢)나라 때 산을 넘어왔다고 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직 남만(南蠻)이 묘족인 것처럼 주장하는 것은 잘못이다.

 

오늘날 묘족은 중국의 다섯 번째로 인구가 많은 종족이며 그 분포지역도 다양하고 넓다. 그러나 그 옛날의 한민족의 시조 환인천제께서 처음으로 가지셨던 종족이름 묘족과는 별개의 것이다.

 

환인시대의 묘족은 오늘날 한국, 중국, 일본의 공통조상이며 동아시아제족의 뿌리이다. 묘족은 어두운 암흑시대에 탄생되었으므로 씨족, 또는 씨의 종족이란 뜻으로 부르게 되었던 것이다. 역대신선통감에서는 오황로(五黃老:水精子 赤精子 黑精子 靑精子 黃精子)가 태초에 태어나 만물이 생기고 인간이 탄생했다고 적고 있다.(歷代神仙通鑑卷一)

 

그 다음으로 묘족은 고산족(桓), 유목족(韓), 하백족(漢)으로 크게 나누어 졌는데 고산족(桓)은 동남으로 이동하여 주로 하백족(漢)으로 발전하게 된다. 유목족(韓)은 서쪽으로 이동하게 되는데 환단고기에 치우를 비롯하여 많은 군장들이 이들 출신이다. 구이(九夷)는 이들 삼묘에서 갈라져 나온 것이다.

 

묘족(苗族)에서 삼묘(三苗)로, 삼묘(三苗)에서 구이(九夷)로 갈라져 나갔다. 구이(九夷)에서 팔적(八狄)·칠융(七戎)·육만(六蠻)으로 갈라지면서, 인구의 팽창은 가속화 되었다. 그에 따라 한民族의 조상인 묘족은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다.

 

결론적으로 지금 중국의 묘족은 황제와의 전쟁 이 후 황하 건너 남쪽으로 물러난 종족과 전쟁을 피하여 남쪽으로 내려간 종족들이며 그 중에서 일부 무리는 요. 순. 우 때까지도 국지전을 일으켰다고 사서에는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상 치우의 군대는 북방에서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으므로 구려(九黎) 구려(句驪)로 이어진 것으로 봐야한다. 고구려는 고리국( 離國)의 뿌리에서 유래되었었다. 고리국에서 갈라져 나온 나라가 부여국이다.

 

고구려는 고리국( 離國)에서 구려(句驪), 고리(高 리) 등으로 이어져 내려왔음을 정사에서는 기록하고 있다. 즉, 구려(九黎)는 중국남부에 정착하지 않았으며 지금의 묘족은 옛날 구려(九黎)의 유민으로 전쟁을 피해서 남쪽으로 내려간 종족의 일부라고 보아야한다.

 

三國史記 高句麗篇 28대 보장왕(寶藏王28대, AD.634년) 27년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高氏自漢有國 今九百年, 高句麗自秦漢之後』

 

" 고구려는 한나라와 같은 뿌리이며, 9백년간 존속했으며, 진한(秦漢)의 뒤를 이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고구려가 유목민(韓) 이었지만 한편으로는 하백족(漢) 이라고 한 것을 보면 유구한 역사의 흐름 속에서 서로 융화한 흔적이라 볼 수 있으며 주로 물가를 주름잡고 살았던 하백족(漢)의 문화가 많이 발달해 있었음을 알 수 있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