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역사 침탈(侵奪)

BC 28세기 요하문명의 濊貊族이 남하 하여 夏, 商, 周를 건국하면서 황하문명을 일구었으며, 鮮卑族이 秦, 漢, 隨, 唐을 건국했습니다. - 기본주제 참조

민족의 기원

우량카이(兀良哈) / 우란카이(烏蘭蓋)

자연정화 2018. 7. 22. 14:56

우량카이(兀良哈) / 우란카이(烏蘭蓋)

 

우량카이(몽골어: ᠤᠷᠢᠶᠠᠩᠬᠠᠶ, 한국 한자: 兀良哈 올량합, 페르시아어: اوريانكقت Ūriyānkqat)는 중세 몽골에서 몽골 고원의 유목민들이 알타이 우량카이, 투바인, 야쿠트인 등의 "삼림민"들을 가리키던 말이다. 10세기부터 중국 문헌에 언급이 나타나는데, 시대에 따라 그 의미가 확장되어 단순히 자신들보다 미개하다고 생각되는 집단을 일컫는 말처럼 사용되는 모습을 보인다.

 

몽골인들은 자신들보다 북쪽에 사는 수렵민족을 우량카이라고 불렀고, 명나라와 조선에서는 여진도 우량카이라고 불렀다. 나중에는 건주여진이 야인여진을 우량카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일 칸국의 라시드알딘 하마다니가 쓴 《집사》에서는 우량카이를 시베리아와 접하는 북방의 숲에 사는 "수렵민 우량카이"와 몽골 초원지역에 진출한 "유목민 우량카이"로 양분해 설명하고 있다. 수렵민 우량카이는 양도 소도 야크도 모르고 방목지의 게르도 모르고 자작나무 껍질로 만든 막집에 살며 생활했는데, 우연히 자신들의 거주지에 들어온 양을 발견하고 곧 그 양과 소의 생육장소를 찾다가 숲에서 나와 초원에 진출했다는 것이 유목민 우량카이의 기원설화이다.

 

수렵민 우량카이는 소위 삼림민(اوريانكقت بيشه Ūriyānkqat-i bīsha)들이라고 불리었고, 그들의 영역은 코리 튀메드 및 오늘날의 키르기스스탄 등지와 접했다. 몽골 제국 시대에 활약한 우량카이 출신 사람으로는 사준사구의 일원인 젤메, 수부타이 등이 있다.

 

몽골의 주 1. 북연 왕조 2. 4 오이라트 3. 모굴리스탄 4. 카라 댈

 

14세기 중반 우량카이는 둥베이 요양에 살았다. 우량카이의 지도자 나하추는 거의 반독립 상태의 군벌이었는데, 1375년 북원과 협력하여 요동반도를 공격했다. 이후 나하추는 만주 남부에서 할거했으나 명나라의 공격으로 1388년 항복한다. 한편 몽골 북부 우량카이는 난을 일으켰다가 1538년 다얀 칸에게 토벌되고 대부분이 할하에게 흡수되었다. 바트무크 다얀 칸은 우량카이의 투먼을 해산시켰다.

 

몽골 중앙에 살던 우량카이는 헹티 산맥 부근에 살다가 16세기 초에 알타이 산맥 방향으로 이동했다.[5] 일부는 북원 아래에서 오늘날의 후브스굴 주로 이동하기도 했다.

 

17세기 초가 되면 우량카이라는 말은 북서부 지방에 드문드문 흩어져 사는 부족들을 그들이 사모예드계인지 튀르크계인지 몽골계인지 상관하지 않고 퉁쳐서 일컫는 말이 되었다. 1757년 청나라는 최북방 국경에 우량카이 기를 설치했다.

 

몽골인들은 투반인들을 우량카이라고 불렀다. 또 오늘날의 바잉울기 주, 허브드 주에 사라던 부족들을 알타이 우량카이라고 불렀는데, 이들은 오이라트와 관련되었음이 확실해 보인다. 또 동부 몽골의 다얀 칸 밑에도 6개 투먼으로 된 우량카이 부족이 있었다. 이 우량카이는 젤메와 수부타이의 출신 부족이었다고 전해진다. 알타이 우량카이나 홉스굴 우량카이는 튀르크계나 사모에드계가 없었다.

 

서부 몽골의 알타이 우량카이족의 쥘게트 귄 호슈 의 지도

 

명나라 때는 여진이 중국인들 보기에 만주의 숲속에 사는 "삼림민"들이었고, 그래서 이들도 우량카이와 같은 말인 "올량합"이라고 불렀다. 이 말이 한국어에도 전해져서 여진의 일파를 "올량합"이라고 일컫다가 이 말이 변해 "오랑캐"가 되었는데, 주로 14세기 ~ 15세기에 중화문명에 포함된 세계를 공격하는 외부의 야만인이라는 맥락에서 사용되었다.

 

조선에서 일컬은 우량카이는 두만강 유역에 살던 야인여진 왈카부를 이름인데, 나중에는 건주여진의 후신인 청나라에서도 야인여진을 일컬어 우량카이이라고 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임진왜란 때 일본의 가토 기요마사가 두만강을 넘어가 이 여진 우량카이와 교전했다가 패퇴한 바 있다.

 

1575년 청나라는 북부 국경에 우량카이 팔기를 설치했는데, 이 우량카이는 물론 야인여진 우량카이가 아닌 몽골 우량카이를 이름이다. 팔기군으로 편성된 우량카이는 후브스굴 우량카이, 탄누 우량카이, 켐치크, 살차크, 토주(이상 모두 투바계), 알타이인이 있다.

 

한편 야쿠트인의 옛 이름 중 "우랑하이(Uraŋxai)"가 있다. 하지만 야쿠트는 우량카이가 아니며, 이는 단순히 야쿠트인의 다른 이름에 불과하다. 러시아의 파벨 네볼신은 1850년대 볼가 칼미크인 중 "우란쿠(Urankhu)" 씨족이 있다고 기록한 바 있다.

 

몽골 헹티 산맥 부근에 우량카이의 후예들이 아직도 살고 있으며, 그 인구는 2010년 기준 26,654 명이다.

 

투바인과 타뉴 우량카이

 

 

우량카이족

 

몽골어: Урианхай (Uriankhai)

영어: Uriankhai

러시아어: Урянхайцы

중국어: 乌梁海 Wūliánghǎi (옛: 兀良哈 Wùliánghā)

일본어: ウリャンカイ

한국어: 우량카이 (옛날에는 오랑카이라고 발음했으며, 이것이 오랑캐가 되었다.)

 

 

1. 개요

우량카이는 우리말 오랑캐의 어원이 된 몽골계 부족.

 

보통 한국인들은 오랑캐를 건주여진과 같은 부족으로 알고 있지만 뿌리부터가 다른 전혀 다른 부족이다. 바이두 백과에 따르면 고비 사막의 북방의 지방(주로 몽골을 가리킴)의 동부에 할거하는 몽골계 부족 이름이라고 한다.

 

2. 우량카이의 역사

 

2.1. 몽골 제국 시대

"집사(集史)"에 의하면 우량카트 부족지에서는 우량카이를 북쪽의 숲에 사는 "수렵민 우량카이족"과 몽골화된 초원 지역에 진출한 "유목민 우량카이족"으로 양분하고 설명하고 있다.

 

우량카트 부족지에서는 원래 "수렵민 우량카이족"는 염소도 소도 야크의 종류도 모르고 목초지도 (펠트)천막의 주거도 모르고 가죽 덮개를 살아왔지만 우연히 자신들의 거주지를 헤매다 양을 발견하고 마침내 그 양이나 소의 생육 장소를 물색 중에 삼림 지대에서 초원에 진출했다는 "유목민 우량카이족"의 근원 설화를 전했다. "집사(集史)" 에서는 삼림 지대에 거주하는 전자의 "수렵민 우량카이족"을 "숲의 우량카트라고 부른다. 또 이 "숲의 우량카트"는 코리, 토마트, 키르키즈족 등과 경계를 접하고 있었다고 한다. 몽골 제국 시대에 활약한 열린 우량카이 부족 출신자로서는 이른바 "사구"의 젤메, 수부타이 두 사람이 있다.

 

상술한 "수렵민 우량카이족"과 "유목민 우량카이족"의 2종류는 거의 현재에도 적합한 전자는 소욘(Soyon)이라고도 불린다. "몽골 우량카이" "알타이·우량카이"에, 후자는 "탄느·우량카이", 토우바명들의 생활 형태에 해당한다.

 

 

2.2. 북원 시대

1368년 대도의 함락부터 청나라의 성립에 이르기까지 시대에는 "우량카이"로 칭하는 복수의 집단이 존재했다.

 

그 중 한 집단은 다얀 칸이 분열된 몽골족을 간만에 통합시킨 후 성립한 6부 중 좌현에 속하는 3부족 중 하나로 연맹에 참여하였다. 이에 관한 자세한 정보는 북원 문서 참고.

 

2.3. 우량카이·투멘

"집사集史"에 의하면 칭기즈 칸과 그 후손들이 묻힌 헨티 산맥의 금전지를 수호하는 자는 우량카이부의 아미르였다는데, 이 역할은 대대로 계승되어 북원 시대에는 "주(칭기스 칸)의 황금의 관을 지키고, 또 큰 운명의 칸국인"로서 우량카이·투맨을 구성했다. 북원 시대의 "투멘 "은 전 기타(사마천), 오이라트 제국의 통일과 와해와 같은 혼란을 겪어 새로운 형성된 것으로 전 시대의 부족과 관계가 불분명한 게 많지만 적어도 우량카이 투 맨은 전대의 우량카이부와 직접 관계가 있다고 본다.

 

잡반에센 타이시가 전 몽골을 통일할 때에는 우량카이부의 두목에 차부단(탄)이란 사람이 있고 딸의 아르타 걸진을 타이슨 칸(톡토아 브하)의 비로서 있었다. 그러나 타이슨 칸은 이를 이연하다 사토가 타에 그치고 버렸다. 나중에 타이슨 칸이 잡 반 에센과의 싸움에 져서 차부 댄의 곳에 진입하는데, 이것을 원한에 생각한 차부 댄은 딸이 막는 것도 듣지 않고 타이슨 칸을 죽이고 말았다고 말한다.. 아르타 걸진이 낳은 타이슨 칸의 아들은 나중에 모런 칸이었다. 또 우량카이의 호톡토이 딸의 시키루를 바양, 몽케, 볼프 진왕에게 시집 보내단 것, 지부티 전 재들을 낳은 다얀 칸의 비의 한 사람이 우량카이부 출신일 것 등도 기록됐고, 우량카이부가 자주 한 비를 배출할 유력 부족 중 하나였던 것을 의미한다.

 

오랫동안 분열 상태에 있던 몽골은 다얀 칸의 등장으로 다시 통일되고 다얀 칸은 부하의 여러 집단을 여섯 투 멘(6만채)으로 재편성했다. 여기서 우량카이 투 라면은 차하르, 하루하와 함께 좌익의 3만채를 구성하는 우익의 오르도스와 대한 것으로 떠올랐다. 상술한 것처럼 다얀 칸은 그 어머니와 왕세자비가 우량카이부 출신의 인물로 우량카이과 칸 사이에는 강한 관계가 있었다.

 

그러나 다얀 칸의 뒤를 이은 보디·아라크·칸은 특히 우량카이과 관계가 없이 우량카이부의 입장은 변화를 피하지 못하고 마침내 우량카이이 반란을 일으키게 된다. 우량카이는 게겐 승상(지부티 바라트 승상)와 토쿠 타이·배·후의(토로이・노양)들에게 인솔되어 공격을 두드렸지만 마침내 보디·아라크 칸, 알탄, 칸들에게 토멸한다 흠좀무(...)

 

멸망되었으나 우량카이부 신장은 남아 투 맨으로 분할되며 일설에는 토우메토의 모밍강부, 오르도스의 우라토부와 케우케토부는 우랑카이 정복에 의해서 증설된 부족으로 알려진다. 우량카이의 자리에는 게레셍지에의 후손인 밖 할하 제후가 진출하고 청조가 성립할 무렵에는 북 몽골의 대부분은 할하부의 영지가 된다.

 

 

2.4. 타안위(朶顔衛) (兀良哈)

1389년 아쟈슈리에게 인솔되어 내일 아침에 항복한 집단은 명나라보다 타안 위·타이 영위·복 여위의 세 수위실로 편제되어 명나라 사람들보다 우량카이 삼위(올량합 삼위)라고 총칭되고 있었다. 그러나 삼위 전체를 "우량카이"라고 칭하는 것은 명나라 측의 오해에서 실제로 우량카이인으로 구성되는 것은 타안 위 뿐이었다. 타안 마모루장의 가계는 칭기즈 칸을 섬긴 네 하야오 네 이누인 우량카이부 지에루메를 시조로 하고 있어 몽골 제국 시대로 나뉜 우량카이부의 일파의 후예인 것으로 보인다.

 

타안 마모루는 삼위 중 유일하게 멸망을 모면하고 존속하면서 청조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네이멍구 로쿠 메이의 하나, 죠스트 맹에 속스루 하라 진 깃발·토우메토 좌기는 실제로는 타안 마모루의 후신이다.

 

2.5. 조선에서의 오랑캐(兀良哈)

조선에서는 북방에 거주하는 이민족의 일부를 명나라의 "우량카이" 같은 한자로 표기하고,"兀良哈(오랑카이)"라고 칭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는 몽골의 우량카이부와 무관한 여진의 한 분파에서 명나라에서는 야인이며 청조에서 동해 삼부이라고 불리었던 집단의 하나, 왈개부에 해당하는 집단이다. 거주지는 주로 두만강 유역에서 명나라에서는 털 린위로 불렸다. 임진왜란에서 가토 기요마사가 그 일부와 교전한 것으로도 알려졌다.

 

2.6. 탄누·우량카이

현대의 투바 공화국에 해당하는 지역도 또 烏梁海(우량카이)라고 불리며 청조 시대에는 탄느·우량카이에 조직되고 있었다. 烏梁海(우량카이)라는 명칭은 가루단 칸의 침공 이전에 이 지역이 할하부 우량카이·오 톡을 소유하는 샘 부산 이마의 일족의 관할하에 나온 것이다

 

3. 현대

몽골 헹티 산맥 부근에 우량카이의 후예들이 아직도 살고 있으며, 그 인구는 2010년 기준 26,654 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