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역사 침탈(侵奪)

BC 28세기 요하문명의 濊貊族이 남하 하여 夏, 商, 周를 건국하면서 황하문명을 일구었으며, 鮮卑族이 秦, 漢, 隨, 唐을 건국했습니다. - 기본주제 참조

민족의 기원

④ 한민족의 뿌리, 몽골의 역사와 문화(마지막회)

자연정화 2018. 7. 20. 13:40

한민족의 뿌리, 몽골의 역사와 문화(마지막회)

하라호롬, 엘승타슬하고려 공녀 출신 기황후가 지배한 하라호롬(Karakorum, 검은 숲길)

 

출처 : 한려투데이 2013. 08. 16. 채흥기 기자

 

▲ 만안궁 외벽, 현재의 성벽은 모두 허물어지고 사원의 외벽이다. 내부에는 에르덴조 사원이 남아 있다.

 

만안궁 주변 인구 500만명 거주, 내부 에르덴조 사원만 남아 / 대형유적 유일

 

하라호롬은 몽골제국 초기의 수도로 몽골어로는 ‘검은 숲길’이라는 뜻이다. 북원시대 고려 여인 기황후가 지배한 하라호룸은 파괴돼 유적이 거의 남아있지 않지만, 초원이 대부분인 몽골에서 유일한 대형 유적지라 할 수 있다.

 

넓은 초원 안에 도시에 형성돼 있는데, 하라호롬박물관측에 따르면 만안궁안에 약 1만~1만5,000명이 거주하고 궁 인근에 약 500만명의 주민이 거주하는 거대한 도시였다고 전한다. 도시가 급속도로 발전하면서 거란인, 한족, 티베트인, 위구르인, 페르시아인, 인도인 등 아시아인과 프랑스, 독일, 마자르, 러시아 등 유럽대륙에서 온 사람들이 거주했다. 남쪽에서 서쪽으로 강이 흐르고 있어 수량이 풍부하고 초원이 잘 형성돼 있다. 위치는 몽골공화국의 서부 오르홍강 상류 우안의 에르데니자오 부근에 있다.

 

징기스칸이 1220년 오르홍강 유역에 수도를 건설할 것을 명령했다. 제2대의 황제인 태종 오고타이 7년(1235)에 도성을 정해 만안궁(萬安宮)을 건설, 이후 정종, 헌종에 이르는 약 20년간의 수도였다. 지난 1948~1949년 구 소련의 키세료프를 단장으로 한 몽골역사민족학 조사단이 발굴. 도성은 남북으로 약 2500m, 동서로 약 1300m의 토루로 싸여 있으며, 만안궁터로 짐작되는 토대나 관아 지구 및 공방지구 등이 있었다.

 

기와와 벽화, 직물조각, 자주요를 포함한 도자기, 공예품, 농공기구 등이 출토됐으며, 13세기의 프랑스인 선교사 뤼브뤼크의 『여행기』를 보면 성내에는 중국인 거주지역과 사라센인 상업구역, 불교사찰 12, 이슬람 교 사원 2, 네스토리우스교 사원이 1곳 있었다고 했다.

 

▲ 만안궁앞 몽골전통방식의 사냥 도구인 사냥매.

 

▲ 만안궁 내 석조

 

▲ 에르덴조 사원

 

▲ 사찰앞에서 엎드려 절하는 몽골 관광객

 

하라호롬은 1235년 우구데이 칸이 건설했지만, 그는 만안궁에 정주하지 않고 계절에 따라 이동생활을 했다.

하지만 앞에서도 언급했듯 쿠빌라이가 즉위하고 아릭부케와 내전에서 승리하면서 수도를 북경으로 옮겼기 때문에 이후 하라호룸은 지역 변방의 도시로 전락했다. 화림이라는 명칭으로 행정체계를 유지했고, 1312년 화녕이라는 이름으로 변경했다.

 

몽골제국은 명제국을 세운 주원장에 의해 수도를 포기하고 다시 초원으로 밀려났다. 원나라 순제 토곤테무르는 초원으로 도망가던 중 사망했고, 그의 아들 아유사리다라(1338년 ~ 1378)는 북원의 제2대 황제로 하라호룸에서 자리를 잡고 제국의 부흥을 꾀했다.

 

아유르시리다르는 원 혜종과 고려 공녀 출신 기황후의 아들이며, 1353년에 황태자가 됐다.기황후는 고려 출신 환관 박불화를 이용해 혜종이 아유르시리다르를 황태자로 책봉하도록 압박했다.

 

고려 공민왕은 1356년 기황후를 믿고 그의 오빠인 기철이 왕권을 압박하자 기씨 일족을 멸했다. 이에 분노한 기황후는 테무르를 고려왕으로 세우고 고려를 침공했으나 압록강에서 패배했다.

 

이후 내전에 휩쌓였으며, 코케 테무르를 실각시킨 후 1370년 북원 황제 토곤 테무르가 죽자 아유르시리다는 하라호룸에서 황제에 등극했다. 어머니 기황후 뜻에 따라 고려 여성 권씨를 황후로 맞이하니 그가 권황후다. 권황후는 딸만 1명 낳았는데, 후에 쿠빌라이칸의 형제 아릭부케의 5대손 예쉬데르에게 시집갔다.

 

아유르시다르는 1378년 사망했으며, 북원은 급격히 힘을 잃었다. 쿠빌라이 후예들은 아릭부케의 후예들에게 패배했고, 이후 오이라트족은 하라호룸을 파괴했다. 당시 500만명의 도시였던 하라호룸은 대부분 파괴되고, 1585년 할하 몽골의 아브타이 사인칸에 의해 건설됐다. 그는 제3대 달라이라마와 만나면서 3개의 주요 사원이 건설했다. 그가 건축한 에르덴 조 사원만이 남아 종교적 성지로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1701년부터 새로운 사원이 건축되기 시작했으며, 청나라 시기인 1803년~1813년 사원의 외벽이 완성됐다.<사진>

 

각변이 400m 정방향에 108개의 탑들이 늘어서 있다. 전성기때는 몇십개의 사원과 수천명의 승려들이 있어 티벳불교의 중심이 됐으나 19세기 재정적 지원을 받지 못해 쇠퇴했고, 구소련 스탈린 집권 후 공산화되면서 반종교적 정책과 몽골의 정신을 없애려는 시도로 1937년~1939년 많은 사원들이 파괴됐다. 에르덴 조 사원은 파괴된 궁전을 건축재료로 삼았다 한다. 1965년 사원이 아닌 박물관으로 개방돼 현재에 이르고 있다. 현재 라마승 10여명이 수도하고 있다. 이러한 저변 때문에 현재 몽골인들은 러시아와 중국에 대해 좋지 않은 감정을 갖고 있다.

 

밖에는 동물형상의 석상과 밥을 해먹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거대한 청동솥이 있고, 절 안에는 부처 등이 모셔져 있다.

 

이외 남쪽 정상에는 돌탑 조형물이 있고, 인근에 역사박물관이 있다. 이곳은 인근 200km 반경내 무덤에서 발견된 금동 등 부장품과 13세기 당시를 모형으로 재현한 집터 등이 전시돼 있다.

 

▲ 하라호롬 염원탑이 있는 산 정상에서 바라본 물이 흐르는 초원

 

▲ 산 정상의 염원탑. 우리의 서낭당 같은 것이다.

 

▲ 하라호롬박물관. 최근에 건축됐다.

 

▲ 가야금 모양의 몽골전통악기를 연주하는 아가씨. 관괭객들을 위해 캠프를 옮겨다니며 공연한다.

 

고비사막을 가지 않고 사막 체험 / 작은 사막, 엘승타슬하

 

울란바토르에서 징기스칸 시대 수도였던 하라호롬으로 가는 길 280km 지점에 있다. 하라호롬과는 80km 정도 거리 있다. 이곳의 지명은 ‘모래가 갈라진 곳’이란 뜻으로 고비사막을 가지 않고도 사막을 체험할 수 있는 곳이다. 4~5km 옆으로는 몽골의 5악의 하나인 허그한산이 자리잡고 있다.

 

이곳에서는 승마체험과 낙타체험을 동시에 할 수 있다. 하라호룸에서 울란바토르 오는 길을 일부를 제외하고는 아스팔트가 포장돼 있다. 현재 울란바토르에서 동서로 4,000km 이상 아스팔트 포장도로를 건설 중이며, 울란바토르에서 달란자드가드 가는 길도 도로 포장이 진행 중이다.

 

또 그 이전에 머물렀던 숙소 인근은 큰 바위산으로 둘러쌓여 있다. 초원에는 진한 허브향을 내는 식물과 드물게 대파가 자란다. 산 정상에도 대파가 자라는 것을 보았다. 또 산 정상 부근엔 누운 향나무가 자라고 있다. 대부분은 암석으로 이뤄져 있다. <글.사진= 채흥기 기자>

 

▲ 엘승타슬하 관광객들을 위한 게르

 

▲ 작은 고비사막이라고 부르는 엘승타슬하의 작은 사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