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회청문회 임승국 (5-4) "발해만 연안에서 기자조선 유물도 나와"
(기자조선이 승리한 즉 "조선사군의 승전기록"이다)
(이어서 계속)
사군의 통치자로 등장한 고조선족 네 사람이 소속된 고조선,
즉 기자조선이 승리했던 것입니다.
다시말하면
위만조선이라는 통치기구가 무너지고
그 통치기구가 네 개로 갈라지고
그 통치 주체가 "기자조선인"으로 바뀐 것입니다.
어저께 김철준 박사께서는 "사기연표"를 동원하면서
이렇게 설치된 조선사람의 나라가 오래가지 못하고 10년 20년 뒤에 다 없어졌다고 했습니다.
사실입니다.
그러나 통치기간이 길고 짧은 것이 문제되는 것이 아니예요
여기서 이 전쟁의 성패를 가름하는 기준이 바로
조선사람 네사람에게 있다는데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딴 사람은 다 사형됐는데
이 사람들만이 지역의 통치자로 군림하였다는데 의미가 있습니다.
이 땅은 그 옛날 기자조선의 땅이고, 또 무너진 위만조선의 강역입니다
(조선사군의 땅은 발해만 연안, 기자조선 유물도 나와)
그런데 이 땅의 위치를 어디라고 사기연표는 밝혔는지 아십니까?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전부 "발해연안 즉 「뽀하이」만 연안에서 산동반도에 걸치는 곳에 사군이 있었다"고 했습니다.
만주대륙도 아니고
한반도는 더욱 아닙니다.
그러니까 여러분께서는 여기에 착안하셔야 합니다
이형구교수가 79년도에 발표한 것을 보면
(지금 이형구 교수는 대만에 가 계신 줄로 압니다만)
"기자의 유물들이 중국의 객좌현(喀左縣)에서 쏟아져 나오고 있다"고 했습니다.
이 객좌현은 다른 곳이 아닙니다.
조선인 사군이 설치된 바로 그 지역이며 옛날에는 기자조선의 땅이었습니다.
이교수는 이 출토물들을 연구하여 석사학위까지 받았습니다.
(한반도 이남의 유물로 고조선 입증하려는 시도는 OO한 짓이다)
기자조선 있던 곳에서 기자유물이 나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인 것입니다.
한반도인 휴전선 이남에서 출토되는 유물들을 가지고 고조선 역사를 증명하려고 한다면
이는 잘못된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고고학이 안고 있는 학문적 한계성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위해서도 남북통일은 빨리 되어야 되겠어요.
그래서 중국땅에 가서 고고학과 한국고대사를 연구해야겠습니다.
(무령왕릉의 묘제는 백제의 대륙진출을 입증한다)
무령왕릉에 관한 말씀도 했습니다마는
중국땅에 가 보면 무령왕릉과 꼭 같은 양나라의 묘제가 많이 있는데
무령왕릉의 묘제는 이상하게도 양나라 묘제와 꼭 같습니다.
그렇다면
양나라 하고 백제는 어떤 관계가 있었던 것이 거의 틀림없지 않겠습니까 ?
그러나 과거와 같으면 의례 이렇게 생각들을 했어요.
즉 "묘제가 같으니 아마도 양나라쪽에서 백제를 쳐들어 왔을 것"이라고 생각 했을 거예요.
그러나 반대로 「백제가 양나라에 진출했을 런지도 모른다」고 생각지는 못했습니다
(사마천은 스스로 조선에 패했다고 기술하고 있다)
어찌되었던 사마천은 "사기 조선열전"을 다 적고나서
제일 마지막에(여러분도 아시겠지만) "태사공왈"이라는 대목을 적었습니다.
이것이 무슨 기록이냐 하면 자기가 적은 역사기록에 대한 "서평"입니다.
다시 말하면 자기의 의견을 말하는 대목입니다.
그런데 이 "태사공왈"에서
"순체쟁로(荀 爭勞)하여"
즉 순채는 육군사령관인데 그가 공로를 다투다가
"여수개주(與遂皆誅)라"
즉 "공손수(천자의 사신)와 함께 죽임을 당하고"
"양군구욕(兩軍俱辱)이라"
즉 "수륙양군이 모두 욕을 당했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욕을 당했다"는 말은
전선사령관이 전선에 나가서 뭐 적장에게 뺨이라도 맞았다는 말인줄 아십니까 ?
아닙니다
이것은 군사술어인데 "졌다"는 뜻입니다.
자기측의 기록을 패라고 적는 법이 없습니다.
따라서 "욕"이라는 말은 졌다는 말입니다.
"졌다"는 말을 한문에서는 여러 가지로 표현합니다.
"패(敗)"나 "항(降)"이라 하지 않습니다.
아까 "삼전도"의 이야기도 나왔습니다마는
우리 인조대왕께서 청태종한테 곤두 칠배하면서 항서(降書)를 바쳤던 것입니다.
그런데 사서에서는 이를 뭐라고 적었는고 하니 "성하지맹(城下之盟)"이라고 하였습니다.
즉 "성하에 내려가서 맹서했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맹서했다"는 말은 무슨 말입니까 ?
무슨 조약체결이라도 했다는 말인줄아십니까 ?
아니예요
"항복했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한문의 「뉘앙스」입니다.
"맹서한다"는 "맹"자나 "강화한다"는 "화"자는 모두 항복을 뜻합니다
(중략)
어쨌던 "맹(盟)"이라 하는 말이나 "화(和)"라고 하는 말은
모두 "항복(降伏)" 했다는 말이며 "양군이 구욕(俱辱)"이라 한 이 말은
"수륙양군이 모두 욕을 당했다"는 말인데
이는 "수륙양군이 모두 패했다"는 이야기입니다
한문의 "뉘앙스"를 잘아셔야 합니다
또 "태사공"은 말하기를 "장졸문막후의(將 問莫侯矣)"라 했습니다
여기서 "졸"자는 "졸(卒)"자로 읽습니다
즉 "장교나 졸병이나 간에 아무도 후(侯)가 된자 없다"
"상 받은자가 없다"는 얘기예요
상은 무슨 상입니까 ?
후는 또 무슨 후 입니까 ?
모두 사형당했는데 !
그러므로 졌다고 고백하는 것이나 다름 없습니다
(일차 사료상에 명시되어 있지 아니한 한사군은 없었다)
(한무제가 참패를 당하였는데 조선땅에 무슨 "한사군"을 설치할 수 있는가?)
동양사에서 역사의 아버지라고 추앙되는 태사공사마천이며
또 한무제 자신의 사관인 사마천이가 쓴 글에
"漢나라가 졌다"고 그랬습니다
진 사람이 식민지를 설치할 수는 없습니다
저는 "한국정사"라는 책을 썻는데 대담하게도 "한사군은 없었다"하는
부제를 달아서 책을 냈습니다
이 책이 다 팔렸어요
그러니까 보는 사람이 많으니까 다 팔렸겠지요
한사군은 없었습니다
우리 "학계에서 한사군은 없었다"고 최초로 떠든 사람은
아마 책으로 낸 사람은 내가 처음일 것이에요
(한사군은 없었다)
한사군은 없었습니다
일차 사료상에 명시되어 있지 아니한 한사군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따가 질문이 나올 것으로 압니다마는
"낙랑, 현도, 진번, 임둔"이라고 하는 사군의 이름을 어디서 채취했느냐
설마 창작은 안했겠지요
물론입니다
사기 다음에 중국 25사는 전한(前漢)서 입니다
사기와 전한서의 시대적 갭이 180년 내지는 200년입니다
적어도 2세기 이상 가까이 돼요
후한시대의 반고가 적은 "전한서"에서 비로소
"낙랑, 현도, 진번, 임둔"이라고 하는 여덟 글자가 "가필"이 됩니다
제가 "가필"이라고 하는 말에 "액센트"를 두는 이유가 있어요
반고의 "조선전"은 사기 조선열전을 그대로 복사한 것처럼 그대로 베꼈습니다
글자하나 글자의 순서하나 바뀌지 않고 그대로 다 베꼈어요.
베꼈는데 이상하게도 "수정조선위사군"이라고 하는 대목에서만은
위자하고 "사"자중간에 즉 「수정조선위」 다음에
「낙랑 현도 진번 임둔」이라는 여덟글자가 불어나고
그 다음에 "사군"이라는 글을 적었어요
(수정조선위 "낙랑 현도 진번 임둔" 사군)
이것은 분명한 가필입니다.
나는 이를 반고 자신의 가필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당나라 이후 중국의 사필이 이런 짓을 한 것으로 압니다.
그래서 이 반고의 전한서 이후 우리 한국의 사학이나 동양사학이
한사군을 거론하면서 "사기조선열전"을 증거 자료로 들먹이지 않고 있습니다
(일차사료인 "사기 조선열전"은 감추고 가필된 "한서 조선전"만을 인용하는 학계는 지능적인 역사왜곡 행위다)
이것은 대단히 지능적인 처사예요.
왜 그런고 하니 사군의 이름이 들어있는 "한서조선전"만을 들먹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삼국유사의 "위만조선" 조만 보아도
"한서조선전문"하고 주를 붙인후 "낙랑 현도 진번 임둔야"라고 쭉 적었어요.
정확한 "사기(詐欺)"기록입니다
사기 조선열전에는 없고
그 200년후인 "한서조선전"에는 실려 있는 사군명입니다.
이 200년이라는 시간은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일차사료상에는 한사군의 이름조차 없으니까
한사군은 본래 없었던 것입니다.
원전 곧 등기문서상에 없는 한사군을 한의 식민지라고 한측이 주장한다면
등기부상에 없는 부동산을 자기것이라고 주장하는 꼴입니다.
내가 원전인 사기 조선열전 낙랑 현도… 등 사군명이 없다고 하면
어떤사람은 "왜 그래 있는데…"라고 반론할는지 모릅니다.
요새 번역되어 나오는 조선열전을 보면 사군명이 있다는 얘기지요.
기왕 번역문화의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참 기가 막힙니다.
특히 한서번역문화라는 것은 더욱 엉망입니다.
지금 한문세대는 내가 54인데 아마도 내가 마지막 세대인 듯합니다.
한문세대는 지금 간들간들해요.
우리가 해방후 36년 살아왔는데 이제 30년만 더 산다면
나도 안호상박사님 나이보다 많아집니다.
84세가 되니까요.
(잘못된 번역문화, 바로잡아야)
그쯤 되면은 아마 우리 한국의 한문세대가 끊어지기 전에 빨리 국사를 찾아야 되겠어요.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한문세대가 없어지고 있다는데 문제가 있다는 것보다
번역문화가 큰 일이라는 말입니다.
단국대학 명지대학에서도 나왔습니다.
또 각 유명출판사 을유문화사 삼성문화재단등에서도 사기 조선열전의 번역판이 나와있습니다.
그런데 그 번역된 조선열전을 보면
"마침내 조선이 평정되어 낙랑 현도 진번 임둔의 사군이 되었다"고 있습니다.
왜 이렇게 적었을까?
이는 번역하는 사람들이 사서의 원문과 "주"를 구별할 줄 모르기 때문입니다.
사서의 원문과 "주"를 구별한다는 것은 고전의 상식인데
저들은 이것을 모릅니다.
제가 가지고 있는 25사는 심지어 주를 란외에 따로적고 있어서 구별하기 쉽습니다.
그런데 다른 고전들은 대게 원문을 한줄로 "…이렇게"적고
"주"는 작은 글씨로 두줄로 적어 구별을 짓고 있습니다.
특히 그 "주석"의 서명을 "집해"니 "정의"니 "색은"이니 하고 적고 있습니다.
혹은 직접 "주자"의 이름을 "위소왈" "서광왈…"하고 적고 있는 것입니다.
대개 남북조시대~당나라 이후 증서들입니다.
따라서 원문을 쓴 시대와는 대게 500년~800년 사이의 시차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원문과 "주"를 혼동하거나 동일시하는 것은 잘못이예요
그렇지 않아도 학교에서 "낙랑 현도 진번 임둔"을 배웠든 터에
고전을 번역하다 보니까 "수정조선위사군"
그 다음에 " "낙랑 진번 현도 임둔"이라고 "주"를 끌어다 쓰게 되는 것이죠.
이렇게 하여 사기 조선열전의 원문에도 없는 사군명이 번역판 사기에 실리게 되는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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