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역사 침탈(侵奪)

BC 28세기 요하문명의 濊貊族이 남하 하여 夏, 商, 周를 건국하면서 황하문명을 일구었으며, 鮮卑族이 秦, 漢, 隨, 唐을 건국했습니다. - 기본주제 참조

홍익인간·인류공영/단군조선(BC2333)

※ 국회청문회 임승국 (5-5) 고구려에 항복한 "동수( 壽)의 묘"

자연정화 2014. 3. 5. 10:27

(고구려에 항복한 "동수( 壽)의 묘"가 한반도에 있는 것은 당연한 이야기이다)

아까 고고학에 관한 말씀을 하였습니다만
김원룡 박사께서는 동수의 무덤을 말씀하셨어요

김원룡교수는 뭔가 의도가 잘못된 것 같습니다.

우리 한국의 고고학자 가운데
동수의 무덤을 미천왕(美川王)의 무덤이라고 북쪽 학자들 얘기에 동조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동수는 저도 주장하기를 여러 군데 글을 썼습니다마는
동수는 꼭 알아두어야 될 것이 있습니다.


(동수가 고구려에 항복 했다는 기록은 "자치통감"에 나와..)

즉 동수가 고구려에 항복했다는 기록이 자치통감에 나온다는 사실입니다.
항복한 자가 그의 무덤을 한반도 땅에 남기는 것은 당연한 얘기입니다.

북쪽에서는 그것을 어떻게 하는지 모르겠습니다마는
우리들의 학문적인 주장을 왜 자꾸 북쪽에서 하는 주장과 우리들의 주장이 같다는 식으로
관련시켜서 얘기합니까?

우리 남쪽 학자들이 동수의 무덤을 미천왕 무덤이라고 주장한 사람이 있단 말입니까?
과문한 탓인지 모르나 저는 모르겠습니다.
우리 측에선 그런 사람 없습니다.


(해방전에 "동수의 묘"가 발견되었으면 일본놈들의 "한사군" 조작에 악용되었을 것이다)

북쪽에서는 동수의 묘를 미천왕릉이라고 주장하는 것을 저도 알고 있습니다.
나는 이 동수의 무덤이 1946년도에 발견되었다는데 의미가 있다고 봅니다.

즉 해방 다음해 1946년에 발견되었기 망정이지
해방전에 왜놈이 있을 적에 발견되었다면
이 동수묘도 아마 왜놈들에 의해서 한사군을 조작하는 고고학적인 반증자료로서
이용되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동수묘에도 "낙랑"이라고 하는 묵서가 나왔으니까
사리원땅이 또 한번 "낙랑군"지가 될뻔했던 것입니다.

마침 동수묘가 1946년에 발굴되었기 때문에 이런 화를 면한 것입니다.
동수의 무덤 비명가운데 역사를 날조(捏造)할 수 있는 아주 훌륭한 자료가 있었다는 말입니다.


("장무이(張武夷)의 묘"도 왜놈들이 조작한 가짜다)

비슷한 예가 아주 많습니다.

김교수가 아까 자주 말씀하셨던 전묘(塼墓)가 있습니다.
☞ 전(塼) : 벽돌 전

중국사람들의 묘지는 당연히 전묘(벽돌무덤)입니다.
전묘가 한반도에 많이 있어요.

제가 아는 장무이(張武夷) 무덤이 있습니다
그는 대방태수(帶方太守)였습니다.

그의 무덤이 사리원땅에서 발견되었습니다.
그래서 한반도땅에 대방군이 있다고 하는 하나의 추정이 이루어졌습니다.

물론 왜놈들에 의해서 말입니다.
그러나 이것도 가짜입니다.


("장무이"도 고구려에 포로로 잡혀온 "한인"이었다)

이 장무이도 아까 얘기한 동수와 마찬가지로 고구려에 포로로 잡혀온 한인이었어요.

동수에게는 항복의 기록이 있습니다.
즉 "분주고구려운운(奔走高句麗云云)"하는 기록이 자치통감에 나오지요.

따라서
동수가 고구려 망명 항복한 것은 틀림없는데
이 "장무이"에 대해서는 그런 기록을 찾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다행히
"비문상에 그가 항복한 사람이라고 하는 증거"가 나옵니다.


제일 마지막 대목에
"趙主簿가 令搏하니 懃意不臥"라는 대목이 있습니다.
(조주부가 영박하니 근의불와)


(5등관 주부(오늘날 주사보)의 아래 있던 사람이 태수라니.....)

조는 성씨요
주부는 고구려의 "벼슬이름"입니다.
세상이 다 아는 고구려 벼슬입니다.

삼국사기의 "관직고"를 보면
"주부"라고 하는 벼슬은 "5등관"입니다.

대한민국의 신분법으로 보면 "주사보"에 해당합니다.

"조주부가 영전" 하니의 "령"은 사역동사입니다.
그의 명령으로 "전"하니 "벽돌을 구워서 전묘를 쓰게 되니"라는 뜻이요

"근의"는 "은근한 뜻"이란 말이요
또 "불와"라는 말은 "쉬지 않노라"라는 뜻이므로
"땡큐 베리 베리 마취"하는 뜻입니다.

즉 조주부의 은혜가 대단히 고맙다는 얘기요.
죽은 사람은 태수요.

그의 무덤에다가 "조주부가 영전하니 근의불와"라
즉 "5등관 조주부의 그 고마운 뜻을 길이길이 잊을 수가 없노라"고 했다면

"대방태수 장무이"는
"조 주부"의 명령하에서 이리가라하면 이리가고 저리가라하면 저리가는
명령을 받았던 사람임에 틀림없습니다.


(장무이는 현직태수가 아니라 고구려로 망명한 한인...)

현직의 태수라면 그럴 수가 있습니까 ?

"태수"는 한지방의 생사여탈권을 걸머쥐고 있는 지방장관인데
5등관의 명령에 의하여 그의 턱끝에서 놀아났다면
이러한 사람은 포로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 전묘 즉 벽돌무덤이 발견된 것도 토성안에서 발견되었습니다.
고구려의 전통적 성법은 "석성"입니다.

그런데 토성 안에서 발견되었다고 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
이는 고구려 방어용의 성이 아니고
그 성은 포로 정도를 수용할 수 있는 도망을 방지할 정도의 성이었으니까
토성이었다고 볼수 있습니다.

어렵게 생각할 것 하나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장무이"는
고구려 병사에 의해 사로잡혀온 한(漢)나라 포로가 틀림없습니다.


(김원룡 교수가 얘기한 "봉니(封泥)"얘기는 과거 왜놈들이 만들어 놓은 조작품 가짜다)

또 김원룡 교수는 봉니에 대하여 말씀하셨는데
다 지난날에 왜놈들이 만들어 놓은 조작품 가짜입니다.

봉니(封泥)라는 것은
옛날에 공문서를 보낼 때 나무 상자속에 서류를 집어넣고
위에다 뚜껑을 덮고 열십자로 끈을 묶은 다음
거기다 아무도 개봉 못하도록 진흙을 뭉쳐서 발송관의 도장을 찍는데

여기서 "발송관"이라고 하는 말에 의미가 있습니다.

발송관이 만일 낙랑태수이면 "낙랑태수지랑"이라는 도장이 찍혀서
이 진흙이 마른 다음에 사자를 시켜서 보내는 것인데
말하자면 옛날의 교통수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요새말로 하면
"서류를 통한 니" 즉 "니"자가 진흙 "니"자 이니까
"발송관의 도장이 찍힌 진흙 덩어리 마른 것"
그것이 "봉니입니다"


(봉니(封泥)는 현대의 "우표개념"으로 도착지를 의미)

요새 우리들의 통신수단은
편지봉투에 우표를 붙이고 우체국의 소인을 꽝하고 찍는데
요사이 우리가 보는 소인찍힌 우표 !
그것을 봉니라고 보면 되요

낙랑태수의 도장이 찍힌 봉니가 평양에서 발견되었다고 한다면 평양은 도착지입니다

발송관인 낙랑태수는 평양 아닌 다른 곳에 있습니다
발송지는 딴 곳에 있단 말입니다

내 책상위에는 미국의 내친구한테서 온 편지가 많이 있습니다
"워싱턴 디시"의 "스템프"가 꽝 찍혀 있습니다

미국 우표까지 붙은 편지예요
자! 그러면 그 편지를 들고 서울은 "워싱턴"이다 라고 얘기할 수 있습니까?

"워싱턴" 즉 발송지는 미국이지요


(낙랑봉니는 왜놈들이 수백개 조작한 가짜)

낙랑봉니 수백개가 나왔습니다

낙랑태수의 봉니 뿐만이 아니라 현리(縣吏)의 봉니도 있어요
옛날엔 이장(里長)은 도장도 갖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장의 봉니까지 나왔답니다

이렇게 왜놈들은 낙랑군을 조작하기 위해서 온갖 짓을 다 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고고학적 조작에 대해서 더 이상 내가 해명할 필요를 느끼지 않습니다

한사군의 고고학적인 문제는 이따 내 강연이 끝난 다음에
박시인 박사께서 보충 설명을 해 주실 것으로 알고
내 이 정도로 고고학적인 문제는 줄이겠습니다

(다음은 역사지리적으로 본 한사군입니다)

(사진자료 1)


< 중국 요서에서 '임둔(臨屯)' 봉니 출토 >

- 출처 : 연합통신 사진검색

중국 랴오닝성(遼寧省) 요서지역 해안도시인
진시시(錦西市) 소황띠(小荒地)라는 고대성곽에서 출토된


"임둔태수장(臨屯太守章) 봉니"와 "승(丞) 자 봉니"

 

 

< 요령성 봉니 출토지역 >

금서(錦西)는 중국 군사지도에 의하면 변경전 지명이 연산(連山)으로 표시되어 있습니다
바로 "산해관"에서 북쪽으로 출발하는 고구려 천리장성 남단에 있군요

녹색표시는 "대릉하"입니다.

 

 

 

(사진자료 2 : 사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