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역사 침탈(侵奪)

BC 28세기 요하문명의 濊貊族이 남하 하여 夏, 商, 周를 건국하면서 황하문명을 일구었으며, 鮮卑族이 秦, 漢, 隨, 唐을 건국했습니다. - 기본주제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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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소(仰韶) 문화의 정체, 그리고 용산(龍山) 문화-3~4

자연정화 2018. 8. 29. 14:01

앙소(仰韶) 문화의 정체, 그리고 용산(龍山) 문화-3

 

출처 : 오뚜기 2017. 06. 18.

 

앙소문화에 속하는 묘조구 유적은 1953년에 하남성 삼문협(三門峽) 섬(陝)현 묘저구(廟底溝)촌에서 발견되어, 1956~1957년 중에 발굴되었는데, 그 위치는 [그림 1]에서 보는 바와 같다.

 

[그림 1] 묘저구 유적 등

 

 

유적의 총면적은 약 24,000㎡이며, 묘저구 유적 1기(期)와 2기(期)로 구분된다.

 

방사성탄소연대측정결과에 따르면, 유적의 하층(下層)에서 발견된 1기(期) 문화는 서기전 4,000~3,500년 경으로 추정되며, 상층(上層)에서 발견된 2기(期) 문화는 서기전 2,900~2,800년 경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하층(1기) 문화는 앙소문화로 분류되고 있는데, 집자리와 무덤 등이 출토되었으며, 돌삽·돌칼 등 간석기와 주발형 또는 대접형의 채도(彩陶) 등이 출토되었다.

 

집자리는 방형(方形)의 움집이며 둥근 노지(爐址)가 있고 10여 개의 크고 작은 기둥구멍이 있다. 채도(彩陶)는 검은색의 채색 무늬를 특징으로 하는데, 나뭇잎 모양의 곡선무늬와 새·개구리 등의 동물 그림이 그려져 있다.

상층(2기) 문화는 ‘묘저구 2기 문화(廟底溝二期文化)’라고 불리는 용산(龍山) 문화 초기라고 한다. 묘저구 2기 문화는 앙소문화의 요소와 용산문화의 요소가 동시에 발견되어 두 문화의 과도기 형태를 보여준다고 한다.

 

과연 그럴까?

 

어쨌든 토기는 회도(灰陶)가 주로 나타나며, 채도(彩陶)도 나타나지만 문양이 단순해졌다고 한다. 집자리는 원형(圓形)의 반움집이며, 농경이 발달하여 장방형(長方形)의 돌칼· 돌낫 등의 도구가 발견되었다고 한다.

 

또 돼지·개·소·산양 등의 가축 무늬가 발견되어 가축 사육과 경제 생활이 발달했음을 알 수 있는데, 무덤 형식은 장방형(長方形)의 구덩무덤(土葬墓)으로서 펴묻기(伸展葬)가 대부분이지만 굽혀묻기(屈身葬)도 나타났다고 한다.

 

그런데 묘저구문화를 예의주시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묘저구문화의 유적과 유물로부터 앙소문화와 용산문화의 관계를 해석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묘저구 2기문화의 유물들을 분석한 결과, 앙소문화가 발전하여 용산문화가 되었다는 결론을 도출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 「앙소(仰韶) 문화의 정체, 그리고 용산(龍山) 문화-2」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앙소문화에 속하는 대표적인 유적이 서안시에서 발견한 반파 유적인데, 반파 유적이 앙소문화 유적 중에서 가장 오래 되었다고 한다. 즉, 반파 유적에서 문화가 동쪽으로 전래되어 묘저구 유적을 이루게 되었으며, 묘저구 유적이 발전하여 산동성 지역의 용산 문화를 이루게 되었다는 논리이다.

 

또 반파유적이 동쪽으로만 전래 된 것이 아니라, 서쪽으로도 전래되어 섬서성 위하 유역에 섬서앙소문화를 이루었다고 한다. 즉, 서안시 반파유적이 동서문명의 중심지였다는 논리이다.

 

그런데 어떻게 서안시에서 발견된 반파유적이 앙소 문화에서 가장 오래된 것으로 평가된 것일까?

 

물론 자료마다 방사성탄소 연대측정 결과가 기록되어 있다. 또 방사선(전자)의 갯수를 하나하나 계측해내는 초정밀계측기로 측정하므로 비록 오차가 어느정도 있더라고 측정한 결과의 오류는 없을 것이다.

 

다만, 여러 유적에서 발견된 유물들의 성격과 내용, 그리고 과학기술적 측정 데이타를 근거로 해서 문명의 전래방향을 어떻게 평가하였는지를 곰곰히 관찰해야 할 문제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서안의 반파 유적을 포함하여 앙소문화보다 훨씬 앞선 시기의 유적이 발견되었는데, 1977년 하남성 정주시 신정(新鄭)시 배이강(裴李岗) 지역에서 발굴되었다.

 

이를 배이강(裴李岗) 문화라고 명명하였는데, 서기전 7,000~5,000년 경의 신석기 유적으로 추정하게 되었다고 한다.

 

배이강 문화는 초기부터 숫돌을 사용해 석기를 갈아서 다듬는 기술적 진보가 일어났으며, 토기 제작 초기에는 모래와 같은 불순물이 많이 포함되어 있었지만 점차 개선되었고, 가마를 사용하기 시작하여 더 높은 온도에서 토기를 구워내기 시작했으며, 용도별로 기종이 분화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바닥이 평평한 물항아리, 바닥이 둥근 사발, 입구가 좁은 호리병, 술잔이 대표적인 기종으로서 토기를 받치는 삼발이 구조와 토기 바닥에 덧댄 지각(支脚)이라 불리는 구조가 배이강문화의 대표적인 지표라고 한다.

집자리는 땅을 반쯤 파고 만든 움집인데, 위에서 내려다 보았을 때 원형의 구조를 가지고 있으며, 개나 돼지 등을 사육했던 것으로 보인다고 한다. 그러나 가축을 키우는 것보다 수렵이 식량 확보에 더 기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십여명 내외의 가족이 3~4 집이 모여 씨족을 이루고, 여러 씨족이 모여 하나의 부족을 이룬 것으로 보이는데, 부족을 구성하는 가족 집단이나 부족 집단 사이의 격차는 거의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고 한다. 매장방식은 시신을 반듯이 눕힌 형태로 묻은 개인장이었다고 한다.

또 앙소문화보다 훨씬 앞선 시대의 유적으로서 하북성 무안시 자산(磁山)진에서 신석기시대 유적이 발굴되었는데, 자산(磁山) 문화라고 명명되었다.

 

자산문화는 태행산맥 동쪽 지역으로서 하북성 하북평야에 존재했는데, 잡곡 재배를 중심으로 한 농업을 하였으며, 마석이나 돌도끼 등의 석기, 삼족의 도기가 많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자산 문화(서기전 6,000~5,500년 경)는 바로 황하 남쪽의 하남성 일대에서 발견된 배이강(裴李岗) 문화와 공통점이 많아서 자산-배이강 문화, 또는 배이강-자산 문화라고도 하는데, 동쪽의 산동성 태안시에서 발견된 북신 문화(서기전 5,300~4,100년 경)와도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둥근 형태의 토기에 지각이나 삼발이를 사용하는 배이강 문화와 달리 자산문화는 동북 지역의 영향을 받아 맥주컵과 같이 옆면과 아랫면이 평평한 토기가 함께 만들어졌다고 한다. 또 옥이나 도자기가면은 황하 지역에서 확인할 수 없는 유물이라고 한다.

 

자산 유적은 8만 ㎡의 넓은 면적을 가지고 있고 주거 형태는 원형의 수혈식 주거였는데, 돼지·개·닭 등을 기른 흔적이 남아있고, 돼지를 주된 식용육으로 하고 있었으며, 어로도 생계의 수단으로서 물고기를 잡아 먹은 흔적도 남아 있었다고 한다.

 

지하에 만든 저장용 구멍(교혈)이 500개 이상 발견되어 잡곡을 저장하고 있었는데, 가장 큰 교혈은 깊이 5m로 대략 1,000 kg 정도의 잡곡을 저장할 수 있었다고 한다.

 

자산문화는 황하유역 문화 중에서 최초로 농경이 시작된 곳으로서 흥륭와문화 지역과 함께 최초로 기장 농사가 시작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고 한다. 자산문화에 이어서 기장과 조가 황하 유역의 주요 농경 작물이 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고 한다.

 

즉, [그림 1]에서 보는 바와 같이 앙소문화(서기전 5,000~3,000년 경)는 하북성 무안시 자산진에서 발견된 자산문화(서기전 6,000~5,500년 경)와 하남성 정주시 신정시에서 발견된 배이강문화(서기전 7,000~5,000년 경)로부터 문명을 전래받았음을 알 수 있다.

 

다시말해서 문명의 중심지는 자산문화, 배이강문화, 그리고 산동성 태안시에서 발견된 북신문화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바로 백제의 초기강역과 중첩되는 지역임을 알 수 있지 않은가?

 

 

 

앙소(仰韶) 문화의 정체, 그리고 용산(龍山) 문화-4(북신문화)

 

출처 : 오뚜기 2017. 06. 18.

 

앙소문화(서기전 5,000~3,000년 경)보다 훨씬 앞선 시기의 유적이 발견되었는데, 1977년 하남성 정주시 신정(新鄭)시 배이강(裴李岗) 지역에서 발굴되었다.

 

이를 배이강(裴李岗) 문화라고 명명하였는데, 서기전 7,000~5,000년 경의 신석기 유적으로 추정하게 되었다고 한다.

 

또 앙소문화보다 훨씬 앞선 시대의 유적으로서 하북성 무안시 자산(磁山)진에서 신석기시대 유적이 발굴되었는데, 자산(磁山) 문화(서기전 6,000~5,500년 경)라고 명명되었다.

 

자산 문화는 바로 황하 남쪽의 하남성 일대에서 발견된 배이강(裴李岗) 문화와 공통점이 많아서 자산-배이강 문화, 또는 배이강-자산 문화라고도 하는데, 동쪽의 산동성 등주(滕州)시에서 발견된 북신(北辛) 문화(서기전 5,300~4,100년 경)와도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배이강문화, 자산문화, 북신문화의 유적 위치는 [그림 1]에서 보는 바와 같다.

 

[그림 1] 배이강문화, 자산문화, 북신문화 등

 

북신문화는 1964년에 등주시(당시는 등현)의 북신(北辛) 가도에서 발견되었는데, 대문구문화(서기전 4,100~2,600년 경)의 유적 아래에 있으므로 1978~79년에 일부를 발굴하였다고 한다.

 

북신문화 유적에서는 황갈도(모래가 섞인 흙을 낮은 온도로 구운 도기) 또는 홍도(치밀한 진흙을 높은 온도로 구운 도기)로 만들어징 솥 등 조리기구가 발견되었고, 일부는 보다 더 높은 온도로 구운 회도 또는 흑도도 출토되었다고 한다.

 

또 돌도끼나 돌낫 등 마제석기, 타제석기, 골각기 등도 발견되었다고 한다.

 

따라서 북신문화는 채집이나 수렵 외에 잡곡을 재배하는 원시적인 농업과 돼지·소 등을 사육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고 한다.

 

유적지의 면적이 대략 5만 ㎡에 이르는데, 78년부터 여러차례 발굴했으며, 유물이 약 1.5m의 토층(土層)에 걸쳐 출토되는 것으로 봐서 오랜 기간 정착생활을 한 것으로 추정한다고 한다.

 

북신문화에 해당하는 유적들의 위치와 유물들의 모습은 [그림 2]에서 보는 바와 같다.

 

<계속>

 

[그림 2] 북신문화 유적들의 위치와 유물들의 모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