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역사 침탈(侵奪)

BC 28세기 요하문명의 濊貊族이 남하 하여 夏, 商, 周를 건국하면서 황하문명을 일구었으며, 鮮卑族이 秦, 漢, 隨, 唐을 건국했습니다. - 기본주제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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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소(仰韶) 문화의 정체, 그리고 용산(龍山) 문화-5~6

자연정화 2018. 8. 29. 14:08

앙소(仰韶) 문화의 정체, 그리고 용산(龍山) 문화-5(대문구)

 

출처 : 오뚜기 2017. 06. 18.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북신문화 유적은 대문구(大汶口) 문화에 속하는 유적의 하층에서 발견되었다.

 

따라서 대문구(大汶口) 문화는 서기전 4,100~2,600년 경으로 추정되지만, 북신문화의 시기는 그보다 이른 서기전 5,300~4,100년 경으로 추정되고 있다고 한다.

 

대문구문화는 1959년에 산동성 태안(泰安)시 대문구(大汶口)에서 발견된 신석기시대 후기 유적으로서 1962년부터 발굴이 시작되어, 1964년에 대문구(大汶口) 문화라고 이름 붙여졌는데, 산동성 태안시 대문구 유적의 위치는 [그림 1]에서 보는 바와 같다.

 

[그림 1] 대문구문화와 북신문화

 

 

대문구문화에서 출토되는 유물들은 앙소문화(서기전 5,000~3,000년 경) 유물과 같은 시기거나 그보다 더 오래된 것이 확인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대문구문화에 속하는 유적은 태안시 대문구 유적 외에도 100여 군데가 발견되었는데, 산동성 태안시 주변에서 많이 발견되었지만, 황해 연안과 발해만 남안에서부터 인접하고 있는 안휘성, 하남성, 강소성에서도 일부가 발견되었다고 한다.

 

1974~75년 기간 중에도 발굴되었는데, 대문구문화와 관계된 유적은 여러 유적 층의 중간 부분에 해당된다고 한다. 즉, 깊은 층(하층)은 북신문화(서기전 5,300`4,100년 경)에 해당하고, 새로운 층(상층)은 용산문화(서기전 3,000~2,000년 경)에 해당하는 특징을 보이고 있다고 한다.

 

대문구문화 유적에서는 터키석, 비취, 상아 등으로 만든 가공품과 도기가 많이 발견되고 있는데, 초기(서기전 4,100~3,500년 경), 중기(서기전 3,500~3,000년 경), 후기(서기전 3,000~2,600년 경)로 크게 세 시기로 나눌 수 있다고 한다.

 

초기(서기전 4,100~3,500년 경)는 발굴된 유물에서 보는 바와 같이 출토된 인골의 성별의 차이가 크지 않았다고 생각할 수 있으므로 당시 사회는 모계 씨족 공동체로 추정할 수 있다고 한다.

 

이 시기에는 삼족의 도기(도기로 만든 세 개 다리의 조리기로 다리가 길다)나 홍도로 만들어진 솥(3개의 다리가 달린 그릇) 등 다양한 형태의 도기가 특징적이라고 한다.

 

중기(서기전 3,500~3,000년 경)에 들어가면, 발굴되는 도기가 홍도보다 회도와 흑도가 증가하며, 크기·문양·형태등이 다양하다고 한다. 또 사회가 부계 씨족 공동체로 바뀌어 부계 사회가 확립되었다고 한다.

 

후기(서기전 3,000~2,600년 경)에 들어가면, 분묘 안에 목제 관이 나타나는데, 부계 씨족 공동체에 계층화가 진행되어 부장품이 없는 분묘도 있고, 대량의 부장품이 발견되는 분묘도 있다고 한다. 토기는 회도 또는 흑도가 주류가 이루고 있으며, 그릇의 두께는 얇고 정교하게 변해가고, 흑도나 난각도(卵殻陶, 알 껍질과 같이 얇은 도기)를 특징으로 하는 용산문화와 연결된다고 한다.

 

산동성 태안(泰安)시 대문구(大汶口) 발굴 장면과 대문구(大汶口) 문화에서 발굴된 유물의 모습은 [그림 2]에서 보는 바와 같다.

 

그런데 대문구문화에서 출토된 유물에서 발견된 가장 중요한 특징은 아래 그림 중 마지막 도기에 새겨진 문양이다. 과연 이 문양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계속>

 

[그림 2] 산동성 태안(泰安)시 대문구(大汶口) 발굴 장면과 유물들

 

 

 

 

 

 

 

 

 

 

앙소(仰韶) 문화의 정체, 그리고 용산(龍山) 문화-6(용산=단군)

 

출처 : 오뚜기 2017. 06. 18.

 

용산(龍山) 문화는 바로 단군 조선의 문화로 추정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간 고대 지명의 위치를 추적한 결과 단군조선의 도읍지 아사달을 현재의 산동성 제남시 주변지역으로 추정할 수 있고, 용산문화는 신석기시대 후기로서 서기전 3,000~2,000년 경으로 추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용산(龍山) 문화는 산둥성 장구(章丘)시 용산진에 있는 성자애(城子崖)에서 1928년에 유적이 발견되어 1930년 이후 본격적으로 발굴되었는데, 용산진의 위치는 [그림 1]에서 보는 바와 같다.

 

[그림 1] 산동성 장구시 용산문화 등

 

용산 문화의 특징은 고온으로 구운 회도 또는 흑도로서 높은 도기 기술에 있다. 흑도가 발달하여 흑도(黑陶) 문화라고도 한다. 그릇이 얇고 균일하여 녹로(轆轤, 물레)가 사용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고 한다.

 

특히 난각도(卵殻陶)로 불리는 도기는 알의 껍질처럼 얇게(0.5~1 mm) 만들고 한층 더 연마하여 검은 윤기를 내고 세밀하게 문양을 조각한 도기이다.

 

용산 문화 유적의 가장 큰 변화는 도시의 출현이다. 초기의 주거 형태는 수혈식 주거였지만, 곧 기둥이나 벽을 세운 가옥이 출현했다고 한다.

 

또 흙을 다져 만든 성벽이나 굴이 출토되었는데, 특히 산서성 임분(臨汾)시 양분(襄汾)현 도사향(陶寺郷)의 남쪽에서 발견된 도사유지(陶寺遺跡, 서기전 2,500~1,900년 경)은 용산 문화의 도시 유적 중에서도 가장 크다고 한다.

 

또 농업이나 수공업의 발달도 큰 특징으로 꼽을 수 있는데, 섬서성 위수 주변에서는 농업과 목축업이 앙소문화 시기에 비해 크게 발전하였으며, 쌀의 재배도 시작되었고, 누에를 기르는 양잠업과 소규모의 견직물 생산의 흔적이 확인되었다고 한다.

 

동물의 견갑골을 사용한 점술이나 무술(巫術)의 흔적도 엿볼 수 있어 종교도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농업의 발달로 인한 잉여 생산이 생기고, 사유재산이 출현하여 사회의 계층화가 진행되었으며, 부권제 사회와 계급 사회가 탄생했다고 한다.

 

유적에서 출토되는 도기의 수나 종류가 보다 이른 시기의 문화보다 대폭 증대하면, 도기의 생산 효율이 높아진 것으로 볼 수 있는데, 용산문화에서는 솥이나 격(鬲, 삼족 솥), 규(鬹, 세발달린 가마솥), 높은 자루 잔(高柄杯) 등 다양한 흑도와 회도가 출토되었다고 한다.

 

또 도기뿐만 아니라, 돌칼(石包丁) 등 석기와 골기,비취 등 구슬도 출토되었고 용산 문화 후기에는 청동기도 출토됨으로서, 은(殷) 또는 주(周) 대의 청동기 시대로 가는 과도기로 볼 수 있다고 한다.

 

신석기 시대의 인구는 용산 문화에서 절정을 이루었지만, 용산 문화의 말기에는 인구가 격감했으며, 동시에 분묘의 부장품에서 고품질의 란각도 또는 흑도 등을 볼 수 없게 되었다고 한다.

 

용산 문화는 황하 중류에서 하류에 걸쳐 퍼져 있는데, 산동 용산문화와 중원 용산문화(하남 룽산문화와 산서 룽산문화)로 나뉘어 볼 수 있다고 한다.

 

산동 용산문화는 황하 하류를 중심으로 존재한 대문구(大汶口) 문화(서기전 4,100~2,600년 경)에 이어 나타나며, 하남 용산문화는 황하 중류에 존재한 앙소문화(서기전 5,000~3,000년 경)에 이어 등장하고 있다고 한다.

 

용산 문화는 황하 유역의 다른 문화가 발전했던 지역에까지 널리 퍼졌을 뿐만 아니라, 장강 유역과 중국의 남부 해안 부근에서도 발견되고 있어 용산 문화가 광범위하게 확산되었음을 알 수 있다고 한다.

 

한편, 장강 중류 지역의 굴가령(屈家嶺) 문화(서기전 3,000~2,600년 경)도 회도 또는 흑도를 특징으로 하고 있는 문화인데, 하남성 부근까지 영향을 끼치고 있으므로, 용산 문화도 장강 부근의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도 있다고 한다.

 

그런데 용산(龍山) 문화를 산동 용산문화와 중원 용산문화(하남 룽산문화와 산서 용산문화)로 나뉘어 보는 게 의문스럽지 않은가?

 

왜냐하면 산서성 임분시 양분현에서 발견된 도사유지(陶寺遺跡, 서기전 2,500~1,900년 경)는 앙소문화에 속하는 지역이라고 볼 수 있는데, 굳이 산서 용산 문화로 분류해야 할 이유가 있을까?

 

아무튼 도사유지(陶寺遺跡)에서 발굴된 토기의 모습은 [그림 2]에서 보는 바와 같다. 또 앞서 앙소문화에서 발굴된 도기 사례는 [그림 3]과 같음 바, 서로 비교해 볼 만하다.<계속>

 

[그림 2] 도사유지(陶寺遺跡) 발굴 유물

 

 

 

 

[그림 3] 앙소문화 반파유지(서안시) 유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