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역사 침탈(侵奪)

BC 28세기 요하문명의 濊貊族이 남하 하여 夏, 商, 周를 건국하면서 황하문명을 일구었으며, 鮮卑族이 秦, 漢, 隨, 唐을 건국했습니다. - 기본주제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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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소(仰韶) 문화의 정체, 그리고 용산(龍山) 문화-7

자연정화 2018. 8. 29. 14:14

앙소(仰韶) 문화의 정체, 그리고 용산(龍山) 문화-7(굴가령문화)

 

출처 : 오뚜기 2017. 06. 18.

 

장강 중류 지역 호북성 형문시 경산현에서 발굴된 굴가령(屈家嶺) 문화(서기전 3,000~2,600년 경)는 용산문화(서기전 3,000~2,000년 경)와 같이 회도 또는 흑도를 특징으로 하고 있는 문화인데, 하남성 부근까지 영향을 끼치고 있으므로, 용산 문화도 장강 부근의 굴가령문화로부터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도 있다고 한다.

 

과연 그럴까?

 

우선 굴가령문화 유적이 발견된 호북성 형문시 경산현 굴가령(屈家嶺)의 위치는 [그림 1]에서 보는 바와 같다.

 

 

[그림 1] 용산문화, 굴가령문화, 석가하문화, 대계문화 등

 

 

굴가령(屈家嶺) 문화는 서기전 3,000~2,600년 경의 신석기 시대 문화라고 하는데, 장강 중류 지역으로서 호북성에서 호남성에 결쳐있었던 문화라고 한다.

 

굴가령문화는 사천성 중경시 무산(巫山)현에서 발현한 대계(大溪) 문화(서기전 5,000~3,000년 경)를 계승 발전시켜 북쪽으로 황하 중류의 섬서성 남부지역과 하남성 서남부 지역, 장강 하류의 강서성 북부지역으로 확대되었다고 한다.

 

굴가령문화는 1955년부터 1957년에 걸쳐 발굴 조사되었는데, 이후 호북성 각지에서

 

굴가령문화와 공통점을 보이는 유적들이 많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그 유적들로부터 문화의 전후관계를 판명하였다고 하는데, 굴가령문화는 장강 중류의 대계문화를 계승했으며, 그 후기는 청룡천(青龍泉) 문화(호북 용산 문화)로 연결되어 간 것을 알았다고 한다.

 

굴가령문화 유적에서 벼를 재배한 흔적이 발견되었으며, 닭·개·돼지·염소 등의 유류물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또 10여 곳의 저장용 굴에는 물고기를 비축했던 흔적이 있었다고 한다.

 

황하 유역의 용산 문화와 출토된 도기에 공통점이 많고, 분묘의 부장품에서 흑도가 출토되었는데, 특히 그릇의 두께가 매우 얇은 난각도(卵殻陶)가 많이 출토되었다고 한다. 도기의 형상은 대계 문화에서 발견되는 권족기(圏足器, 크고 높은 다리를 가진 그릇)를 많이 볼 수 있지만, 그것보다 솥이 많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또 건축재로는 구운 흙의 덩어리를 많이 사용하고 있어 벽돌의 발달을 엿볼 수 있으며, 굴자령문화의 독특한 유물로는 도기로 만들어진 주발이나 채색한 방추차(紡錘車, spindle-whorls)가 있는데, 채색 방추차는 방직의 발달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한다.

 

한편, 굴가령문화 유적이 발굴된 호북성 형문시 경산현 바로 남쪽지역 천문(天門)시 석가하(石家河)에서 유적이 발굴되었는데, 굴가령문화에 속하는 유적으로 간주하기도 하지만, 석가하(石家河) 문화(서기전 2,500~2,000년 경)라고 명명되었다.

 

석가하 유적의 대표적인 특징은 장강 유역에서 발견된 최초의 도시 유적이라고 한다. 즉, 환호 집락에서 발전하여 대규모 성곽도시가 축조되어 있었는데, 성곽도시를 쌓아 올린 시점에서 취자링 문화와 구별된다고 한다.

 

그러나 굴가령문화의 특징인 채색 방추차(spindle-whorls)를 계승하였다고 한다. 또 회도 등 도기나 도제의 인물상(토우), 비취 구슬 제품 등이 보다 발달한 제조법으로 전승되었으며, 동광석이나 구리 제품도 석가하 문화의 유적에서 발견되었다고 한다.

 

석가하 유적은 120만 ㎡의 넓이를 가지는 성곽도시로서 주위에 굴과 판축으로 만들어진 성벽이 둘러싸여 있어 거의 정사각형의 형상을 이루고 있었으며, 남북 1.3 km, 동서로 1.1 km 정도로 만들어져 있어서 이 지역의 중심 도시였던 것을 추측할 수 있다고 한다. 또 취락은 타원형이나 사각형의 환호 집락으로 확장되었던 시대임을 알 수 있다고 한다.

 

그런데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산동성지역의 용산 문화(서기전 3,000~2,000년 경)도 장강 부근의 굴가령문화(서기전 3,000~2,600년 경)로부터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도 있었을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는데, 과연 그런 것인가?

 

즉, 황하 중류 지역의 앙소문화(서기전 5,000~3,000년 경)와 황하 하류 지역의 용산문화(서기전 3,000~2,000년 경), 그리고 장강 중류 지역의 굴가령문화(서기전 3,000~2,600년 경) 간에 어디서 어디로 문화가 전래되었을 것인가?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그간 오랬동안 중화인민국 측은 앙소문화에서 용산문화로 문화가 전래되었으며, 굴가령문화가 앙소문화로 영향을 미쳤으므로, 굴가령문화가 용산문화로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는 해석을 내세우고 있었다.

 

그러나 1973년에 장강 하류지역인 절강성 하모도문화(서기전 7,000~5,000년 경)가 발굴되고, 70~80년대에 내몽골자치구와 요령성 지역에서 신러문화(서기전 7,200년 경), 흥륭와문화(서기전 6,200~5,200년 경), 조보구문화(서기전 5,400~4,500년 경) 등이 발굴됨으로써 중화인민국 측은 문명의 중심지가 어느 한 군데 있었던 것은 아니고 여러군데서 각자 발생하여 서로 영향을 주며 발전하였다는 식으로 수정에 수정을 거듭하고 있는 형편이다.

 

그런데 그렇게 어물적거리면서 문명의 초기발생지와 전래경로를 없었던 일인양 덮어들 수는 없는 일이 아닌가?

 

조상님들의 찬란한 역사가 추천년, 수만년에 걸쳐 이어져왔음을 명명백백하게 밝히는 것이 후손의 도리가 아니겠는가?

 

우선 각 문화별로 대표적인 유물들을 비교해야 할 것이다.

 

앙소문화(서기전 5,000~3,000년 경)의 대표적인 도기 유물은 채도(彩陶)로서 [그림 2]에서 보는 바와 같다.

 

[그림 2] 앙소문화 채도

 

 

 

 

 

 

용산문화(서기전 3,000~2,000년 경)는 앙소문화보다 후대에 해당하지만 대표적인 도기 유물은 흑도로서 [그림 3]에서 보는 바와 같다.

 

[그림 3] 용산문화 흑도

 

 

 

 

 

 

 

 

 

또 앙소문화의 하층문화인 북신문화(서기전 5,300~4,100년 경)의 도기 유물은 [그림 4]에서 보는 바와 같다.

 

사진으로 비교하는 것이 세밀할 수 없지만, 도기의 특징들을 비교할 때, 시기와 만든 방법, 재료 등을 비교할 수 있을 것이다. 또 유적에서 출토되는 양과 유적분포지역들을 종합적으로 검토할 수 있을 것이다.

 

용산문화가 앙소문화보다 늦은 시기의 문화이어서 그런지 흑도(특히 난각도)가 채도보다 정밀하고 단정하게 만들어졌음을 알 수 있다. 또 용산문화의 유적들은 산동성과 강소성 북부 하남성 동부지역에 광범위하게 분포되어 있으며, 용산문화의 하층문화로서 대문구문화(서기전 4,100~2,600년 경)와 북신문화(서기전 5,300~4,100년 경)에 속하는 유물들이 출토되고 있으므로, [그림 2]와 [그림 4]를 비교하더라도 앙소문화가 북신문화의 전신이라고 볼 수 없을 것이다.

 

또 용산문화의 흑도가 양자강 중류지역과 하남성 및 산서성 등지에서 출토되고 있다고 하니, 용산문화가 북신문화와 대문구문화를 이어받은 문화로서 앙소문화 쪽으로, 즉, 황하 하류(동쪽)에서 중상류(서쪽) 방향으로 문화가 전래된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서 용산문화는 산동성 주변지역에 존재했던 단군조선의 문화로서 단군조선이 서쪽으로 문화를 전래시켜준 주체였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지 않겠는가?

 

<끝>

 

[그림 4] 북신문화